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2장 2


 

제 2 장

2

 

조순근은 한걸음한걸음 생각을 짚으며 평양교외의 오솔길을 걸어갔다. 푸른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란 야산기슭의 농가마을에는 누기를 머금은 희고 부드러운 새벽안개가 바다의 멀기처럼 소리없이 늠실거리였다. 썰렁한 새벽바람이 야산의 나무숲을 흔들며 솨-하고 불어지나면 놀란듯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우로 치달아오르다가는 다시 느물느물 일렁이며 모여드는 젖물같이 흰 안개··· 조순근은 눈앞에서 굼실거리는 새벽안개마저 이날의 운수를 보여주는 그 무슨 조짐처림 생각되였다.

이제 비로소 그는 벼르다가 찾아가는곳, 평양성가까운 농가마을에 들어섰으니 그럴법도 하였다.

재령강과 대동강이 합수되는 외암포에서 하루밤을 묵고 어뜩새벽에 길을 떠난 그는 나루에서 멀지 않은 이 마을에 조반을 에울만한 주막집이 있을상싶어 찾아오는 길이였다.

조순근은 마을길을 얼마간 걸어가다가 주막집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안개발이 훨씬 설피여져서 이제는 마을의 륜곽이 뚜렷하게 안겨왔지만 아직 이른새벽이여서인지 인적기없이 고요했다. 그는 얼마후에야 저쪽 백양나무 두그루가 유표하게 서있는 초가집앞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는것을 보고 얼른 걸음을 옮기였다. 목깃이 울긋불긋한 수탉 한마리가 백양나무집 지붕우에서 목을 빼여든채 혼신을 비틀어짜듯 울어댔다.

《꼬옥-꼬끼요-오》

《허허, 그놈의 수탉이 시간을 외끼는군.》

허드레옷 무명바지를 무릎게까지 걷어올린 키가 성큼한 로인이 삽짝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두엄을 쳐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돼지 세마리가 쇠지렁물이 질척거리는 놀이장에 달려나와서 꿀꿀 소리를 내며 구리물을 올린것같은 로인의 장딴지를 주둥이로 내받았다.

로인은 발밑을 내려다보며 꽥 소리쳤다.

《야, 이놈들!》

《꿀.》

《옳지, 이놈들두 말을 배웠구나.》

로인은 뒤발질을 하며 웃기까지 했다. 조순근은 웃음을 머금고 로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돼지들이 주둥이를 쳐들고 눈앞에서 드적드적하는 로인의 거름물투성이의 두발을 쏘아본다. 그러자 로인은 꼭 사람에게 하듯 돼지들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이제 진자리를 파내고 마른깃을 깔아주마. 짚을 한아름 깔아줄테니 폭신한데 누워보아라.》

《꿀.》

《허허, 이놈이 정말 말을 알아듣는다.》

로인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일자리가 푹푹 나게 두엄을 걸이대로 찍어서 밖으로 내던지였다. 시큼하게 코를 적셔오는 검은 거름무지가 놀이장밖에 뫼덤같이 생겨났다.

거름을 다 쳐낸 로인이 놀이장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조순근은 인기척을 냈다.

《저 아버님, 말씀 좀 묻습시다.》

《엉?》

일에 열중했던 로인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슴벅거렸다.

《지나가던 길인데 주막이 어데 있습네까?》

《주막? 허 여긴 그런게 없는데···》

로인은 몸이 굴대장군같은 조순근의 아래우를 훑어보고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데쯤에 주막이 있나요?》

《대다리장까지 가야 하는데 길손은 어째 이 외진쪽으로 꺾어들었수?》

《전 저 앞나루에서 내리다보니.》

《나루에서? 벌써 물참이 그렇게 되였나.》

로인은 손을 이마전에 대고 해가늠을 해보았다.

《아직 들물이 오르려면 퍼그나 있어야 할텐데. 어디서 오는 길손이요?》

《예, 황해도 재령벌에서 옵니다.》

《쯔쯧, 아래도리가 다 젖었군.》

로인은 무릎게까지 푹 젖어있는 조순근의 아래도리에 눈길을 주며 혀를 찼다. 조순근은 그제야 자기가 아까 당두리배에서 뛰여내리다 물에 떨어진 생각이 났다. 물시간이 안맞아 배가 반나절은 기다려야 한다는 사공의 말에 조급증이 나서 발을 헛짚으며 내리는바람에 물참봉을 당했던것이다.

《코앞에 인가를 두고 주막을 찾을 일이야 있소. 우리 집에라두 들렸다가우.》

《아버님, 괜찮습네다. 성안길이 바빠서.》

《마찬가질세. 주막거리에 가재두 그만한 시간은 버려야 한다우.》

로인은 걸이대를 옮겨잡으며 무작정 조순근의 팔을 잡아끌었다.

