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9


 

제 4 편

9

 

장군님께서는 머리를 들고 병풍처럼 둘러선 산들과 저 멀리 남쪽으로 파랗게 비껴간 하늘을 바라보시였다. 그것은 조국의 하늘이였다.

산에는 아직 눈이 덮여있고 나무가지들은 여전히 앙상하지만 하늘땅을 채운 공기는 얼마나 맑고 따사로운가. 사납고 지겨운 겨울은 기를 숙이고 기다리고기다리던 봄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 환희의 봄에 밀영은 왜 이리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는가.

《마동희가 죽다니···》

장군님께서는 입밖에 소리내여 홀로 외우시였다.

통신원의 보고는 더 따져볼나위도 없이 정확했다. 그것은 어떤 뜬소문이 아니라 샘골조직에서 직접 확인한 통보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믿을수가 없으시였다. 마동희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을 아무래도 받아들일수가 없으시였다.

따로 지시한것은 없었지만 마동희의 희생에 대해 누구나 입밖에 내여 말하기를 삼가하였다. 그러나 비통한 소식은 밀영에 다 퍼져간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다양한 날씨에 노래도 웃음도 말끔히 사라져버린 밀영을 상상이나 할수 있는가.

장군님께서는 딱히 어디로 간다는 질정도 없이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언덕을 내리고 산발을 에돌아 골짜기갈피에 나서시니 아담한 귀틀집이 나졌다. 주춤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시니 재봉대병실이였다. 이 집에 마동희의 누이동생 국화가 있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그제야 자신께서 국화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는것을 깨달으시였다.

봄볕이 밝게 비친 마당은 비여있었고 처마밑에 그늘이 깃든 병실은 잠든듯 조용했다.

사람이 없다는것을 확인하신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고 마당귀를 돌아나오시였다.

그이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물흐르는 소리가 이는 강기슭으로 이끌리시였다.

강기슭의 실버들은 흐느적이고있었다.

강복판에 떠있는 얼음장과 버들개지의 진자주빛 눈이 다닥다닥한 버들방천사이로는 강물이 태없이 흐르고 그 가운데 솟아난 구름돌에는 떠내려가던 빨래감이 걸린듯 녹지 않은 얼음덩이가 붙어있었다.

아닌게아니라 누군가가 우굿하게 휘여든 강기슭의 버들숲속에 몸을 숨기고 빨래를 하고있었다.

장군님의 가슴은 벌써부터 옥죄여드시였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마국화가 틀림없을것이였다.

빨래를 헹구는지 세찬 물소리가 일어났다.

굵은 모래가 깔린 강기슭에 바투 다가앉은 국화의 가슴앞으로는 변두리가 녹아서 작두날처럼 날카로와진 얼음장이 금시 물결을 타고 밀려올것 같았다.

얼핏 보시니 국화는 아직 소식을 모르고 안정된 마음으로 빨래질에 전념하고있는것 같았다.

불현듯 지난가을 5호밀영에서 국화를 만나던 일이 떠오르시였다.

그때도 방금 입대한 국화는 바위부리가 두드러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있었다. 국화는 그때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주었었다. 그 사진에는 마동희가 없었다. 그래서 후날 오빠랑 형님이랑 모두 군복을 입고 집에 가면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사진을 찍자고 말씀하시였었다. 그때 국화는 행복에 겨워 두볼은 불타오르듯 빨갛게 상기되고 두눈에는 별빛같은 영채가 어렸었다. 그것을 볼 때 자신의 가슴에는 또 얼마나 기쁨이 넘쳤던가. 혁명하는 보람이 모두 그 한순간에 있는것만 같이 생각되기도 하시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박한 희망마저 실현할수 없게 되였다.

철썩거리던 물소리가 잠잠해진것을 감촉하신 장군님께서는 국화쪽을 바라보시였다.

국화는 물에 잠긴 빨래감 한끝을 붙잡은채 망연한 눈길로 강건너산을 바라보고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오빠생각을 하는것이나 아닌가. 국화라고 그 소식을 못들을리 없다.

국화는 참을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외진곳에 홀로 나와 빨래질을 하는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장군님께서는 국화의 모습과 처신이 더없이 미덥고 억세게 보이시였다.

오래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국화는 강물에 헹구어낸 빨래를 비틀어짰다. 주루룩하고 빨래에서 짜낸 물방울이 검푸른 강물우에 쏟아졌다. 국화는 물을 다 짜낸 빨래를 활활 턴 다음 쭉 펴서 버드나무덤불우에 널어놓고 그 주변을 맴돌며 구겨진 군복의 주름살을 곱게 펴나갔다.

무심히 덤불우에 널린 군복을 보시던 장군님께서는 흠칫 놀라시였다.

국화는 소매를 잡아당겨 휘청거리는 버드나무의 저쪽가지에 걸쳐놓는데 그 기장이 그가 입고있는 군복보다 엄청나게 길었다. 하기는 국화는 신대원인데 저런 겨울군복이 두벌씩 있을수는 없지 않는가. 그것은 마동희의 군복이였다.

국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군복을 손바닥으로 쓸고 두들기고 하면서 좀체로 덤불곁을 떠날줄 모른다.

그이께서는 덤불우에 바지저고리 차례대로 단정하게 널려있는 군복을 보시니 마치도 간고한 행군길에서 맞이한 휴식시간에 락엽우에 활개를 펴고 누워있는 마동희를 보는것 같으시였다.

바람이 일었다. 숲은 우수수 설레이고 강가의 버드나무덤불은 방금 얼음이 풀린 강물처럼 흐느적이였다. 마동희의 군복은 그에 따라 무겁게 너풀거렸다. 그것은 한순간에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부축을 받아 기어코 땅을 딛고 일어나 자기 대오에 들어서려는 마동희의 억센 넋이 힘겹게 안깐힘을 쓰고있는것 같은 환각을 몰아왔다.

