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8장 2


 

제 8 장

2

 

조순근을 데리고 대동강변을 따라 올라가던 로인은 앞에 대동문이 나타나자 서문거리로 꺾어들었다.

《저 언덕우에 올라가면 되네.》

로인은 남산재를 손짓해보이며 이젠 다 왔다고 했다. 붐비는 서문거리를 지나 남산재에 오르니 소음도 덜하고 한결 조용했다. 시내가 한눈에 굽어보이기도 했다. 어느새 해가 서쪽하늘을 불색으로 물들이면서 톱날같은 서산마루에 기울어지고있었다. 조순근은 어쩐지 지금 자기가 장군님 계시는 공산당청사가 있다는곳과는 너무도 딴방향으로 온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로인은 골목을 빠져 걷더니 오디색벽돌로 담장을 둘러친 남향집앞으로 갔다. 대문앞에 털외투를 입고 목갑총을 멘 사람이 경비막을 등지고 서성거리고있었다. 조순근이 조금 떨어져 바라보느라니 로인이 먼저 경비막으로 다가가 파수를 서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털외투를 입은 파수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있다. 얼마후 로인이 이쪽을 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조순근은 가슴이 널뛰듯해서 뛰여갔다.

《이 집이 장군의 집일세. 우리 들어가 기다립세. 장군은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니까.》

《네에? 장군님댁이요?》

조순근은 눈을 흡뜨며 되물었다. 녀학생이 대주던 공산당청사쪽이 분명 아니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이렇게 장군님댁에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는 귀뿌리가 확 달아올랐다. 장군님의 댁에 이렇게 허물없이 아무 사람이나 찾아와도 일없을가. 조순근은 불안스러워 눈동자를 가로세로 굴렸다. 집은 처마가 높지 않은 ㄷ자형의 단층집인데 남향으로 대문이 있고 집 좌우토방에는 마루가 깔리고 유리미닫이들을 해달았다.

《일없다니까, 내가 저 파수군한테서 들어가있어두 좋다는 승낙을 받았네.》

로인은 파수군에게 히죽 웃어보이며 조순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보초를 선 젊은이도 승낙한다는 태도로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조순근은 일이 너무도 놀랍게 번져지는바람에 얼이 나가고말았다.

《자, 어서.》

《아니, 저 전 여기 저 파수군에게 편지를 전하구···》

《원, 문밖에서 돌아서다니. 그러면 장군이 섭섭해할걸세. 어서.》

로인은 조순근의 손목을 잡아끌고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자, 한대 태우세. 급히 오느라구 힘두 들었는데.》

로인은 두루마기자락을 훌 들어제끼며 마루우에 앉았다.

《저, 이거 일없을가요?》

《일은 무슨 일, 어서 앉으라구. 그 편지를 남의 손을 거칠게 없이 임자가 직접 전하게.》

조순근은 야단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같은 촌무지렁이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는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일이였다. 장춘하며 흥묵이는 물론이고 김창규까지도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아버님, 이거 우리가 무엄한짓을 하는게 아니웨까? 파수군에게 편질 주구 어서 돌아갑세다요.》

조순근은 겁을 먹고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로인에게 졸랐다.

《글쎄 일없다니까, 김장군도 농군의 집안에서 태여난지라 농군을 조금도 허물치 않네.》

《아버님, 그건 또 무슨 소리웨까?》

조순근은 눈을 까뒤집고 황급히 로인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언젠가 우리 처남되는 사람도 그러기에 다시는 그따위 허튼말을 외우지 말라구 오금을 박았더랬어요. 하늘이 내신 장군님인데 농사군집에서 태여나시단요.》

조순근은 로인이 하는 백가지 말을 다 옳은것으로 믿었지만 그 말만은 천부당만부당한것이라고 우기였다. 어쩌면 그것이 장군님을 비하하기 위해 반동들이 퍼뜨려놓은 말이 아닌가싶기도 했다.

《그건 임자가 모르구 하는 소리야. 틀림없이 장군의 집안은 농사군집이네. 장군의 증조할아버지때에 저 성밖에 자리를 잡았는데 쭉 내려오면서 다 농사를 지었네. 농사군집안에서 난 장군이기에 농군의 하정을 누구보다 잘 알구 또 농군을 위해 정사를 펴는거네. 그러니 이제 장군이 오면 조금도 스스러워말구 편지도 전하구 속안에 뭉쳤던 설음을 다 털어놓게.···거 되초 가지구온게 있으문 내놓게.》

조순근은 여전히 의혹에 잠긴 얼굴을 하고 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로인이 구리대통을 허리춤에서 잡아뽑더니 조순근의 쌈지에서 누런 되초를 비벼서 대통에 다져넣었다. 조순근은 부시를 쳐서 불도 붙여주었다.

