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봄-제11장 5


 

제 11 장

5

 

장군님의 접견수락을 받은 조만식은 《담판》에 상정시킬 문제를 재확인하였다.

《민주당은 정강을 가진 당으로서 존엄있는 하나의 정치세력이다. 공산당이 굳이 토지개혁을 단행한다면 민주당은 자기의 정강을 실현해야 할 사명감으로부터 만천하에 당의 립장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주당원들을 모든 정권의 자리에서 소환할것이다. 이로부터 초래되는 모든 후과에 대해서는 공산당이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장군님께서 심사숙고하시고 조성된 사태에 비추어 바른 대책을 취해주기 바란다.》

조만식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장군님이 자기의 주장을 일축해버릴수 없으리라는 흥분이 가슴을 사로잡았다. 심복들도 같은 심정이여서 그의 방으로 뻗닿게 드나들었다. 그들은 조당수가 이번에 그 주장을 기어이 관철시켜야 하며 또 조당수로서는 능히 그렇게 할수 있다고 괴여올렸다. 조만식은 상전과 심복들의 떠받들림속에서 장군님을 찾아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크게 차비를 갖출것이 따로 있는것은 아니였다. 외모는 이미 단정하게 갖추어져있었고 장군님을 만나 해야 할 말도 머리속에 모두 준비되여있었다. 그래도 그는 비서에게 서류들은 가방안에 넣으라고 이르고 거울앞으로 다가가 머리에 동인 수건을 풀어서 고쳐매고 두루마기앞섶을 쓰다듬으며 주위에 둘러선 심복들에게 말하는것이였다.

《헤여지지 말고 모두들 기다리게. 내 이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테니.》

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났다. 조만식은 자기의 운전사가 발동을 걸어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발 먼저 밖으로 나갔던 그의 비서가 달려들어오며 김장군님께서 오신다고 소리쳤다.

《김장군님께서?!》

뜻밖의 소리에 조만식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접견을 요구한것은 자기인데 장군님이 찾아오다니? 심복들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 입을 벌리고 마주보았다.

《어서들 방을 거두게. 아니, 방은 나와 비서가 거두고 자네들은 자리를 피하게.》

조만식은 심복들을 몰아대며 책상우의 서류들을 주섬주섬 모아놓았다. 그리고는 황황히 밖으로 나갔다. 벌써 자동차에서 내린 장군님께서 조만식이쪽을 향해 곧추 걸어오셨다. 곤색양복에 넥타이를 매신 장군님의 모습은 류달리 환해보였다. 조만식은 묵례로 례의를 표했다.

《황송합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찾아와주시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지요.》

《내가 와야지 나이많은 조선생이 날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조만식의 손을 잡고 깍듯이 존대의 말씀을 하시였다. 조만식은 황송한듯 두손으로 장군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가까이 만나뵈올 때마다 무한한 도량이 느껴지는 장군님의 너그러운 인품을 대하자 조만식은 꼬부라들고 옥맺힌 자기의 마음마저 한순간에 풀리며 알수 없는 아량이 생겨나는것 같았다. 그는 장군님앞에서 너그러워지는 자기의 마음을 힘들게 다잡아야 했다.

(하늘이 마련해준 이 운명의 자리에서 내가 공산당에게 일보라도 양보한다면 공든 탑이 일조에 무너지게 된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제부터 장군님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도 알고있었다.

조만식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기고름을 고쳐매면서 부디 모든 일이 잘되도록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리고나서 담찬 걸음으로 앞장에 서서 장군님을 방으로 안내하였다.

《량해해주십시오. 방이 좀 루추합니다. 장군님께서 친히 이렇게 나오실줄 모르고있다보니 미처 방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방안에 들어와서도 두루마기를 벗지 않았다. 장군님께 애민애족의 《갑옷》을 떨쳐입은 자기의 모양을 그대로 보이고싶어서였다. 그는 장군님께 쏘파를 권하였다. 방안에는 그간 기물이 늘었다. 처음에는 왜놈재산을 다 내다 불사르라고 해서 본래 있던 가구들을 다 내버렸댔지만 차츰 도정권의 기강을 세우는데는 기물을 홀시해선 안된다며 비서가 이것저것 들여다놓아 이젠 가구 비품이 적지 않았다. 벽에도 대나무그림족자와 《대동단결》이라는 추사체의 서예가 한폭 걸려있고 창문에는 분홍색 비단카텐이 드리워있었다. 조만식은 장군님앞에 담배를 꺼내놓는다, 비서를 시켜 차를 가져오게 한다 바삐 돌아쳤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무슨 말부터 시작할것인가, 무슨 말로부터 꼭지를 떼야 장군님으로 하여금 《민주당》의 립장을 심중하게 받아들일수 있게 할것인가 하고 생각을 굴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중절모를 벗어 상우에 놓으며 조만식이 권하는 차잔을 옆으로 밀어놓으시였다.

