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12장 1


 

제 12 장

1

 

캄캄한 밤이였다. 먹물을 풀어놓은듯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였다. 조만식은 앞에서 전지를 번뜩거리며 왁새걸음을 하는 서강을 따라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옮기였다. 뒤에서 두사람이 뒤따르며 그의 신변을 살피였다.

조만식은 요즘 자주 깊은 밤에 브라운의 초청을 받았고 그때마다 서강의 안내를 받아 미군련락기관청사로 가군 했다. 그곳은 일체 사민과의 접촉이 엄금되여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데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았던것이다.

지금 브라운의 초청을 받고 그를 찾아가는 조만식은 기분이 자못 흡족했다. 그것은 자기네의 일이 미국사람들의 의도대로 되여가고있기때문이였다. 물론 송신일을 저승길로 보내지 못한 사실을 두고는 그도 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할것도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진척되고있는가. 3.1운동기념일에 따로 가지게 될 민주당원들의 모임을 준비하는 사업만 해도 그렇다. 조만식은 이 사업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했다. 의의가 크다고 하는것은 이날에 비로소 민주당이 세계앞에서 제 할일을 할수 있기때문이였다. 이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법령을 발포할수 있다. 이에 대처하여 민주당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뽀이코트성명을 낼것이다. 그러면 공산당은 틀림없이 강권을 발동하여 민주당을 제압하는 길에 들어설것이며 민주당은 때를 놓치지 않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민주주의정권이 아니라는것을 세상에 공포하면서 미국에 구원을 바라는 두번째 성명을 낼것이다.

미국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있다. 그런만큼 미국사람들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것이다. 하다 못해 조선문제를 국제회의에라도 상정시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비법적인 정권으로 선포할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는 조선땅에 공산정권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을것이다. 조만식은 량수겸장을 부르는것 같은 통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조만식은 두개의 성명을 준비하는 작전을 은밀히 벌리였다. 공산당이 눈치 못채게 벌리는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려운 일이였지만 조만식은 용의주도하게 그 일들을 해냈다. 그러지 않아도 브라운을 만나 자기네 당이 단행할 거사의 뒤받침을 요청하려던참인데 마침 일이 제대로 되여 조만식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있었다.

앞서 걷던 서강이 주위를 살펴보고나서 그를 으슥한 방으로 안내했다. 바닥에 양탄자가 깔리고 창문들에 두텁고 묵직한 카텐이 드리워있어 낮에도 이 방에서는 불을 켜야 한다. 이 방에서 미군정청의 지령이 조만식이와 같은 반역자들에게 전달되고 모략이 꾸며지고 각종 정보자료들이 종합되여 미군정청으로 날아가군 하였다. 낮이면 정원이 넓은 뜨락에서 흰 운동복을 입은 신사들이 정구를 치고 밤이면 늦도록 서양무도곡이 은은히 흘러나오는 이 단층집을 사람들은 그저 쏘미량군의 련락사업을 위하여 평양에 와있는 미군련락대표들의 집으로만 알았다. 또 그렇게만 믿고있었던것이다.

얼마후 머리가 벗어진 브라운과 조만식은 원탁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았다. 브라운은 새노란 눈알을 굴리며 서강에게 한참이나 영어로 씨벌여대였다. 조만식은 영어에 문외한이 아니였다. 그에게는 2년간 일본에서 영어학교를 다닌 경력이 있다. 그는 자존심때문에 브라운과 직접 영어로 이야기하는것을 삼가하였다. 그는 서강의 통역을 요구했다.

《브라운각하는 송신일의 테로미수사건에 유감을 표시한답니다.》

서강은 브라운이 하는 말을 정확히 조선말로 받아외웠다. 조만식이 브라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다.

《나역시 같은 심정이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저승으로 보낸것 못지 않게 값을 받아냈다고 할수 있네. 그러니 우리가 크게 손해본건 없네.》

서강이 영어로 번지자 브라운은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뽑아들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만식과 견해를 달리했다. 작전의 목적은 송신일을 사살하는것이였다. 송신일을 살려둔이상 얻은것이란 없다.

코마루가 날카롭고 우묵 들어간 눈확속에서 노란 눈알이 뱅글거리는 브라운의 얼굴인상은 무뚝뚝했다. 브라운은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언급하지 않고 민주당에서 따로 준비하는 3.1기념식에 대하여 질문했다.

조만식은 신심에 넘쳐 자기가 준비한 성명의 내용이며 기념식장소며 인원수, 연설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거기에 바쳐진 자기와 자기 민주당의 숨은 노력에 대하여 죄다 이야기했다. 그런데 브라운은 조만식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도중에 말을 꺾었다. 서강의 통역에 의하면 기념식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바로 그때문에 오늘밤 조선생님을 초청했답니다. 미군정청의 의견이라고 합니다.》

조만식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브라운과 서강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다시 말하게. 무슨 소린가?》

조만식은 서강을 쳐다보며 물었다.

《3.1기념식을 공산당과 함께 하라고 합니다.》

서강은 브라운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대꾸했다.

