조선의 힘 제2편 19

제 2 편

19

 

눈앞에 비행장이 있었다. 넓게 다진 토활주로, 세가닥의 유도로와 감시대, 활주로가까이에도 군데군데 보초막이 있고 멀리 비행사들이 들어있는 콘세트천막도 보였다. 비행기들은 아마 활주로의 반대쪽에 있을것이다.

현수는 각종 차단말뚝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물홈에서 이발을 덜덜 떨며 3선철조망의 마지막철선들을 공병가위로 끊어놓았다. 물홈을 따라 배밀이하며 기여들어온지 어느덧 2시간가까이 되였다. 이제는 뼈마디까지 얼어붙어 팔다리의 관절도 놀리기 어려웠다. 공병중대의 경험있는 전사들 몇이 3선철조망밑을 기여들어가 탐침으로 지뢰를 더듬어 찾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지뢰원까지 해체하면 사실상 그들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끝난다고 할수 있다. 뒤에서는 보병중대들이 공병작업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다.

차디찬 새벽바람이 귀뿌리를 얼구며 불어쳤다. 오랜 시간을 물홈에 엎드려있자니 그 고통이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꽛꽛하게 얼어붙은 군복자락이 와삭거리군 했다. 감시대의 적들이 투광등을 비쳐댈 때나 적순찰병들이 지나갈 때면 덤불이 엉킨 개울바닥에 코를 들이박고 한참씩 참아내야만 했다.

앞에서 흰 손수건이 언뜻거렸다. 앞서나간 조가 지뢰원을 해제한것이다. 현수는 계속 전진할것을 지시했다. 소리없는 구령, 소리없는 전진이다. 군복옷섶에서 얼음버캐가 와삭거리지만 않는다면 여기 황량한 비행장은 무덤굴같이 여겨질것이다. 얼어붙은 군복들이 얼어든 땅을 긁어댔다. 손끝이 모지라지고 감각을 잃어간다. 이제 얼마간 더 그대로 엎드려있다가는 영영 얼어붙고말수도 있다.

또 흰수건이 언뜻거렸다. 이번엔 정지신호이다. 무엇인가 잘못된것 같다. 그쪽에서 언땅을 뚜지는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도 큰소리다. 현수는 그쪽으로 기여갔다. 터진 팔굽에서 피가 흐르는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아픔을 느낄수 있으니 다행이다. 감각을 잃어가는 팔굽을 한치한치 내밀어짚으며 이를 악물고 기여나갔다. 그때 앞쪽에서 팡!- 하는 소리가 나더니 파란 불덩이가 휙- 날아올랐다. 조명탄이다! 누군가 잘못하여 조명지뢰를 터뜨린것이다. 비로소 현수는 그때 파란 불빛아래서 눈꽃이 날리고있는것을 보았다. 다음순간이였다. 《누구야!!》하는 기겁한 웨침소리와 거의 동시에 《땅!》 총소리가 울렸다. 가슴이 덜컥 무너져내렸다. 꽁꽁 얼어든 가슴속에서 분명히 무엇인가 뚝 떨어져내렸다. 파편에 허비운듯 한 쓰라린 아픔, 눈앞이 캄캄해지는 망연자실, 비행장 저쪽에서도 자지러진 기관총소리가 울렸다. 도처에서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푸르께한 빛의 파도가 주변을 샅샅이 훑어가는 가운데 《공산군이다!-》하는 웨침소리가 련이어 터졌다.

무서운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앞서 나간 공병들이 마지막지뢰원을 해제하고있다는 신호를 받고 벌써 보병중대의 수십명 전투원들이 개설된 통로에 들어서고있었다. 한줄기 좁은 통로에서 뒤로 빠질수도 없다. 오직 앞으로 내달리는 길뿐이다. 기관총몰사격이 그들을 쓸어눕히기 시작했다. 탐조등불빛이 날아왔다. 그속으로 보병전투원들이 눈이 먼것처럼 뛰여나왔다. 앞에서 쓰러지면 또 달려나온다. 3선철조망을 맞받아 달려가다가 그대로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강렬한 탐조등불빛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것 같다. 무서운 함성, 기관총소리, 급사격의 선풍속에서 지뢰들이 쾅쾅! 튀고있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끝장이다!··· 아니, 그럴수 없다. 여기까지 들어와가지고 이 지경이 되다니.)

