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2장 3


 

제 2 장

3

 

《재령벌에서 왔습니까?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위원장선생께서 몹시 기다리셨는데···》

자기를 조만식선생의 서기라고 한 젊은이는 반갑게 달려나와 현관밖에 서있는 조순근을 맞아들이면서 회의가 벌써 끝났다고 하였다. 키가 늘씬하고 온몸에서 향수내가 풍기는 양복차림의 젊은이였다.

《예, 저는 회합에 참가하자구 온게 아니구···》

조순근은 어깨에서 중태끈을 벗겨내리며 황송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서기는 조순근의 손을 이끌어들이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옆에는 목갑총을 엇가로 멘 파수군이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석상처럼 서있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라고 쓴 참먹글씨의 두터운 간판이 보이였다. 조순근은 발소리를 죽이며 서기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넓은 복도는 채광이 적어서 어둑시그레한 동굴속같았다. 이따금 양복차림의 사람들이 마주오다가는 젊은 서기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헌 두루마기차림의 조순근을 피꿋 쳐다보기도 했다. 조순근은 그때마다 굵은 목을 움츠리며 허리를 굽히군했다. 마당에서부터 관청에 온 촌닭처럼 어리어리해진 그는 심장이 흉벽을 쿵쿵 울려서 숨이 가빠올랐다. 넓은 마당에는 딱정벌레같이 생긴 승용차가 넉대나 줄지어 서있고 현관에 보초까지 버티고있어서 함부로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조순근은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시작될 종씨어른과의 상봉을 생각하니 아래도리가 후들거리였다. 자기같은 촌무지렁이가 감히 이런곳에 걸음을 하고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집에서 국사를 보시는 이에게 그 무슨 소청을 드린다는게 분수에 닿는 일이겠는가. 조순근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조만식위원장이 자기같은 촌사람을 분명 불러주었고 또 몹시 기다리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슬그머니 눈물이 고여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 방에서 잠간 기다려주십시오.》

서기는 2층복도의 가운데 방으로 들어서자 조순근의 귀에 대고 속삭이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들고 올라온 조순근의 중태를 낮고 기다란 응접대우에 내려놓았다. 유리알같이 반들거리는 상이 우툴두툴한 벼짚망태에 긁혀서 자리가 날것 같았다. 상의 네다리에도 룡대가리같은 무늬를 돋히고 꼬아비틀어 붙인것 같았다. 조순근은 그러한 상우에 자기의 땀배인 천한 물건짝이 놓이는게 창피하고 죄송스러워 중태를 들어다 얼른 발밑마루바닥에 내려놓았다. 두루마기도 벗어서 겹놓았다.

서기는 조순근의 하는양을 넘겨보다가 넌지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나서 맞은 벽면에 있는 문으로 다가가 손기척을 하였다. 문이 비써 열리는 짬으로 얼핏 방이 또하나 보였는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새여나왔다.

《농민본위라는 표현은 어딘가 색다른 냄새가 풍긴다고 봅니다.》

《표현때문에 주저할것까지 있소?》

《땅가진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게 되지 않을가요?》

《너무 자질구레한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다간 끝이 없소.》

이어 우렁우렁한 말소리가 울리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군지 연설을 시작한것 같다.

《난 본론에 앞서 오늘 오전에 결속지은 서도빈농협의회의 취지와 회합의 목적을 피력코저 합니다. 우리가 정치와 법률을 밝게 시행하여 시국을 정돈해야 할 분주한 때에 서둘러 빈농민대표들을 모이게 한것은···》

조순근은 3.7제니 농민이니 지주니 하는 소리에 은근히 귀맛이 당기였다. 더우기 방안의 소리에 귀를 강구게 되는것은 굵고 거친 목소리가 귀익은 목소리라는 호기심때문이였다. 재령벌에 와서 농민들에게 분발하라고 열변을 토하던 그 목소리다.