《실은 나도 조선생을 한번 만나자던참이였는데 잘됐습니다. 무슨 문제로 절 만나자고 하셨는지 어서 말씀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꺼내시였다. 조만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는 소리없이 내심으로 기도를 드리고 장군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군님은 한 당파의 령수를 초월한 민족의 영웅이시오. 누구도 그걸 의심하지 않지요. 때문에 나는 민주당 당수로서 우리 당의 립장을 장군님께 통보하는것을 의무로 간주하는바입니다.》

조만식은 이렇게 이야기의 허두를 떼고 장군님 얼굴을 또다시 피끗 바라보았다. 조용히 듣고있는 장군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으시였다. 조만식은 안심하고 다음말을 이었다.

《우리 당은 자기의 정강을 가진 정치세력입니다. 하나의 정당이 다른 당의 시녀로 된다는것은 생각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조만식은 여기서 또다시 말의 단락을 짓고 장군님의 표정을 넌지시 살피였다. 조만식의 이야기에는 첫마디부터 가시가 돋혀있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웃으며 조용히 물으시였다.

《그러니까 조선생은 지금 공산당이 민주당더러 시녀가 될것을 강요하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시오.》

《내 장군님앞에서 뭘 서슴어하겠습니까.》

조만식은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 서둘러 의자를 당겨 나앉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공산당에서 시도하고있는 토지개혁문제 하나를 놓고도 말할수 있습지요. 공산당은 응당 우리 민주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고려가 없지요. 고려하고 참작할대신 자기 당의 견해에 추종하기만 바라면서 자기의 주장과 반대되는것은 무작정 반인민적인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독선이며 모든 당이 자기에게 복종할것을 요구하는 강압입니다.》

조만식은 자기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아지는것을 감촉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말은 공산당을 빗대놓고 시녀요 뭐요 했지만 결국 장군님더러 토지개혁을 그만두게 해달라는 강한 요청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응대하시였다.

《조선생은 무언가 오해하고있습니다. 토지개혁을 하자는 공산당의 립장은 농민들의 한결같은 소원과 지향을 반영한것입니다. 공산당은 워낙 그 리념에 있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당입니다. 그래서 토지개혁도 하자는게 아닙니까. 제 말이 리해됩니까? 이왕 말이 난김에 물어봅시다. 조선생은 왜 토지개혁을 그렇게도 마음에 없어합니까. 왜 불만을 가지고 뒤에서 성명을 내겠다, 민주당원들을 정권기관에서 소환하겠다 하며 훼방을 서슴지 않는것입니까? 난 오늘 조선생한테서 그 리유를 좀 자세하게 들어야 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조만식의 앞으로 한발 다가앉으시였다. 방안의 공기는 잔뜩 잡아당긴 활줄처럼 팽팽해갔다. 조만식은 차라리 잘되였다고 생각하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인데 장군님이 먼저 터쳐놓은것이였다. 옆방으로 몰려가 이쪽방에 귀를 기울이고있는 조만식의 심복들도 가슴을 조였다. 그들도 이야기가 시작부터 직통으로 들어가는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조선생이 마음속으로 질시하는 공산당에서 하는 일이 돼서 그러는지 아니면 땅을 떼우고 나앉을 지주들이 불쌍해서 그러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조선에 와있는 미국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때문에 그러는지··· 어쨌든 리유가 있을것입니다. 그걸 말씀해보십시오.》

《장군님의 예측이 다 옳습니다. 어느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나는 장군님이 공산당의 책임석을 한석 지니고계시니만치 공산당의 무분별하고 비인도주의적인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지금 공산당은 나라와 민족을 사분오렬시키고있습니다.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질것 같은 불안한 시국에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라는 동란을 몰아와서 남과 북을 딴 세상으로 만들고 북조선안에서도 지주와 농민을 철천의 원쑤로 갈라놓으려고 하지요. 공산주의자도 공산당이기전에 먼저 조선사람이 되고 선을 도모하는 인간이 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만식은 의자등받이에서 털써덕소리가 나도록 내던지듯이 잔등을 뒤로 젖히였다. 앙바틈한 가슴이 턱밑에 도드라져올랐다.

