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7장 3


 

제 7 장

3

 

조순근은 오봉산골안을 한달음에 내려와서 곧장 서만호네 집앞으로 달려갔다. 지나가던 사람마다 옷깃을 너펄거리며 정신없이 달리는 조순근이를 웬일인가싶어 한참씩 눈이 둥실해서 지켜보았다.

눈에 피발이 선 조순근의 다급한 걸음걸이가 의아쩍은데다 그뒤로는 아들이 지게를 지고 허둥지둥 쫓아가기때문에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여보게, 순근이. 어딜 가나?》

면목이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물었으나 조순근은 옆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총총히 달리기만 하였다.

《허허, 저사람이 농조에서 나가더니 이젠 지주집을 제 가시집 다니듯 하는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빈정대며 혀를 찼다.

대문앞에 말승냥이같은 개가 누워있다가 조순근을 보자 훌떡 일어서며 짖어댔다. 그놈은 문앞에 접근할수 없게 한길이나 뛰여오르며 앞발을 쳐들고 조순근에게 달려들었다. 사슬만 매놓지 않았더면 벌써 달려들어 시뻘건 입으로 살점을 물어찢었을것이다. 개는 붉은 이몸과 날카로운 이발을 드러내고 매인 사슬이 끊어져 나가게 발악을 하였다. 뒤로 물러섰던 조순근은 앞으로 씽 달려나가며 작시미로 짖어대는 개의 허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러자 개는 《깨갱!》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쳐들었던 발을 옆으로 떨구고 모재비로 나가 넘어졌다. 그러는 찰나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개한테는 왜 그 지랄이야?》

문앞에 누구인가 나와서 꽥 소리쳤다. 마주보니 체통이 우람한 꼼보이다. 얼굴에 돈잎같은 마마자국이 얼룩덜룩한 흑호는 시뻘건 눈알을 부라리며 조순근을 노려보았다.

《음, 여기두 개새끼가 한마리 있었구나··· 너두 한방망이 얻어맞아봐라.》

조순근은 흑호놈을 보자 분기가 더욱 치밀어서 작시미를 쳐들고 도리깨처럼 휘둘렀다.

《아니, 이놈이 미치지 않았어?》

곰보는 머리우로 떨어지는 작시미를 날쌔게 피해서 저쪽으로 달아났다.

《이놈, 너 사람을 잘 친다지?》

조순근은 그놈을 향해 몇걸음 따라가다가 내버리고 서만호가 있는 사랑채로 들어갔다. 이때 약탕관을 들고나오던 장서방이 중대문쪽에서 조순근이와 마주쳤다.

《적은이, 이게 무슨 일인가?》

조순근의 행색을 보고 장서방은 겁이 나서 물었다.

《이 돼지같은 왕벌이 지금 있소?》

《아니, 어찌자구 이래, 엉?》

장서방이 조순근의 풀어진 옷자락을 여며주며 달래였다.

《아저씨, 비키시오. 내 이놈하구 계산할게 있어요.》

조순근이 장서방을 뿌리치고 사랑방대돌앞으로 가자 마침 미닫이문이 량쪽으로 쭉 갈라지더니 서만호의 불깃한 얼굴이 쑥 나왔다.

《밖에서 이 무슨 소란들인고?》

서만호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대돌앞에 서있는 조순근은 숫제 거들떠보지도 않고 장서방에게 호령했다.

《장서방! 사랑채앞엔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하라고 일렀는데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엉?》

《저, 대복이 애비가 무슨 긴한 말씀을 여쭐게 있는가보이다. 그래서···》

장서방이 중대문앞에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서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떠듬거리였다. 그제서야 서만호는 유들유들한 낯을 찌플사하고 조순근을 내려다보았다.

《음, 임잔가? 임자가 조만간 날 찾아올줄 알았네. 허나 오늘은 일이 바빠서 짬이 없으니 후날 찾아오게. 어험!》

서만호는 위엄있게 헛기침을 하고 당장 미닫이를 닫아버릴듯이 량손을 벌리였다.

《당신이 그래 사람가죽을 쓰구 정 이러겠소?··· 땅을 가지구 정 이렇게 롱간질을 하겠소.》

조순근은 다짜고짜 작시미로 대돌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 무엇이 어쨌다구?》

서만호는 한아름이나 되는 몸을 벌떡 일구더니 다시 대청으로 나와서 발을 굴렀다.

《네가 이젠 아래우도 모르는 개망종이 됐구나. 웃사람들한테 하는 말본때가 도대체 그거냐? 공산당물이 단단히 들었구나.》

서만호의 늘어진 볼따귀와 이마에서 쥐가 펄떡펄떡 뛰였다.