그이께서는 다급히 버들방천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적탄에 쓰러진 전사를 보는것 같은 절박한 생각이 엄습해와서 한자리에 서계실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처 강가에 이르시기도전에 환각은 사라지고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치면서 엄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랭랭하게 펼쳐놓았다.

장군님께서는 푸석푸석한 땅을 쿡 디디고 걸음을 멈추시였다.

(동희동무는 없다. 영원히 가버렸다. 어머니를 두고··· 사랑하는 안해와 누이동생과 중대의 전우들을 두고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장군님께서는 참아오던 뜨거운 눈물을 삼키시였다.

그이께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잠겨 오빠의 군복곁을 떠나지 못하는 국화의 기색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눈앞이 흐려와서 모상이 똑똑치 않으시였다.

그래서 눈정기를 모으시니 처녀의 표정은 뜻밖에도 퍽 안정되여있는듯 하였다. 혹시 국화는 아무런 눈치도 못채고있는것이나 아닐가. 지금 밀영의 사람들은 누구나 마동희의 희생을 두고 슬퍼하는 한편 그 소식이 국화에게 줄 타격을 두고 마음을 쓰고있다. 그러고보면 국화가 아직 아무런 소식도 모르고있을수도 있는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혁명의 절개를 지켜 장렬하게 희생된 전사의 소식을 그 혈육에게 자신이 직접 전해야 한다는 쓰라린 의무를 느끼고계시는 그이께서는 통신원을 만나신 어제 오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줄곧 어떻게 첫말을 떼며 슬픔에 눈물지을 나어린 처녀를 어떻게 위로할것인가를 어떤 잠재의식속에 생각하고 또 생각해오는것이였으나 정작 국화가 눈앞에 있는 지금에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던 그 모든 말마디들이 다 무의미한것으로 느껴지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가슴답답한 생각을 누르시며 나무사이를 걸어 열걸음도 못되는 거리를 천리처럼 어렵게 다가가시였다.

《국화동무, 여기서 뭘하오?》

그이께서는 제 생각에 빠져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있는 국화를 향해 우선우선한 표정을 지으시였다.

국화는 몹시 놀랐다. 그러나 장군님을 알아본 다음순간 그는 전날이나 다름없이 살눈섭을 곧게 펴고 억실억실한 눈에 웃음을 지으며 덤불밖으로 나섰다.

《사령관동지, 날이 따뜻해서 해빛도 쏘일겸···》

국화는 간신히 속삭이였다.

《그렇소? 나도 날씨가 따뜻해서 물구경을 나왔던길이요. 아직 물이 차겠는데 벌써 빨래를 했구만. 그런데 이건 뭐요?》

장군님께서는 방금 국화가 앉아서 빨래를 하던 강기슭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다가 모래밭에 움푹하게 파놓은 홈타기를 띄여보고 물으시였다. 찰랑찰랑 물을 채워놓은 홈타기안에는 노란 집게발을 이마우에 올려놓은 큼직한 가재가 박제품처럼 꼼짝없이 엎디여있었다.

장군님께서 가재를 보신것을 눈치챈 국화는 시무룩하게 웃음을 띠우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물속에서 돌을 들어올리다가 그안에 가재가 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저건 아직 물이 차거우니까 겨울인가 해서 잠에서 깨여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흥미를 느끼고 가재가 기여가는 모양을 손시늉으로 해보이며 말씀하시였다.

《국화동무가 새해에 들어서서 이 강에서 처음으로 고기잡이를 한셈이요. 가재를 좋아하오?》

국화는 입귀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용하게 추운 겨울을 다 견디여냈는데 정작 봄이 와서 죽으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뿐입니다. 이제 얼음이 다 녹으면 다시 살아날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국화의 억실억실한 눈망울은 아래로 처지고 빛발처럼 펴졌던 살눈섭이 파르르 떨었다.

장군님의 가슴은 뜨끔하시였다. 봄이 왔는데 죽으면 불쌍하다는것은 무슨 암시가 아닌가. 국화는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것이 분명하다. 국화도 자기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차 고개를 들고 딴말을 꺼내려고 하는것 같았으나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천진한 처녀의 그런 모대김이 더 가슴을 긁어주는것 같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눈길을 돌려 하늘을 보시였다. 새파란 하늘에는 댕기같이 희고 긴 한갈피의 구름이 걸려있었다.

《요사이도 복남이가 찾아오오?》

장군님께서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전혀 새로운 화제를 꺼내시였다.

국화는 눈에 생기를 띠며 살눈섭을 슴벅이더니 아까처럼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복남이가 이따금 오기는 하지만 전처럼 불평질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는 비판을 접수한 모양인가?》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는듯 심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전날 복남이는 보초를 서다가 메돼지를 쏘아맞히였다. 그래서 적정이 생겼는가 해서 비상소집까지 벌리였다.

밀영안에서 함부로 총을 발사한 책벌로 근신처벌을 받은 복남이는 자기가 잡은 메돼지는 모두 맛있게 먹으면서도 자기한테는 책벌을 주었다고 불평을 말하였다. 그래서 다시 더 큰 책벌을 주었다.

일이 생기면 곧 희창이한테 찾아가던 복남이는 희창이가 김주현과 함께 공작나간후에는 쩍하면 국화에게 찾아와서 놀다가군 하였다. 어제낮에는 복남이가 찾아와 희창이가 왜 아직 안오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다가 돌아갔다.