《그러니까 조선생은 민족의 운명이 걱정되여 그러신다는 말씀인가요?》

《예, 나의 한평생은 그저 그 걱정이지요. 나라가 해방되니 오히려 그 걱정은 더 커져 잠을 못자고 수저를 못듭니다. 광복되기전에도 주의주장때문에 서로 시비중상을 일삼다가 칼부림을 벌려오기를 열도깨비 날치듯 했는데 이제 또 나라도 세우기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상사람들이 이 백의민족을 얼마나 역겹게 보고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당쟁에 망한 나라!

장군님, 이 민족이 또다시 깨진 기와장처럼 속절없이 흩어질가봐 나는 전전긍긍합니다.》

조만식의 이마에서는 피줄이 도드라져오르며 붉은 반점들이 번져갔다. 눈굽에는 귀밀알같은 눈물이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흔들거렸다.

장군님께서는 조만식의 눈귀에 맺힌 이슬을 의미깊이 지켜보시였다.

《자기 민족에 대한 조선생의 마음이 그렇게 절절하다면 그 숭고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하고싶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것은 이 나라의 당쟁을 피타게 개탄하는 조선생자신이 지금 당쟁을 일으키고있는것입니다. 그것은 조선생이 우리 민족의 현 상태를 모르고있고 나라를 망하게 한 당쟁의 근원을 모르고있기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잘 모르고있습니다.》

《아, 아니 내가 제 민족을 모르다니요? 내 민족의 력사를 모르단요?》

《내가 보건대는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까밝히며 이야기해봅시다.》

장군님의 침착한 목소리가 조만식의 높은 숨소리를 타고 저력있게 울리였다.

《아니요. 장군님, 난 민족을 알아도 잘 압니다. 난 한평생을 이 민족의 불운을 가시자고 바쳐온 사람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공없는 배를 탄 모양으로 창해에 가랑잎같이 떠서 이 20세기라는 난바다로 하루하루 흘러가고있습니다. 이 누구도 돌보지 않는 창해의 일엽편주, 조선을 놓고 60평생 울어온 조만식이가 조선을 모른다고요? 그래서 내 스스로 당쟁을 일으킨다구요?》

《조선생, 이 민족을 사랑하고 알고있다면, 진심으로 인도적인 정책을 바라고 당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덮어놓고 〈단결〉하자는 저 견해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조만식의 등뒤에 높다랗게 걸려있는 흰 비단족자를 손을 들어 가리키시였다.

《아니, 민족의 단결에 저이상 합당한 구호가 또 어디 있단 말씀이시오?》

《조선생, 나는 언제인가 송신일선생과 토지개혁에 대한 론의를 하면서 〈흥부와 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흥부는 농민이고 놀부는 지주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이 만약 지주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받아온 이 나라 농민들의 수난의 력사를 알고있다면 토지개혁을 반대할수도 없고 〈대동단결〉만을 주장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주장하는 〈대동단결〉이란 결국 가난한 농민들더러 지주에게 반항하지 말고 계속 마소처럼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소리입니다. 기만적인 구호입니다. 우리 나라 근대력사를 돌이켜보아도 〈대동단결〉을 주장한자들은 류례없이 인민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대부분이 종당에는 매국의 길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최린이도 그랬지요. 지금 리승만이도 민족을 팔아먹고 인민을 탄압하는 그런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대동단결을 부르짖습니다. 선생이 과연 리승만의 속심을 전혀 모르고있습니까.》

석상처럼 앉아있던 조만식은 깍지 낀 두손을 풀고 두루마기자락을 당황히 쓰다듬었다. 이윽고 조만식의 눈길이 허공에서 장군님의 시선과 부딪쳤다. 조만식의 이마에서 물기가 번들거리였다.