《법도 례절도 모르는 이 천벌을 받을놈!》

《천벌이라구요? 어린 아이를 륙칠년 부려먹다 내보내군 그 이튿날로 땅을 떼버리는 당신이야말로 천벌을 받겠소. 오봉산 밭이 뉘 밭이고 어떻게 생긴 밭인데 그것마저 뺏아서 종씨 작인들에게 넘겨준단말요. 정말 하늘이 무섭지 않소?》

조순근은 대돌우에 한발을 올려짚으며 온 마당이 들썩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중대문쪽에서 흑호를 비롯한 네댓명의 《호신병》들이 왁 달려왔다.

《야, 이눔의 새끼. 죽지 못해 발광이냐? 내 오늘은 애비 아들 두놈을 아예 죽여버리고말테다.》

흑호놈이 뺏아낸 작시미로 조순근의 허리통을 후리치고는 이어 돌아서서 지게를 진채 마당 한귀에 서있는 대복이게로 달려갔다. 장서방이 미친 갈범처럼 날뛰는 흑호를 말리려다가 팔에 후려치여 뒤로 벌렁 나가넘어졌다.

《이 무슨짓들인고? 가만있지 못할가!》

서만호가 수라장이 돼버린 대청아래를 향해 엄하게 소리를 치자 비로소 《호신병》들의 발광이 즘즉해졌다.

《다들 물러가거라, 이 무슨 방정맞은 짓들인고!》

서만호가 대청을 구르며 다시 추상같은 호령을 하자 마름이며 머슴이며 《호신병》들이 비실비실 물러났다.

《아버지, 우리 가자요! 에익 분해!···》

대복이가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죽이겠으면 죽이고 때리겠으면 때려라 하고 대돌앞에 버티고 서있던 조순근은 아래다리에 맥이 빠지며 온몸이 땅으로 잦아드는것 같았다. 그는 몇발자국 비틀거리다가 우뚝 멎어서며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놔라! 할말은 하구 가야겠다.》

《음, 한사코 행투리를 하겠다는거냐? 오냐, 정 그렇다면 올라오너라. 네가 얼마나 배짱이 세구 버르장머리 없는놈인지 좀 보자. 그래 네 할말이 무언지 어서 실컷 말해봐라!》

서만호는 대청마루 한끝에 놓여있는 참대의자를 끌어내더니 털써덕 소리가 나게 육중한 몸뚱이를 실었다.

《나는 여러말 할게 없소. 당신은 우리 애를 륙칠년 부려먹었으니 나한테서 땅을 뗄수가 없소. 사람이면 어떻게 그럴수 있겠소. 그리구 또 오봉산밭으로 말하면 내 손으로 일군 밭이지 당신의 땅이 아니요. 그런데 그것마저 서씨가문의 작인들에게 넘겨주다니 어디 될말이요.》

《허어- 저런 가을뻐꾸길 봤나···》

서만호는 어이가 없다는듯 고개를 제끼고 쓴웃음을 짓더니 장서방을 불러 성배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얼마후에 성배가 나타나서 두손을 합장하고 서만호의 분부를 기다렸다.

《얘야, 저 순근이네 빚문서를 좀 보여줘라!》

《예, 알겠소이다.》

서만호의 충견은 그 불편한 다리도 마다하지 않고 냉큼 물러나서 잠간사이에 베개통같은 문서책을 들고왔다.

《예, 조대복이 머슴기간으로 말하면 6년 8개월 스물닷새인데···》

마름은 이렇게 문서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한것이 반시간이나 지나서 끝을 냈다. 6년 8개월 기간을 날자별로 쪼개서 회계를 하다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나 시시콜콜이 적어놓았는지 아무날에는 고뿔을 앓아서 공밥을 먹은것, 아무 시간에 집에 놀러가서 공시간을 보낸것, 아무때 도끼에 발을 다쳐 누워있은것까지 밝혀서 따지고나자 결국 대복은 제 밥값밖에 한것이 없고 6년 8개월전 열두살때 가지고 들어온 조순근의 빚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서만호는 아연실색해있는 조순근을 거느즉이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굳이 임자가 회계를 까자고들어 빚문서를 읽었는데 형편은 그렇네. 한사코 대복을 보내달라구 앙탈을 쓰기에 빚대신에 소작을 뗐는데 무슨 노염인가 엉? 그리구 오봉산밭두 소작을 받지 않으니 임자 밭인줄 알고있나? 그건 이미 내가 오봉산을 국유림에서 넘겨받을 때 다 함께 넘어온거야. 그런걸 이때까지 봐주었는데 뭐 롱간질이야!》

