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7장 5


 

제 7 장

5

 

《인생은 고해다. 겉 희고 속 검은것은 제일 위험한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어린 시절 조순근이 서당방에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맞으며 천자를 외울 때 턱수염이 한발이나 되는 훈장에게서 들은 말이였다. 조순근의 학력은 서당을 몇달 다닌것밖에 없는데 이마적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몇달동안에 늙은 훈장으로부터 인생의 교훈으로 되는 말을 많이 들은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깊이 하고 해준 늙은 훈장의 말을 시답잖게 듣고 마이동풍으로 흘러보냈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날에 그는 삭막하게 지워졌던 그 두가지의 말이 떠오르는것이였다. 훈장의 말은 옳았다. 참으로 인생은 고생의 바다였고 겉 희고 속 검은것은 위험한것이였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다니는 조만식을 나는 정말 신선으로 생각했댔네. 그런데 그놈이 겉 희고 속 검은 악귀였네. 내 그놈때문에 모든걸 망쳤구 태를 묻은 이 신당리에선 얼굴을 들구 한시도 못살게 됐네. 그래서 이제 밤이 깊어지면 가만히 떠나겠네.》

조순근은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엽초함박을 끌어다가 창규앞에 놓고 고불통대를 꺼냈다. 안해가 저쪽구석에서 입을 막고 이따금씩 쿨쩍거린다. 신문지를 찢어 담배를 마는 김창규의 얼굴색도 맑지 못했다. 대복이만 혼자서 부엌으로 오르내리면서 새끼줄로 이것저것 꿍져서 동여매였다.

김창규는 그러는 대복을 말없이 지켜보며 연송 담배연기를 내불었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그의 강글강글한 머리우로 꼬리를 끄을며 피여올랐다.

《그래, 아저씬 정말 떠날 작정이예요?》

김창규는 조순근을 돌아보며 캐여물었다.

《그저 해보는 말인줄 알았나? 처남네가 사는쪽으로 가든지 좌우간 오늘중으루 떠나겠네.》

조순근은 결연한 표정으로 재털이에 곰방대를 털었다.

《좀더 생각해보세요. 예, 아저씨?》

《말리지 말게.》

《그럼, 기어코 가겠단 말씀이요?》

조순근은 헛기침을 한번 크게 하며 넌지시 창규의 얼굴을 살피였다. 갑자기 따지고드는 그의 눈빛이 두려워서였다.

《정 생각이 그렇다면 얼른 짐을 꾸립시다.》

김창규는 불시에 서늘한 낯빛을 하고 벌떡 일어서더니 이불보짐을 와락 풀어헤쳤다. 개여져있던 이불을 펴놓고 그우에 밥그릇들을 누데기에 감아 엎어놓았다. 그리고는 대복이더러 빨리 섬기라고 야단스레 손으로 독촉을 했다. 그바람에 돌아앉아 울던 대복이 어머니도 하나둘 옷가지들을 겹놓아쌓았다. 조순근은 느닷없는 김창규의 행동에 놀라서 고불통을 문채 멍청히 바라보았다.

《아니, 대복이 아버진 앉아 보기만 하겠소. 얼른 짐을 꾸려야지. 대복아, 부엌에 가서 새끼를 사리채루 올려오너라. 이것가지군 안되겠다.》

창규는 부엌구석에 놓인 새끼사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녜.》

대복은 별스레 서두르는 김창규의 본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선뜻 부엌으로 뛰여내려갔다.

《여보게, 이거 왜 이러나. 내가 무슨 잘못한거라두 있나?》

조순근이 일어서며 창규의 다부진 손을 잡았다.

《아저씨는 가우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 가두 되우다. 얼른 짐을 꾸리자요.》

김창규는 새끼줄로 이불보짐을 끙끙 조이며 소리쳤다. 조순근은 창규의 두손을 와락 부둥켜잡았다.

《달리 생각지 말라구. 내가 글쎄 뭘 믿구 무슨 체면에 여기서 살겠나.》

《그러게 가라지 않습니까. 믿을데가 없게두 됐지요. 농조에서두 쫓겨나구. 땅두 떼우구. 서만호는 무섭구. 종씨한테서두 기만을 당하구 제 그림자두 못믿게 됐지요.》

창규는 숫제 팔을 걷어올려붙이며 짐을 쌀 물건을 찾느라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이불짐을 싸고나자 별로 손댈 일감도 없었다. 그제야 대복이도 창규의 성난 얼굴에서 기미를 채고 일손을 멈추었다. 아버지가 들어오기전에 김창규와 마주앉아 어제오늘 있은 일을 물어보는대로 다 이야기하면서도 못느꼈던 그의 범같은 기상이 여간 무섭지 않았다.