《조선생은 지금 지주의 땅에 얽매여 굶주리며 죽어가는 농민들이 수자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이 북반부에서만도 600만인구가 됩니다. 그런데 이 600만의 농민이 4만호가 좀 넘는 지주들한테서 이리 뜯기우고 저리 뜯기우다가 이젠 더 못참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그래 〈대동단결〉을 위해 그걸 외면해야 옳습니까. 조선생이 진정으로 60평생 이 민족의 불행을 놓고 울었다면 우리 조선농민들을 구원하는 토지개혁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지지해나서야 할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심중한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생이 조선농민을 모르는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것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용서할수 있어도 후자의 경우라면 사실상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라면 선생이 흘린 눈물이 죄다 거짓으로 되기때문입니다.》

《으음-》

조만식은 눈을 지리감으며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장군님께서 이렇게 무자비하고 날카롭게 말씀하실줄은 좀처럼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수삼차 만나뵈웠지만 심각한 론의를 하는 마당에서도 무슨 말씀이든 모를 죽여가지고 부드럽게 하던 장군님이시였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신가? 마지막 판가리를 하시자는것인가. 하긴 나의 숨박곡질이 너무 오래 지속되였지···

조만식은 자기가 지금 이 순간 정치무대의 가장 극적인 장면에 들어섰다는것을 의식하며 한껏 긴장해졌다.

《조선생은 저 재령벌 양평리의 한 의원으로부터 이 나라 농민들을 구원해달라는 하소의 편지를 받아보셨지요? 그곳 농민들이 누구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우리도 농민들로부터 그러한 편지들을 수백통 받아보았습니다. 조선생이 알고있는 조순근농민은 혈서까지 써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이 세상에 지주라는 씨종자를 없애달라고 했습니다.》

두루마기자락을 만지고있던 조만식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있던 이름을 장군님의 말씀을 통해 듣게 된것이 너무도 놀라와서였다. 조순근, 양평마을농민들··· 조만식은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고 지내왔다. 조순근이가 왜 혈서를 써가지고 장군님을 찾아갔단말인가. 거기에는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서만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만식은 그에게 세상에 비밀로 되는 여러가지 내흉스러운 편지들을 썼었다. 공산당과 정치적으로 대결하는 문제, 농민들을 기만하여 3.7제를 무난히 넘기는 문제 등 극비의 글들이였다. 조만식은 서만호가 황해도의 대지주일뿐더러 아들이 미군정청에 있기때문에 자기 활동의 발판으로 리용하기 위해 그런 편지들을 서슴지 않고 보내였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뼈저린 후회가 일어났다. 극비의 편지들을 보는 즉시로 태워버리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그 미련한 사람이 무슨 실수를 했을지 모른다.

(그 편지가 혹시 농민들의 손에 들어가서 루설된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조순근이가 왜 혈서를 써가지고 장군님을 찾아갔겠는가?)

조만식은 온몸에 진땀이 확 돋아났다. 그는 자기가 이미 헤여날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였다.

《조선생, 〈지주를 없애라! 농민에게 땅을 달라!〉 이것이 바로 막을수 없는 오늘의 민심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먼저 우리는 토지개혁을 하자는것인데 소수인원들이 그것을 반대하고있습니다. 반대만 하는것이 아니라 정치적대결로 나섭니다. 〈공산당에서 토지문제결정서를 내놓으니 우리도 소작세칙을 내놓자. 공산당에서 토지개혁강령을 발표했으니 우리는 그걸 두드려엎는 강령을 내놓자〉 이렇게 말입니다. 심지어는 공산당내의 불평분자들을 찾아다니며 꼬드기고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누가 〈당쟁〉을 야기시키고있고 누가 민족의 단합을 방해하고있습니까?》

조만식은 장군님을 외면하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였다. 조순근농민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으로 단락을 짓고 일반적인 정치이야기로 번져진것이 다행이였다. 서만호와 오고간 극비의 편지에 대해선 아직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되였다.

조만식은 자유롭게 말할수 있었다.

《장군님!》

그는 분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장군님은 나를 오해하고있습니다. 나는 그 어떤 정치적대결을 위해 소작세칙이나 토지강령을 내놓은것이 아닙니다. 만민평등의 리치로 볼 때 공산당의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기때문에 지주에게도 농민에게도 다같이 리로운 인도주의적인 법령을 꾀했던것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지주와 농민은 리해관계에서 상극되는데 어떻게 지주에게도 농민에게도 다같이 리로운 그런 법령을 만들수 있습니까. 그러다보니 조선생의 소작세칙은 지주본위의 세칙이 되여 수백만 농민들로부터 배격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문에 조선생은 인민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권선징악〉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악한자는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조선생이 지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있습니다. 소수의 지주가 숱한 땅을 혼자서 다 걷어안고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고 만민평등을 부르짖는것은 언어도단이며 인민을 속이는 일입니다.》

《나는 토지개혁을 반대하는게 아닙니다.》

조만식은 서둘러 발명하였다. 그는 장군님과 정치적론쟁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야기를 할수록 자기의 깨끗치 못한 본색이 드러나기때문이였다.

