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3장 3


 

제 3 장

3

 

땅거미를 밟으며 가시집을 향해 걸어가는 김창규의 가슴은 걷잡을수 없이 설레였다. 흥묵이네 집은 오봉산기슭 외딴뜸 후미진곳에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사연많은 길목들이 쓸쓸한 재빛 황혼속에 펼쳐지고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추억속에 새겨져 잊혀지지 않던 그 골목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안해와 첫사랑을 언약하던 오리나무숲은 여전히 저쪽에서 옛모습 그대로 설레이고있고 흐느끼는 안해의 손목을 이끌고 정든 땅과 리별하던 슬픔의 자욱자욱들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은채 걸음걸음에 추억을 되살리고있다. 창규는 소나무 한대가 서있는 길섶에서 우뚝 멎어섰다.

《그렇지. 여기서 순돌에미가 못가겠다고 주저앉았댔지. 불효막심한짓을 하는것 같다고 울었지.》

김창규는 소나무등허리에 손을 짚으며 눈을 꾹 감았다. 그때는 어린 애솔나무이던것이 풍성한 가지를 펼친 푸르싱싱한 소나무로 자랐다.

(그때 내가 처를 어떻게 얼렸던가? 그렇지, 힘껏 껴안아주고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 볼을 비비면서 영원히 변치않고 사랑하겠다고 했지. 사랑이란것이 무엇인가? 그는 사랑이란 말에 자기의 부모들도 버리고 나를 따라왔지··· 이제 장인, 장모들앞에서 어떻게 사죄를 한다? 그 부모들앞에서도 사랑하겠다는 말을 해야지. 마을을 사랑하고, 농군들을 사랑하고··· 그러면 용서해줄것이다.)

김창규는 고개를 쳐들고 마을을 바라보았다. 숨박곡질하는 아이들의 뜀박질소리가 들려왔다. 《별하나 반짝》 《별둘 반짝》 숨는 애들이 여기저기서 찾는 애들을 골려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 시절은 벌써 저렇게 흘러갔는데 그 애들, 그 소리들이 까마득한 동요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창규는 일부러 시간을 좀더 지체해가지고 땅거미가 짙어져 주변이 어둑시근해졌을 때 초가집 두집을 에돌아 외주물집 손바닥만 한 뜰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선뜻 삽짝문을 열지 못하고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워 뿌잇한 안개속을 들여다보는것만 같았다.

그는 얼마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헛기침을 깇었다.

《계십니까?》

반디불만 한 등잔불이 희미하게 내비치는 방안에서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한번 더 찾아서야 등잔불에 그림자가 얼른거린다.

《누구요?》

떨리는것같은 녀인의 목소리가 지게문사이로 흘러나왔다.

《저 이 집이 리흥묵댁이 옳습니까?》

창규는 우정 말끝을 길게 끌며 늦잡았다.

《누구시오?》

《이댁에 김창규라는 사위가 있습지요?》

《···》

방안이 가뭇 조용해지며 정적이 흐른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창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였다.

《사위? 우리한테 무슨 사위가 있겠소. 우린 그런 사위가 없소!》

녀인의 목소리가 야멸차게 울려나왔다. 야릇한 슬픔이 창규의 가슴을 훑어내렸다. 모질게 마음을 도사려먹고 이 집의 사랑하는 딸을 추동하여 떠나갔던 그 일이 어찌 철없는 젊은 혈기에 저지른 한갖 인생의 장난같은것이겠는가. 문도 열지 않고 게정을 부리는 장모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그럼 한가지 더 물읍시다. 칠팔년전에 이 집 딸을 데려다가 아들낳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이집 사위가 아니란말입니까?》

창규는 짐짓 선떡을 먹고난 사람처럼 꿋꿋해서 어성까지 높였다.

《귀한 딸년 뺏아가지고 걸음한번 안하는 녀석이 사위는 무슨 사위, 고약스러운 체네도적이지··· 아, 아니 그런데 도대체 뉘시우?》

녀인은 그제야 지게문을 비쭉히 열고 얼떠름해서 내다보았다.

