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16장 2


 

제 16 장

2

 

장군님께서는 바위너설들이 창끝처럼 삐죽삐죽 내솟은 가파로운 벼랑굽이에서 차를 멈추게 하시였다. 벼랑옆으로 다박솔 덮인 푸른 야산이 누워있었다. 어디에선가 물소리가 들려오고 봄눈이 녹은 눅눅한 잔솔밭에서는 아지랑이인지 김발인지 알수 없는 희고 부드러운것이 피여오르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차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말씀하시였다.

《저 야산을 돌아서 조금 가면 갈촌이라는 마을이 있소. 토지개혁법령을 발포한후 내가 강진건위원장과 함께 그 마을에 들렸댔는데 아마 지금쯤 거기서도 토지분여가 한창일게요.》

장군님께서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듯 차에서 내리시였다. 부관도 따라내렸다.

그이께서는 이날 어뜩새벽부터 여러 농촌마을을 다니며 토지개혁사업을 지도하고 돌아가시는 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야산너머 저쪽 갈촌마을이 있는곳을 그냥 바라보다가 부관에게 말씀하시였다.

《일정계획엔 없었지만 이왕 다니던 길인데 갈촌마을을 마저 들려보고 갑시다.》

장군님께서는 다시 차에 오르시였다.

승용차는 천천히 자국을 떼며 벼랑굽이를 돌아갔다. 차가 야산기슭에 이르자 부관은 늘 몸속에 깊이 간수해두고 다니는 사업일지를 뒤적거리였다. 그는 자기 사업을 정확히 총화하기 위해 매일과 같이 현지에서 짤막짤막 간단하게 생략부호를 쳐가면서 일지를 썼다. 그러나 때로는 부관의 현지일지가 저도모르는 사이 일종의 감상록처럼 긴 글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며칠전에 쓴 3월 10일의 일지가 바로 그런것이였다. 부관은 그날에 적어둔 장문의 일지를 더듬으며 깊은 명상에 묻히기 시작했다.

 

△ 1946년 8월 10일(날씨 흐림)

유난스레 새벽바람이 음산하다.

밤을 꼬박 새우신 장군님께서는 날이 밝자 평안남도 대동군쪽으로 나가실 차비를 하시였다.

나는 오늘 한겻만이라도 좀 쉬시도록 여러번 간청을 올렸지만 그이께서는 농촌마을을 꼭 돌아보아야 한다며 서두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요즘 문자그대로 침식을 잊고 주야로 분투하신다. 어제도 새벽 6시부터 평양시 각곳을 다니며 여러 시민들을 만나시여 생활형편을 료해하고 토지개혁법령에 대한 소감들을 들어보시였다. 이 나라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을 풀어준 토지개혁법령에 대한 시민들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집무실에 돌아와서도 부단히 사람들을 접견하시고 전화를 받고 글을 쓰시고 그리고는 또 바삐 어디론가 나가보시며 참으로 1분1초의 휴식도 없이 일하시였다.

특히 어제는 장군님께서 그 바쁘신속에서도 토지개혁법령과 관련한 방송연설을 준비하느라 무척 시간이 긴장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저녁 7시부터 방송연설을 하고 뒤이어 선전부문 간부들을 만나 밤늦도록 담화를 하며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집무실로 돌아와서 여태 날이 밝을 때까지 온밤 주무시지 않고 일을 보시였다. 그런데 이 아침에 또 농촌마을을 돌아보겠다고 차비를 하시는것이였다.

나는 장군님의 건강이 념려되여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왔으나 어쩌는수 없이 장군님을 모시고 차에 올라야 했다.

아침 8시에 평양을 출발한 차는 9시 30분경에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내리에 도착하였다.

덧옷에 수수한 모자를 쓰신 장군님께서는 곧장 농촌위원회 사무실로 들어가시였다.

토지분여대장을 정리하던 위원장의 놀라움!

당황, 감격··· 그는 장군님을 따뜻한 방에 모시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뜨락에 멍석을 펴고 앉으시였다.

장군님께서 먼저 농촌위원회 구성상태를 료해하고나서 위원장에게 묻기 시작하셨다.