《아니, 뭐가 어쨌다구요?》

《오봉산두 내가 돈을 주고 산 내 땅이란 말일세. 내 산에다 임자가 밭을 일궜어!》

조순근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오봉산이 서만호의 개인소유로 넘어왔다는 말은 금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거 보라구. 임자가 이래저래 모르구 받은 내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건 생각지두 못하구 무슨 행투린가? 대복이 문제두 그래, 임자가 곱게만 놀면 그 애를 내보내구두 소작 전답들을 그냥 부치게 하겠네만 소행이 괘씸하단말이야. 란동질을 하다 못해 이젠 내앞에 와서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퍼붓는단말인가? 그게 어디서 하던 본땐가?》

서만호는 조금 가라앉혔던 목소리를 다시 높이면서 대청마루가 드렁드렁 울리도록 발을 굴렀다. 조순근이도 수그러들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만 그르다구 하지 말구 제 편에서도 좀 생각해보시우. 아무리 사람같지 않아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논밭을 떼서 훌렁 넘겨주는 법이 어디 있소. 그런 롱간질은 제발 그만하시우. 너무하우, 너무해!》

《너무하다? 그럼 내 한가지 묻자구. 너희 농존지 한애빈지 3.7제를 할 때 나한테 의논을 하구 3.7제를 했느냐? 너두 의논없이 소작룔 7할루 떼먹구 수염을 뻑 쓸구있지? 피장파장이 아니냐? 네 떡이 한개면 내 떡두 한개야. 할말이 있느냐?》

조순근은 또 말문이 막히여 아무런 항변도 못하고 어금이만 깨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무슨 요정을 낼것처럼 달려왔으나 어찌된 조화속인지 말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범굴에 잘못 들어온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보기가 면구스러웠다.

서만호는 더욱 기승을 올리였다.

《봐라, 이놈! 네가 렴치있는 수작을 하는가. 여기 재령벌에서 네놈들이 농사짓구 목숨을 부지해 살아나가는게 누구덕이냐. 우리 가문이 대대로 내려오며 한푼두푼 모아서 땅을 장만해놓고 너희놈들을 먹여살리는데 뭐가 어쨌다구, 이 천하의 은혜를 모르는 놈들! 나중엔 제 주인의 땅까지 가로채먹겠다니 그 도적놈의 심보가 됐느냐?》

《주인의 땅이란게 어떻게 생긴 땅이요? 작인들한테 돈 한잎씩 던져주구 갈밭을 개간해서 얻어낸거지요?》

조순근은 어차피 이제는 막판이 되였다고 생각하며 농군의 고혈을 짜서 횡재한 재령벌 백리전답의 죄많은 연혁을 마구 들추었다.

《허, 이것봐라. 이놈아. 한잎이건 두잎이건 그건 내 돈이 아니고 도적질한 돈이냐? 난 작인놈들 거저 일시켜먹은적 없다.》

서만호는 어이가 없다는듯 목을 제끼며 웃었다.

조순근은 별안간 아들애의 팔을 잡아끌어 터지고 부어오른 손을 지주에게 내보이였다.

《자 이애의 손을 보우. 어린애의 손이 이 지경이 됐는데 뭐 6년 8개월에 제 밥값밖에 한게 없다구요? 날도적은 바로 당신이요!》

조순근이 불현듯 실성한 사람처럼 펄펄 뛰자 장서방이 겁에 질려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여보게 적은이, 이게 무슨짓인가··· 원 세상 순하던 사람이···》

《아저씬 좀 비키시우. 내 할말은 다 하구 가겠소. 신당리가 아니면 살 땅이 없겠소. 너무하우, 너무해. 그래 조만식선생이 이러라구 합디까? 이렇게 악착스레 작인들의 명줄을 밟으랍디까? 어디 좀 말해보시우.》

조순근은 불악귀같은 서만호와의 최후의 결별을 작정한 이 시각 조만식의 얼굴이 떠올라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뭐, 조만식선생? 허허허···》

서만호도 한순간 미친 사람처럼 목을 제끼고 너털웃음을 치다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엑기 고약한놈! 네놈이 조만식어른한테 갖은 험구를 다해 날 모함한걸 모르는줄 아느냐? 조만식어른이 네놈의 가살에 넘어갈줄 알았느냐? 그래 요즘두 그분이 보내준 옥돌탕관에 약달여서 녀편네 병구완을 잘 하나?》

《···》

조순근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언제 벌써 저놈이 약탕관을 받아온 사실까지 알고있는가. 서만호는 연송 입언저리를 실룩거리면서 기염을 토했다.

《동서남북을 모르는 우둔한놈! 그게 바루 내가 몇해전에 그분께 올려보낸 약탕관이야. 그분이 무슨 뜻으로 그걸 너에게 줬는지 짐작이 안가냐? 그게 이 서만호한테 충복하라는 뜻이야. 그런데 네놈이야말로 조장로의 뜻대로 한 일이 한가지도 없다. 공산당에 찰떡같이 붙어다니다가 흥, 농조에서두 쫓겨났다면서? 싸지 싸!》

조순근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심장이 멎어버리는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현훈증이 일어났다. 사실 조순근은 그 옛날에 서만호가 조만식에게 자오라기모자를 선물한 사실은 알고있지만 옥돌약탕관을 주었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었다.