참으로 봉황새앞에 나선 참새의 존재와 같은 렬등감에 사로잡혀 그는 피끗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자기의 심복들이 밖에서 귀를 도사리고있을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장군님과의 접견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있음을 절감하였다. 조만식은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싶었다.

《나는 토지개혁을 반대할것이 아니라 통일정부가 선 다음에 하자는것입니다.》

조만식은 자기의 이 변명이 처음에 한 말들과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있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계속하였다.

《모든 민주개혁은 통일정부가 선 다음에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군님은 보매 여기 북에서 먼저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그 기반우에서 로동자, 농민에 의거해서 장차 통일정부를 세우실 구상인것 같은데 무식하고 정치를 모르는 로동자, 농민이 정부를 받들어내겠습니까. 때문에 북에서 민주개혁을 하기전에 통일정부를 먼저 수립해야 하되 반드시 련합국측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조만식은 이 말을 옮기기가 무척 괴로웠다. 그는 얼마전만 하여도 민족주의자의 존엄을 보이며 소리높이 신탁통치를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자기의 정치적리념을 굽히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그러한 조선을 만들자면 어차피 미국에 운명을 의탁하지 않을수 없게 된것이였다.

《특히 미국은 조선문제해결에 관심을 돌리고있지요. 우리 민족은 현대국가를 세우고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것만큼 나는 미국이 우리 반도의 절반땅에나마 진주하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나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정부를 수립할것을 주장하는바입니다.》

조만식은 마마자국이 짙은 얼굴에 랭소를 짓고 자기의 두루마기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미국의 지원을 바라는 자기의 발언과 두루마기가 어울리지 않는것 같았다. 장군님께서는 알릴듯말듯 하게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조만식은 가슴속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서글픈 마음때문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는 자기가 장군님앞에서 자가당착의 모순된 말을 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고 그래서 벌레가 기여다니는것처럼 낯가죽이 간지러웠다.

《미국의 지원이라? 조선생으로서는 그 말을 하기가 몹시 괴로웠을것입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건설해야 된다고 하던 조선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은 나더러 내 나라의 로동자, 농민을 믿을수 없기때문에 미국에 의탁하자고 말씀하시는군요.》

장군님께서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그이께서는 카텐이 드리운 창문앞을 무겁게 거니시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짚으실 때마다 마루바닥이 삐걱삐걱 신음소리를 내며 가볍게 떨었다. 제노라 하던 한 민족주의자의 입에서 제 민족의 로동자, 농민을 모욕하고 미국을 우러러보는 말을 듣게 되니 가슴이 아프시였다,

조만식은 장군님의 무거운 발걸음에 시선을 쫓으면서 마음을 조이였다.

《조선생, 그전에 산에서 싸울 때 어느 한 민족주의자가 저에게 장군의 정치적좌우명은 무엇인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때 나의 좌우명은 우리 인민을 믿는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애당초 혁명을 시작할 때부터 조순근이와 같은 로동자, 농민들, 우리 인민들을 믿는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는 민족주의자들도 믿었기때문에 손을 잡고 싸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모든것을 믿고 그에 의거해서 싸웠습니다. 이 좌우명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지난날에도 우리 믿음을 배반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백이면 한두사람뿐이였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미국에 맡길수 없습니다. 제 나라의 로동자, 농민을 믿지 못해 미국에게 의탁하다니요? 그런 말이 어떻게 조선생의 입에서 나올수 있습니까.》

장군님의 목소리는 격해지시였다. 시종 부드러운 빛이 떠돌던 그이의 안광에 벙긋하는 푸른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만식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선생, 수난에 찬 우리 나라의 근대력사를 돌이켜보십시오. 미국은 우리 나라를 위해 조미관계가 시작된 때로부터 리로운 일을 한적이 한번도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조선을 넘겨다보기 시작한것은 지난 세기 30년대초였지요. 일본과 무역관계를 개시하던 그 무렵에 벌써 미국은 조선을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은 이른바 기독교전도의 명목으로 선교사들을 조선에 들여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서 저들의 침략발판을 닦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면서 별의별짓을 다했습니다. 못된짓을 하던 선교사들은 애국적인 조선농민들한테 맞아죽기도 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침략의 구실을 찾고있던 미국은 프랑스와 함께 련합토벌군의 파견을 획책했습니다. 그것이 1866년의 일이였습니다.》