《어제 와서는 그 동무가 돌아오면 자기 누나소식을 알수 있겠는데 왜 아직 안오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소리를 하다가 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피하자던 말을 꺼낸 국화는 당황한 빛을 지었다.

《그 동무》란 안희창이고 안희창이 말을 하면 그 화제의 끝은 다시금 마동희쪽으로 쏠릴것이였다.

이번에는 국화가 새 화제를 꺼내였다.

《요즘은 모두 학습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제야 학습하는 재미를 알겠는데 벌써 봄이 다가왔다고 얼마나 서둘러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다 비서처의 명국동지가 노래도 배워주고 연극도 하자고 나서서 얼마나 흥성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국화동무가 <피바다>의 갑순이 역을 잘했다면서··· 쓰러진 을남이를 안고 노래를 부를 때는 눈물이 난다고들 하더군···》

장군님께서는 무중 말씀을 끊으시였다.

국화도 가볍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였다.

쩡하고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여울목이 터진듯 콸콸하는 물소리가 조용하던 강기슭을 뒤덮었다. 어째서 물소리가 별안간에 이처럼 소란스럽게 울리는가. 실상 강기슭은 여전한 정적속에 묻혀있었다. 숨가쁘도록 무거운 침묵이 그렇듯 물소리를 소연하게 만드는것인지도 모른다. 장군님께서도 국화도 더는 《피바다》의 이야기를 계속할수 없었다. 그 화제도 결국은 마동희의 희생과 잇닿아있었던것이다.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모든 화제의 끝은 모든 흐름이 종당에는 한곬에 모여들듯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마동희에게로 쏠려지는것이다.

《장군님!》

오래 끈 침묵끝에 국화는 그 어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듯 안깐힘을 쓰며 목메인 소리로 불렀다.

장군님께서는 놀라며 국화를 돌아보시였다. 국화의 파르르 떠는 살눈섭에는 이슬이 맺혀있고 눈자위는 슬픔의 바다속에 잠겨버린듯 침침하게 가라앉아있었으나 그 막막한 심저에서 억센 광채가 내뻗치고있었다.

《저는 다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겠습니다.》

국화는 용케 울음을 참아냈지만 온몸이 세차게 떨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슬픔을 이겨내는 국화의 억센 모습을 보며 자신께서도 가슴 찢기는 고통을 다잡으려고 애쓰시였다,

《국화동무, 우리 서로 마음을 굳게 먹자구. 나혼자서는 슬픔을 참기 어려워 찾아왔는데 이렇게 억센 국화를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오.》

장군님의 얼굴을 살펴본 국화는 돌아서서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이나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가 돌아서서 군모를 바로 쓰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누구도 저에게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고 모두들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을 볼 때 저는 울면 안된다, 내가 울면 어떻게 하는가 하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장군님, 저는 오빠 대신 왜놈들을 족치고 해방된 인민들앞에 나가서 갑순이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마국화는 오히려 장군님을 위로해드리느라고 애를 쓰고있었다.

《장하오. 장한 생각이요.》

하고 장군님께서는 국화의 꽁꽁 언손을 잡고 흔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국화동무는 모습이 오빠를 많이 닮았는데 혁명정신도 오빠를 닮아야지. 그러나 지금은 오빠이야기를 좀 하자구. 이제 춘기작전이 시작되여 전투와 행군이 계속되면 언제 이렇게 만나서 조용히 오빠이야기를 해볼 짬이나 있을라구.》

《장군님, 저는 장군님 마음을 다 압니다. 저때문에 너무 마음 쓰시지 마십시오.》

국화는 장군님 손에 잡힌 제 손등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로 언손을 녹이였다.

《고맙소. 동무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자고 하니 내 가슴이 더 아프오. 그러나 어찌겠소. 동무도 참고 나도 참아야지. 내가 언제든 조국에 나가면 동무네 오누이랑 같이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했는데 이제 내가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수 있겠소. 동희를 원쑤들에게 빼앗기고 저혼자 왔습니다 하고 말해야겠으니 차마 그런 말을 어떻게 어머니앞에 하겠소.》

《장군님, 저의 어머니는 저같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억셉니다. 절대로 장군님께 눈물을 보이지 않을것입니다.》

《그래, 그럴수 있지. 국화도 나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자고 애를 썼지.》

장군님께서는 혼자말씀처럼 낮게 외우며 천천히 강가를 거니시였다.

《그러나 겉으로 흘리지 못한 그 눈물이 다 어디로 가겠소. 그것은 모두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이 되여 골수에 스며드는거요. 국화는 오빠를 잃고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또 국화의 형님은 하늘같은 남편을 잃었소. 나도 혁명하다가 부모도 잃고 형제들도 잃었소.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그 마음을 나도 아오. 국화동무.》

장군님께서는 동을 넘쳐나려는 눈물을 삼키듯 길게 숨을 들이그으시며 잠시 먼 산발을 바라보시다가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국화동무, 그러나 참아야지. 우리 억센 마음으로 슬픔을 이기고 오빠대신 혁명을 더 잘하자구. 나는 오빠 대신 국화를 누이동생으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내 어머니로 삼고 국화는 나를 친오빠로 생각하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혁명이 승리하는 날까지 억세게 싸워나가자구.》

《장군님.》

국화는 마침내 참고참아오던 울음을 터치며 버드나무덤불로 달려갔다. 아직도 물기흐르는 오빠의 군복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국화를 잠시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마치 처녀의 신성한 슬픔을 지켜주시듯 천천히 강가를 오락가락 거니시였다.

물소리도 바람소리도 숨을 죽인듯 강가에는 씹어삼켜도 씹어삼켜도 그냥 솟구치는 국화의 흐느낌소리만 가득차있는듯싶었다.