김창규는 이미 며칠전에 신당리 농조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있었다. 장인령감도 조순근이 농조에서 쫓겨난 일때문에 달려올라와 야단법석을 했었다. 농조에서 쫓아낼놈은 정기찬인데 무엇때문에 마을에서 제일 못살고 불쌍한 사람을 몰아대느냐고 책상을 치면서 당장 농조에 다시 들게 손을 써달라고 했다. 김창규는 신당리일이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되였다는것을 느끼고있던차라 유사천에게 신당리농조문제를 다시 토론하는것이 어떤가고 물었다. 유사천은 대번에 김창규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그리하여 창규는 군당비서와 오래동안 언쟁을 벌리였으나 조순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창규는 군당에 오는 첫날부터 유사천의 좌경적이고 몰인정하고 거만한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벌써 그와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을 한것이 몇번인지 모른다. 어쩐지 김창규의 눈에는 유사천이 진심으로 장군님을 받드는 공산당간부같지 않았다. 그러나 유사천은 왜놈시절에 감옥살이를 한 경력때문인지 일부 중앙의 큰 간부들에게서 대단한 신임을 받고있었고 그래서 더욱 그는 안하무인격으로 군중의 머리우에 군림하여 전횡을 부리는것 같았다.

그런 군당비서와 함께 군당사업을 하는 창규의 마음은 늘 괴로웠다.

지금 창규의 귀전에는 지난날 머슴살이를 하던 공산당원이 재령벌로 가야만 빈고농들을 위해 진심으로 투쟁할수 있다고 타이르면서 그것이 곧 장군님의 뜻이라고 하던 김책동지의 말이 쟁쟁히 들려오는듯 했다.

그러한 믿음과 기대를 받아안고 내려온 자기가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이 재령땅에서 대대로 머슴살이를 해오며 제일 가난하게 살아온 고농출신의 조순근이가 오늘 지주에게선 소작지를 떼우고 농조로부터는 계급성이 없다고 내쫓기였는데도 아직 속수무책으로 있지 않는가?

김창규의 마음속 모대김에 응수라도 하듯 대복이 어머니가 남편을 향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여보, 우리가 마을을 떠두 저 아버님묘를 옮겨보구 뜨지 않겠소?》

《별 뚱딴지같은 소리! 묘를 옮긴단말여?》

조순근은 안해에게 역증을 부리였다.

《난 어쩐지 아버님 산소를 잘못 써서 이러는것 같아요. 보구려. 신통히 우리 집하구 물방아간집이 화액을 받고있지 않소.》

조순근은 눈섭을 구핏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듣고보니 우연한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자리에 묘를 쓴 물방아간집과 자기네만이 유독 불행을 당하고있었다. 이 두 집에서는 재판에서 지고 재령강물에 빠져죽은 아버지들의 시신을 죽음의 빌미로 된 땅-장사래밭이 내다보이는 강변 맞은편에 나란히 묻었었다. 아닌게아니라 그전날 언제인가 늙은 풍수쟁이가 마을에 들렸다가 두 령감의 묘자리가 좋지 못하다고 혀를 차며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신통히도 정말 불행은 강변 맞은켠 검은 진흙땅에 아버지들을 묻은 두 집에 닥쳐들었다. 흑호놈에게 대복이가 된매를 맞고 쓰러지던 날에 물방아간집 부자도 매를 맞고 인사불성이 되였고 그후 동생은 조순근이처럼 농조에서 쫓겨났다.

《묘자리때문이라면 거 뭐 힘들게 있습니까? 래일이라도 당장 풍수쟁일 불러다 묘를 옮깁시다. 예, 아저씨?》

김창규가 짐짓 정색을 짓고 그러나 분기가 배인 거친 목소리로 말하였다. 조순근은 덤덤히 고불통을 입에 물었으나 대복이 어머니가 한수 더 떴다.

