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3장 2


 

제 3 장

2

 

지주집을 돌아서는 조순근의 발걸음은 사뭇 무거웠으나 그는 락심하지 않았다.

(대복아, 조금만 참거라. 이제 머지않아 머슴살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조순근은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뇌이며 걸어갔다. 길량옆에 고개를 숙인 벼이삭들이 주홍빛 아침노을을 담고 선들바람에 술렁거리고있었다. 금비단을 펼쳐놓은것 같은 논벌을 바라보느라니 조순근은 불현듯 자기손으로 붉은 지장을 찍은 3.7제 소작세칙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마냥 부풀어올랐다. 눈뿌리 아득하게 펼쳐진 황금벌에 당장 낫을 거머쥐고 뛰여들고싶었다. 그리고 팔목이 시큰하게 벼를 베고 또 베여서 한아름씩 모개를 지은 벼동배기들을 어깨가 빠개지도록 지고싶었다.

조순근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을빛이 쏟아지는 아득한 벌, 저 유연한 금나락의 속삭임은 얼마나 부드럽고 너그러워보이는가.

(이제는 저 벌에서 내 피땀으로 가꾼 낟알의 7할을 내가 가진다.)

조순근은 바다같은 벌판을 향해 목청껏 소리치고싶은 심정이였다.

《그게 대복이 애비가 아닌가?》

황금벌에 취해있던 조순근은 누구인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였다. 아까 인력거를 끌고 읍으로 떠났던 장서방이 웬 젊은이들과 함께 걸어오고있었다. 시간폭을 보면 이제 겨우 읍에 가닿을듯말듯하겠는데 어떻게 벌써 돌아오는지 몰랐다. 그나마 인력거는 어디에 버렸는지 빈손으로 돌아오고있다.

《순근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이게 얼마만입니까? 제가 김창규입니다.》

장서방과 함께 걸어오던 청년들중 한사람이 조순근이 앞에 와서 곤색캡을 벗고 깍듯이 절을 하였다.

《하아, 싹뿔일 모르겠어요?》

이마가 넓은 청년이 흰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애명을 대였다.

《야, 이거 그럼 그때 제철공장으로 떠나갔던 그 싹뿔이란 말인가.》

조순근은 김창규의 어깨를 잡아쥐고 흔들었다.

《예, 그때 달아나서 인제 돌아옵니다.》

《아, 정말 반갑군. 그러지 않아두 왔단소릴 피끗 들었는데 그래 그새 무슨 일을 했나?》

조순근은 금방 도가에서 구어낸 질그릇같이 번쩍거리는 그의 다기진 얼굴과 굵은 몸집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선철뽑는 공장에서 용광로와 씨름을 했지요. 쇠장대를 쥐고 이렇게 이렇게, 하하하···》

그는 손으로 장대를 휘젓는 시늉을 했다. 걷어올린 팔뚝에서 근육이 울근불근 불거져오르는게 제철공장에서 쇠물을 휘저으며 단련한 몸이라는것이 알린다.

《그런데 듣자니 자네가 군공산당에 무슨 벼슬을 따가지고 왔다는데 그게 적실한가?》

조순근은 좀전에 서만호가 그 소리를 외우며 이를 갈던것을 생각하고 캐여물었다.

《허허, 벼슬자리를 딴게 아니라 머슴자릴 얻어가지고 옵니다. 종노릇을 하러 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해방이 돼서 머슴하던 사람두 그 신세를 면하게 된다는데 임자가 머슴을 하러 오다니?》

조순근은 눈이 둥실해져서 창규를 건너다보았다.

《예, 제가 군당에서 중책을 맡고 일하게 된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벼슬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일하는 인민의 종입니다. 인민의 머슴입니다.》

《백성들의 머슴이라? 그게 뜻깊은 말일세.》

조순근은 감심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군당에서 무슨 책임을 맡았는가, 어떻게 되여 그런 일을 하게 되였는가 하고 궁금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물었다. 김창규는 당간부훈련반에서 달반가량 공부하고 김책동지의 주선으로 군당에 부장직을 맡고 오게 되였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생각이 많아서 재령근처에는 내려오지 말자구 했습니다. 너무두 저의 피눈물이 많이 괴여있는 땅이니까요. 그런데 김책동지가 바로 그렇기때문에 제가 내려가야 한다는것이였습니다. 그분이 저를 떠나보내면서 동무가 하는 일을 무슨 벼슬자리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동무는 이제부터 인민을 위해서 온갖 일을 다해주는 인민의 머슴, 인민의 종으로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 하구 말씀했습니다.》

《김책동지라니? 그분이 어떤 분이게?》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는 나라의 큰 간부입니다.》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는?··· 원 임자가 그런분의 주선을 받았단말인가?》

조순근은 깜짝 놀라며 부지중 뒤걸음을 쳤다. 그러고보니 지금 자기앞에 곤색캡을 쓰고 서있는 김창규는 그전에 자기와 함께 머슴을 하던 싹뿔이와는 전혀 다른 의젓한 어른이였다. 하늘이 낸 장수라고 항간에서 전설처럼 외우는 김일성장군님을 조순근은 얼마나 흠모하였던가, 그런데 창규가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는 그런 큰 어른의 주선을 받아 여기로 내려왔다니 하늘처럼 돋보였다. 그러나 조순근이 자기자신도 조만식이와 같은 큰 어른을 만나고 돌아오고있는 그 엄연한 현실을 생각하고 새삼스레 감격의 전률을 일으켰다. 조만식이도 김책이라는 그 사람처럼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일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김책이란분이 창규에게 《인민의 종》이란 말을 했듯이 조만식이도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자기 서기에게 인민을 위해서 일하자면 의식을 검박하게 해야 된다고 준절히 타이르지 않았던가.