뒤짐을 지시고 묵묵히 비탈로 오르내리는 오솔길까지 걸어가셨던 장군님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그때 비탈길에 외롭게 서있는 커다란 미루나무밑둥에 그림자처럼 구부리고 앉았던 안희창이 몸을 털며 일어났다. 어찌할바를 모르고 멍청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이 강가에 깃든 그 모든 사연을 알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그옆에 고개를 숙이고 두손을 앞으로 모두어쥔채 서있던 김주현이 괴로운 빛을 띠고 장군님을 바라보았다.

《주현동무가 돌아왔구만, 수고했소.》

장군님께서는 김주현의 몸매를 다심한 눈길로 살펴보다가 미루나무쪽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으시였다. 어제 온 통신원의 보고가운데는 김주현이 이번에 나가서 진행한 활동정형도 반영되여있었다. 마동희가 체포되자 그자리에서 혼란에 빠진 국내조직을 수습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넘어갔으며 백암지구에 박힌 적의 독묻은 밀정 재선이와 몽강에 웅크리고앉아 악랄한 음모를 꾸미고있는 선우제를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했다는 보고를 들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김주현으로부터 선우제에 대한 보고를 듣자 선우제가 적의 특무라는것을 확인하고 처단했는가고 물으시였다.

김주현은 선우제를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하여 족제비사냥군을 시켜 몽강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서 만나자고 알려준 다음 20리 앞질러 몽강근교에서 그자를 기다렸다는것이였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와오자 상면하기로 된 지점은 적들이 잠복하고 포위망을 치고있었다. 김주현은 그때 벌써 선우제가 틀림없는 적의 특무라는것을 단정했으나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하여 일제의 사복경찰인체 하고 단속을 하니 관동군헌병사령부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꺼내보였다고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보고를 구체적으로 들으며 이해 겨울 군정학습을 통해 몰라보게 성장한 혁명가로서의 김주현을 느끼는 동시에 그가 마동희의 체포와 희생때문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짐작하시였다.

재선이나 선우제따위를 몇백명 처단한다고 해서 우리 가슴이 열리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국화를 위하여 국화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금도 옥중고초를 겪고있는 권영벽을 비롯한 장백과 혜산일대 조직원들과 인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도 포함한 우리 혁명군성원들의 가슴터지는 슬픔을 다소라도 달래이기 위하여 그만한 보복이라도 과단성있게 해치운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되시였다.

《어떻게 이렇게 늦었소? 나는 동무들이 몽강에서 선우제를 처단했다는 통보를 벌써 어제 받았는데··· 무슨 사고라도 있은게 아니요?》

김주현은 경례를 붙인채 장군님의 슬픔어린 안색을 차마 마주 보기 힘든듯 시종 눈길을 아래로 떨군채 떠듬떠듬 말씀드렸다.

《별일 없었습니다. 성안을 빠져나올 때 추격을 당해서 통화쪽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적의 주목을 우리 밀영방향으로 끌지 않자니 좀 먼길을 돌게 되였습니다.》

《그렇군, 고생을 했겠소.》

사령관동지께서는 김주현의 거멓게 질린 얼굴을 살펴보시며 측은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김주현은 옆차기를 더듬더니 붉은 천에 싼 권총을 두손에 받쳐들었다.

《이 총으로 선우제를 처단했습니다. 마동희동무가 남기고 간 총입니다.》

《아니 이 총이 어떻게 동무손에 들어갔소?》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가슴이 뜨끔하는것을 느끼며 서둘러 권총을 집어드시였다. 무쭐한 쇠붙이는 밀영을 떠나던 날 이 총을 받고 다지던 마동희의 맹세를 련상시켰다. 이처럼 웅숭깊은 빛과 무게속에 억센 힘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혁명을 위하여 불을 토하던 사나이가 바로 마동희가 아니였던가. 너무 닦아서 군데군데 강철빛이 두드러지는 암록색 권총의 번들거리는 총신에는 정녕 마동희 그 사람과 같은 은근한 은빛 광채가 깊숙한 밑바탕에서 뿜어나오는듯 하였다.

《동희동무의 어머니가 사령부에 보냈습니다. 아들은 잡혔지만 총은 헛간에서 놀릴수 없다면서··· 선우제한테 가는 길에 동희동무의 최후소식을 들었습니다. 선우제놈을 이 총으로 처단했습니다.》

《잘했소. 신념도 버리고 량심도 버린놈들···

마동희일가는 어머니도 아들도 다 강의한 사람들이요. 마음속에 신념의 뿌리가 든든히 내린 혁명가들은 모두 그렇게 억세고 강의한 법이요. 신념이란 곧 그 혁명가의 사상상태를 규정하며 혁명적지조의 기초로 되는거요.

신념을 떠난 공산주의사상이란 종이장우에 써놓은 리론에 불과하오. 신념이 없는 혁명가, 그것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소. 심장이 없는 사람··· 그러니 신념을 버리는것은 심장을 버리는것이니 그 사람이야 벌써 죽은 사람이 아니겠소. 심장은 사람들이 태여날 때 세상에 가지고 나오지만 신념은 혁명투쟁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거요.》

말씀을 끊으신 장군님께서 김주현에게 국화를 만나보라고 이르시고는 또다시 아까처럼 강가를 거니시였다. 손에 쥐신 권총의 무게가 그이의 몸과 마음을 한곬으로만 잡아당기는듯 하였다.

미루나무앞에서 돌아서시니 김주현과 국화는 마주서있는데 둘다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지켜볼뿐 별로 말을 나누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안희창이도 강기슭에 퍼더앉아 무심한 물결만 지켜보고있다. 하기야 긴말이 누구에게 필요할것인가. 새삼스러운 위로의 말은 피차에 거치장스러울뿐이다. 허지만 마동희가 죽었는데 우리는 그저 이렇게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답답한 침묵으로만 달래야 한단말인가.