《자네도 한대 태우라구.》

《아니, 전》

조순근은 집안팎을 둘러보느라 언제 담배대를 꺼낼 생각도 못했다. 그런것보다는 장군님댁에 와서 담배대부터 꼬나문다는것이 례절없는 일같아 그만두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로인은 대통을 뻐금뻐금 빨다간 연기를 후후 내뿜었다. 비위가 여간 아닌 로인이다.

도대체 장군님과 어떤 사이이기에 이렇게 언행이 척척할가, 장군님댁에 와서도 자기 집 토방에 앉은것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파수군을 바라본다. 파수군이 씽긋 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이사람, 거 빈집에 다리아프게 서있지 말구 여기 와서 한대 태우라구.》

로인이 청년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마음놓구 앉아계십시오.》

《성미두 꼿꼿하군. 빈집앞에 우두커니 서있을건 뭔고.》

로인은 쯧쯧 혀를 차며 파수군청년을 나무랐다. 조순근은 지금 자기가 장군님댁에 와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생시같지 않아 자꾸 두리번거렸다.

장군님께서 이런 키낮은 벽돌집에 계신다는게 의문스러웠다. 파수를 선걸 보면 그렇게 짐작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집은 너무 눈에 차지 않는다. 방도 너덧칸 되나마나하고 담장밑에는 장독대가 있는가 하면 앵두나무 몇그루가 서있고 좀더 뒤에는 돼지우리도 자그마한게 하나 있다. 놀라운 일이다. 장군님댁에서 돼지를 기르다니, 닭우리도 손질하다만것이 있고 터밭도 몇평 되는것이 있다.

《아버님, 이 집이 장군님댁이 옳긴 옳습네까?》

《허, 거 무슨 소리를 자꾸 하나. 내가 그럼 장군을 만나겠다는 임자를 외딴집에 데려왔을가. 정 믿지 못하겠으면 저 파수군에게 물어보게.》

로인은 담배대를 입에서 빼며 웃었다.

《하, 장군이 이젠 또 닭을 치려는가부다. 닭우릴 만드는걸 보니.》

이러며 로인은 일어서 닭우리 짓다만곳으로 갔다. 조순근은 호기심이 나서 따라갔다. 닭우리라는게 큰 상자 하나를 네귀에 기둥을 박고 올려놓았는데 아직 웃썰미도 없고 문도 없었다.

《가만, 우리 시간이 있는데 이걸 하나 손질해놓읍세.》

로인이 두루마기를 벗어 아무렇게나 앵두나무우에 걸쳐놓았다. 조순근도 따라서 얼른 어지러운 두루마기를 벗고 팔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든지 팔걷고 해야 널뛰듯 하는 불안스러운 마음을 진정할것 같았다.

《자넨 홰나 하나 만들게.》

로인은 이러며 긴 장대 하나를 넘겨주었다. 조순근은 장대를 받아 눕혀놓고 새끼줄을 감기 시작했다. 닭은 발톱이 매발톱같이 날카롭고 발가락이 든든해서 장대에 새끼줄을 배게 감지 않아도 일없다. 사선으로 풀리지 않게 조여감기만 하면 된다. 조순근은 장대끝을 무릎에 올려놓고 끙끙 새끼줄을 조여감았다. 로인은 가마니 한개를 접어서 닭우리에 올려놓고 새끼줄로 놀지 않게 잡아 맸다. 웃썰미를 해놓으려는 모양같다. 조순근은 그게 우스워 한마디 했다.

《아버님, 웃썰미야 다른걸 올려놓아야지 보기 흉하지 않을가요?》

《허, 닭이 거적때기루 지붕삼았다구 알을 안낳을가, 일없네. 이것두 맨발벗구 사는 그눔한텐 과남해.》

《허허허···》

조순근은 마음이 가라앉으며 처음 웃음을 웃었다. 일손을 잡으니 두근거리던 가슴이 한결 진정이 되였다. 로인은 닭장지붕우에 거적을 포개여 올려놓고는 돌 몇개를 지질러놓았다. 바람에 날아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것이였다. 둘이 이렇게 일하는것을 보며 파수막에 선 청년이 빙긋빙긋 웃음을 보냈다.