《이 부락에 지주가 몇명이나 되오?》

《셋입니다.》

《지주의 토지가 얼마나 됩니까?》

《50정보입니다. 타지방의 토지까지 합하면 200정보입니다.》

《토지분여는 어떻게 하였소?》

《로력자 점수 1점당 2천평가량 되는데 고농들에게 먼저 주게 했습니다.》

《잘했소, 잘했소. 제일 고생하고 제일 못산 농민들에게 먼저 땅을 줘야지.》

장군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시였다. 농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저마다 장군님께 허리굽혀 인사를 드리며 《장군님, 땅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소원이 풀려서 이젠 죽어도 한이 없을것 같습니다.》 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여러분들이 그처럼 기뻐하시니 나도 여간만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에게 땅을 준게 아닙니다. 본래 땅의 주인들인 여러분들이 제 땅을 도로 찾은것입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내놓고 어떤 사람들이 땅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한시간 남짓이 농민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 토지개혁법령의 의의, 그 정당성, 집행대책들을 구체적으로 해설해주시였다. 그리고 위원장에게 이 마을에서 제일 잘 살던 지주집이 어디에 있는가고 하며 그리로 가보자고 하시였다.

오전 11시에 장군님을 모시고 대동군 시족면 성문리 지주집으로 갔다.

그때 마침 지주집에선 로인들이 둘러앉아 장군님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하고있었다.

《집구경을 좀 하려 왔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루에 앉아있던 로인들이 황황히 달려내려와 무릎을 꿇고앉았다. 그들은 모두 지주집에서 종신 머슴으로 살아온 늙은이들이였다.

《왜들 이러십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제는 땅의 주인들이 됐는데 이러면 됩니까?》

장군님께서는 로인들을 손잡아 일으키시였다.

그러나 평생 사람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늙어온 로인들은 너무도 황송해서 계속 어쩔바를 몰라했다.

《우리 집에도 로인네들처럼 농사일로 허리가 굽으신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조금도 어렵게 생각지 말고 편안히 앉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친히 로인들의 손을 잡아 방아래목으로 자리를 권하시였다.

마을농민들이 장군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한 녀인이 장군님께 큰절을 올리며 《장군님,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 어떻게 다 갚겠습니까.》 하고 목메인 소리를 하더니 한참 머밋머밋하다가 손에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거기에는 삶은 고구마가 가득 담겨있었다. 농민들은 땅을 주신 장군님께 고구마밖에 대접하지 못하는것을 못내 송구스러워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고구마는 아주 별맛입니다. 나는 산에서 싸울 때 고구마를 대단히 그리워했습니다.》 하고 고구마 한알을 들고 껍질을 벗겨 가까이 앉아있는 농민에게 먼저 권하시였다. 그런데 그 농민은 고구마를 두손에 받쳐든채 머리를 푹 숙이고있더니 갑자기 장군님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목놓아울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하였다. 농촌위원회 위원장이 울음터뜨리는 농민의 사연을 장군님께 말씀올렸다.

《장군님, 이 박장반농민은 평생 머슴살이를 하며 사람대접을 못받다가 장군님께서 이렇게 고구마를 손수 껍질까지 벗겨 손에 쥐여주시니 너무 감격해서 그럽니다.》

《울지 마십시오. 그만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은채 새삼스레 지주집을 둘러보시였다.

토방을 높이 쌓고 그우에 아름드리 기둥을 받쳐 대궐같이 지어놓은 기와집, 번들거리는 미닫이, 윤기도는 불그스레한 대청, 머슴과 소작인들을 호령하던 지주의 권세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집에 있던 박경식이라는 지주는 1년갈이 이상이나 되는 토지와 큰 자본을 가지고있은 친일지주인데 지금은 남조선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박장반농민은 이 집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고달픈 인생을 흘러보냈다.

《그래 언제부터 머슴살이를 하였습니까?》

장군님께서 박장반농민의 나무껍질같은 손등을 쓸어만지며 물으시였다.

《여덟살에 부모를 잃구 그때부터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소이다.》

《여덟살때부터?》

《예. 그러다가 10여년 지나 돈 천냥을 내구 장가를 들었소이다.》

《장가를 든 다음엔 어떻게 살았습니까?》

《저는 그냥 머슴질을 하구 처는 지주집 식모를 했소이다. 처음엔 강병률이란 지주집에 있다가 견딜수가 없어 뛰쳐나와 이 박지주밑으로 왔는데 천대와 박대는 마찬가지였소이다··· 고생끝에 다 죽게 된걸 장군님께서 저같은 천덕구리한테두 땅을 주셔서···》

박장반농민은 또다시 흐느끼였다.

《이번에 토지를 받았단말이지요?》

장군님께선 농민의 손을 잡아흔들며 기뻐하시였다.