그는 문득 떠나오던 날 읍에 들려서 몇사람이 주고받던 말을 듣던 생각이 났다. 서만호가 친일지주임에는 틀림없지만 조만식이 《물산장려》운동을 할 때 뒤를 많이 받쳐주었기때문에 이제 그 덕을 단단히 볼것이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 조만식이 쓰고다니는 말총모자도 서만호가 황해도 물산인 자오라기로 결어서 만들어보낸것이라 했다. 원래의 말총모자는 여름볕에 잘 뜨거워지고 겨울에는 랭해져서 쓰고다니기 불편했기때문에 서만호가 재간있는 말총쟁이를 불러다가 말총의 품질과 비슷하면서도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랭기를 잘 막아주는 자오라기풀로 정성껏 겯게 해서 선사했다는것이다.

조순근은 10여년전에 조만식이 재령땅에 내려올 때면 의례히 서만호가 나서서 침실과 음식범절을 조처하는것을 보았지만 그들의 사이가 그처럼 자별한줄은 몰랐다.

문득 조순근은 10여년전 그때 조만식장로가 농군들앞에서 자기의 말총모자를 가리키며 《이것은 세상에 불고내리는 풍풍우우를 막아 민족의 넋을 지켜주는 나의 투구요》 했던 말이 분명하게 기억되였다.

바로 그러한 모자를 서만호가 결어보냈으니 어찌 고맙다 하지 않으랴.

(그렇다면 서만호집 머슴을 사는 우리 대복이에 대한 소청을 선생은 어떻게 조처할가?)

조순근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은근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드는속에 탁한 목소리가 더 세차게 울려나왔다.

《그럼 이번 서도빈농회합이 가난구제일면에만 의의가 있는가, 여러분, 부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난구제는 곧 대동단결의 한 측면이며 제일보라는 점입니다. 현대의 민주정치는 곧 민중정치라고 해야 옳을것입니다. 때문에 대동단결이 필요하며 또 대동단결을 위해서 가난을 구제하는 일을 소홀히 할수 없는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겐 인구의 85빠센트의 지지와 찬동이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합니다. 바로 수백만 농민층의 넋을 울리고 심장을 틀어잡아 대동단결의 성업에 인입하자는 여기에 우리의 서도빈농회합과 3. 7제결정의 피할수 없는 취지가 있는것입니다. 부언하여 말한다면 북조선공산당이 우리보다 한걸음 앞서 무산빈농본위의 3. 7제절정을 채택하였다는 놀라운 사태도 간과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정당결정으로서가 아니라 빈농대표들의 건의에 의하여 정권기관의 법적인 명의로 이 세칙을 채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회합의 뜻깊은 의의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동단결하는 민주정치야말로 하늘의 뜻이며 우리가 바라마지 않아온 민족화합과 재생의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우리는 신이 인도하는 이 광영의 길에서 한치도 물러설수 없습니다.》

박수갈채가 터졌다. 조순근은 바늘방석에 앉은듯싶있다. 당장 사람들이 쏟아져나올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누군가 한사람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민주당강령에서도 토지문제를 언급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야 물론, 명백히 쪼아박아야 하오. 농민본위의 토지개혁단행, 이렇게 말이요.》

조순근은 토지개혁이란 무슨 소릴가 하여 머리를 기웃거렸다. 이때 서기가 문을 조용히 밀며 나왔다.

《이거 안되였습니다. 위원장선생이 지금 중요한 회의를 하는중이 돼놔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서기는 주머니에서 은지가 빨락거리는 담배갑을 꺼내 한대 권하였다. 조순근은 손살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조순근이 들어온 방문이 열리며 중절모를 쓴 두명의 신사가 들어섰다. 금시계줄이 앞가슴에서 번쩍거리였다. 서기는 권하던 담배갑을 그채로 조순근의 앞에 놓고 손님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되여 이번엔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들이 두툼한 봉서들을 안고 소리없이 나와서 급히 걸어갔다. 조순근은 어쩐지 자기의 처사가 외람된것같은 생각이 또다시 마음을 서슴케 하였다. 조만식선생의 방으로는 한다하는 점잖은 사람들만이 출입을 하는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정사를 보는 큰 어른께 자기같은 바지저고리차림의 농군이 찾아올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조순근은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아니 웬 식은땀을 그렇게 흘립니까? 자, 땀도 씻고 옷차림도 좀 돌보십시오.》

어느새 나왔는지 서기가 나타나서 손수건을 내밀어주었다.