《글쎄 임자네 가시집을 보게. 영길인 자위대장이 되구 흥묵이 그 적은이두 요즘 신수가 얼마나 멀끔해지구있나. 그저 우리 집과 물방아간집형제네가···》

《싹 입을 다물지 못할가!》

조순근이 돌연 입안에서 고불통을 빼들며 안해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방안은 쥐죽은듯이 고요해졌다. 평생 남편에게서 큰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고 살아온 안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멍청하니 앉아있었다.

조순근은 눈을 스르르 감으며 누구에게라없이 중얼거렸다.

《묘탓이 아니라 내탓이야. 나는 천벌을 맞을 짓을 했지··· 내가 신선을 믿는다는게 마귀를 믿었거던. 마귀를 믿은탓에··· 아, 참말 원통하네.》

조순근은 불시에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김창규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얼마나 분명한 말이며 옳게 찾아낸 생활의 교훈인가. 김창규의 페부를 찌르는 말이였다. 그 순간 창규는 자기를 뚫어지게 지켜보는 조순근의 부릅뜬 눈이 무서웠다. 그 부릅뜬 눈은 마치도 《내 스스로 이런 교훈을 찾기전에 너는 왜 나를 일깨워주지 못했느냐.》 하고 질책하는것만 같았다. 삽시에 거뭇하게 질리는 창규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회오의 빛이 짙게 어리였다.

《아저씨!》

창규는 부지중 조순근의 팔목을 부여잡았다.

《아저씨는 옳은 말을 했습니다. 아저씨가 오늘 이 지경이 된것은 산소를 잘못 쓴때문도 아니고 팔자탓도 아닙니다. 조만식이와 같은 인간을 믿었기때문입니다.》

김창규의 목소리는 점점 열기를 띠며 조만식을 단죄하듯이 크고도 엄하게 울려나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 어린 회오의 빛은 더 짙어졌다.

《아저씨가 그렇게 된데는 제게 잘못이 더 많습니다. 장군님만을 믿도록 제가 잘 도와드려야 했을텐데 그렇게 못했지요. 그러기를 바래서 저를 여기에 보냈는데 제가 구실을 못했습니다.》

《아니야. 임자는 벌써 여러번 그놈이 하는 일이 장군님의 뜻과 어긋난다는것을 말했지. 그런걸 나는 그놈이 장군님의 부하인줄만 알고 임자의 말을 새겨듣질 않았네. 내가 눈이 멀었어. 이제보니 그놈은 농군편이 아니야. 내가 그 마귀의 말을 듣고 그놈의 세칙을 온 재령땅에 퍼지게 만들었으니 이게 역적이 아니구 무언가. 이 땅을 밟고 살수 없는놈이 되였어. 어이구···》

조순근은 무르팍을 꽉 움켜쥐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몰라서 저지른 잘못인데 역적은 무슨 역적이겠습니까. 제가 섭섭하게 생각하는건 아저씨가 그렇게 기막힌 일을 당하면서도 저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지 않은것입니다. 이 김창규가 그렇게 남남지간으로 생각되는가요? 우린 같이 머슴살이도 하지 않았습니까.》

김창규는 서글픈 눈빛으로 조순근을 잠간 지켜보고 불쑥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저도 피가 있고 정이 있는 사람이외다. 아저씨에게 죽을 일이 생기면 모른다고 고개를 돌릴놈이 아니란말이우다.》

《여보게, 내가 왜 그걸 모르겠나. 임자 마음이야 내가 잘 알구 내 마음은 또 임자가 잘 아는게 아닌가.》

《아저씨가 제 마음을 정말 알고있다면 저 짐보따리들을 당장 푸십시오. 김창규가 숨을 붙이구 살아있는한에는 아저씬 재령땅을 뜨지 못합니다.》

조순근의 목에서 울대뼈가 세차게 오르내리며 꿀떡 하고 닭알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창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격하게 울리였다.