《예. 밭 5천 7백평을 받았소이다.》

《제일 고생을 많이 하신분이니 제일 좋은 땅을 받으셨겠지요?》

《···》

웬일인지 박장반농민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한다. 그는 좋지 못한 땅을 그나마 먼곳에 있는 땅을 받았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낯빛을 흐리시였다. 그리고 농촌위원장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엄하게 핀잔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마당에 있는 농민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시였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이 집과 이 집 세간살이 등속을 몽땅 이 집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신분들에게 드리고 땅도 박지주네 땅 가운데서 제일 좋은것으로 드립시다.》

모두가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동의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지주집 본채의 제일 큰 칸과 그옆에 꺾어지은 집을 가리키며 그것을 박장반농민에게 주자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마루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서시였다. 《박경식》이라는 지주의 문패가 아직도 붙어있는것을 보셨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농민들의 고혈을 짜먹다가 도주한 친일지주놈의 이름을 한참 바라보시였다. 그리고 토방에 올라서서 번쩍 팔을 들어 착취자의 문패를 뜯어버리시였다. 흰 대리석바탕에 붉은 색으로 새겼던 지주의 문패는 두쪼각으로 쪼개지며 나떨어졌다.

《붓과 문패감을 하나 만들어오시오.》

장군님께서 마당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시자 농민들이 매끈하게 대패질을 한 판자와 붓을 가지고 왔다. 장군님께서는 마루에 판자를 눕히고 붓끝을 겨누시였다. 농민들이 술렁거리면서 우르르 마루앞으로 몰려왔다.

장군님께서는 드디여 붓끝을 힘있게 놀리시였다. 매끈한 판자에 《박장반》이라는 먹글이 활달한 획으로 새겨졌다. 환희의 설레임, 감격의 흐느낌···

나도 그 순간 감격의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어째선지 그때 불현듯 나는 유격근거지생활이 추억되였다.

장군님께서 두만강연안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제반민주주의적개혁들을 실시하시던 그때에도 내 가슴에 가장 큰 환희의 충격을 준것은 토지개혁이였다. 아마도 그것은 나도 농민의 아들이였기때문일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이미 유격근거지창설당시에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들에게》라는 구호를 제시하시고 일제와 친일주구,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할데 대한 혁명적인 토지개혁방침을 내놓으시였다.

나는 그때 왕청유격구 제5구 영창동에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유격구대표로 토지개혁에 참가했었다. 그때에도 한평생 땅없는 설음속에서 살아오다가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한을 품고 돌아간 부모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후 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무장투쟁을 하면서도 두고두고 그날의 격정을 이야기하군 하였다.

언제인가 장군님께서는 행군의 휴식참에 나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동무의 부모들은 소작살이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지. 우리 기어이 나라를 찾아 제 땅을 가지고 제 농사를 짓고싶어하는 농민들의 소원을 풀어주자구.》 하며 내 손을 꼭 쥐여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말씀하신 그대로 나라도 찾아주고 토지개혁도 해주시였다.

농민해방의 새 시원이 바로 이렇게, 장군님께서 걸어가신 저 백두산 혁명의 길에서부터 열려졌음을 박장반농민은 알고있는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성문리 농민들을 둘러보았다.

25년전 고유수와 오가자의 농촌길로부터 그이께서 항일혁명의 험난한 길을 걸으시며 조선농민들을 위해 바치신 그 많은 수고와 사랑에 대하여 여기 성문리사람들에게 말해주고싶었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때 벌써 장군님께서는 어제날의 머슴이였던 박장반농민의 문패를 기둥에 높이 달아주며 뜨겁게 말씀하고계셨던것이다.

《이제는 새 세상이 왔습니다. 이 집에서 지주 부럽지 않게 잘 사시오.》

장군님께서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시여 이윽토록 박장반농민의 문패를 바라보시더니 밭지경에 박을 표말을 한개 가져오라고 하시였다. 어느 농민인지 농촌위원회사무실에 많이 쌓아두었던 표말중 제일 큰 표말 한개를 올리였다.

《위원장동무, 박장반농민과 함께 차를 타시오. 벌판을 다니며 좋은 밭을 고릅시다.》

장군님께서는 손수 표말과 필묵을 차에 실으며 말씀하시였다.