《가만, 문은 제대루 해달아야겠는데.》

로인은 망치같은것이 없는가해서 판자쪼각을 몇개 들고 뒤울안으로 갔다. 조순근은 다 된 홰를 들어 닭장에 기대놓았다. 뒤울안에 들어갔던 로인이 난데없이 호미 세가락을 들고나오며 기뻐서 소리쳤다.

《이사람, 하 글쎄 뒤울안에 가니까 추녀밑에 이런게 매달려있지 않겠나. 장군이 터밭도 몇평 안되는데 이걸 세개씩 해선 어디다 쓰자고 그럴가?》

로인이 호미가락 하나를 조순근에게 쥐여주며 참 쓰기 편리하게 만들었다고 혀를 찼다. 호미는 귀가 넓고 날도 긴데 자루는 쇠스래나무를 다듬어 맞춘게 손에 쥐기가 편리했다. 목을 들어서 후린것이 더욱 맵시가 있었다.

《이건 품을 들여서 만든 호미가 틀림없네. 가만, 장군에게 이걸 달라고 졸라보지 않겠나?》

로인이 호미날을 쓸어보며 조순근을 쳐다보았다. 조순근은 대답대신 시무룩이 웃기만 했다. 참 별난 로인이다. 장군님댁에 와있다는 사실만 해도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무슨 엄두에 그런 욕심을 부린단말인가. 갓 벼린 호미여서 호미에 검은 쇠독이 그대로 남아있다. 로인은 오금을 꺾고 앉으며 호미를 땅에 대고 북북 긁어보았다. 채 녹지 않은 땅이 호미날에 부딪치며 다릉다릉 소리를 냈다. 쇠소리도 좋았다. 조순근이도 무릎을 세우고 앉아 흙을 긁어보았다. 배추그루터기, 고추나무그루터기 같은것이 호미날에 긁혀서 꺾어져나갔다.

《아버님, 호미가 여간 쓰기 좋지 않군요.》

《그러게 말일세. 호미귀가 송곳같아서 잔김도 다 맬수 있겠네. 우리 장군한테 졸라보세, 허허.》

《허허···》

둘이는 턱을 제끼며 웃었다. 조순근은 불안한 마음속에서도 자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오늘같은 좋은날을 만났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을 울렁거리였다.

이때였다. 파수를 선 청년이 장군님 오신다고 알려주었다. 로인과 조순근은 무슨 못할 일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것처럼 와뜰 놀라며 호미를 놓고 우쩍 일어났다. 대문밖에서 팔에 외투를 걸치신 장군님께서 보초에게 누가 왔느냐고 물으며 들어오시였다.

《이사람, 장군이 왔네.》

로인이 반가운듯 조순근을 데리고 걸어나갔다.

《아니, 할아버지, 이게 웬일입니까? 소식도 없이.》

장군님께서 마주 달려들어오시며 로인의 손을 잡는다. 그 순간 조순근은 로인이 장군님과 아는 사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면서도 황황히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당황해하였다. 어지러운 두루마기는 벗어놓았지만 덞을대로 덞은 신발을 감출수가 없다.

《장군, 난 집이 비여있길래 내가 날을 잘못 받구 들어오지 않았나 했지. 그런데 저 파수를 선 사람이 기다려보라구 하더군.》

《하하하, 난 그러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보고싶어서 이번주에 한번 나가볼가하던 참입니다. 할머니랑 삼촌네랑 다들 잘 계시겠지요?》

《그럼··· 무슨 걱정이 있을라구. 요즘 증손이 어머니도 일이 바쁜 모양이구나. 집에 없는걸보니···》

《녜, 오늘 녀맹사업때문에 남포쪽에 갔습니다. 할아버님이 이렇게 오실줄은 모르구···》

조순근은 뒤에 서서 이야기소리보다도 장군님의 환하신 얼굴모습을 쳐다보며 얼나간 사람같이 서있었다. 장군님의 얼굴모습에서 천하를 호령하시는 위엄이라도 있지 않나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로인과 인사를 나누시는 젊으신 장군님은 그저 정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보게, 자네가 만나겠다구 하던 장군이야.》 로인이 조순근을 돌아보며 말했다.

《?!》

조순근은 어리둥절해졌다. 로인의 말투가 수상쩍었다.

《할아버지, 만경대에서 오신분입니까?》

장군님께서 할아버님께 물으신다.

《아니, 이 사람은 황해도 재령벌에서 왔네. 나하구 기막힌 일때문에 인연이 있는 사이이지.》

《그렇습니까? 오시느라구 수고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 조순근의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미시였다.