《장군님께서 15여성상 백두산에서 눈비를 맞으시며 싸우신것도 아저씨와 같은 조선농민들을 땅의 주인으로 되게 하고 모든 인민들이 잘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개선하신 첫날부터 우리 농민들때문에 마음을 쓰며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는데 아저씨가 이 땅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게 얼마나 죄스러운 일입니까. 그게 바로 장군님의 뜻을 어기는 역적의 짓으로 될겝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농군들이 잘못을 한번 저질렀다고 나무라실분이 아닙니다. 아저씨는 우리 장군님께서 농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아저씬 공산당기관지인 신문〈정로〉 창간호를 읽어보셨습니까?》

김창규는 이렇게 물어보며 조순근의 얼굴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고 까딱없이 앉아있던 조순근이 피끗 김창규를 스쳐보고는 무겁게 고개를 수그리였다. 조순근은 언제인가 신당리 농조에 한부씩 오는 《정로》를 본적이 있었으나 얼핏 겉만 스쳐보았을뿐 내용을 읽어본 일이 없었다.

《보아하니 아저씬 글을 알면서도 신문을 읽는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만식이한테 쉽게 넘어가고 지주놈과 〈법관〉이 한번 호통치는 말에 당황실색하고 절망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로〉창간호에 무엇이 실린지 아십니까? 거기에는 악질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이 실렸습니다. 그게 바로 김일성장군님의 지도밑에 북조선공산당 1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내놓은 결정입니다. 그리구 창간호는 조만식의 소작세칙의 반동성을 까밝히는 글과 함께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를 비롯해서 우리 농민들을 위한 힘있는 구호들이 특필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우리 농민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정로〉창간호에 농민들을 위한 글을 그렇게 많이 싣도록 하셨겠습니까. 아저씬 여태 다 모르고 살았지요?》

굳게 얼어붙어있던 조순근의 얼굴살에서 푸들푸들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눈이 충혈되면서 목덜미에서부터 이마전으로 붉은 혈조가 피여오르는듯 했다. 김창규는 부엌문설주를 붙든채 벌겋게 이물린 눈을 슴벅이고있는 대복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복이도 이젠 어서 글을 배워야겠다. 지금 동네에서 야학을 하구있구 앞으론 성인학교두 세우려고 하니 열심히 글을 배워라. 아저씨, 대복이 어머니, 장군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기고 지주는 집니다. 오직 장군님만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밝은 앞날이 있습니다. 제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어서 짐을 푸십시오.》

창규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 무르팍을 움켜쥐고있던 조순근의 두손이 후들후들 떨리며 옆으로 미끄러져나갔다. 그는 움쭉 일어나서 꺾쇠같은 손으로 이불보짐을 당겨 풀기 시작하였다. 새끼줄을 옭매여서 풀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그는 이발을 꽉 깨물고 뚝심으로 새끼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마침내 새끼줄이 뚝하고 끊어져나갔다. 그것은 조순근의 몸을 압박하던 그 무슨 운명의 동아줄이 끊어져나가는 소리처럼 통쾌하게 들리였다.

김창규와 대복이도 조순근의 일손을 도와 옭매인 새끼매듭들을 한매듭씩 풀어나갔다.

조순근의 처는 어느새 돌아앉아 녹이 쓸어 시우쇠가 다 떨어져나간 반닫이문을 열고 옷가지들을 들여놓았다. 한창 짐보따리를 풀고있을 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흥묵이며 정기수며 장춘하들이 놀란 얼굴들을 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흥묵은 들어서기 바쁘게 여기저기 흩어진 새끼오락지들을 둘러보더니 머리를 못들고 앉아있는 조순근의 팔을 붙들고 마구 휘저었다.

《서···성님, 너무하우. 너무해유. 이 흥묵일 버리구 어딜 달아나겠다는거유. 살아두 같이 살구 죽어두 같이 죽자구 하던 땐 언제였시꺄?》

흥묵은 분한듯이 조순근의 무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흐느끼듯이 웨쳤다.

《여보게, 흥묵이 그만하게.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언제나 온건하고 침착한 장춘하가 마라초를 입에 물며 흥묵을 진정시키였다. 그러자 조순근의 눈귀에 맺혔던 구슬알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내려 흥묵의 손잔등에서 부서졌다.

일순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북받치는 오열을 참느라 눈을 지리감았던 조순근은 어쩐지 물방아간집 정기수가 류다른 눈으로 자기를 보는것만 같아 고개를 돌리였다. 정기수의 얼굴에는 물방아간에서 맞은 어혈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이마에도 푸름푸름 멍이 있었다. 코날이 칼날처럼 성큼해졌다. 바가지손잡이같이 뾰족한 턱을 들고 마주 보는 그의 눈만은 번개가 일듯 번쩍거린다.