나는 장군님을 모시고 벌판으로 갔다. 얼마후 장군님께서는 기름진 밭 5천 7백평을 잡아놓고 위원장에게 큼직한 돌을 주어오라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선 밭표말 네면에 《박장반 밭 5천 7백평》이라고 쓰고 신발에 진흙을 묻히며 최뚝을 한참 다니다가 맞춤한 자리에 표말을 세우시였다.

떵, 떵··· 장군님께서 굳은 돌덩이로 표말을 내리치는 소리··· 그 표말은 이 나라 농민들을 봉건의 질곡에서 영원히 해방시키는 력사의 리정표와도 같은것이다.

《이 밭을 영원히 부치시오.》

장군님의 뜨거운 말씀, 표말을 붙들고 흐느끼는 박로인···

 

부관은 가슴이 뻐근하여 큰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아버렸다. 3월 l0일 일지는 아직도 두장이나 남아있었다. 그날에는 부관자신이 격정을 금할길 없어 그토록 긴 글을 썼던것이다. 그날뿐아니라 3월 13일과 3월 15일에도 감상록형식의 긴 일지를 남기였다.

3월 13일에는 《토지개혁법령을 외곡집행하여 몰수하기로 한 평남도 룡강군의 어느 한 목사의 과수원을 장군님께서 도로 돌려보내주고 그를 축출하지 않도록 은정을 베푸시였다.》 라는 글로부터 일지를 써나갔다.

3월 15일에는 장군님께서 평남도 중화군 남곳면에 나가서 토지개혁사업을 지도하신 내용을 적어놓았다.

부관은 다시 일지에 눈을 주었으나 몇자 더듬어보지 못하고 머리를 쳐들었다.

장군님께서 차를 멈추게 하시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갈촌마을 논밭들이 앞에 나타나자 차에서 내려 걸어가자고 하시였다. 농민들이 받아안은 이 나라의 모든 농토를 실컷 밟아보시고싶어서였다.

부관은 서둘러 일지책을 품속에 찔러넣고 차에서 내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부관을 데리고 야산주변에 있는 밭들을 한참이나 돌아보시였다. 얼마후 그이께서 지름길이 나있는 잔솔이 덮인 둔덕을 넘어서자 농가마을이 내다보이며 쾡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뒤 비탈밭에서 지평선까지 아득히 펼쳐진 논밭에서 농군들이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돌아갔다.

장군님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흔연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지난 10여일간 토지분여가 시작되는 농촌마을을 다니면서 벌써 여러번째 목격하신 환희로운 광경이였다. 분명 이 봄과 더불어 이 땅의 눈물겨운 력사는 끝나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허리를 굽혀 한웅큼 흙을 쥐여보시였다. 보름전 이 마을에 왔을 때는 속흙이 꽛꽛이 얼어있었으나 그사이에 따뜻한 봄볕이 땅을 누비고 속속들이 스며들어서 얼음기가 말끔히 가시여졌다.

진득진득 찰기가 느껴지는 거무스름한 흙, 그 한줌의 흙이 얼마나 뜻깊게 들여다보이는지 모르시였다. 수천년 오랜 세월 농민들의 비극이 루적되여온 땅이기에 쌀알같은 그 흙알갱이들은 그네들의 설음과 눈물의 결정체와도 같은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불현듯 며칠전 저 평남도 대동군 시족면에서 머슴군의 문패와 표말에 붓글을 쓰던 일이 생각나시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몇자 글을 적기에도 비좁은 밭표말의 하얀 바탕이 마치 씨앗을 뿌리고 오곡백과를 거두어들일 새 력사의 광활한 농토로 바라보이시였었다. 그 표말이 그저 논밭지경을 구획하는 단순한 말뚝으로 보이지 않으시였다.

장군님의 눈앞에는 다시 보름전 갈촌마을 농민총회때 겨우 한일자를 알아보던 순박한 농군의 얼굴이 떠오르시였다.

《그 농군의 성도 박가였지? 그래 박근팔이였어. 》

장군님께서는 혼자서 입속으로 조용히 뇌이시였다. 련이어 그이의 눈앞에는 이 세상에서 지주만 없어지면 원이 없겠다고 피타게 절규하던 조순근의 혈서가 밟히시였다. 나어린 농토의 수난자 서분이, 그 가련하고 불쌍한 처녀가 혀아래 음성으로 가락을 뽑아부르던 재령강의 슬픈 노래소리가 들려오는것도 같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부지중 걸음을 떼시였다. 이 나라 농민들의 표말을 자신께서 다 박아주고싶은 강렬한 욕망으로 하여 그이께서는 마을을 향해 급하게 걸어가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