각종 차단물을 사이에 두고 보병중대와 분리된 그들의 처지에서 이제 한순간만 더 지체했다가는 몰살을 면치 못한다. 행동해야 한다. 지금, 바로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 공병들만으로도 돌격해나가야 한다.

현수는 자기가 어느새 어떻게 되여 벌떡 뛰여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감각을 잃어가던 팔을 쭉 내뻗쳤다. 목구멍이 터져라 하고 고함을 쳤다.

《중대- 앞으롯!-》

누가 맨 처음 따라섰는지 누가 그의 구령을 목청껏 되받아 불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기관총은 물론 자동총조차 없는 공병들이다. 기병총이나 허리춤에 매단 한두개의 수류탄밖에 없다. 탐침이나 공병가위를 손에 든 그대로 뛰쳐일어나 와- 쓸어나갔다. 활주로가운데로, 투광등이 언뜻거리는 감시대로 또 저쪽 콘세트천막쪽에서 맨 내의바람으로 뛰쳐나온 적병들을 맞받아 무턱대고 달려갔다. 맵짠 칼바람이 토활주로바닥을 휩쓸었다. 뒤따라 투광등의 불빛이 비자루질을 하기 시작했다.

기관총몰사격이 그들에게 쏠린것 같았다. 그래도 힘껏 달린다. 소리도 없이 죽을힘을 다하여 달린다. 한발자국, 한순간을 놓으면 끝장이다.

《누구야, 누구야?!》

별안간 현수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적병을 보았다. 총부리를 앞에 내대고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소리를 연방 내지르고있다. 그자는 야밤의 활주로에, 탐조등이 휘저어대는 불빛속에 유령들처럼 나타난 인민군전사들을 뻔히 보면서도 기겁한 소리만 거듭하였다.

《자식, 이 등신아!》하고 현수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누군지 보구두 몰라. 인민군대가 비행장을 공격하고있단말이야!》

그는 내달리던 그 기세로 얼혼이 나간 적병의 면상을 권총으로 힘껏 후려쳤다. 꺽하는 비명, 다음순간 한무리의 적병들이 또 쓸어오는것이 보였다. 사방에서 적아가 한데 어우러지고있었다. 강렬한 탐조등불빛이 어지럽게 휘돌며 눈을 때리고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현수는 머리를 치는 생각이 있어 쓰러진 적병의 철갑모를 벗겨 썼다. 그리고 뒤따라온 대원들을 모두 엎드리게 한 다음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정지, 누구야!》하고 소리쳤다.

《자식- 위병장이다!》 앞서오던 장교놈이 꿱꿱거리며 소리쳤다. 《정신을 바싹 차려, 사방 공산군이다.》

그놈은 정황이 발생하자 보초를 늘이기 위하여 병졸들을 데리고 달려온것이였다. 그때 땅에 엎드려있던 전사들이 뛰쳐일어나며 다가선 적병들을 쏘아눕혔다. 동시에 현수는 마주선 위병장교의 가슴팍에 권총을 찌르며 소리쳐물었다.

《비행사들은 어데 있어. 빨리 대라!》

《비행기로, 이제 비행기로 갈거요. 여보시오. 난···》

그는 한초가 새롭다는것을 깨달았다. 비행사와 비행기들을 놓친다면 오늘의 습격은 수포로 돌아가는것이다. 다시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활주로 한끝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맨 내의바람의 적병들이 덤벼치고 소리치며 정신없이 뛰여다니고있었다. 그 순간 연유탕크가 폭발하며 거센 불기둥을 휘말려올렸다. 주위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러나 병영쪽으로 앞서 달리던 기습조만은 뜻을 이루지 못한듯 했다. 맹렬한 몰사격이 그들을 저지시켰다. 현수 역시 지상지휘소의 목조건물에서 멀지 않은 유도로근처에 엎드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비행기쪽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발견한 적들이 집중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때문이였다. 눈앞에 줄지어 촘촘히 박히는 탄알들이 죽음의 불꽃을 뿌리고있었다. 누군가 기관단총을 휘둘러 감시소의 투광등을 박살냈으나 그 자신도 허리를 꺾으며 구겨박히고말았다.