《거짓말 하지 마오.》

《거짓말? 허 이것봐라. 게 성배 있느냐? 그 문갑우에서 함통을 내오너라.》

서만호가 중대문쪽에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치자 약삭바른 성배는 1분의 지체도 없이 까만 옻칠을 한 함통을 들고와서 뚜껑을 열어주었다. 서만호는 그속에서 하얀 단지같은것을 꺼내서 공중에 높이 들어올렸다.

《봐라, 이게 한쌍이였다. 여기에두 〈만세불망〉이란 글이 새겨있지?》

조순근은 서만호의 손에 받들려있는 옥돌약탕관의 눈부신 백광을 바라보고 입이 얼어들었다. 그것은 자기가 감지덕지하게 조만식에게서 받은 물건과 신통히도 같은것이였다.

《아직두 믿어지지 않으면 내 그분의 편지도 읽어주마.》

서만호는 사랑채로 들어가서 두툼한 편지봉투를 가지고나오더니 돋보기를 끼고 열뜬 목소리로 어느 한 대목을 읽어나갔다.

···신하가 임금을 받들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고 작인이 지주를 섬기는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라 내 어찌 그것을 어기리오. 우리가 만든 세칙도 지주에겐 조금도 손해가 없소. 그곳 나의 종씨 작인에게 옥돌약탕관을 선사한것도 서형의 충복작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람이였소. 일전에 우리가 보낸 법관이 그 농민을 호되게 다스린것만봐두 서형은 리해할거요. 참, 그 농민이 아들때문에 조르면 내 체면을 봐서도 내보내주면 좋겠소. 그다음 처리는 서형이 잘해주시오. 서형에게 손해가 없도록말이요.(이런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겐 함부로 발설하지는 마시오.)···

서만호는 괄호안의 글이 눈에 밟히는 순간 헛기침을 하며 읽기를 그만두고 편지를 접어버렸다. 함부로 읽어서는 안될 비밀편지를 울김이 북받치는 서슬에 읽어버린것이다. 하긴 조만식이가 지주의 편이라는것이 이제는 세상의 비밀로 되지는 않았다.

그때 경악실색한것은 오직 조순근이였다. 도저히 믿을수 없는 엄연한 사실앞에서 그는 정말 미칠것처럼 허둥거리였다. 그는 점점 현훈증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끝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대돌밑에 쓰러졌다.

그는 대돌을 그러안고 계속 중얼거리였다.

《조만식이··· 조만식이··· 그게 사실인가?》

그는 눈앞에 바라보이는 모든것, 하늘도, 땅도, 집도 그리고 서만호의 유들유들한 비게살도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가슴속에서 연방 돌각담이 무너져내리는것 같았다.

서만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를 아득히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했다.

《임잔 농조에서두 쫓겨났으니 어쩔셈인가? 이제라두 임자가 회심을 하구 조장로의 분부대로 우리한테 충복하면 전날의 고까운 일을 다 풀구 내 땅을 계속 부치게 하겠네. 하긴 싸움끝에 정든다는 말두 있지.》

서만호는 목소리를 낮추며 얼리기 시작했다. 조순근은 대답을 안했다. 그는 무서운 마귀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포위해 들어오는것 같은 환각을 일으켰다. 한아름씩 되는 지주집 기둥이며 높은 합각지붕이 큰 무게로 내리누르는것 같고 사방 누런 벽돌이 몸을 조이는것 같았다. 그러다가는 불쑥 눈앞에 조만식의 얼굴이 크게 나타나서는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 그가 정말 서만호의 충복이 되라는 뜻으로 약탕관을 주었단말인가.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편다면서 진속은 서만호와 같은 지주의 편이였단 말인가?

서만호의 목소리가 여전히 먼곳에서 아리숭하게 들려왔다.

《왜 대답이 없나? 좋네. 그만큼 타일러두 배짱놀음을 하겠으면 하게.》

조순근은 드르릉하는 문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머리를 들었다. 사랑문은 이미 닫기고 대청우에는 참대의자만이 덩그랗게 놓여있었다.

조순근은 비칠거리며 몇발자국 옮기다가 돌부리에 걸채여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순간에 그는 《아버지-》하는 대복이의 울음섞인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으나 의식을 잃어버리고말았다.

우상처럼 받들어오던 그 이름, 깨끗하고 정의롭고 그리고 거룩하다고 생각한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그렇게도 무서운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