《장군님, 그건 편견이라고 봅니다. 그네들은 우리가 갓쓰고 당나귀타고 다니던 시절에 전기불을 보게 해주고 광산을 개발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워주었습니다.》

조만식은 몽틀몽틀한 손가락으로 서류가방을 풍금타듯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자기의 크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살이 빠져서 겉가죽이 밀리긴 하지만 아직도 흠집 하나 없이 처녀애들 손처럼 매끈했다. 바로 그 손으로 이 땅에 미국사람들과 함께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자기의 인생이 통채로 시궁창에 구겨박힌다는것을 생각하며 놀라고있었다. 운명의 동아줄은 이미 오래전에 조만식을 그렇게 미국이란 나라에 얽매여놓은것이다.

《허허··· 조선생은 그들이 준것만 생각하고 자기것을 빼앗긴것은 기억못합니까. 내가 알건대 그들은 운산광산에서만도 수십t의 금을 채굴해갔습니다. 미국인들의 덕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조선생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있는것은 그들이 우릴 위해서 좋은 일을 했기때문에 생긴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그때 불어넣은 숭미사상때문이지요. 미국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해되는 일밖에 한것이 없습니다.》

《해되는 일밖에 한것이 없다니요?》

조만식은 놀라서 부르짖었다. 그는 본의아니게 또다시 위험한 론쟁에 말려들어가는 자신을 생각하며 불안스러워하였다.

《그것이 리해되지 않는다면 제가 이야기를 좀더 해야 하겠습니다. 미국이 청나라를 내세워 천진에서 리조와 통상조약을 맺은것이 1882년입니다. 그때 조약에는 두 나라가운데서 어느 한 나라가 제3국에 의해서 비법적인 취급을 받을 경우 호상원조를 약속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여있었습니다. 그후 조선에 대한 모든 조약, 문서, 결의, 선언들에는 조선의 〈독립〉이라는 말이 수많이 사용되였습니다. 그러나 천진조약이 체결된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립에 대한 인정은 한갖 말공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언제 그들이 그 약속을 지켜주었는가.》

장군님께서는 조선에 대한 미제의 비우호적인 력사를 계속 더듬어나가시였다.

돌이켜보면 미국이란 나라는 청일전쟁, 로일전쟁 등 조선을 둘러싸고 동란이 일어날 때마다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꾀하면서 조선을 침략하도록 키질을 해준 나라였다. 로일전쟁초기 미국대통령이 조선정부에 보낸 편지에는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일본에 효과적으로 간섭할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그 짧은 표현속에도 조선을 업수이 여기고 수난당하게 한 미국의 근대력사가 응축되여있다.

1905년 타프트-가쯔라협정에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공식적으로 동의하였다. 조선에서 3.1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미국무성은 서울주재 미국령사에게 조선사람들을 돕지 말고 일본통치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라는 여러가지 고약스러운 편지들을 보냈다. 이러한 실례는 너무도 많아서 장군님께서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비우호적인 죄악의 력사를 하나하나 꼽아가다가 중도에서 그치시였다.

《미국이 지난 100년동안 조선을 위해서 한 일이란 대체로 이러루한 일들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비우호적이고 가장 신뢰감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의 운명을 미국에 의탁하겠다구요?》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멈추고 넌지시 시선을 돌리시였다. 조만식은 뿌연 눈빛으로 장군님을 쳐다보고있었다. 그는 장군님의 정연한 론리와 비상한 기억력에 우선 탄복하였다. 그리고 그 어느 하나도 론박할수 없는 력사적인 사실이라는데 놀랐다.

그는 은근히 겨드랑이밑으로 진땀을 뽑았다. 한참 생각을 굴리던 그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나서 말을 꺼냈다.

《장군님, 그네들의 정치라고 어떻게 백이면 백 다 훌륭하기만 하겠습니까. 더우기 정치라는거야 정책에 따라서 이렇게 될수도 있고 저렇게 될수도 있지요. 더구나 우리가 제구실을 못해서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통채로 내준 때에 그네들인들 뾰족한 수가 있었겠습니까?》

조만식은 미국의 허물을 들추는것을 자기 살을 베여내는것만치나 아파했다. 장군님께서는 역겨운 생각이 들어 허거픈 웃음을 지으시였다.