《여보게 순근이 난 오늘 종일 이런걸 생각했네. 임자가 김일성장군님께 편지를 올리는게 어떨가 하구.》

《예?!》

조순근은 탄성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외마디 부르짖음을 하고는 얼핏 김창규를 돌아보았다. 김창규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있었다.

정기수가 엄한 얼굴빛을 띠고 다시 말하였다.

《편지를 올리게. 임자는 면무식은 한 사람이니 능히 글을 쓸수 있는데다가 지금 임자처럼 억울한 처지에 놓인 농군이 어디 있나. 우리 농군들을 보살펴주시는 장군님을 믿고 글월을 올리는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되네.》

《?!》

조순근은 놀라움과 흥분에 턱이 떨리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흥묵이도 서두르며 부추기였다.

《서 성님, 이 흥묵이랑 저 정기수형님이랑 신당리농군들의 소원을 다 담아서 김일성장군님께 글월을 올려유.··· 창규, 임자 생각은 어떤가?》

《저두 아버님들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모두 장군님을 믿고 사는 농군들이니 기쁜 일이 생겨두 슬픈 일이 생겨두 장군님께 청을 올리게 되는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잖아 지금 다른 지방들에선 3.7제후에 감사편지들이 많이 올라가고있습니다.》

《옳거니! 우리도 벌써 글월을 올렸으면 이런 페단이 없었을거네.》

정기수가 정중히 한마디 덧붙였다. 조순근은 여전히 얼어붙은것처럼 앉아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도 김일성장군님께 억울하고 원통한 만단사연을 아뢰고싶은 충동이 불처럼 일어나고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장군님께 감히 글월을 올린다는것은 너무도 외람되고 어벌이 큰 일로 생각되여 용단을 내릴수가 없었다.

김창규와 마을농군들이 떠나간 뒤에도 조순근이네 세식구는 잠들지 못했다. 도저히 잠들수 없는 밤이였다. 조순근은 등불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끊임없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천사만념을 굴리였다. 그는 김창규가 하던 말을 더듬어보았다. 우리 농민들은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던 그의 말이 귀전에서 메아리처럼 울리였다. 창규가 무슨 말인가 많이 하고갔으나 웬일인지 그 소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창규의 말이 옳아. 우리 농군들이 믿어야 할 분은 오직 장군님뿐이니 그분께 신당리농군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아뢰여야 한다.)

벌떡 일어선 조순근은 방안을 빙빙 돌아갔다. 세찬 격랑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비로소 비상한 결심을 품게 된 조순근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안해만 혼자 아래목에 옹크리고 앉아 남편의 얼굴을 지켜보고있었다.

《대복인 어데 갔소?》

《아까 부엌문을 차고 뛰쳐나갔는데 아마 서분이를 만나러 가는가봐요. 저희들끼리두 무슨 언약이 있었을테니 집에서 벌어진 새소식을 알려주자구 갔겠지요.》

조순근은 스무나무밑에서 속삭이던 아들과 서분이를 생각하면서 한참이나 문가에 서있었다.

드디여 조순근은 반닫이문을 열고 한지를 꺼내여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그다음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그는 입술을 사려물었다. 그러더니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송곳이로 꾹 깨물어뜯었다. 손을 펴들자 선지피가 여기저기 뚝뚝 떨어졌다. 한지에도 붉은 피가 떨어져 슴배였다. 조순근은 단정히 한지를 펴놓고앉아 손가락 끝으로 붉은 글자를 하나하나 그리기 시작했다.

《고마우신 김일성장군님!》

조순근은 첫줄을 이렇게 뗐다. 붉은 피로 그려진 서뿌른 글씨였다.

그러나 이 열자를 붉은 피로 새기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시련의 언덕을 넘고 생각의 바다를 건너왔던가싶다. 회의의 구름속에서 운명을 희롱당하던 농군, 대대로 짓밟히고 억압당하던 농군이 해빛을 보고 새 운명의 첫발자국을 떼며 세상에 소리치는 천금같이 값높은 글자였다. 그것은 이 땅에 새로 태여나는 조순근의 고고성인지도 모른다.

조순근은 밤을 새워 혈서편지를 썼다. 그의 안해도 남편옆에 앉아서 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