조순근은 뜻밖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마지 못해 움직이였다.

사립문밖에서 바라보니 안채와 헛간으로 갈라진 초가집은 티검불 하나 없이 알뜰하였다. 토담우에 씌운 곱새며 나무기둥을 해서 높이 세운 다락들이 부지런하고 착실한 농군의 집이라는것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집을 꾸린것을 보면 집안에 일손이 영 없는것도 아닌것 같은데 어림짐작에도 칠순은 나보이는 고령의 로인이 새벽부터 걸이대를 잡는것이 이상스러웠다.

《저 아버님, 슬하에 자손들이 없습네까?》

《왜 없겠소.》

로인은 사립문짝을 두어번 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들으라는 인기척같기도 했다. 부엌문이 벌컥 열리더니 흰 머리수건을 쓴 안로인이 자시물옹배기를 들고나왔다.

《인제 들어오시우, 잘난 조밥 한그릇 자시면서 무슨 기운에 어뜩새벽부터 지게를 지시우.》

로인을 가볍게 지청구하는 녀인은 아직 뒤에 서있는 길손에겐 주의가 안미친 모양이였다.

《어허 큰일날 소리, 조밥이 어쨌다구. 낟알천대하단 조밭에 흉년들지 않나 보지.》

《내 입덕에 조밭에 흉년들면 백날 굶고 칠성단에 절하오리다.》

《허허허··· 백날 굶구 임자 상가나지 않을가.》

두 로인내외의 정분이 어찌도 살뜰하고 웅숭깊어보이는지 조순근은 사립문앞에 입을 벙글써하고 서서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는데 로인이 조순근에게 고개를 돌리며 손짓을 하였다.

《이사람, 어서 들어가세. 우리 안사람이네.》

조순근은 두손을 무릎에 모아대고 허리를 깊숙이 꺾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아니, 령감님두 손님을 모셔왔으면 인사부터 시킬것이지. 뉘신지 정말 안됐수다.》

녀인은 머리수건을 벗어내리며 맞절을 하였다.

《이 손님 신발이 물에 절었소. 얼른 말려신구 떠나야겠는데···》

로인은 길손의 등을 밀며 웃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형편은 어떤가? 올농사가 착실한가?》

방안에 들어온 로인은 담배되박을 길마리에서 끌어내놓으며 물었다.

《예, 올여름에 늦장마가 져서 더러 침수를 받은덴 있지만 가을날이 잘해줘서 소출이 무던할것 같쉐다.》

《그래야지. 농사만 섭섭치 않게 되면 농군들이 이젠 낟알을 푼히 먹으며 살아가게 될걸세. 좋은 세상이 올테니까.》

로인은 장죽을 입에 물고 아침해빛에 불그레해진 문창에 눈을 주며 흔연한 어조로 말하였다.

구리빛얼굴에 무수히 잡혀있는 로인의 굵은 주름살들은 다난한 농토에서 한평생 몸을 절구고 살을 그슬린 농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었지만 부드러운 빛을 조용히 내뿜는 그윽한 눈은 어딘가 이름할수 없는 도고한 기품을 느끼게 하였다.

《아버님! 정말 앞으로 세월이 좀 나아질가요? 좋은 세상이 올가요?》

《암, 오구말구. 이제 우리 농군들의 평생소원을 풀어주는 그런 세상이 올걸세.》

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대답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장죽을 빨다가 말을 이었다.

《왜 임자두 전번 공산당에서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을 세상에 낸걸 알겠지? 거기 씌여있는 자자구구가 다 농군들을 위하구 지주들을 징계하는게 아니던가? 인제 해방된 이 나라에 바른 세상을 만들자구 나서는 이들이 많으니 틀림없이 우리 농군들이 제땅에서 제 농사를 마음껏 짓게 될 날이 꼭 오게 될걸세.》

로인의 말을 듣고있는 조순근의 가슴은 기쁨으로 울렁거리였다.

《아버님의 말씀이 옳은가보웨다. 조만식선생이라구 아시겠는지. 그분두 우리 농군들을 위해 여간 마음을 쓰지 않는것 같어요.》

《조만식이?··· 선성은 많이 들었네.》

《실은 그분이 〈서도빈농협의회〉를 한다고 군에서 일보는 사람이 저보구두 자꾸 그 회합에 참석하라구 합디다만 저같이 무식하구 비천한 사람에겐 분수에 맞지 않는 일입지요. 저는 회합에 참가할 엄두는 내지 않고 조만식어른이 우리 마을 지주와 잘 아는 사이기에 무얼 좀 도움을 받자구 평양성으로 가는 길입네다.》

《음, 그래서 길을 떠났구만.》

로인은 의미깊은 표정으로 조순근의 얼굴을 새삼스레 찬찬히 훑어보고 말을 이었다.