《그러면 미국이 오늘에 와서는 신뢰감있게 우호적으로 나오고있습니까? 조선생도 아시지요. 제2차 세계대전의 결속을 앞두고 열린 까히라, 테헤란, 얄타 그리고 포츠담회담들에서 미국도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데 대하여선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벌써 그 약속을 어기고 지금 남조선에서 군정을 실시하고있습니다. 조선생도 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조선사람들이 몽매하기때문에 자기네가 군정을 하지 않을수 없다는것입니다. 독립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모욕이 어데 있습니까. 우리 민족을 모욕하는 미국의 말을 조선생이 그대로 받아외우고있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미국은 작년 12월에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지지하고 돌아와서는 그걸 지지하는 인민들을 탄압하고있습니다.》

《장군님, 그 결정이라는거야 쏘련측이 제출한 결의초안이 통과된것이구 또 신탁통치를 내포하고있으니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가요. 그래서 그네들도 불간섭으로 나오는것으로 보는데요.》

《허허허···》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웃으시였다. 말끝마다 리유가 다 있으니 더 상대할 의욕이 별로 안나신다. 그이께서는 조만식의 두루마기를 바라보며 저 옷은 왜 벗지 않을가 하고 생각하시였다. 저게 무슨 민족정신의 상징이라도 되는것인가. 그렇다면 저 옷을 벗고 미국을 비호하는것이 격에 더 어울릴텐데···

장군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조만식의 앞으로 다가서시였다.

《조선생, 그렇게 아전인수격으로 리해를 하지 마십시오. 〈신탁〉이라는 말은 미국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리입니다. 세계여론이 두려워 결정에 동의하고 돌아와서는 뒤에서 외곡중상하고있습니다.》

《장군님, 내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그래도 그네들은 공산당같이 우리 민족을 계급투쟁의 동란에 휘몰아넣지는 않습니다. 난 미국을 따르면 따랐지 공산당과는 손을 잡을수가 없습니다.》

조만식의 뾰족한 혀끝이 입술사이에서 독벌레처럼 날름거렸다.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번쩍 들고 또다시 서슴지 않고 배족적인 말을 내뱉는 그의 작은 입을 한참이나 바라보시였다. 자기 동족은 싫다면서 미국은 따르겠다구? 어떻게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수 있는가.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혹시 잘못 듣지나 않았는가 해서 머리를 기웃해보시였다. 그러나 정적이 흐르는속에 그의 목소리는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조만식의 두루마기도 다시 훑어보시였다. 흰 무명옷인데 우정 짧게 지어서 그런지 무릎우에서 더 내려가지도 못했다. 언젠가 사진에서 본 리승만의 옷차림이 련상되시였다. 안에는 양복을 입고 다리엔 대님을 매고 구두를 받쳐신은우에 짧은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얼치기옷차림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더 철저한가. 속에도 한복에 비단조끼를 받쳐입고 머리에도 흰수건을 썼다. 하지만 미국을 따르겠다는 말은 리승만이의 말과 한글자 어긋나는게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두루마기입은 《애국자》가 가련해보이여 말씀을 못하시였다. 장군님께서 말씀을 안하시자 조만식은 자기의 심정을 리해해주시는것이 아닌가 하는 순간의 착각이 일어났다.

《장군님, 장군님은 그네들의 언동을 막아내실수 있습니다. 막아낼수 있구말구, 저 붉은 마귀들이 이 민족을 데리고 지옥으로 가고있습니다. 지옥으로.》

조만식은 절절히 부르짖었다. 밭은 목에서 쉰소리가 거칠게 울려나왔다. 작은 몸은 경련을 일으키듯 모질게 떨었다.

《조선생, 흥분하지 마시오. 지옥으로 가는건 공산당이 아니라 리승만이같이 외세를 업고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생도 말로는 민족을 아끼고 나라를 사랑한다지만 벌써 조선생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고있는 애국심이 없습니다. 비였습니다. 그걸 미국에 갖다바친지 오랩니다. 선생에게 남은건 애국이라는 빈 간판뿐입니다.》