그러나 조순근은 허리에 찼던 베수건을 꺼내 이마며 목덜미에서 땀을 훔쳐냈다.

《자, 이젠 들어갑시다.》

서기가 맞은편 벽문을 열며 조순근에게 조용히 속삭이였다. 그를 따라 들어서자 정거장 대합실같이 휑뎅그레한 방은 사람들이 다 나가버려서 쥐죽은듯 고요하였다.

《재령벌에서 오신이라지요?》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 저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마주나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차로 못오고 배를 타고 오느라고 늦어졌더군요.》

서기가 조순근이 대신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지금 철도형편이 말이 아니니까. 하여간 반갑소. 내 조만식이요.》

《예, 조순근이올시다.》

조순근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기여드는것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만식은 조순근의 두툼한 손을 쥐고 거듭 흔들었다.

《여기 좀 앉읍시다. 이사람, 거 시원한 차물이라두 좀 내오지.》

조만식이 손을 잡아 응접대가 있는 벽밑으로 끌어서 조순근은 손을 뽑지 못하고 가죽쏘파우에 주춤거리며 겨우 앉았다. 밀어놓은 카텐짬으로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렸다. 의자 몇개와 사무탁에 잇대여놓은 책상 하나가 뎅그랗게 놓여있는 방은 이상스럽게 너렁청해보였다. 조순근이와 마주앉은 조만식의 차림도 놀라움을 금할수없이 수수했다. 나비날개같이 해서 흰머리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짧은 두루마기에 백고무신을 신었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게 생각과는 다를가싶다. 마당에서 본 번쩍이는 차들과 어마어마한 무장파수, 출입하는 유지들이 이 어른과는 다 상관이 있어보이질 않는다.

《자, 이걸 한모금 드오.》

조만식은 서기가 가져온 차잔을 조순근의 손에 들려주었다.

《예, 예.》

조순근은 황급히 일어나며 두손으로 잔을 받았다. 조만식이 어깨를 누르며 앉아서 마시라고 했다.

《저 위원장선생님, 밖에 당기관지창간문제때문에 발기인 몇이 또 왔습니다.》

서기가 조만식의 잔에 차물을 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지금은 안되겠어. 저녁에 만나자고 이르오.》

《저 바쁘신데 괜히···》

조순근은 난처해서 또 일어서려 했다.

《앉으시오. 임자같은 농군을 만나는게 더 중하오. 이보라구. 백군, 내 자네에게 싫은소리 한마디 해야겠네.》

《예?》

젊은 서기가 조만식의 마뜩잖아 하는 소리에 눈을 슴벅이였다.

《자넨 옷차림을 왜 그렇게 사치스럽게 꾸미나. 엉, 내옆에서 날 성심껏 도우려면 차림부터가 한결같아야지. 이젠 이런 사람들이 민주정치에 참여해야 하는데 자네가 그렇게 하고나서면 그들이 날 마음놓고 찾아오겠나. 물론 젊은 자네보구 나처럼 두루마길 입으라는 말은 아닐세. 나가보라구.》

서기는 벌거죽죽해진 얼굴을 수그리고 대답없이 방에서 나갔다. 조순근은 젊은이가 자기때문에 괜히 욕을 보는것 같아 옹색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깨가 처져나가는 젊은 서기의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일없소. 지금 젊은것들은 훈계를 안하면 버릇을 궂힌다오. 그래 임자는 성이 조씨라구 했지.》

《예.》

《본관이 함양인가?》

《아니 저···》

조순근은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감히 제 입으로 그와 한 본이 된다는 소리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가만, 그럼 본관이 창녕인게구만, 응?》

《···》

조만식은 반색을 지으며 무랍없이 조순근의 무르팍을 쳤다.