《?!···》

조만식은 서강의 말에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을 했다.

《난 리해할수 없네. 우리가 기념식을 포기한다는것은 지금까지 우리 당이 지켜온 자기의 지조를 줴버리는것과 같은거네. 나도 리해되지 않거니와 우리 당원들도 말을 듣지 않을거네. 내말을 그대로 통역하게.》

서강은 조만식의 이 말을 통역하지 않았다.

《조선생님, 미군정청에서도 다 생각이 있어 그러는것입니다.》

《난 그것이 미군정청의 생각이라는걸 알아야겠네. 여러말 말고 자넨 내말이나 통역하게.》

서강은 브라운과 몇마디 영어로 주고받았다. 조만식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서강이 조선생이 납득이 안가하는데 사실대로 말해주면 어떤가고 브라운에게 묻는것 같았다. 브라운은 노란 눈알을 굴리며 서강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일을 망치고싶어서 그러는가고 했다. 서강은 할수 없다는듯 조만식을 돌아보며 약간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그건 말할수 없답니다. 어쨌든 민주당원들도 모두 공산당에서 조직하는 3.1기념식에 참가하랍니다.》

조만식은 갑작스레 모욕감이 치밀었다. 그는 온몸에 닭의 살이 돋아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뽑아물었다. 이런 모욕을 당해보는것이 처음인듯싶었다. 지금까지 미국을 진심으로 받들고 미국인들에게 성실해온 자기였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자기는 한개 정당의 유력한 당수였다. 그런데 련락장교인 브라운이나 그의 통역인 서강이조차도 분명 알고있는듯 한 미군정청의 사업내막을 비밀에 붙여놓고 불철주야 성심성의로 준비해오던 당의 전략적인 거사를 덮어놓고 중지시키니 될말인가. 그로서는 전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단독기념식은 미군정청의 동의밑에 발기되고 추진되여온 일이다. 더구나 참을수 없는것은 민주당원들도 공산당에서 하는 행사에 모두 참가해야 한다는 말이였다. 모욕이면 이런 모욕이 어데 있단말인가.

《유감이라고 전하게, 난 돌아가겠네. 돌아가 위원들과 의논해보고 당의 결심을 알리겠네.》

조만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있고싶지도 않았고 그 문제를 놓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싶지도 않았다. 조만식이 훌 일어서는 바람에 놀란것은 브라운이였다. 그는 서강을 마주보며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서강이 영어로 한참 주어섬겨서야 영문을 알았는지 일어서 조만식에게 다가오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조만식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도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조만식은 두루마기자락을 여미며 당장 나오려고 하다가 못이기는척 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조만식이 자리에 앉자 브라운은 방안구석에 있는 벽장문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샴팡주 한병을 들고 돌아왔다. 유리잔 두개에 따르어 하나는 조만식에게 권하고 한개는 자기손에 잡았다. 어서 들자고 턱짓을 했으나 조만식은 자기는 술을 안마신다고 했다.

《선생님, 이건 녀자들도 마시는 청량음료나 한가집니다.》

《나두 모르지 않아.》

조만식은 잔을 들어 입에 약간 대였다 뗐다. 그가 잔을 드는것을 보고 브라운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강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조선생님, 각하께서는 조선엔 산이 많아 그런지 사람들의 성미가 급하다고 하십니다.》

《성미가 급해서가 아니라 공산당과 어울리는것이 싫어 그래.》

조만식은 서강에게 이러며 브라운의 얼굴을 살폈다. 서강이 조만식의 말을 브라운에게 통역하였지만 브라운은 술잔을 들고 웃기만 했다.

얼마후 조만식은 브라운과 악수를 하고 일어서 나오고말았다. 서강이 뒤따라 나오며 조만식을 위로했다.

《선생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게 다 조선생과 민주당을 위해서입니다. 3.1운동기념식날로 공산당정권은 끝장이 납니다.》

《뭐?!》

조만식은 걸음을 멈추고 서강을 돌아보았다.

《더 묻지 말고 그쯤 알아두십시오. 아무렴 미국사람들이 선생님과 민주당편에 손해되는 일을 할가봐 걱정이십니까. 안심하십시오. 드디여 기다리던 날이 옵니다. 조직은 공산당이 했지만 3.1운동기념식은 이제 민주당의 기념식으로 될것입니다. 그러니 연설문이랑, 성명서랑 다 가지고 참석해야 합니다.》

《응!···》

조만식은 그제야 귀가 솔깃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대하던 그 어떤 거대한 사변이 눈앞에 박두한 듯하여 가슴이 설레였다. 그러자 노여움을 샀던 방금전의 자신이 후회되였다.

《그런데 자네는 왜 진작 나한테 그 암시를 주지 않았나?》

《극비에 속하는 문젠데 함부로 입을 놀리면 되겠나요.》

《하긴 그렇지, 그 량반들이 우리에게 손해되는 일이야 하지 않겠지. 비밀이라니 구태여 캐여묻질 않겠네.》

노염과 수치감이 말끔히 사라져버린 조만식은 가슴설레이는 흥분을 안고 힘있게 뜨락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