《네, 제가 바로 창규동무가 보내서 온 사람입니다.》

《보내서 온 사람? 그런데 왜 울바자밖에서 숨박곡질이요. 이리 들어오시구려.》

《여기두 좋습니다. 한마디만 하구 가겠어요.》

그러자 녀인은 토방으로 나와 말소리나는쪽으로 다가왔다.

《쯔쯧, 제발루 못오구 사람을 보내, 제가 범사를 잘해줬으문 일이 이렇게 될가. 줄난자식같으니.》

《하긴 이집 딸이 외동딸이였으니 배필을 하늘에서 따오자고 할 법도 한 일이였지요. 창규 그사람이 너무했거든요. 그래두 어머니, 창규가 오면 꾸짖지 않구 집에 받아들이겠습니까?》

창규는 어둠속에서나마 장모의 얼굴을 가려보려고 수수대사이를 헤집었다. 어둠속에서 작달막한 녀인의 형체가 드러났다.

《꾸짖긴 누굴 꾸짖어, 내 딸 잘 건사하구있다가 이제라도 찾아오면 이 두팔로 얼싸안지 않으리.》

《어머니, 그게 정말입니까?》

창규는 사립문을 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니구.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가만!》

녀인도 문득 짚이는데가 있는 모양이여서 창규가 밀고들어오는 삽짝을 와락 잡아당기였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창규가 왔습니다. 어머니, 절 용서하십시오.》

창규는 목메인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한껏 굽히고 장모의 두팔을 틀어잡았다.

《이게 누구야? 이게!》

《어머니 접니다.··· 저예요.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구 달아났던 이 못된놈이 왔습니다.》

창규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와졌다. 장모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울먹거리였다.

《어디 보자, 내 사위가 맞느냐!》

장모는 창규의 얼굴을 보려는듯 그의 어깨를 틀어잡고 등잔불빛이 내비치는 토방우로 올리끌었다. 장모는 지게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허둥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서다가 등잔불을 걷어차서 엎질렀다.

《어이구, ···이런 원, 성냥은 어디 있노.》

장모는 창규의 잡았던 두손을 놓고 등잔불을 엎지른 어방을 손더듬하며 돌아갔다. 한참 허둥대더니 성냥을 찾아 불을 켰다. 우뚝 서있던 창규는 그제야 모자를 벗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 장승같은 사람이 이렇게 나타나서 절을 해? 이게 정말 내 사람인가. 옳구나. 옳아!》

장모는 두팔을 벌려 아름이 번 사위를 꽉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엉엉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었다. 창규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이구, 이사람 이렇게 다시 오는걸 령감은 두구두구 욕만 퍼붓더니.》

장모는 설음이 북받쳐 그냥 울음을 터뜨리였다.

《어머니, 이젠 그만하십시오.》

창규는 통곡하는 장모를 겨우 진정시키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도 그전대로 정지방 한칸에 부엌 한칸이 달린 두칸짜리 오두막이였다. 칠팔년세월에 오두막은 더욱 낡고 고삭아져서 숨막힐듯 한 가난기가 느껴졌다.

《해방이 다르긴 다르구나. 갔던 사람이 오구··· 그래 우리 아에민 탈없이 지내나?》

《예, 앞으로 집이 생기면 세간살이를 걷어가지구 오게 됩니다.》

창규는 뒤주머니에 차고온 술병을 꺼내놓으며 아버지는 어디 가셨는가고 물었다.

《웃마을에 올라갔는데, 어디 가서 남의 외상술이나 얻어먹겠지. 그 령감은 예나 지금이나 주책머리가 없다우.》

장모는 치마자락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었다.

《영길인 어디 갔어요?》

《그애두 신당리 웃마을로 갔는가보네. 인제 오겠지 》

장모는 방안에 들어와 앉아서도 쳐다보이게 큰 창규의 어깨팍을 자꾸 쓸어만지며 눈물을 훔치였다.