《친척이 마을에 몇집이나 되오? 자식은?》

《우리 신당리부락은 거지반 달성서씨구 친척이란 한집두 없소이다. 자식두 하나밖에··· 처두 변변치 못한게 자꾸 앓기만 하는데 처남 하나 있을뿐입네다.》

《그럴줄 알았소. 우리 창녕조씨는 씨족이 번성 못할 까닭이 있으니까. 우리 창녕 시조에 대한 이야길 들어본적이 있소?》

《전, 아직···》

조만식은 조순근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해빛에 눈을 쪼프리며 카텐을 약간 내려놓았다. 방안은 해빛이 덜해지자 오히려 아늑한 감이 들었다. 조만식은 앉았던 자리로 유유히 걸음을 옮겨오며 조순근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이에 비해선 걸음걸이에 정력이 있어보인다. 방금까지 기세찬 연설을 하고나서도 지친 표정이란 가뭇 찾아볼수 없다.

《우리 창녕조씨는 인과 덕을 숭상해온 기품이 름름한 씨족이요. 물론 그 덕에 대대로 가난과 비천을 면치 못했소만··· 무슨 소린가 하면 우리 창녕시조에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시조가 나이 많고 병들어 세상을 하직할 림종의 시각에 이르자 자식들을 불러앉히고 자기를 앞산둔덕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오. 그러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로 〈우인좌물〉,〈우인좌물〉하고 두번을 곱씹었는데 자식들은 이게 무슨 소릴가 하고 머리를 쥐여짜며 의논을 했는데 해득해보니 자기를 앞산 우쪽에 묻으면 후세에 인과 덕이 차례지고 앞산 좌측에 묻으면 재산과 부귀가 차례진다는 소리였소. 그래서 자식들은 시조의 시신을 떠메고 3일후에 앞산둔덕에 올라 장지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산좌측에 이미 봉분이 솟아있더라오. 허허··· 후에 안일이지만 글쎄 딸년이 제 새서방한테 달려가 마지막말을 전했는데 마침 그 집에서도 상가가 있었던차라 먼저 올라가 앞산 좌측을 넌떡 차지했던거요. 출가외인이란 소리도 그래서 나왔는지. 그래 어찌겠소. 아들형제는 할수 없이 앞산 우측의 빈 자리에 시조의 시신을 안장하고 한 아들은 함경도쪽으로, 다른 아들은 평안도쪽으로 흩어져서 대를 이어왔는데 그 후손이 지금 임자나 나라구 할수 있네. 그래서인지 력대루 봉직두 없고 세간도 넉넉치 못하여 청빈한 생계를 이어오는데다 씨족이 번식도 제대로 못한것 같소. 물론 이런 전설이야 하두 못사는탓에 지어낸 소리겠지. 이렇거나 저렇거나 우리 창녕조씨가 인과 덕을 귀중히 받들어온것만은 틀림없네.》

조순근은 황홀한 눈으로 조만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몸은 작고 나이는 들어보여도 차림과 언행이 얼마나 준절하고 틀이 있는가. 설사 창녕조가가 아닌들 이런 어른이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극진스러운 정사를 안펼리가 있으랴. 점점 자기가 와야 할 곳에 왔다는 안도의 마음이 가슴속으로 젖어들었다.

《이젠 해방이 되였소. 조선민족 누구나가 자유롭게 살수 있는 세상이 분명 왔소. 아들을 공부시키오. 조선사람이 보란듯이 머리를 쳐들고 왜놈들을 내려다보며 살아야 하오. 이제 당신같은 농민들에게도 좋은 세월이 오오. 우리는 오늘 오전에 〈서도빈농협의회〉를 진행하고 3. 7제소작료세칙을 결정했소. 3. 7제를 말이요. 어떻소?》

조만식이 선자리에서 조순근을 내려다보았다.

《3. 7제라니요?》

조순근은 놀라운 소리에 어려움을 잊고 물었다.