《지봉동무, 오윤남! 엄호하오-》

벌떡 일어서 내달리려다가 다시 엎드렸다. 이제는 한발자국도 더 전진할수 없었다. 활주로에 들어서기만 하면 수백발의 총탄이 벌둥지처럼 만들어놓으리라는것이 명백했다. 집중사격의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있었다. 감시소쪽으로 수류탄이 날아가 적황색의 불길을 솟구쳐올렸다. 기관단총과 기병총, 보총들이 대응사격을 가했으나 화력충돌은 대비조차 되지 않았다.

(제길할!··· 이제 곧 비행기가 뜰텐데···)

귀밑에서 피줄들이 푸들푸들 뛰놀았다. 그는 오윤남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소리치며 견인차들이 서있는쪽으로 기여갔다. 그 뒤쪽에 방수포를 씌운 커다란 무지들이 눈에 띄였다. 포탄상자들임에 틀림없다. 집체같은 저 포탄상자더미를 폭발시키면 비행장은 온통 불바다속에 잠길것이다. 갑자기 누군가 그의 어깨를 꽉 틀어잡았다. 병영쪽으로 대원들을 끌고 온 문화부중대장 주영섭이였다.

《내가 하겠수다. 중대장동무, 그건 내가 맡았던거지요!》

《무슨 소리요?》

《내가 한다니까. 걱정마시오. 이런 일엔 보병이 더 났수다!》

그는 모자도 없는 맨 머리바람이였다. 수류탄을 틀어쥔 두손이 흥분에 떨고있었다. 잠시후 또 거칠게 숨을 내그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맡겠소. 믿어도 되우. 이게 어떻게 마련된 싸움이요. 글쎄 저 락동강에서부터 여기까지··· 그 먼길을 와서··· 내 인츰 해제끼구 오겠소!》

어느새 주영섭은 견인차들사이로 달려갔다. 달려가다가는 엎드리고 그리고는 또 힘껏 달렸다. 현수는 거의 반쯤 몸을 일으키며 웨쳤다.

《지봉동무, 문화부중대장을 엄호해주라!-》

로지봉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뛰쳐일어나 주영섭이 사라진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견인차들 가까이에서 차바퀴에 몸을 의지하며 엎드렸다. 견인차의 시창유리에서 검푸른 불길이 쏟아져나오고있었다. 불달린 그 차가 폭발할수 있었다. 분명 지봉은 그것을 느꼈던 모양으로 또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적들의 사격은 활주로에 집중되고있었다.

가슴을 쥐여뜯는듯 한 순간들이 흘렀다.

(빨리, 빨리 하오. 문화부중대장! 우린 시간이 없소. 제발 빨리!···)

공중에서는 조명탄이 연방 터져 동동 매달렸다. 교차사격의 새된 회오리속에서 수류탄이 터지며 분간하기 어려운 외국말비명이 날아왔다. 병영쪽에서, 콘세트천막근처에서 갈팡질팡하던 괴뢰군과 미국놈들이 돌격태세를 갖추는것이 분명해졌다. 구령소리들이 또렷해지고 이리저리 뛰여다니던 적들이 은페물들에서 교차식으로 사격하고있었다. 여러갈래로 갈라져 달려가는 적병들도 조명탄의 불빛속에서 드러나보였다. 아마도 보병중대의 결사적인 공격을 저지시키려 차단물계선에 증원하는 모양이였다.

(왜 이리 굼뜬가. 문화부중대장!) 심장이 초물처럼 녹아내렸다. (내가 가는게 낫지 않았을가? 제길할! 이러다간 다 녹는다.)

적들이 돌격해나오기 시작했다. 병영기습에 나섰던 주영섭의 조까지 합쳐도 2개 분대정도밖엔 안된다. 이들을 가지고 정면충돌을 하다가는 다 녹는다. 은페할 곳도 없는 활주로와 유도로근처의 개활지대였다. 나무등걸, 파헤쳐진 흙더미들이 고작이다. 다시 수류탄이 날아갔다. 꽝!- 하는 요란한 폭음이 배밑의 땅을 뒤흔들었다. 누군가 반전차수류탄을 던진것 같았다.