《인젠 큰아이가 4살이 넘었겠는데, 외할미라는게 외손주 얼굴두 못보구사니···》

《이젠 외할머니 보구싶단소릴 자주 하는데요. 참 영길인 혼사를 했어요?》

《그앤 오봉산뒤 덕골에다 혼사를 정했다우.》

《됐군요. 영길이두 무척 컸겠는데》

《그럼, 어이구. 이 정신봐라, 내 임자 좋아하는 고구마를 얼른 찔게. 밥은 해놓은게 있지만.》

장모는 치마자락을 휩싸며 부엌으로 내려갔다. 소합단을 안아들이고 아궁에 불을 지폈다. 널름거리는 불길이 부엌바닥을 훤하게 비치자 장모는 가마에 물을 붓고 고구마를 씻어 앉혔다.

이때 뜨락이 쿵쿵 울리고 지게문이 벌컥 열리더니 맨 등거리바람의 영길이가 뛰여들어왔다. 창규는 새문턱을 짚고 일어섰다.

영길이는 키가 장대한 창규를 얼른 한번 치떠보고는 서먹서먹해하며 돌아섰다.

《얘. 영길아, 네 매부가 왔다.》

창규가 먼저 영길이의 손을 끌어다 만져보았다. 손이 불갈구리같이 험했다.

《네가 인젠 장정이 됐구나.》

영길이는 창규보다 일곱살아래지만 키가 꺽실하고 몸이 다부졌다. 영길이는 자기의 매부라는 말이 곧이 들리지 않는지 한번 지릅뜬 눈으로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왜 저렇게 말뚝처럼 서있기만 하누. 매부한테 절이라두 하지.》

부엌에서 장모가 처남매부간의 어석버석한 모습을 올려다보며 아들을 나무랐다.

《매부, 농사지으러 왔소?》

덤덤히 서있던 영길이가 한마디 툭 내쏘았다.

《뭐, 농사?··· 하하하, 그래 농사지으러 왔다.》

《아주?》

《그렇지 않구.》

창규는 껄껄 웃었다.

《에그 끌끌, 봉산수수대 같아서, 무슨 인사본때가 저렇누.》

부지깽이를 든 장모가 목을 빼들고 올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이러는데 조순근이 물방아간집 정기수령감을 비롯해서 숱한 농민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창규는 마주나가 어서 들어오라고 잡아끌었다. 조순근이 자기집에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다.

《이 사람, 난 자네가 왔다니 거짓말같이 들었네. 가슴에 아주 못을 박고 간 사람이 이렇게 쉽게 올랴했지.》

몸이 겉늙어 마른명태같이 꼬장꼬장한 정기수가 창규의 손을 잡고 눈물이 그렁해서 말했다.

《곁에서 모두 우리 가시집을 돌보아주느라고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돌봐준게 없네. 그저 마음을 서로 의지하구 같이 고생하며 살았지.》

정기수는 아래목에 올방자를 틀고앉으며 쓸쓸히 중얼거리였다. 그리고나서 창규의 거쿨진 모습을 대견하게 치떠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여태 대복이 아버지한테서 조만식어른을 만나뵈온 이야기를 듣다가 임자왔다는 소식을 알게 됐네. 한데 임자가 읍자위대원들을 시켜 지주집 인력걸 몰수했다면서?》

기실 농군들은 조순근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하도 희한스럽기도 하고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몰려온것이였다. 수십년세월 서만호지주를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기며 살아온 작인들에게 있어서 지주의 인력거를 몰수한 그 자그마한 사건이 놀랍고 기이한 일이였던것이다.

더구나 서만호의 머슴을 살다 야밤도주했던 김창규가 그랬다는데 모두 놀라와했다.

《그래, 정말 참의어른이 순순히 굽혀들었나?》

조순근이도 인력거사건이 궁금해서 정기수옆에 올방자를 틀면서 동달아 물었다.

《굽혀들지 않으면 별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마름을 불러대며 야단을 쳤던 모양입니다. 그런걸 자위대원들이 당장 읍자위대원들과 보안서원들을 몽땅 불러대겠다고 하니 수그러든 모양입니다.》

《허허··· 임자가 인물은 인물이네. 듣자니 왕벌지주가 군수자리를 따겠다고 연설을 하며 돌아갈 때에도 임자가 뒤에서 사람들을 일쿼서 그놈이 더는 나서지 못하게 했다더니 이번에두 또 마을에 오자마자 혼찌검을 내주네그려··· 동흥리 개바닥에서 룡이 나왔네.》

정기수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렇지 않느냐는듯 통쾌하게 부르짖었다.