《그렇소. 농군이 7할을 먹고 지주가 3할을 먹게 되오. 이 결정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온 빈농대표들이 다 쌍수를 들어 찬성한것이요. 임자두 조금 먼저 왔으면 그런 중대한 결정에 손을 드는걸 그랬소.》

《저야 뭘··· 고마운 생각뿐입네다.》

《가만, 그 세칙을 좀 보시오.》

조만식은 책상앞으로 다가가 문건철을 뒤적이였다. 그러다가 찾는 문건이 없는지 출입문쪽으로 다가가 서기를 불러들였다.

《소작료세칙을 인쇄한 문건이 어디 있소?》

《네, 그건 봉투안에···》

옷차림때문에 무안을 당하고 나갔던 서기가 바삐 들어와서 책상우의 두툼한 봉투를 들고왔다. 조만식은 그안에서 얇은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이걸 좀 들어보게.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 소작문제의 불평등을 해결함은··· 가만 임자는 글을 아오?》

조만식은 세칙을 읽다말고 문서를 건너다보는 조순근에게 물었다.

《예, 겨우 언문이나 뜯어봅니다.》

《그럼 웬간한 공문서는 볼수 있겠군. 허허, 어서 자기눈으로 직접 읽어보우.》

조만식은 문서를 조순근의 손에 넘겨주었다. 조순근은 종이장을 쥔채 손을 후들거렸다. 문서는 국한문으로 쓴것이였다.

 

소작에 관한 규정세칙

 

소작문제의 불평등을 해결함은 대동단결하는 민주정치의 필수적요건이다. 평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주민의 7할8분에 해당하는 농민층을 토지반분소작제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절량과 기아의 지속을 종식코저 아래와 갈이 결정한다. 본 규정세칙은 서도빈농협의회의 건의에 따라 작성공포한다.

 

첫째, 소작료는 물납제를 원칙으로 함. 포장비와 운반비는 지주가 부담.

둘째, 소작료납부는 타조, 정조의 형식에 기준하며 작인과 지주의 합의에 따라 그중 필요한 형식을 택함. 단 정조지에 있어서는 금비대와 수세를 소작인이 부담.

셋째, 대차한 토지의 종곡대는 소작인이 부담.

넷째, 곡초는 소작률에 의해 분배함.

다섯째, 소작료분할은 3. 7제(7할 농민, 3할 지주)로 하되 기정소작계약이 본규정에 비하여 유리하다고 인정(쌍방합의)될 때에는 재래의 관습도 무방함.

 

《어떻소? 마음에 드오? 우린 3. 7제를 이렇게 법으로 찍어밝혔소.》

조만식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순근은 문서에 눈길을 박은채 대답을 못했다.

그는 세칙의 문구들이 어려워서 내용을 분명하게 리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소작료 분할은 3. 7제(7할 농민, 3할 지주)》라는 글자가 마음에 당기였다. 꿈만같은 일이였다.

《위원장선생님, 이분도 이 세칙에 서명을 하도록 하는게 어떻습니까?》

서기가 한마디 비쳤다.

《좋은 생각이요. 회의에 참가 못한건 못한거구 빈농민인것은 사실인데 그렇게 합시다.》

조만식이 머리를 끄덕이자 서기가 책상에 다가가서 부피가 큰 문건철을 들고왔다.

서기는 몇장을 번지고나서 뻘건도장들이 주르르 내리찍힌 맨 마지막란에 만년필로 몇자 적고 조순근에게 내밀었다.

《전 도장을 못가지고 왔는데요.》

조순근이 딱한 표정을 짓자 서기는 《지장을 눌러도 됩니다.》 라고 하며 인즙을 끌어다주었다.

《아니 이거···》

조순근은 저도모르게 뒤걸음질을 했다.

시뻘건 인즙을 보니 괜히 당황해지는것이였다.

그러자 서기가 그의 엄지손가락에 인즙을 발라주더니 지장을 누르도록 도와주었다.