《아니, 내가 애국심을 버렸다구요? 그걸 팔았다구요. 아! 통분하오.》

조만식은 주먹으로 자기 두무릎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지 마십시오. 분한것은 우립니다. 선생의 가슴속에도 언젠가는 애국심이 없지 않았을테지요. 그런데 이젠 싸늘하게 식어서 재티만 날리고있습니다. 그 식은 재무지우에 미국이라는 검은 비석만 세워져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서도농민들이 모두 민족정신의 표대처럼 입고다니는 선생의 두루마기가 거짓이라고 하는데 인민의 눈을 속일수 없는것 같습니다. 선생자신이 자기의 모든것을 더럽혔습니다. 인생도, 량심도, 애국의 신념도···》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끝내고 책상주위를 돌아나와 떠날 차비를 하시였다. 조만식은 책상가위손을 두손으로 움켜잡고 입을 앙다물었다. 너무도 뜻밖의 타격에 한생을 지팽이처럼 의지하고있는 마음의 기둥이 와지끈 무너져내리는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천길나락으로 내리구는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책상쥔 손을 더욱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내 두루마기가 거짓이라고? 언제부터 내가 그런 소리를 듣게 됐는가?)

불현듯 조만식은 왜정말기에 《매일신보》에 쓴 자기의 친일격려문을 생각했다. 여태 그것을 자기가 쓰지 않고 왜놈들이 써서 자기 이름으로 냈다고 교묘하게 변명해왔던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게 끝장났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아니다. 난 애국자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민족을 위해서 한생을 바치는 사람이다. 민족을 생각하는 내 마음은 백옥과 같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해!)

조만식은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지리감았던 두눈을 떴다. 장군님께서는 벌써 방문을 열고계시였다. 순간 그는 장군님을 이대로 보내면 조만식이란 이름이 영원히 오점으로 얼룩질것 같아 몸을 떨면서 다가들었다.

《장군님, 한마디만 더 들어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였다.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장군님, 나에 대해선 아무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약소국인것만은 틀림이 없지요. 우리가 어떻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뿌리칠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완전독립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그들이 쥐고있는것도 사실이고 또 그네들의 군대가 이 땅에 와있는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그들과 엇서서는 조선을 건지지 못합니다. 다시한번 말씀을 드리건대 나와 나의 당의 간절한 소원이니 토지개혁을 하더라도 쏘미공동위원회가 끝난 뒤에 단행해주십시오.》

조만식은 충혈된 작은 눈알을 굴리며 장군님을 지켜보았다. 그의 넉두리같은 긴 사설에는 미국에 의탁하는 자기의 마음이 애국심으로부터 출발한것이라는 속대사도 담겨있었다.

《재삼 말하건대 선생의 소원이 아무리 안타깝고 간절해도 나는 동의할수 없습니다. 땅을 갈망하는 수백만 농민들의 세기적인 념원을 담아실은 혁명의 기관차는 이미 출발고동을 울렸습니다. 력사의 궤도를 따라 달리는 기관차를 나는 멈춰세울수 없습니다. 선생의 소원과는 결별할수 있어도 인민들의 소원에는 배반할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선생도 진정으로 력사와 인민의 편에 들어서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것이 조선생을 구원하는 마지막 길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시였다.

조만식은 장군님을 바래울 생각도 못하고 멍청히 허공 한점을 바라보며 목이 메게 한숨을 내뽑았다. 밖에서는 벌써 떠나가시는 장군님의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께서 떠나가시자 옆방에 있던 조만식의 심복들이 방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들도 장군님의 격렬하신 음성을 통하여 곁불에 한방망이 단단히 얻어맞은 뒤인지라 모두가 시르죽은 상이였다. 게다가 정신이 돈것처럼 눈자위가 뒤집혀 헛눈을 파는 조만식의 꼴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모두들 입을 봉하고 서있었다. 조만식은 두주먹으로 책상을 꾹 누르고 서서 얄팍한 입술을 눈에 띄게 떨고있었다. 그는 얼마후에야 고개를 돌리며 자기 주위에 몰켜와 서있는 심복들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에게서도 아까와 같은 도도한 맛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한결같이 실패의 그늘이 낀 패배자의 죽은 얼굴들뿐이였다. 순간 조만식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입에서는 악에 받친 소리가 튀여나왔다.

《왜 초상난 집처럼 얼굴들이 모두 그 모양이야? 그래가지고도 뭐 당의 리념을 지켜싸우겠다구··· 용기들을 내라. 이제는 별수 없다. 우리도 우리 리념대로 싸워야겠다. 성명도 내고 모두 정권에서 나오구··· 우선 저 유다같은 송신일이부터 사퇴를 하라구해.》

조만식은 팔을 휘두르며 고아대였다. 다 죽은것 같던 그가 이렇게 날치자 옆에 있던 심복들의 얼굴에서도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