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9장 1


 

제 9 장

1

 

요즘 대복은 조롱속에 갇혀있던 수리개가 넓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듯 한 심정이였다. 그는 이날도 아침부터 성수가 나서 신당리 아래웃마을을 종횡무진으로 뛰여다니였다. 이날 읍에서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궐기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대복은 마을사람들을 집합시키는 심부름을 맡았던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농민궐기대회에서 토론을 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더욱 신명이 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집안에 별안간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듯 기쁜 일이 연거퍼 생겨나고보니 꿈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토론하는 일로 밤새 걱정을 하며 잠을 못이루다가 새벽녘에야 대복의 공책장 하나를 찢어내서 끙끙 갑자르며 오리발같은 글자를 몇자씩 그리기 시작했다. 한평생 연설이라는것을 해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장군님을 만나뵙고 호미까지 선물을 받은 농군이기때문에 기어이 토론을 해야 된다는것이였다. 대복은 하늘이 낸 백두산의 장수로 온 나라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장군님을 아버지가 만나뵈웠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뜻밖이여서 지금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대복은 이날아침에도 시렁우에 올려놓은 호미 두가락을 내려놓고 쓸어보고 만져보고 또 가슴에 품어보면서 여러시간 푸르른 꿈을 펼쳤다. 오늘 읍에 숱한 사람들이 모이는데 한가락 차고가서 자랑하고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옛말에 금도끼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금도끼나 금호미보다 더 값지고 귀중한 농쟁기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호미 한가락을 꽁무니에 찌르고 나와서 집집을 돌아다녔다.

《빨리 읍에 갈 차비들을 하고 농조 앞마당에 모이세요. 시간이 없어요. 빨리요, 빨리!》

대복이 이렇게 소리쳐 재촉하면서 여러집을 돌고 마을 앞길로 나오는데 안개가 걷히는속으로 빨래함지를 인 서분이가 마주 걸어오고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대복은 들뜨고 즐거웠던 기분이 졸지에 가라앉으며 온몸의 살점이 미여지는것 같은 쓰라림이 일어났다.

차거운 벌바람을 안고 걸어오는 불쌍한 서분이, 추운 날씨에 홑것을 입은 몸이 얼어서인지 얼굴색이 더 파리해보이고 눈빛은 끝없는 슬픔에 젖어있는듯 했다. 함지에 무엇을 잔뜩 담았는지 그는 목을 곧추 들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함지가위손을 잡은 두 팔은 옷깃이 밀려내려 방금 저며놓은 송아지고기처럼 빨갛게 얼었다.

《서분이!》

《어마나, 오빠!》

발끝만 내려다보고 걸어오던 서분이 그제야 대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 추운날에 또 빨래야?》

대복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있었다. 그는 자기만 혼자 지주집에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서분이의 고생과 설음이 더 커졌을것만 같았다. 기실 자기와 같이 있을 때는 마음속 의지라도 되였을테지만 지금 얼마나 외로우랴싶었다. 그래서인지 대복을 보는 순간 옹달샘같이 맑은 서분이의 눈에 물기가 핑 어리였다.

그는 고개를 다소곳하고있다가 한손으로 얼른 눈굽을 닦고 빨래함지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오빠, 어딜 가는 길이예요? 오늘 읍에서 무슨 일이 있잖어?》

서분이는 대복에게 소꿉시절처럼 반말을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깍듯이 존대를 쓰기도 어색해서 늘 이렇게 반말에 옙을 섞어가며 어정쩡히 넘기였다.

《오늘 농민궐기대회가 있어. 이제 왕벌이 거들먹거릴 날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서분이두 조금만 참으면 돼!》

《응, 그래서 엊저녁에 서가마을 늙은이들이 가득 모여서 나리님하구 술 잡수면서 모두 거기 가지 말자구 했구나.》

《뭐? 서가마을것들이 모여서 수군거려?》

대복은 대뜸 눈꼬리를 치켜들며 캐여물었다.

《그래, 우리 아래마을에서 간 사람 없던?》

《없어. 그런데 흥묵아버님한테 간다면서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더구나.》

《음 알았다, 앞으로두 그런걸 들어두었다가 나한테 알려다구.》

《이제야 어떻게 알릴수 있어, 전 아주 나오구··· 요즘엔 오지두 않으면서···》

아기뚱해서 돌아서며 반응석으로 원망을 뇌이는 그의 얼굴이 얼마나 예쁘고 가엾고 그리고 사랑스러운지 대복은 하마트면 서분이의 어깨를 꽉 그러안을번 하였다.