《고맙습네다. 3. 7제를 해주셔서···》

조순근은 두손을 가슴에 모으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 혼자 받을 인사가 아니라 대동단결의 기치를 든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 할 감사요. 지금 일부 사람들은 무산혁명이다, 자산계급타도다 하면서 자기들만이 무산자를 위하는체하지만 그건 사실상 나라와 민족전반을 생각지 않고 웨치는 황당한 소리요. 앞으로 임자도 마을에 돌아가면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오. 우리가 지금 분별없는 말을 돌리는 사람들때문에 애를 먹고있소.》

《예, 잘 알겠습네다.》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조순근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안타까움이 서려돌았다. 벼르고벼르던 간절한 소원을 어떻게하면 비쳐보일가, 자기같은 촌무지렁이들의 팔자틀 고쳐주겠다고 아글타글 애쓰시는 고마운 어른께 주책머리없이 잔걱정을 끼쳐드려야 옳은가.

조순근은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두어번 기고나서 《저···》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데 이때였다. 문밖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조만식이 눈을 껌뻑이며 소리나는쪽으로 몸을 돌리였다. 벌써 서기가 한걸음 먼저 달려나갔다.

문이 열리자 닭울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아뿔싸! 내 정신봤나. 그걸 여기 가져다놓고서는···)

조순근은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섰다. 중태에 넣어가지고 온 검정닭이 재구를 친것이다. 어리둥절해서 서기의 안내를 받다보니 닭넣은 중태까지 메고 들어왔던것이다.

조순근이 옆방으로 갔을 때는 조만식이 바닥에 놓인 중태속에서 닭을 알아보고 미소를 짓고있었다. 종일 중태안에 갇혔던 닭은 그우에 두루마기까지 덮어놓아서 참다못해 발광을 한것이였다.

《닭은 왜 지고 오셨습니까?》

《저···》

조순근은 서기의 물음에 귀밑이 붉어지며 중태안의 닭모가지를 비틀었다.

《시장에 내다 파시려고 그랬습니까?》

서기는 이상한듯 재차 캐여물었다.

《아, 아니올시다. 오히려 시장에서 산 닭인데 저, 사실은 선생님께···》

《그럼?···》

이때 조순근의 뒤에 선 조만식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였다.

《백군, 그 중태안의 닭을 꺼내오. 이 사람이 나한테 그냥 오기가 뭣해서 가져온 물건같소.》

몸둘바를 모르고 입술을 깨물던 조순근은 서기의 손에서 빈중태를 받아 구석에 놓으며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허물하지 않고 받아주니 정말 고맙습네다.》

《무슨 소릴, 인사는 내가 해야 할터인데, 가만 백군, 기념이 될만한게 뭐 없겠나?》

조만식은 닭을 안고 서있는 서기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준비해놓은게 없어서···》

《가만 그게 있지, 황해도에서 온 물건말이요.》

서기가 목을 기웃거리며 조만식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후에 나온 그의 손에는 은백색의 조그마한 단지 같은것이 들려있었다.

《이건 약탕관일세. 처가 앓는다구 했지. 멋으루 장우에 놓고 보기보다는 임자가 가지고가서 약을 달이는게 낫겠네.》

조만식은 서기의 손에서 넘겨받은 옥돌탕관을 조순근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아니, 전 이런 귀한 물건을 못만집네다. 선생님께서 두고 쓰셔야지. 이런게 아니라도 약달일 그릇이 있습네다.》

《그야 그럴테지. 그래두 내 성의루 알구 가져가라구.》

조순근은 목이 꺽 메여 더 말을 못했다. 세상에 이런 고맙고 인정깊은 어른도 있는가, 손끝에 마쳐오는 매끈한 감각은 고마운이에 대한 감사의 정을 더욱 북받치게 했다. 흰눈같이 눈부시고 꼭지달린 뚜껑이 얹혀있는 옥돌탕관, 뚜껑에는 《만세불망》이라는 글자까지 새겨져있었다.

조순근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치고야말았다.