《제가 무슨 큰 인물이겠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지난날 천대받고 못살던 사람들을 위해 정사를 베풀어주시니 제가 그렇게 기를 펴게 된거지요. 그런점에서는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집니다. 장군님께서 계시기때문에 이젠 지주를 무서워할게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농민들을 위해 금년엔 소작료를 3.7제로 물게 하도록 당결정으로 채택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로는 토지개혁을 해서 모든 농민들이 제땅을 가지고 제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야, 소식중에서두 제일 반가운 소식이다. 우린 그저 안개속같이 어슴푸레한 소리만 듣고있었는데 이젠 조선백성들이 춤을 추며 살게 됐어.》

방안이 빼곡하게 들어앉은 농민들이 무릎을 치며 환성을 질렀다.

《이 사람, 저 그런데 이자 오면서 이 사람들과도 얘기가 있었네만 김일성장군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이 사실인가?》

정기수가 무릎걸음으로 나앉으며 물었다.

《하하하, 그거야 장군님의 명성이 하두 높으니까 난 소리겠지요. 제가 듣기에는 김장군님께서 대동군 어느 농촌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장군님의 일가분들이 다 농사를 하는데 초가집에서 사신답니다.》

《원 자네 그 소린 잘못들었군. 김장군님일가분이 초가집에 사신다니 그게 제정신 가지구 하는 소리요. 아, 대대로 애국지사의 가정에서 나시여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셨는데, 왜놈들두 오죽하면 고대광실 지어놓고 김장군님을 관동군대장으로 모실 행차를 꾸며가지고 만주벌판을 싸다녔겠나.》

정기수는 눈을 흘기며 다른 소리를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조순근을 돌아보며 덧붙이였다.

《대복이 아버지가 만나뵈온 조만식어른두 3.7제소작세칙을 법령으로 떨궜다니 이젠 정말 우리 농군들이 살아나게 됐어.》

《그 법령서를 재령에두 내려보냈다는게 적실하지?》

좌중에서 누구인가 조순근을 바라보며 다짐을 두듯이 물었다.

《벌써 그걸 몇번째 묻소. 내가 오늘 읍에 가서 서무과에 그 문설 직접 전했다는데두···》

조순근은 어이가 없는지 무르팍을 괴여올리며 껄껄 웃었다. 뿌연 등잔불이 가늘게 연기를 그을면서 널름거리였다. 한 농민이 일어나 성냥개비로 불심지를 돋구었다.

《참, 쉽지 않은 어른이야. 저 대복이 아버지한테서 눈물나게 살아온 이야길 들어주구 대복이 에미 병구완하라구 옥돌약탕관까지 보내주셨으니··· 이렇게 장군님의 신하들이 모두 우리 농군들을 위해주는데 우리두 무슨 보답이 있어야 도리가 옳지. 참, 창규 이사람, 다른 동리에서랑은 농조라는걸 내온다는데 우리두 그런게 있어야 하지 않을가?》

정기수가 방안사람들을 대변하여 건의하듯이 창규에게 물었다.

《옳습니다. 제가 여기루 온것은 바루 그 일때문입니다. 빨리 농민조합을 내와야 합니다. 그래야 농민들이 단합해서 3.7제투쟁도 잘할수 있고 장차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뭉텅뭉텅 나눠가지는 그 거사를 잘해낼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만호의 땅을 우리 작인들이 저마끔 나눠가진단 말이지? 아예 제것으루?···》

농군들은 그것이 너무 놀랍고 희한해서 거듭 물어보고는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설레였다.