벼랑길에 돌구르는 소리가 났다. 숨소리가 씩씩거려서 돌아보시니 박덕산이 급히 내려오고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직도 버드나무덤불앞에 말없이 서있는 김주현과 국화쪽을 한번 돌아본 다음 미루나무밑으로 맞받아나가시였다.

박덕산의 표정은 먼발치서부터 벌써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것을 직관적으로 말해주고있었다.

지금 밀영은 적의 대병력에 의해 포위되여있는것만큼 임의의 시각에 무슨 일이든 얼마든지 벌어질수 있는것이다.

박덕산은 강가에 내려서서야 국화와 김주현을 띄여보고 방금 벌리려던 입을 다물어버렸다.

장군님께서는 경비를 책임지고 밀영밖에 나가있던 박덕산에게서 다른 보고가 있을수 없다는것을 생각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일없소. 말하시오.》

그러면서 국화쪽을 돌아보시였다. 사실 지금같이 슬픔에 짓눌려있으면서 그것을 서로 감추려고 애쓰는 이 강가의 숨가쁜 분위기속에서는 차라리 불의의 정황이라도 생겨 사색을 딴데로 돌리는것이 자신에게나 국화에게나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드시였다.

박덕산은 사람들의 낯빛에서 무엇인가 느껴지는것이 있었기때문에 잠시 주저하다가 그 역시 어떤 중압에서 벗어나려는듯 별안간 격렬한 어조로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지금 <최후통첩문>이라는것을 들고 우리를 찾아헤매는 개들이 나타났습니다.》

박덕산은 말을 해놓고보니 못할 말을 했다는듯 마치 더러운것을 삼킨 사람처럼 구역질을 참는 시늉을 하였다.

김주현도 마국화도 가슴이 덜컥하였다. 방금까지 마동희의 장렬한 최후를 두고 그처럼 가슴아파하며 슬픔을 삭이지 못해하시는 장군님께 또다시 좋지 못한 소식이 왔다고 생각하니 두사람 다 숨을 쉬기도 두려울만큼 마음이 송구해졌다.

《허허허.》

장군님의 허구픈 웃음소리가 울려서야 둘러선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이께서는 김주현과 마국화에게 박덕산을 눈길로 가리키며 말씀하시였다.

《그런걸 처음 겪는 사람 같소. 그래 뭐 새로운 소리가 좀 있소?》

장군님께서 너무나 대범하게 말씀하시니 박덕산은 잠시 어리둥절해있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조는 퍽 가라앉고 굼떠졌으나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격정은 그때문에 더 강조되는듯 량귀가 짓물린 눈에는 고뇌와 증오, 슬픔과 분노의 섬광이 엇갈아 비끼며 린광처럼 타올랐다.

《언제 보나 같은 개수작입니다. 다 포위됐다느니, 요구에 순응하면 뭘 어째주겠다느니 하는 낡아빠진 수작에다가 조모님이야기를 새로 덧붙였습니다.》

《흠- 알만하오. 있음직한 일이지. 그 말 한마디를 하자고 만경대까지 드나들면서 겨우내 고생을 한 놈들인데 그걸 왜 빼놓겠소. 나는 언제쯤 그런 말을 듣게 되겠는가 하고 은근히 기다리던 참인데 겨울도 다 간 이제야 왔군. 너무나 때가 늦었지. 이제는 봄이란말이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입가에 쓰거운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씀하시였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온 그 더러운놈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박덕산은 격분에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뭘 그러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말하오. 놈들의<최후통첩문>이나 들고다니는놈이 좋은 말을 할리야 없지 않소.》

사령관동지께서는 여전히 여유있는 목소리로 박덕산을 달래며 천천히 강기슭을 따라 이쪽저쪽으로 거니시였다.

《그래서 그런게 아닙니다. 너무 분해서 그럽니다. 그놈들이 장군님을, 사령관동지를 륙군대장으로 모실 생각을 하고있는것이 사실이다느니, 조선인자치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해보고싶어한다느니··· 심지어 자기가 조모님을 돌보고있기때문에 여태까지는 그럭저럭 무사했지만···》

《그놈이 대체 어떤놈이요?》

사령관동지께서 우뚝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서시였다.

여태 격분에 몸을 떨며 폭발적으로 말을 섬기던 박덕산은 그이의 노기어린 눈빛이 번쩍하고 강물을 누비며 돌아오자 잠시 쭝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윽히 지켜보시는 그이의 눈길을 느끼자 말하기조차 창피한듯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차석입니다.》

《뭐 박차석!》

사령관동지께서는 이렇게 받아외우고 사실여부를 확인하듯 박덕산을 지켜보시였다.

박덕산은 몽강일대에서 인민혁명군사령부와 련결된 줄을 찾으려고 나돌아치다가 우리 소부대공작원들에게 억류되여있는 박차석과 만나게 된 사실이며 그놈의 품속에서 나온 《최후통첩문》을 읽던 일이며 즉석에서 처단해치우자는 대원들의 제의를 보류하고 사령관동지의 결론을 받기 위하여 달려오게 된 자세한 과정에 대하여 보고드리려고 생각하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박덕산의 표정이 심각한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거니시였다. 아까와는 달리 보폭이 훨씬 넓어지고 빨라졌다.

박차석! 얼마나 숭고한 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이름이 뛰여들었는가.