《한데 임자는 왜 자기를 비천한 사람이라구 생각하나. 세상의 근본일을 하는 농군이 왜 비천하겠어. 임자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옳은 세상을 세울수가 없네.》

조순근은 로인의 나무람에 오히려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어올라 눈을 슴벅이였다. 대할수록 점점 더 초연한 인품을 느끼게 하는 로인이였다. 로인은 서글픈 눈빛으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아래방문이 열리며 안로인이 소반을 들고 올라와서 로인의 이야기가 중둥무이되였다.

《길손을 앉혀놓구 조반이 늦었수다. 식찬이 변변찮지만 우리 령감과 겸상해서 많이 드시우.》

안로인은 조밥이 담긴 밥바리뚜껑까지 열어주며 권하였다. 조순근은 밑도끝도없이 무턱대고 뛰여들어와 페를 끼친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전 좀 앉았다 가갔어요.》

《어서 나앉게. 나두 조반전일세.》

로인은 놋숟갈 한개를 뒤걸음질하는 조순근의 두툼한 손바닥에 놓아주며 밥상머리로 끌었다.

《아버님, 이거 정말 뜻밖에 페가 많어요.》

《페는 무슨 페, 어서 다가앉으라구. 우리 이 마을 사람들은 넉넉하겐 못살아두 인심은 과히 각박하지 않다우.》

조순근은 로인의 친절한 권유에 고마운 생각을 하며 밥상앞에 조심히 다가앉았다.

《그래 집안식솔이 다 농사를 짓소?》

《식솔은 셋인데 농사는 제 혼자 합지요.》

《혼자?》

《예, 처는 장창 구들바닥에 몸져눕구 외독자 하나 있는게 지주어른네 집에서 종살일 해요.》

《아니 해방이 되였는데 그 지주가 남의 외아들을 아직두 종으로 부려먹구있단말인가? 왜 그걸 그냥 그러구있나? 원 쯔쯔···》

밥술을 뜨며 이야기하던 로인의 우선우선하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버님, 제가 진 빚이 그냥 있는데 어떻게 그 앨 내놓으라구 하겠어요? 그리구 또···》

조순근은 가슴에 치미는 설음으로 하여 저도 모르게 밥술을 쥔채 어깨를 떨어뜨렸다.

《밥을 마저 들게.》

로인은 시름에 잠긴듯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놋숟갈로 밥사발가녁을 꾹꾹 다지더니 주먹같은 조밥덩이를 한손받쳐 입에 가져갔다.

조순근이도 말없이 무우국에 밥을 말아 부지런히 먹었다. 방안엔 한동안 놋바리에 수저마치는 소리만 울리였다. 밥바리를 굽혀 마지막술을 낸 로인은 랭수사발을 들어 꼼꼼히 양치질을 하였다.

조순근은 로인이 들려주는 물그릇을 정중히 받아서 머리를 돌리고 마시였다.

《외아들이 지주집 종살이를 한단말이지?》

로인은 밥상을 옆으로 물리고나서야 이마전에 돋은 땀발을 훔치며 엄하게 뇌이였다. 조순근은 은근히 마음이 조이였다. 이렇게 고맙고 근엄한 로인에게 자기 신상에 미쳐있는 가슴저린 불상사들을 죄다 말씀드리고싶으면서도 어쩐지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버님, 저의 아들을 잡아두고있는 그 지주어른이 지금은 군수가 된다, 어쩐다 하는 소리까지 있어요.》

《지주가 군수질을 하겠다고? 허어- 나무리쪽이 그렇게 어수룩한가?··· 그건 그렇구. 임잔 어째서 아직두 지주를 어른이라구 괴여올리구있나? 이젠 썩 그런 소릴 거두게.》

로인은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로 타일렀으나 조순근은 추상같은 호령을 듣는것만 같았다.

《지주에게 군정사를 맡겨서야 되겠나. 그래선 안된다는걸 이젠 아마 삼척동자도 짐작할걸세.》

《예, 그래서 모두 윽윽하지만 한편 전 그눔이 위험을 느끼구 달아날가봐 숫제 걱정이여요.》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로인은 장죽을 들어다가 써레기를 담으면서 의아하게 조순근을 건너다보았다.