《백군, 이 사람을 농민대표들이 든 3. l려관에 안내하라구 이르게. 며칠 쉬면서 모란봉이랑 구경도 시키게 하구···》

《녜.》

조만식의 말에 서기는 고개를 끄덕했다. 문이 열리자 밖에는 가방을 쥔 사람들이 여러명 둘러서서 웅성거리고있었다. 조순근은 그제야 정사를 보는 일때문에 사람들이 북나들듯 하는 방에 주책없이 너무 오래 앉아있었다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옥죄였다. 그런데도 어쩐지 돌아서는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어딘가 허전하고 아수한 생각이 가슴속 한구석에 서려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위원장선생님, 창간호에 실을 원고들은 오늘중으로 다 봐주셔야 하겠습니다.》

《알겠소.》

《아니, 우린 원고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알겠다니까.》

조만식은 자기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복도끝으로 멀어지는 조순근의 뒤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조순근이 웬일인지 란간을 잡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피끗 이쪽을 돌아다본다. 자기와 눈길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더니 허둥거리며 계단을 내리짚는다. 한발한발 무겁게 내려서는 농군의 처진 어깨, 어딘가 애원의 빛을 띠고 얼핏 자기를 돌아보던 서글픈 눈, 조만식은 거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갈아 서기를 불렀다.

《백군, 저 사람이 왜 저러오? 가서 알아보우.··· 그리구 임자들은 더 기다리게.》

조만식은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뿌리치며 서기가 달려간쪽으로 뒤짐을 지고 천천히 따라갔다. 계단아래 저쪽에서 서기와 농군의 싱갱이소리가 들려왔다. 농군은 별일 없으니 가겠다고 하고 서기는 위원장어른께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하고 가라고 팔소매를 잡아끌고있다.

《아니, 저렇게 바쁘신데··· 괜찮소이다.》

서기에게 팔소매를 붙잡힌 조순근이 몸을 비틀었다.

《무슨 일이요? 올라오우.》

조만식이 그쪽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아니, 선생님이?···》

조순근은 자기가 소란을 피워서 조만식이 나타난것 같아 두손을 배허벅에 대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위원장선생님, 이분이 사실은 한가지 소청이 있는것 같은데 어려워서 이러는것 같습니다.》

서기가 조만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데리구 올라오우. 무슨 청인지 말해야지. 그냥 가면 내가 섭섭하지 않은가.》

조만식은 눈길을 떨구고 다가오는 조순근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방으로 안내했다,

《저···》

조순근은 조만식이 권하는 쏘파에 가까스로 들어앉으며 머밋거렸다.

《일없소. 어서.》

《저, 저··· 사실은··· 전 렴치없는놈이웨다. 바쁘신 위원장어른께···》

《무슨 자꾸 그런 말을, 어서 이야길 하오.》

조만식은 담배 한대를 꺼내물었다. 서기가 라이타로 불을 켜서 대주었다.

조순근은 한참만에야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대복이 이야기를 하다간 서분이 이야기를 하며 순서가 왔다갔다하는줄도 모르고 두서없이 평양에 온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서만호씨가?》

지그시 눈을 감고 창밖을 내다보던 조만식이 눈섭을 약간 꿈틀거리며 물었다.

《예, 너무 안타깝던 생각에 무엄한 청인줄 알면서 이렇게 왔소이다.··· 대복이와 서분이를 구원해주십사 하구···》

조순근은 차츰 안정이 되여 서분이가 서만호집 몸종으로 들어가게 된 자초지종이야기까지 자상히 하였다.

조만식의 얼굴에 점점 그늘이 비끼더니 전혀 말이 없었다. 그의 입으로 가끔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자기에게 간절한 소청을 드리고있는 재령벌 농군의 불행한 처지가 다름아닌 서만호의 행위와 관계되여있는 그 사실앞에서 어지간히 난처해진것이다. 조만식은 자기의 자오라기모자와 서만호의 유들유들한 얼굴이 자꾸만 엇갈려 나타나면서 궁지에 빠져들어가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정시절부터 어지간히 친교가 있는 서만호를 내놓고 탓하기가 거북한 일이였다. 그가 자기를 재정적으로 여러번 도와준것은 사실이였다.