하기는 혁명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제 혀를 끊고 희생된 고결한 혁명전사를 생각하시며 눈물짓는 이 정화된 세계에《최후통첩》이요 뭐요 하는 말부터가 인간세계의 두 극을 련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결국은 마동희와 박차석이라는 두 이름으로 요약된셈이다. 이해 겨울, 눈물도 많고 시련도 많았던 준엄한 이 겨울에 우리 혁명은 마동희라는 거대한 인간상을 빚어낸 동시에 박차석이란 구역질나는 인간을 보게 되였다.

인간은 혁명에 눈뜨고 의리에 충실할 때 한없이 억세고 아름다운것이다. 마동희는 바로 그런 인간상이다. 그러나 혁명을 배반하고 의리를 저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는 어떤 짐승보다도 더 추악한 존재로 굴러떨어진다. 개돼지조차 박차석이보다는 의리를 안다고 말할 근거가 얼마든지 있다.

그놈이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어쨌다고?

그래 왜놈들이 할머니에게 감히 손을 못대는것이 우리 인민혁명군의 위력과 할머니자신의 불굴의 기상때문이 아니라 박차석이같은 더러운놈의 그 어떤 주선때문이란말인가. 권영벽이가 철창속에서도 적들을 추상같이 호령하고 마동희가 혁명을 지키기 위하여 제 혀를 제가 물어끊으며 우리 인민혁명군의 모든 전사들이 만난을 무릅쓰고 불패의 힘을 길러나가는 바로 그때문에 적들이 감히 할머니에게 손을 못댄다는것을 그놈은 아직 모른단말인가?

아마 박차석이자체도 그놈들앞에 무릎을 꿇기전까지는 비록 고통은 당하였어도 훨씬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을것이다. 인간답게, 고생스럽더라도 보다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지향을 버린 그 순간부터 단순한 천대뿐아니라 목숨자체도 남의 손아귀에 쥐여지고 만다는것을 그놈은 여태 모른단말인가!

숨가쁜 침묵의 한순간이 지나간 다음 장군님께서는 문득 고개를 드시였다.

《국화와 희창동무는 소대로 돌아가지. 국화는 저녁에 나한테 놀러 오라구. 그리고 우리는 사령부로 갑시다. 실무적으로 토론할 문제들이 있소.》

마국화는 다소곳이 머리틀 숙이고 말없이 빨래가지를 소랭이에 조심조심 눌러담았다. 안희창은 일어서더니 고개를 푹 짓숙이고 국화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이제는 슬픔보다도 긴장에 굳어진 처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한숨 지으신 다음 박덕산과 김주현에게 어서 가자고 손짓을 하시였다.

사령부로 돌아가는 벼랑길은 전에없이 가파롭게 느껴졌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시고 김주현과 박덕산도 숨을 씩씩거리며 뒤를 따랐다.

방어공사장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노래소리와 작업의 소음이 집요하리만큼 귀전을 울렸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냥 생각에 잠겨 걷기만 하시였다. 박덕산과 김주현의 가슴은 죄여들었다.

《개같은 자식!》

박덕산은 사령관동지께서 괴로운 생각에 모대기시는 모습을 뵈옵자 가슴에서 다시금 분노가 꿈틀거려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김주현은 따로 응대하지 않았지만 배속깊이에서 울려나오는듯 한 웅글은 기침을 깇었다. 그것은 그 더러운놈을 당장 쳐죽이겠다는 말보다 더 위협적으로 울리였다. 사실 그에게는 재선이와 선우제를 처단한것은 별로 의의가 없고 정작 없애야 할 놈은 멀쩡히 살아있는데 이것이 다 자기 립장이 철저하지 못한데서 생겨난 엄청난 허점같이만 생각되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지휘원들을 돌아보며 물으시였다.

《그래 그자를 지금 어떻게 했소?》

박덕산이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동무들이 그놈을 아름드리 전나무에 칡넝쿨로 묶어놓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범상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다 얼어죽겠소.》

실은 얼어죽기전에 대원들한테 맞아죽을 형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신듯 머리를 저으시였다.

《그럴 필요가 있소. 나는 그가 밉기보다 가련하오. 그러지 마오. 외딴 병실에 두고 노루나 메돼지를 잡아서 융숭히 대접하오. 적들이 지껄여대는것처럼 우리가 죽게 되였는가 아니면 더욱더 억세여졌는가 하는것을 잘 깨닫게 하여야 하오. 내 생각은 그가 몸성히 돌아가게 하자는건데 산속에서 범에게라도 물려죽을가봐 걱정이요.》

김주현은 박덕산과 그이를 바라볼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은 박차석을 처단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사령부에 들어서시자 전투가방에서 지도를 꺼내시여 책상우에 주르르 펼치시였다.

《자, 우선 김주현동무의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조직들의 형편은 동무가 련락소를 통해서 보낸 보고도 받았고 지방조직들에서 올려온 통신도 종합돼있으니 우선 정찰내용부터 들어봅시다.》

박덕산과 김주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물론 김주현이가 지방공작을 나갔다가왔으니 보고를 받자고 하시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쩐지 강가에서부터 줄곧 통분한 생각에 잠겨 걸어오셨을 사령관동지께서 이처럼 지도부터 꺼내놓고 실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보았었다. 김주현은 장군님의 침착하게 바라보는 눈길에서 재촉하시는 뜻을 읽자 어쩐지 박덕산쪽에 미안해하는듯 한 표정을 지어보인 다음 지도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났는지 인차 제자리에 물러서더니 꺼꺼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일공군차림으로 변장했을 때부터 신고다니던 헐어빠진 솜신의 한쪽끈을 풀었다. 중국식으로 만든 그 두툼한 솜신은 너무나 헐어서 군데군데 어지러운 솜이 삐여져나왔는데 신끈도 본래것은 떨어져나간지가 오래고 지금은 솜과 비숫한 색갈의 천으로 가느다랗게 꼰것을 아래우 한구멍씩만 꿰여 어설프게 잡아매고있었다.