장군님의 뜻이 그러하기에 두분이 다 똑같은 말을 했을것이다.

《참 세상은 희한하게만 되여가네. 말은 바른대루 나같은 무지렁이도 지금 조만식어른을 반나뵙구 돌아오는 길일세.》

《예, 저두 그 소릴 들었습니다. 그건 공연한 걸음이였어요. 아저씨가 대복이, 서분이때문에 몹시 속이 타겠지만 누구 신세를 질 생각은 말구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합쳐 지주와 싸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서만호가 아직도 기세가 등등해서 거드름을 피우지 않습니까. 글쎄 칠순이 넘는 이 장아바이가 아직 그 지주놈의 인력거를 끌고다니고있으니 이게 어디 된 일입니까?》

김창규의 준절한 목소리틀 듣고 조순근은 그때까지 감감 잊어버리고있은 장서방을 돌아보았다. 한평생 지주집에서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며 살아온 늙고 쇠진한 그 머슴은 허리를 구붓한채 땅만 내려다보며 뻐끔뻐끔 되초를 빨고있었다.

《우리끼리야 무슨 수가 있어야지··· 참 아바인 인력걸 어떻게 하구 빈손으루 돌아왔수?》

조순근은 창규와 이야기를 하다가 장서방에게 눈길을 돌렸다.

《인력걸 저 읍자위대동무들이 회수했습니다.》

김창규는 동행한 두 젊은이를 가리키고나서 분개한 표정으로 지주집을 노려보았다.

《인력걸 그렇게 하면 장아바이가 화를 입지 않을가?》

《그래 이제 저 동무들이 서만홀 만나서 다시는 늙은이를 마소처럼 부리지 못하게 할것입니다. 인력걸 아주 몰수한건 아니고 장아바이를 인력거군으로 부려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다음 제손으로 가져가게 하자는것입니다.》

조순근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새파랗게 젊은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재령나무리벌의 수백명 작인들을 호령하는 대지주를 과연 어린 두 젊은이가 굽혀낼수 있을가싶었다. 지주집에는 포악한 《호신병》들과 마름들이 있는것이다. 김창규는 조순근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있는듯 히뭇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저씬 몹시 겁을 내는것 같군요. 저 장아바이도 내내 근심을 하며 오는데 하나도 무서워할게 없습니다. 이제는 지주를 보호해주던 경찰서가 아니라 인민을 보호해주는 보안서와 자위대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창규는 자기 삼촌이 살고있는 동흥리에서는 악질지주 송상환을 두드려패서 다리갱이를 분질러놓았고 지금은 농조까지 무어 3.7제투쟁을 하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동흥리에선 농조를 무었단말인가?》

《그렇습니다. 이 신당리에서도 빨리 농조를 무어야 합니다. 그런 조직이 있어야 지주와 싸울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니까 서만호가 아직까지 마을에서 왕노롯을 하고있습니다. 서만호가 전번에는 군수가 된답시고 군중앞에서 연설을 하더니 오늘은 또 칠순늙은이에게 인력거를 메우고있으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김창규는 조순근이와 장서방을 번갈아보며 여전히 분개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사실 창규는 이 서만호에 대해 특별히 각성을 가지고 경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가 김책동지의 지시를 받고 읍에 도착하던 날에도 실지 서만호가 군수추대를 받겠다고 연설을 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서만호의 연설놀음을 띠여본 그는 분개한 심정으로 군당과 군자치위원회에 뛰여다니며 이게 무슨 추태냐고 질책을 해대였다. 사태가 그런데도 군당일군들은 연설바람에만 들떠서 정신이 없었고 군자치위원회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재령벌에선 서만호만한 인물이 없다고 한심한 소리를 하였다. 김창규는 즉시 철도기관구와 광산에 나가 로동계급들을 들어일구었다. 친일파를 몰아내자는 그의 호소에 수백명의 로동자들이 호응하여 읍으로 밀려들어 련일 시위를 벌렸다.

그바람에 읍에 내려와있던 서만호는 혼비백산하여 신당리로 올라왔다.

《아저씨, 그럼 먼저 가십시오. 난 다른 리들에 들렸다가 저녁녘에 여기로 오겠습니다.》

창규는 인사를 하고나서 길을 떠났다.

조순근은 땅에 내려놓았던 중태를 집어들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는 허리를 구붓한채 어정어정 젊은이들을 따라가는 장서방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분명 세상은 달라지고있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