《예. 그걸 믿으십시오. 우리가 지금 농조를 뭇고 3.7제투쟁을 하자는 목적은 단지 소작료를 적게 물자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장차 토지개혁을 하기 위해 농민들을 각성시키자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지주가 무섭지 않다. 지주와 싸우면 이길수 있다. 여차하면 지주를 두들겨패자〉하는 신심말입니다. 그러니 비유해서 말하면 3.7제투쟁은 광산에서 남포질을 하기 위해 남포구멍을 뚫는것과 마찬가지라 할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장차 돌산을 무너뜨리기 위해 남포구멍을 뚫어보지 않겠습니까?》

김창규는 주먹을 머리우로 뻗쳐올리면서 농군들을 선동하였다. 그는 긴 이야기를 하였지만 어쩐지 농민들의 마음을 대번에 움직이고 깨우쳐줄수 있는 신통한 말을 하지 못한것같아 안타까왔다.

《자네의 말을 듣고나니 힘이 생기네. 남포구멍을 뚫어보세. 오봉산 왕벌네 대궐이 박살나게.》

앞이발이 몇대 남지 않은 정기수가 입안에서 휘파람소리를 내며 호응해나섰다. 그러자 방안사람들이 모두 성수가 나서 금시 무슨 일을 치를듯이 더욱 설레였다. 그러나 조순근이만은 올방자를 튼 무릎에 두손을 얹은채 심중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조만식이 자기를 바래워주면서 《대동단결》에 대하여 루루히 곱씹어 말해주던 일을 다시 더듬고있었다. 조만식은 3.7제를 해도 법을 가지고 공정히 해야지 치고 때리는 란장판을 벌려선 새 나라를 세울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난날에 지주와 작인간에 서로 맺힌 원이 있어도 해방과 더불어 너그럽게 풀고 오손도손 의논해서 합의를 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대복이와 서분이의 일도 자기가 잘 조처해서 풀어줄터이니 서만호와 아귀다툼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김일성장군님의 부하의 주선으로 재령땅에 내려온 창규의 말은 조장로의 그것과 어딘지 다른점이 많은것 같았다.

조순근은 밖에서 개바자울타리를 탕탕 두들겨대며 고아대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내다보는놈이 없이 문 꼭 닫고 뭘하느냐? 어 어른이 나들이 갔다오면 나와보는 례절두 모르느냐?》

흥묵이였다. 잔뜩 혀꼬부라진 소리로 주정을 부리였다. 먼저 달려온 발바리가 뛰여돌아가며 자지러지게 짖어대였다.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그의 처가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여보, 이게 뭐요?》

《뭐긴 뭐야. 서만호가 오늘 서만필네 제사에 수 술 부조해서 그놈하구 한잔하다가 인력거 태워줘서 함께 왔다.》

《어 어이구, 서만호가 당신 뭐 잘났다고 술먹이고 인력거 태워주겠소.》

《자 잘난게 없지, 그래 내가 그 그 못난 사위덕 좀 보는게 어때? 서만호가 날보구 뭐랬는지 알아, 장구배미 줄테니 베, 베나락 심어 머먹으래는거야. 적은이라구 올려추면스리, 그눔두 이젠 공산당세상인줄 아는가부지. 왕벌이 어째 저렇게 오졸없는 인간처럼 나한테 추접을 떠는지 알아? 내가 저놈 술 한잔 얻어먹구 제깐놈을 곱게 볼가 해서, 웩 테. 난 남의 걸 먹어두 제정신까진 팔지않는다.》

흥묵은 짚고온 막대기를 휘저으며 연신 게트림을 했다.

《여보, 그만해유 듣겠수다. 그 사람이 왔어유.》

처가 낮은 목소리로 귀띔하며 휘젓는 그의 막대기를 빼앗아 나무단옆에 집어던졌다.