김주현이 끈을 풀어내여 맺어놓은 한끝을 조심조심 풀어헤치자 신끈은 가위뽐만 한 넓이의 가느다란 명주손수건이 되였다. 그 끈이 검게 보인것은 거기에 먹으로 쓴 글씨가 빼곡이 차있고 략도까지 여러개 받쳐져있기때문이였다.

《이것이 압록강이고 이 동그래미들이 집단부락과 성시들입니다. 이름을 너무 잘게 써서 알아보시기 힘들겠는데 이걸 이쪽 큰 지도에 옮기면 이렇게 놓입니다.》

하고 김주현은 자꾸 되말려드는 명주천을 연신 한쪽손바닥으로 쓸어서 펴며 그것을 큰 지도에 갖다댔다.

《됐소, 됐소. 그대로 설명하오. 다 알아보겠소. 이것이 6도구고 여기가 12도구구만. 그러니까 동무네가 간 로정이 이렇게 그어지겠소?》

사령관동지께서 좁다란 명주필에 들어찬 엄청나게 많은 지명들과 수자들, 군용지도에 대고 맞추어봐도 별로 축척이 틀리지 않는 거리와 형태를 갖추고있는 놀랄만큼 정교한 략도들을 보고 내심 감탄하며 군용지도를 한옆으로 밀어놓으시였다. 김주현이 그린 그 정교한 략도에는 지형과 지명만 있는것이 아니라 주민수, 적병력수, 중요 적기관의 위치, 지방과 지방간의 거리, 크고작은 도로, 지어 가재수같은데는 포대의 형태까지 그려져있었다.

《흠, 굉장한 지도로군. 그런데 이 6도구옆에 있는건 뭐요? 여기는 너무 글자를 배게 써넣다나니 서로 엉켜붙어서 가려보기 힘들구만.》

《그건 쌍산자입니다.》

《쌍산자, 그런데 뭘 이렇게 많이 써넣었소?》

《쌍산자가 아주 주목할만 한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6도구성문을 나서면 처음 맞다들리는데가 쌍산자입니다. 그 앞으로 이렇게 라즈거우산이라는 밋밋한 언덕이 지나갔는데 큰 규모의 매복전투를 하기가 아주 좋은곳입니다.》

김주현은 사령관동지께서 밀어놓으신 군용지도틀 끄당겨 쌍산자부근의 지형과 길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흠, 알만하오. 그러니까 6도구를 치고 나와서 쌍산자에서 매복한단말이지. 그럴듯 한 생각이요. 그러나 6도구는 장백, 림강일대에서 그중 크고 적의 무력이 집중된곳이요. 그놈을 큼직하게 치는것이 좋기는 하지만 곧은막대기처럼 내밀지는 못할거요. 그러니까···》

장군님께서는 팔짱을 끼고 한쪽손으로 천천히 턱을 만지며 지도를 내려다보시였다.

《6도구와 쌍산자를 친다··· 그러자면 멀찍이 나가 동쪽을 치고 그달음으로 돌아서서 서진을 해야 한단말이요. 여기가 가재수라··· 얼마나 될가?》

벌써 장군님의 머리속에 그려지고있을 장엄한 작전구상과 번개치듯 하는 공격화살표에 몸이 옥죄여드는것을 느끼며 숨소리를 죽이고있던 김주현이 제꺽 앞으로 나섰다. 장군님의 질문은 몹시 비약되여 있는듯 하였으나 김주현은 그이께서 무엇을 물으신다는것이 인차 리해되였다.

《400리길입니다. 이틀이면 넉넉히 가댈수 있습니다.》

《어디를 말이요?》

《가재수, 12도구언저리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조밀한 주민지구를 지나야 하는만큼 불의의 정황이 생길수 있다는것을 타산해야지. 우리가 춘기작전의 첫 총소리를 울리기까지는 이 어방이 쥐죽은듯 조용해야 한단말이요.》

하고 장군님께서는 몽강, 림강, 장백일경을 넓다란 손바닥으로 꾹 눌러덮고 동쪽으로 쭉 내미시였다.

그것은 그 쥐죽은듯 한 정적뒤에 어떤 폭풍이 그 땅을 휩쓸어갈것인가 하는것을 뚜렷한 형상으로 그려주고있었다.

두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자 장군님께서 박덕산이쪽으로 돌아서시였다.

《지금 우리가 계획하고있는 2계단 군정훈련의 강령을 다 수행하자면 언제까지 걸릴것 같소?》

《둬주간이면 끝날것 같습니다.》

《행군속도를 평균 하루 100리정도로 보면 적어도 5일, 정찰과 전투준비를 하는데 하루이틀은 봐야 할것이니 그렇게 끌수 없소. 방어공사도 다그치고 훈련강도를 높이시오. 늦어도 3월 25일경에는 전투가 있을것으로 예견해야 하겠소. 박차석이 상전에게 돌아가서 보고를 하면 그다음에 올것은 놈들의 공격뿐이요.》

《아니 그놈을 돌려보낸단 말입니까?》

박덕산이 너무나 뜻밖이라 놀란 소리를 질렀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이겠단말이요?》

장군님께서는 심상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그놈이 돌아가서 할 일이란 우리 혁명을 모독하고 우리 사람들의 분통이나 터뜨릴 개수작밖에 할짓이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한테 붙잡혔으니까 마지 못해 죽이든 살리든 산에 남아있게 해달라고 입에 침발린 소리도 하지만···》

《주현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사령관동지께서는 미심쩍은 눈길로 김주현이를 돌아보시였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반역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의미에서도 죽여없애치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놈이 이제 돌아가면 전보다 더 너절해지고 더 악랄해질것입니다.》

《실컷 하라고 내버려두오.》

하고 장군님께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시였다.