《수류탄을 아끼라. 반전차수류탄은 비행기에만 던지라!》

눈앞의 나무등걸에 총탄이 퍼부어졌다. 현수는 헉헉 단김을 내뿜고있었다. 순간순간이 살점을 저미는듯 했다. 미칠듯 한 초조감때문에 달려드는 적병들을 바로 겨눌수 없었다. 한무리의 적병들이 일제사격에 중둥무이로 나가넘어졌다. 그러나 또 달려들것이다. 그리고 비행기쪽으로 갔다는 비행사들··· 바질바질 타드는 가슴, 비행기의 엔징소리같은것이 울려왔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 발동기소리가 목줄띠를 사정없이 조이는듯싶었다. 아니다. 더는 지체할수 없다. 그는 이것이 단 몇분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것을 알지 못했다. 설사 누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미친놈이라고 웨쳤을것이다.

《련락병, 날 따라- 동무들은 엄호하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죽더라도 비행기있는쪽으로 달려갈 생각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온몸을 들었다놓는듯 한 진동을 느꼈고 말뚝처럼 박혀버렸다. 뒤이어 무서운 폭음이 터지며 거센 불기둥이 확 치솟아오르는것을 보았다. 불의 회오리, 귀가 멍멍해지는 폭음, 그는 폭풍에 날려 토활주로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수천수만발의 포탄이 일시에 터져버린것이다. 옹근 한개 도시라도 산산이 박살낼수 있는 거대한 포탄더미가 폭발하는것이다. 회백색의 섬광들이 전광처럼 번쩍이고 불의 타래가 쏟아지면서 적아를 가리지 않고 가랑잎처럼 사람들을 나딩굴게 했다.

미증유의 거창한 폭발, 또 폭발, 눈도 뜰수 없었다. 파도처럼 휩쓰는 불의 해일에 밀려 몸을 지탱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폭풍속을 뚫고 적들이 빈 활주로끝에서 날아오르는것을 현수는 보았다. 맨처음 활주로를 따라 리륙하려고 달려오던 적기가 불의 화살에 맞아 찢어져 나딩굴었다. 포탄상자더미에서 아직도 그칠새없이 포탄들이 튀여나오고있는것이다. 또 한대, 두대의 적기가 경쟁이라도 하는듯 달려오다가 서로 부딪쳐버리는것도 보였다. 날아오르지 않고서는 살수 없는 적들이기에 필사적으로 포탄들이 뛰여나는 활주로를 달려오는것이다. 활주로는 물론 온 비행장구내가 화염속에 잠겨들었으나 적기들은 미친듯 달려오고 또 달려온다. 현수는 단 1대의 적기라도 날아오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끊임없는 폭발속에 저절로 다 불타버리기를 기다릴수 없다. 그는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대라도 날아오르게 해서는 안된다. 절대 안된다.)

그는 자기의 잔등에 불이 달린것도 모르고있었다. 화염의 강이, 도하장이, 쓰러진 전우들이 떠올랐다. 급강하하던 적기들, 미친듯 쏘아대던 기총탄, 반나마 상체만 남았던 김수찬소대장, 정신없이 토하던 련락병 박원철, 폭음을 울리며 새떼처럼 련속 달려들던 적기들··· 안된다. 한놈도 날아오르지 못한다!

누군가 달려들어 잔등의 불을 꺼주고있었다. 오윤남이다. 후퇴의 먼길을 함께 헤쳐 온 전사, 하지만 너는 아직 적기들의 미친듯 한 공습은 겪어보지 못했을것이다. 저놈들을 살려주어선 안된다!··· 그는 반전차수류탄을 거머쥐고 아직도 비틀비틀 활주로를 따라 굴러오는 적기를 맞받아 달려갔다. 그리고 불속에서 요행 살아나온 적기를 향해 금시 바퀴를 덜덜 떨며 날아오를듯 요동치는 적기를 향해 힘껏 수류탄을 뿌렸다.

아무런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다 메여버린듯 했다. 하지만 반전차수류탄에 맞은 적기의 동체가 뭉청 끊어져 동강이 나는것만은 똑똑히 보았다.

 

주영섭이 보이지 않았다. 포탄더미를 날려버린 그 사람이 살아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수백m밖에 있던 사람들까지 가랑잎처럼 나딩굴게 한 폭발이다. 활주로우에서 날아오르려던 적기들을 불의 화살로 찢어버리던 무서운 폭발··· 현수는 정신없이 돌아쳤다. 많은 전사들이 그와 같이 뛰여다녔다. 그러다가 그들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머리를 짓숙이고있는 로지봉을 발견하였다. 현수를 보자 그는 비틀거리며 마주왔다. 그을음 낀 그의 얼굴에서 피방울같은것들이 굴러내렸다.