《서분이, 내가 잘못했어. 이제는 내 매일밤 담장밑에 가서 기다릴게.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우리 거기서 실컷 이야기하다 헤여지군 하자.》

대복의 열렬한 목소리에 서분이는 파드득 몸을 떨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벌바람 부는 이 들길 한복판에 그들은 오래오래 함께 있고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 바쁜 일이 있었다. 서분이는 점심전으로 함지에 가득한 빨래감을 씻어내야 했고 대복은 아직 여러집을 급히 돌아야 했다. 더구나 서만호네 집에서 벌어진 일이 심상치 않아서 그것도 빨리 농조에 알려줘야 될것 같았다.

그들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인차 헤여졌다.

대복은 한참 달려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래함지를 이고 되뚝거리며 걸어가던 서분이도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였다. 그때 먼발치에 서있는 처녀의 눈에서 반짝반짝 해빛이 반사되였다. 그것은 눈물이였다.

대복이가 분주히 뛰여다니고있을 때 벌써 정기찬네 집마당으로는 새벽조반을 치른 사람들이 담배대를 빨며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바깥마당 한쪽에서는 기발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한 청년이 장석을 깔아놓은 마당에 넙적 엎드려 배를 헐썩거리며 흰천에 글을 내려썼다.

김일성장군님! 농민들에게 땅을 주시옵소서.》

큰 붓으로 이렇게 내려써서 장대끝에 매달았다. 매달아놓고보니 천이 바람에 날려 자꾸 접혀진다. 그러자 군중속에선 내려쓰지말고 가로 건너써서 량쪽에 대를 대서 펴들고 나가야 한다고 떠들었다. 말하자면 프랑카드를 만들어야 한다는것이였다.

《제길, 그 말이 옳군. 내 그럼 가서 천을 또 가지고오겠소.》

글을 쓰던 청년이 투덜거리며 뛰여가더니 이긴 명주를 두어발되게 끊어가지고와서 장석우에 펼쳐놓았다. 한쪽에선 큰 벼루에 먹을 가느라고 법석이였다.

《가만있자. 내 글씨는 볼품이 없는데 저 샘골집 초시령감을 데려내다가 글을 쓰게 하자구.》

《아, 그 달성서씨령감쟁이를 말이야. 달성서씨넨 오늘 그 령감밖에 나오지 않았어. 싹 걷어치워. 〈서〉자 소리만 들어두 구역질이 나우.》

한 청년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글을 쓰던 청년이 서만호때문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을 다 한몽둥이로 쳐서야 되겠느냐며 안뜨락으로 뛰여갔다. 이윽고 그는 다섯뿔이 난 관을 쓴 두루마기령감을 붙들고 나왔다. 사실 그 서씨령감은 농민대회에 가자고 나온것은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모여서 들끓으니 웬일인가싶어 지나가다 들렸던것이다. 그는 땅마지기나 가지고 농사를 지어먹는 중농이므로 땅문제는 어떻게 되였든 오불관언하는 령감이였다.

그는 언젠가 과거시험까지 치른바가 있어 초시령감으로 불리우는 늙은이로서 삼강오륜을 외우며 일제시대엔 읍에 있는 향교에 사흘이 멀다하게 오르내렸다. 방금까지도 골방안에 들어앉아 리백의 《아미산월가》를 읊조리다가 나왔다.

그는 먼저 써달아맨 기폭의 글을 바라보더니 대뜸 채머리틀 흔들며 시비하였다.

《어허 기가 막혀, 수백명 인총이 모인곳에 첫자부터 마지막자까지 언문으로 쓴 저걸 내붙인단말여? 신당리에 식자있는 사람이 저렇게두 없는가구 흉을 보겠소.》

그 령감은 짜장 제 망신이라도 되는듯이 얼굴을 붉히며 시비질을 계속했다.

《옛날부터 언문은 쌍놈들 글로 쳤어. 그리구 문장두 유식하구 점잖게 엮어야지 저거야 려염집아낙네의 말을 옮기듯했으니 쯔쯔···》

령감은 입천정이 해지도록 세차게 혀를 차더니 《지존막대하신 천출명장 김일성장군님! 토지를 요망하는 우리 경자들에게 성은을 베푸소서!》 이렇게 써야 식자가 있는 량반의 글로 된다고 하였다.

《뭐요, 량반의 글? 이런 젠장, 령감이 아직두 골방에 들어앉아 공자왈 맹자왈 하고있으니 세상뒤집혀진걸 모르구있구만. 량반은 무슨 꿨다 먹은 량반이구 또 경자는 뭐요? 그저 맘속에 있는걸 그대로 수수하게 쓰는게 제일이지. 그놈의 량반때문에 조선이 망했댔단말요!》

처음부터 서씨령감을 밉게 보던 그 청년이 목에 피대를 올리며 부르짖었다.

《옳수다. 오늘 전부 글을 못배운 농민들이 모여올텐데 수수하게 말나가는대로 쓰시오.》

주위를 둘러싼 군중이 저마끔 한마디씩 하였다.