《그눔이 아들애까지 달구 달아날가봐 그럽지요. 워낙 불악귀같은 놈이니까요··· 아버님, 저한텐 가슴아픈 일이 아들애일만이 안여요. 제 자식 못지 않은 애가 또 하나 그놈에게 잡혀있어요.》

조순근은 일단 설분이 터져나오자 로인앞에서 조심스럽던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울먹이는 소리로 기막힌 가정사를 하소연하였다.

10여년전에 조순근이네는 서분이라는 처녀애의 부모와 이웃하고 살았다. 무서운 생활고가 신당리 농가마을을 휩쓸고있던 어느해 봄, 며칠째나 낟알구경을 하지 못해서 온 가족이 구들에 눕게 되였을 때 서분이 아버지는 솔가도주 할 마지막생각을 품고 조순근을 찾아왔다.

《성님, 그저 죽었으문 좋겠어유. 이게 무슨 세상살이유. 어디든 식솔을 데리구 떠나볼가 해유. 그러다 로상에서 죽어버릴 생각이여유.》

조순근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솔가도주하려는 그의 결심을 막을 길이 없었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데야 그렇게 늘 묵은 빚에 깔려서 언제인가는 일조에 떼죽음을 당하는 신세밖에 될것이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조순근이도 솥을 뽑아지고 그와 함께 가고싶었으나 대복이 어머니가 앓고있고 또 한편으로는 조상대대의 원혼이 묻혀있는 땅을 그렇게 홀하게 버리고 갈수가 없어서 참았었다. 유난스레도 소쩍새가 슬피울던 캄캄한 여름밤에 서분이네는 끝내 조순근이 꾸려주는 좁쌀 너되를 운명의 량식으로 받아들고 눈물을 뿌리며 떠나갔다. 그때 그 집에는 여섯살난 서분이와 젖먹이총각애 하나가 있었는데 서분이만은 조순근이네 집에 떨궈두고 갔었다. 10리길도 제걸음으로 가지 못할 서분이를 데리고 도망치다가는 도중에 덜미를 잡힐수도 있는 일이여서 이다음 자리를 잡은 다음에 슬그머니 데려가라고 조순근이 스스로 맡아나섰던것이다. 그래서 애가 잠든 다음 안아내왔는데 그 맡아나섬이 오히려 자기 생애에 큰 죄를 짓는것으로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서분이 부모들은 마을을 떠난지 몇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묘연하여 생사안위조차 알길이 없었다. 서분이는 그리운 부모들과 떨어져 조순근의 집에 얹혀사는동안에 대복을 친오빠처럼 따르게 되였다. 그 처녀애는 대복이가 서만호지주집 바깥종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종일 그곁에 묻어다니다가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오군했다. 그러느라니 자연히 서만호 본댁의 눈에까지 뜨이게 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분이에게 불행한 운명을 가져다준것이였다.

지주집 본댁은 그무렵에 시름시름 자꾸 앓아서 무당을 불러 점패를 보았는데 속세에 때묻지 않은 어린 계집애의 손으로 떠온 산당집박우물의 정화수를 새벽마다 마시면 집안에 대통운이 트고 온 일가가 무병장수한다고 했다. 그래서 본댁은 생김새가 예쁘고 역발라보이는 서분이를 몸종으로 부리면서 정화수를 길어먹을 생각을 하게 된것이였다.

빚을 떼먹고 솔가도주한 작인집 계집애여서 빚대신에 몸종으로 부려먹을수 있는 권한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녀자는 억지다짐을 하지 않고 우선 맛있는 음식과 현란한 옷가지들을 가지고 철없는 애를 유혹하며 제법 살갑게 굴었다.

어느정도 계집애가 자기에게 정을 붙였다고 생각될 때 본댁은 서분이와 함께 조순근을 불러들이였다.

《이사람, 녀자애가 없는 우리 집안에서 이 애를 수양딸로 삼을가 하는데 어떤가?》

이 뜻밖의 말을 듣고 조순근은 깜짝 놀라며 그렇게는 못한다고, 그 애 부모가 언제 와서 찾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겠는가고 사정하였다. 그리고 금시 빼앗길것만 같아 서분이의 손목을 잡아 옆구리에 다가끼였다.

《호,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빚을 떼먹고 솔가도주한놈의 피줄을 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수양딸로 길러주겠다는데 고맙다는 소리는 없이 무슨 우는 소리를 하고있나. 워낙 임자가 괘씸한 사람이야. 그 집을 야밤도주하도록 곁들어주고는 서분이를 장차 부려먹자는 심보가 아닌가? 그래 임자가 지금 이 애를 끼고앉아 먹을걸 온전히 먹이나 입힐걸 제대로 입히나.》

지주집 본댁은 조순근의 가슴을 그렇게 허비여주고나서 눈이 말똥말똥해 서있는 서분이에게 물었다.