《문화부중대장은 어데 있소?》

현수가 소리쳤다. 그러나 로지봉은 아무것도 가려듣지 못하는듯 했다. 맥없이 축 드리웠던 한손을 들었다. 불에 타고 갈기갈기 찢겨진 가방이 들려있었다. 주영섭의 전투가방이다. 지봉은 아무말 없이 그것을 현수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현수는 모든것을 깨달았다. 예리한 파편이 심장 한끝을 스쳐가는듯 했다. 그는 없다. 수더분한 문화부중대장 주영섭은 형체도 없이 갔다. 폭풍에 날려버린 이 전투가방만이 남았다.

자기 부대 근위18련대로 가게 되였던 사람, 그는 후퇴의 먼길을 함께 걸어온 전우들과 이 전투를 마저 치르고 돌아가려 했었다.

···그의 가방안에서 성한채로 나진것은 크지 않은 수첩이였다. 수첩 한가운데 누르끼레하게 색이 바랜 한장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가리마를 곧게 탄 젊은 녀인이 어린 아들을 껴안고 수줍게 웃고있는 사진이다. 배경은 사진관에 그려놓은 서투른 풍경으로서 련꽃이 핀 못과 고풍의 정자가 있었다. 녀인이 팔굽을 올린 작은 원탁우엔 꽃병 하나가 놓여있었다. 밝고 평온한 정경이였다. 놀란듯 눈이 올롱해서 쳐다보고있는 어린애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였다. 사진을 보자 로지봉이 몸을 떨었다. 얼마전 우물가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실을 상기한것이였다. 장정들조차 떼낼수 없이 서로 꽉 껴안고있던 녀인과 아들, 굳어지고 얼어붙은 그들을 떼여내려 했을 때 주영섭이 무섭게 소리쳤던것이다.

《다치지 마오!》

수첩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표창내신할 사람, 희생된 사람, 생년월일, 집주소, 무덤위치··· 소대와 중대의 모든 전사들이 거기에 적혀있었다. 마지막엔 박영일, 로지봉 등의 이름과 주소도 있었다. 그것을 보자 로지봉은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걷잡을길없이 어깨를 떨며 사레들린것처럼 허덕이였다. 현수가 그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이건 동무가 건사하오.》

《···》

로지봉은 알아듣지 못했다. 현수는 큰소리로 반복했다.

《이건 동무가 건사해야 돼!》

《···》

로지봉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자기에게 내밀어준 수첩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받소, 지봉동무!》

《뭣이라는거유. 응? 지금 뭐이라 하는거유?》

고함을 지르듯 했다. 온통 질벅해진 얼굴에서 충혈진 두눈이 무섭게 번뜩이고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현수는 그가 그 폭발 때 귀가 멀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참을길없는 아픔이 가슴을 꽉 죄였다. 현수는 그의 손에 수첩을 쥐여주었다. 불시에 그를 와락 끌어당기며 귀전에 대고 고함을 쳤다.

《잘 건사하라구. 응? 지봉이?!···》

로지봉은 우들우들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펴들었다. 또한번 사진을 들여다보고 꼭 감싸쥐였다. 이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다. 작은 손거울이 나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토록 정히 간수해온 손거울이건만 어느새 산산이 깨여져있다. 수십수백개의 쪽무이로 그의 덜퍽진 몸집과 피빛화광을 흐트러뜨렸다. 그는 저도모르게 그것을 떨구었다. 꿈과 희망, 추억이 담겨있던 거울, 백화산기슭의 실그러져가는 마방집과 부끄럼 잘 타는 안해 순금이를 비쳐주던 거울이다. 여태껏 지봉은 손바닥 한줌에나 들어가는 그 작은 세계에서 살고있었지만 곁을 떠나간 이 사람은 수십 수백명 전우들의 꿈과 희망을 다 안고있었다. 그는 헉-하고 울컥 치밀어오르는것을 토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발치에 떨어져 흩어진 거울쪼각을 마구 쥐여뿌리기 시작했다. 이 미련한놈아, 이 쫄보야. 게뚜더기야! 거울이나 가지구 고향에 간다구? 너같은 놈이나 사등뼈가 문질러질것이지. 찌꺼기 같은건 살구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갔으니··· 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하누-

현수가 그를 일으켰다. 로지봉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구 소리내여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