《제가 물론 그의 땅을 부치고사는건 사실이지만 해방된 오늘에 그 애들을 잃으면 무슨 살 생각이 있겠습네까. 저의 처두 그 일때문에 오래 못삽네다. 선생님, 이 의지가지할데없는 촌무지렁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애들을 구원할 길을 좀 열어주십시오.》

정작 애들 이야기를 꺼내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조순근은 저도 모르게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석한 일이군. 거센 바람과 소낙비도 한나절이고 혹한과 춘풍도 번갈아오는 법인데 임자는 너무도 애간장을 태워왔군. 일어나오. 잘 알겠소. 내 서만호씨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람사는 세상에서 그건 너무한것 같소.》

조만식은 조순근의 어깨를 다잡아 쏘파우에 올려앉히였다.

그의 눈엔 이름할수 없는 괴로움이 서려있었다.

《선생님, 참의가 애들을 데리고 서울루 나가진 않을가요?》

조순근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을 옥죄며 불쑥 그런 말까지 꺼냈다.

《안심하오. 얼마전에 그도 나한테 시국이 불안스럽다고 편지를 보내온적이 있길래 안심하라는 회답을 띄웠소. 지금 일부 사람들이 왜정때 앙갚음으로 분별없이 구는바람에 더러 남으로 뛰는 일들이 있는데 시국이 안정되면 다 잦아드오. 또 그가 숱한 가산을 버릴 사람이요. 그 사람의 가산이라는게 땅인데 그걸 버리고 가지 않아. 내 말을 믿소. 우리가 하는 정치가 바로 시국을 안정시키고 그런 불화를 다스리는 정치요. 그한테 내가 사람을 보내든가 편를 띄우든가 하겠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권고를 함부로 뿌리치진 않아. 애들을 내놓으라구 해봅시다.》

조만식은 두손으로 앞상을 짚고 무겁게 일어섰다. 순간 조순근은 저도 모르게 마주 일어섰다. 얼어붙었던 가슴이 쑥 열리며 숨이 터져나왔다. 그 옥맺혔던 숨이 온몸의 긴장을 다 걷어가지고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그는 서기가 자기옆에 차물을 가져다놓아주는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뒤짐을 지고 시름깊은 생각에 잠겨 방안을 거니는 조만식의 흰옷 입은 모습도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것 같았다. 그 순간 조순근의 뇌리에는 불현듯 조만식위원장의 은정으로 대통운이 들었다던 양평마을의 희한한 풍문이 떠올라 다시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였다.

《참, 제가 위원장어른께 미처 감사의 말씀을 아뢰지 못한것이 있소이다. 양평마을의원이 올린 글월을 받구 위원장어른께서 불쌍한 작인들에게 쌀과 고기를 보내주신 그 은정에 대해서 지금 우리 마을 농군들은 한결같이 백골난망의 은혜로 생각합네다.》

조순근은 먼곳에서 날아온 한장의 편지를 받고도 그와 같은 은정을 베푸는 위원장어른이 하물며 눈앞에서 하소연하는 자기의 간청에 대해서 어찌 무심하랴싶었다. 조순근은 머리를 조아리느라 그때 조만식의 얼굴에 어떤 놀라운 빛이 떠올랐던지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후에 약간 떨리는듯 한 조만식의 경이의 목소리를 들었을뿐이였다.

《양평마을 그 작인들에게 정말 쌀과 고기가 내려갔소?》

《예예- 내려갔을뿐아니라 그걸로 보신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다고 합네다. 그 소문은 우리 신당리마을에도 파다합네다.》

《으음···》

조순근은 머리우에서 울리는 조만식의 이상한 신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쳐들었다. 조순근의 눈길을 얼른 피하며 돌아서는 조만식의 두팔이 알릴듯말듯 떨고있었다.

조만식은 지난 9월에 양평마을 의원으로부터 굶어죽게 된 작인들을 살려내도록 서만호지주를 신칙해줍시사 하는 편지를 받은바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 쌀과 고기를 내려보내기는커녕 여태 그 편지를 감감 잊어버리고있었다.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그렇다고 내가 굳이 안내려보냈다고 까밝힐거야 없지··· 정치란 그런것이니까···)

조만식은 또다시 가늘게 팔을 떨며 신음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