관 쓴 령감은 《그게 소원이라면 허는수 없지.》 하고 중얼거리며 손에 붓대를 탈아쥐였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듯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프리였다.

《그래 기어이 언문으로 쓰라나?》

《조선글로 쓰라요. 조선글자, 세상에서 제일 좋은게 우리 조선글인데 쌍놈의 글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서씨가문을 증오하는 그 청년이 또 소래기를 꽥 질렀다.

《임자, 거 오늘 아침에 무얼 먹지 못할걸 먹구온게 아닌가. 어른앞에서 무슨 고함질인고!》

관 쓴 령감이 붓대를 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아하, 이거 경사스러운 날에 왜들 이러시나. 초시령감, 노염을 어서 풀구 번듯하게 하나 잘 쓰시우.》

령감은 한동안 붉으락푸르락하다가 여럿의 권고를 받고 다시 붓대를 쥐였다. 아닌게아니라 령감의 붓글솜씨는 자랑할만 했다. 붓끝을 벼루에 대고 고루고루 먹즙을 먹이고나서 명주폭에 춤을 추듯 가로세로 획을 그어나갔다. 붓대가 움직이는데 따라 주먹같은 힘찬 글이 한글자씩 꿈틀거리며 돋아난다. 글자마다에 새로 태여나는 신당리농민들의 맥박이 뛰는것도 같았다. 일필휘지한 령감의 붓글을 보고 모두 탄성을 올리고있을 때 영길이가 조순근에게 달려왔다.

《아저씨, 이거 야단났어요. 본마을 서가네는 모두 나오지 않았어요. 저 초시령감 혼자서 구경삼아 나왔어요.》

《글쎄말이네, 그것들이 보이지 않네.》

《어제저녁에 서만호가 중농들을 비롯해서 여러명 데려다 술추렴을 하구 오늘 읍에 못가게 오금을 박았대요. 그래서 농조원들까지도 움직이질 않는다누만요.》

《서만호가?》

조순근은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흥, 그것들이 우리 아버지한테두 술가져다 대접했다구 해요.》

《뭐, 그것들한테서 대접을 받아?》

《아저씨, 이제라두 집집으로 돌아다녀볼가요. 시간은 없는데···》

조순근은 화가 나는대로 하면 내버려두라고 소리치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도 다 제 땅이 없는 사람들인데 땅가질 생각이야 왜 없겠는가. 더우기 장군님께서는 땅없는 농민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서 지주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사람, 빨리 사람들을 띄워 데리구 가자구.》

조순근의 곁에 있던 장춘하가 먼저 몇몇 사람들을 불러내여 서가네 사람들을 가서 데려오라고 했다.

《그것들을 데리고 가요? 서만호한테 붙어돌아가며 야지랑을 쓰는 그것들은 왜 데리고가겠다는거요. 이다음 땅 한평 못받구 굶어죽게 만들게지.》

한 농민이 칼날같은 턱을 추켜들고 웨쳤다.

《그런 소리 말구 빨리 집집을 돌라구, 시간이 없어. 》

장춘하는 두말을 못하게 오금을 박았다.

《체, 미물같은것들, 아직두 서만호상판대기를 쳐다보구있어? 뒤를 내는 눈치를 보이면 절대로 데려오지 않겠수다.》

모두 밸들이 부풀어서 두덜거리며 흩어졌다.

조순근은 어물거리다간 읍에 모이는 시간을 맞추어내지 못할것 같아 할수없이 《서가마을》을 향해 장달음을 놓았다. 제일 먼저 맞다들린 집이 정평집 서달호네 배다리집이였다. 서달호는 농조원이 아니였다. 말은 중농이라고 하지만 제 밭농사로는 한해계량을 못맞추어내서 겨우내 국수장사로 연명하는 반자작농이다.

《게 서령감 있소?》

조순근이 소리치자 웃방문이 열리며 머리카락이 꺼칠한 서달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하고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 읍으로 안갈 작정이요?》

《읍에? 거긴 뭣하러?》

《모른척하지 마우.》

조순근은 제잡담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서달호를 잡아끌었다.

《여보게 이사람, 팔 빠지겠네. 누가 읍에 간다구 이 야단인가. 난 그런덴 안가.》

서달호가 손을 뿌리치며 조순근을 흘겨보았다.

《안가요? 그럼 서령감은 땅을 안가지겠소?》

《뭐 땅? 헹, 나야 땅 있는 사람인데 뭣땜에 자네들하구 밀려다녀.》

서달호는 이미 어제저녁 서만호에게 불려가 술잔도 얻어먹고 땅도 더 주겠다는 달콤한 소리를 들은터였다.