《오긴 뭐가 와?》

《영길이 매부가 집안에서 동리어른들하고 얘기하구 있어유.》

《뭐, 뭐라구?》

《겸이포갔던 아애비가 왔수다.》

《아애비라니?》

《아니 원, 싹뿔일 모르겠소?》

《엉?!》

흥묵은 놀랍게 부르짖으며 얼결에 일어서 허둥대는 손길로 문고리를 찾아쥐였다. 금시라도 뛰여들것 같이 헤덤벼쳤다. 그러다가 불쑥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낯빛이 댕댕해지며 토방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으흠!》

그는 일부러 요란스럽게 가래를 톺아올리며 삑 돌아앉았다. 기척을 느낀 안에서 문이 열리며 불빛이 쏟아져나왔다. 맨발바람으로 선참 뛰여나온 창규가 흥묵의 손을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이사람, 거 절을 받게.》

토방우에 나온 사람들이 관골이 날카로와진 흥묵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아버님, 죄많은놈이 오늘에야 왔습니다.》

창규는 눈가장자리에 알릴락말락 물기가 어려서 장인의 손을 꼭 잡았다. 흥묵은 고개를 외면하고 두루마기를 활활 벗었다.

《흥, 이 못난놈 보자구 나타나. 왜 이놈이 죽은담에 오지 않구 벌써 나타나? 보기싫다.》

《여보게 영길애비. 아무리 제사람이라두 만나자마자 그게 뭐나?》

조순근이 토방아래로 내려서며 나무랐다.

《성님은 내가 밉지요?》

흥묵은 긴목을 빼여들고 조순근에게 화를 내였다.

《내가 밉겠지요. 공짜 좋아하구, 제딸 팔아먹지 못해 몸살을 앓은놈이라구. 그래두 난 못사는놈의것은 안먹어유. 술 한잔이래두 있는놈의것을 뽕빼지. 그래 그렇게 안하구 살아갈수가 있시꺄? 어느놈이 나한테 쌀 한되박 거저 주었시꺄?》

말은 조순근에게 했지만 창규를 빗대고 하는 소리다. 창규는 그래도 거무스레한 얼굴에 태연한 빛을 담고있었다.

창규는 보쌈주머니같이 탄력이 다 빠진 장인의 훌쭉한 볼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모진 세월의 고초가 한줌만 한 얼굴에 주름만 깊이 파놓았다.

《에그. 동네사람 부끄럽게 왜 이러우. 얼른 들어갑세다. 이 사람이 술을 가져왔는데 감자랑 놓고 속을 좀 풀구려.》

장모가 헤지르며 달려들었다.

《감자를 쪄? 그건 왜 쪄.》

흥묵은 안해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내가 내 딸차구 달아났다구 이러는줄 아니? 딸년이란거야 어느놈이 데려가든 어차피 집문밖을 나서기 마련이지. 그 그따위 쪼물짝한 생각은 잊어버린지두 오래다. 어째 걸음을 못하니, 난 외손주 안아볼 자격도 없는놈이드냐?》

토라진 심사는 좀처럼 돌아설것 같지 않았다.

《거 가슴아픈 소린 그만두게.》

정기수가 듣다 못해 한마디 했다.

《물방아간집아저씨, 말씀하시게 하십시오. 내가 오늘은 종아릴 맞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종아릴 맞겠다구. 그 그만해라. 네가 종아릴 맞고 내가 종아릴 치면 억문가슴이 풀릴테냐. 어, 몹쓸놈의 세상살이, 얘 영길아! 도장간에서 삼바줄 내오너라.》

흥묵은 이러며 비청걸음으로 처마밑 개우리로 다가갔다.

《어머니, 거 생술이라두 한잔 권해야 할가보군요.》

창규는 장모를 돌아보았다.

《가만있게. 저 령감이 개를 잡자구 저러는것 같네.》

《개를요?》

이때 개우리 앞에 간 흥묵이 또 바줄내오라고 소리쳤다.

《녜에, 아버지두 소린 왜 자꾸 치면서.》

영길이가 바줄에 옥노를 매며 대꾸했다. 흥묵은 벌써 우리에서 자고있던 엄지개를 끌어내여 목을 더듬고있었다.

《소리안치게 됐니. 감자나 쪄놓구 제 매부를 맞아들여? 시라소니같은것들. 넌 얼른 부엌에 들어가 물을 끓여라, 못난녀석 같으니. 오면 온단 소리나 하구 오면 좋지 않아.》

창규를 나무라는 소리다. 그래도 이번엔 퍽 가라앉은 목소리에 울음이 젖어있었다. 순간 창규는 눈뿌리가 확 달아올라 어깨와 잔등을 가볍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