조순근은 입을 헝 벌리고 서서 할아버님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장군님께서 손을 내미시는바람에 앗차 하고 혀를 깨물었다. 이상타했던 일이 그제야 안개가시듯 환해지였다. 장군님과 장군님의 할아버지!

《아, 장군님. 전, 전 황해도 재령벌 신당리에서 온 조순근이올시다. 사, 사실은 집앞에만 왔다가 갈려고 했는데 무엄하게···》

조순근이 무릎을 꿇고 들어앉으며 두손을 땅에 대고 허리를 구부렸다.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젊은 사람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그리구 왜 집앞에서 돌아서겠습니까. 절 만나야지.》

장군님께서 난감해하며 조순근의 팔을 잡아일으켜 세우시였다. 조순근이 장군님의 손을 잡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고개를 외로 틀었다.

《너무 이러지 마십시오. 할아버지, 밖에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자 김보현할아버님께서 조순근의 옆으로 오며 마루에 가앉자고 하시였다. 조순근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며 할아버님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 용서하셔요. 장군님의 할아버님인줄 모르구 마구 덤벼서···》

《원, 쓸데없는 소릴. 장군의 할아범이면 어쨌다는건가.》

조순근은 김보현할아버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사죄는 하면서도 사람을 이렇게 속이시는법이 어데 있는가고 나무라는 표정이다.

《장군, 이 사람이 글쎄 장군이 있는 어방에만 왔다가겠다면서도 옷이 어지럽다구 어디에 가서 손질해입구야 오겠다질 않나. 그런걸 내가 일없다구 여기까지 잡아끌구왔어.》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십니까. 조선농민이 그렇지 어디 여벌옷이 있어서 빼입구 나들일 다니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할아버님과 조순근의 손을 잡고 마루에 가 걸터앉으시였다.

《아니, 우리 집에 와서 할아버지랑 일을 다 하셨군요.》

장군님께서 닭장꾸린걸 내다보며 말씀하시였다.

《일이랄게 없어. 시간이 있는데 둘이서 뭘하겠니.》

할아버님은 이러며 닭을 몇마리 기르자고 그러는가고 장군님께 물으시였다. 할아버님은 언제 감추었는지 호미를 벌써 마루밑에다 건사하시였다. 조순근은 호미가 그냥 닭장앞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였다.

《한 댓마리 기르자고 합니다.》

《그럼 닭을 내가 더 들여보내주지. 중배가 여러마리 있어. 오뉴월병아리 하루볕쬐기가 무섭다더니 어찌나 크는지.》

할아버님은 대통을 꺼내드시였다. 장군님께서 인차 양복주머니안에서 권연 한갑을 꺼내놓으시였다.

《그런데 장군, 저 사람, 이야길 들어보라구. 참 기막힌 이야기야.》

《그렇습니까. 그럼 방안에 들어갑시다.》

《아니, 장군님, 일없습니다. 전, 전, 장군님께 하나 렴치없는 청을 드리자구 찾아왔습네다.》

조순근은 코멘소리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끼앞자락을 헤치고 붉은 공단에 싼 봉투를 꺼내 장군님께 두손으로 올렸다.

《이게 뭡니까?》

장군님께서 마주 일어서며 부들부들 떠는 조순근의 받쳐든 손에서 편지를 집으시였다.

《장군님, 이건 제가 장군님께 올리는 청원을 적은 편지입네다.》

조순근은 두손을 모아쥐고서서 눈물을 흘렸다. 장군님께서는 붉은 천을 헤치며 편지봉투를 집어드시였다. 그리고 한지로 된 속지를 꺼내 펼쳐드시였다. 누런 한지에 적자색 글자가 삐뚤삐뚤 서있었다. 바람에 부대끼는 갈대처럼, 아니 세파에 시달리는 농군들의 힘겨운 걸음걸이처럼 왼편, 바른편으로 글자들이 쓰러지듯이 눕혀있다. 종이 여백에도 검붉은 피자욱이 툭툭 튀였다.

땅을 달라는 소박한 청이지만 길지 않은 그 혈서에는 수천년의 봉건의 질곡과 농민들의 설음의 력사가 적혀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피로 얼룩진 종이를 쓸어만지며 오래도록 말씀이 없다가 머리를 수그리고있는 조순근의 두손을 잡아쥐시였다.

《우리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겠는데 방에 들어가서 이야길합시다.》

김보현할아버님도 편지를 읽고 가슴이 아픈듯 눈굽을 찍으며 조순근을 측은히 바라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