《좋수다. 그러다 서만호 망한담에 땅 달라구 울고불고하지 마시우.》

《땅없는것들이 너무 날뛰지 말라구. 그러다 경쳐.》

서달호가 얼굴에 시꺼멓게 독이 올라 소리질렀다. 조순근은 괜히 왔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참고참으며 저희들 잘되라고 찾아다니는데 왼새끼를 꼬며 하는 수작이 괘씸하기 그지없다.

조순근은 불이 난 걸음으로 서가네 마을을 한바퀴 돌았으나 응해나서는 농민이 없었다. 겨우 서씨농민 한명을 데리고 정기찬네 집부근에 이르렀을 때 두루마기앞자락을 풀어헤친 흥묵이가 마주 오고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 활개를 저었다.

《아, 아니 성님은 서가넨 왜 데리구오슈?》

혀가 꼬부라진 말투였다. 마주서기 바쁘게 시큼한 소주내가 확 풍겼다.

《임자는 안가겠나?》

조순근이 영길이한테서 들은 소리가 있는지라 볼멘 소리로 물었다.

《여, 서 서만실이. 뭘 봐. 얼른 가지 않구.》

흥묵은 조순근의 뒤에 선 농민을 먼저 가라고 손을 저었다.

《성님, 사실은 말이유, 내 한잔 해정했어유.》

서씨농민이 앞서가자 흥묵이가 조순근의 옆에 바싹 다가붙어 걸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그것들 술은 왜 자꾸 받아먹어?》

《성님두 참, 이게 누구세상이유. 사, 사실은 저것들이 어제밤 술 가지구와서 날 읍에 가지 말라나. 내가 안가면 이 마을 무지렁이들이 다 안간다는거유. 허허허. 그래 내가 그것들 술 받아먹고 안갈 사람이유. 퉤.》

흥묵은 서씨네 마을쪽에 대고 침을 뱉었다.

《이보라구 흥묵이, 난 임자가 그 공짜놀음에 언제 한번 꼭 경을 칠것 같네.》

《서 성님두 이 흥묵이가 술 몇잔에 본색을 버릴놈 같소, 흥, 어림도 없수다.》

《그만 게정을 부리게. 창규의 체면을 봐서라두 술을 좀 삼가하는게 좋겠네. 오늘이 어떤 날이라구 주정질을 하며 다니나.》

조순근은 엄하게 타이르며 눈을 흘기였다. 그래서인지 흥묵은 정기찬네 마당으로 들어설 때에는 풀어헤쳤던 두루마기고름을 단정히 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정기찬네 마당에는 이미 달성서씨네가 10여명 와있었다. 그러나 어제저녁 서만호네 사랑방에 가서 침을 맞은 농민들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반신반의하며 뜨아한 걸음으로 찾아든 서씨네 농민들은 정기찬네 집 안팎에서 숱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프랑카드가 펼쳐져 너펄거리는것을 보고는 덩둘해서 눈을 두리번거렸다.

《저것들두 땅 준다니까 인제 눈이 뜨나보군.》

한 장년이 이렇게 빈정대면서 서씨농민들중 힘이 있어보이는 통영갓을 쓴 령감앞으로 다가갔다.

《어데 기운을 좀 시험해봅시다. 계급투쟁하러 떠나는데 투쟁을 할수 있겠는가?》

장년은 령감을 훌쩍 안아들며 배지기를 뜨자고 했다. 그러자 키큰 령감은 상대를 떠밀며 도리여 장년의 다리에 안내기를 걸자고 했다. 령감의 통영갓이 뒤로 벗어져넘어가 뒤통수에 매달려 뎅굴렁거렸다. 안뜨락에선 흐아하고 웃음이 터졌다. 처음으로 서씨가문과 타성사람들이 한덩어리가 되는것 같았다.

얼마후 신당리앞 고개길로는 농민대렬이 올려밀었다. 앞에는 가로건너쓴 프랑카드가 펼쳐지고 기발이 펄펄 날렸다.

군중은 들끓으며 서만호네 집쪽을 흘끔흘끔 건너다보기도 했다. 번쩍거리는 갓들이 해빛에 유난히 광채를 뿜었다.

대렬이 나무다리를 건널 때였다. 조순근은 해빛이 번쩍거리는 얼음장우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웬 처녀를 띠여보았다. 동이아구리만 한 얼음구멍을 까놓고 빨래를 하다가 물방치를 안은채로 다리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깡똥한 치마밑으로 드러난 동그란 무르팍이 조순근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서분이구나!)

조순근은 갑자기 오한이 일어나서 몸을 떨며 걸음을 멈추었다.

(매정한것들, 엄동설한에두 애한테 홑것을 입혀 강판에 내몰다니··· 부모들이 저 모양을 보면 가슴이 쓰려 견디겠는가.)

짧은 순간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조순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문득 서분이의 부모들이 나타나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앞을 내다보았다. 대렬은 벌써 저발쯤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