《서분아, 말해봐라. 너 이 집에 있겠느냐, 저 대복이 아버지네 집에 있겠느냐?》

그러자 서분이는 발볌발볌 큰댁쪽으로 다가갔다.

《나, 큰엄마하구 살래.》

조순근은 기가 막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흐흐, 이것보라구, 애가 이렇게 정이 들었는데 임자가 제 욕심만 생각하면 되겠나?》

바로 이렇게 되여 서분이는 그 악녀의 검은 손아귀에 들어가고말았다. 그때부터 서분이의 고생스럽고 설음많은 종살이의 운명이 시작되였다.

그 불쌍한 소녀는 사시절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어뜩새벽이면 여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도깨비불이 펑긋거리는 무시무시한 묘지들이 있는곳-산당집 박우물을 찾아 5리길을 걸어야 했고 본댁의 변덕스러운 성미를 맞추면서 고달프고 천스러운 온갖 잡시중을 들어야 했다. 새벽이면 물동이를 이고 산당집 언덕을 초연히 오르내리는 불쌍한 계집애, 겨울이면 얼음구멍옆에서 손을 불며 빨래하는 나어린 녀종을 보며 세상에는 별의별 랑설이 떠돌기도 했다. 조순근이 제대로 먹이지 않고 입히지 않아서 서분이 스스로 지주집 몸종으로 들어갔다느니 혹은 조순근이 처녀애를 맡아기르기가 지겨워서 선돈을 받고 지주집에 몸종으로 넘겨주었다느니···

《세상에 그런 말이 떠돌면 저는 정말 천벌을 맞을 죄를 지은것만 같아 잠을 이룰수가 없습네다. 지금 서분이넨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혹 그네들이 신당리로 되돌아온대도 내 무슨 면목으로 어떻게··· 머리를 쳐들가요··· 아버님, 사실은 제가 그래서 이번에 평양나들이를 했습네다. 조만식선생에게 우리 대복이와 서분이를 빼내주십사 간청을 드리자고요.》

《참, 임자두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있구만···》

로인은 목이 잠겨 떠듬거리는 조순근을 측은하게 건너다보며 구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였다. 그리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은채 한숨을 내쉬듯 풀썩풀썩 장죽을 빨면서 허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조순근은 어째서인지 로인의 고동색얼굴에서 주름살들이 더 굵어지고 깊어지는듯 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여태 자기가 주책없이 제 설음만 생각하고 긴 넉두리를 늘어놓았다고 후회하게까지 되였다.

얼마후 조순근은 방문턱에 비쳐드는 해빛을 보고 시간이 퍼그나 갔다는 생각에 서둘러 중절모와 중태를 걷어쥐며 일어섰다.

《벌써 가려나? 하루밤 자면서 얘기나 좀 더 했으면 좋았을걸.》

로인도 장죽을 털며 일어섰다.

《길이 바빠서··· 실없이 페를 끼쳤습네다.》

조순근은 방문을 열고 신발을 신으려다가 갑자기 눈이 덩실해졌다. 흙물에 어지럽혀졌던 자기의 지하족이 떠날 때처럼 하야말쑥했던것이다. 그속에 발을 꿰이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로인이 어느새 신을 빨아서 아궁이불에 말리운것 같았다.

어쩌면 늙은 내외분이 다 생면부지의 길손에게 그리도 살틀한가싶어 조순근은 눈앞이 뿌잇해져서 비틀거리며 토방을 내려섰다.

《아버님! 정말 고마워요. 이거 약소한대루···》

조순근은 두루마기자락을 제끼고 조끼주머니에서 지전 한장을 꺼내였다.

《허허, 이사람 밥값을 물겠다는건가. 썩 거두게. 그럼 못써.》

《그래두 거저야 어떻게···》

《이것 넣지 못할가. 사람의 인심을 돈으루 흥정하는건 고약한 짓일세.》

로인은 조순근의 지전 쥔 손을 밀어제끼였다.

《그럼 이 신세를 다 어떻게 합네까. 나오지 마셔요.》

조순근은 사립문밖으로 나온 로인의 손을 잡으며 만류하였다.

《신세는 무슨 신세라고 아까부터 자꾸 외우나. 임잔 이곳 지형이 생소할테니 여러말 말구 내 가는데까지 함께 가세.》

로인은 대통을 뒤에 찌르고 앞서 걸어나갔다. 조순근은 나이 많은이에게 길잡이까지 시키는것이 민망해서 송구스러운 걸음으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