《혁명을 배신하면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된다는것을 보여주는것도 교훈이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조국과 인민을 팔아서 번 목숨이 얼마나 더럽고 욕된것인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것인가 하는것을 보여주는것도 나쁘지 않는 교훈이요. 그놈이 스스로 제 목숨을 저주하도록 살려두시오. 이제 그놈이 우리 혁명군을 아무리 헐뜯고 물어먹자고 해도 박차석이가 배신자라는것이 드러난 이상 그것은 언제나 제 살을 물고 제 상통을 허비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소. 우리가 화김에 그놈을 처단한다 해봐야 우리 속은 풀릴것이 별로 없고 기뻐할것은 적들뿐이요. 재선이나 선우제는 애국자의 탈을 쓰고있기때문에 당장 조직에 피해를 주지만 그놈에게는 이젠 그럴 힘도 없단말이요. 우리 동무들에게 이야기해서 그냥 놔주라고 하시오.》

《그럼···》

박덕산은 무엇인가 께름직한것이 있어서 입을 벌렸으나 정작 무엇이 께름직한지는 자신도 똑똑치 않아서 말끝을 흐리였다.

《괜찮소. 더 붙잡아둘 필요도 없고 더 끌어들일 필요도 없소. 그 자리에서 놓아주시오.》

장군님께서는 그가 석연치 못해 하는것이 무엇이라는것을 진작 간파하고 자신있게 말씀하시였다.

《그놈을 놓아준다고 해서 우리 할머니에게 해될것은 하나도 없소. 무엇만은 명백한가. 우리 할머니가 무사하자면 우리가 언제나 그놈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는것이요. 우리 할머니는 변함없이 불굴의 의지로 싸울것이요!》

김주현과 박덕산은 새삼스럽게 그 어떤 시련도 폭풍속에서도 추호의 동요없이 혁명의 원칙을 확고부동하게 견지해나가시는 그이의 강철의 의지를 느끼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후 박덕산이 퍽 진정된 묵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적들은 박차석을 통해 우리의 회답을 요구할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쨌거나 교전일방에서 통첩을 보냈으니 회답을 해야지.》

하고 장군님께서는 아까처럼 두팔을 깍지끼고 방안을 몇번 거닐다가 돌아서서 활자로 찍어낸듯이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놈에게 말하시오. 다음달 중순쯤해서 대답을 주겠다-이렇게 말해서 보내기로 합시다.》

《알았습니다.》

박덕산은 잠시 주저하다가 서둘러 대답하였다.

《박차석이 할머님께 우리와 만난 사실을 알릴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김주현이 좀 미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럴수도 있다고 하며 잠시 창밖을 내다보더니 혼자말씀처럼 나지막하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할머니는 억센분이요. 그러나 아무리 억센 기질이라 하더라도 산속에 손자를 두고 왜 속을 태우시지 않겠소. 나는 이처럼 동무들의 따뜻한 사랑과 우정속에서 아무 불편없이 살아가지만 부모들은 그런 생각만으로 마음을 놓지 못할거요. 나는 그것이 제일 안타깝소. 내 걱정은 말고 할머니자신께서 몸을 잘 보전해서 우리가 조국을 해방하는 그날까지 앉아계셨으면 하는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인데 이것은 물론 편지에 쓸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같지 않은 그놈에게는 그런 말이 리해되지도 않을테니 제입으로 번지지도 못할거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가.》

두사람은 고개를 떨구었다. 적의 특무들에게 련행되여 바람사나운 만주벌판에 와계시는 할머니를 두고 처음으로 하시는 걱정의 말씀이였다.

박덕산과 김주현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였다. 장군님의 심중에는 할머니를 구원한다든가 그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는듯 하시였다. 다만 할머님께서 손자걱정은 하지 마시고 자신의 몸을 돌봐주셨으면 하는것이 그이의 소원인데 그 소원마저 전할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적 100만대군을 공포속에 몰아넣고있는 만고명장 김일성장군의 휘하에 사람이 없는듯 한 생각이 들었다.

김주현이 더는 참을수 없어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는데 그이께서는 천천히 돌아서시였다.

《동무들 너무 걱정 마오. 이제 우리가 적들을 치는 총소리를 높이 울리면 할머님은 우리가 울린 총소리를 들으실것이고 적들이 우리에게 녹아난 몰골을 보실거요. 할머님께서는 손자가 잘 있다는것과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뜻을 변함없이 지켜 싸우고있다는것을 아시게 될거요. 그러면 할머님은 기뻐하시고 마음을 굳게 먹고 광복의 날을 기다리실거요!》

장군님의 말씀을 듣자 침침하게 가라앉아있던 두 지휘원의 얼굴에 비로소 화기가 피여올랐다.

《자, 이제는 일에 달라 붙읍시다. 박덕산동무는 그놈을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나서 곧 비서처동무들과 함께 군정훈련강령을 다그칠 안을 세우시오.》

《알았습니다.》

두 지휘원이 목소리를 합쳐 힘차게 대답하였다.

생각탓인지 침침하게 내리누르는듯 하던 무거운 하늘을 테고 바람이 터져나왔다. 천고의 밀림이 솨- 하고 먼저 설레이더니 습기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장군님께서는 머리에 갈마드는 생각때문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으시였다. 할머님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지는것 같으시고 원쑤들을 생각하면 화산같은 분노가 끓어오르시였다. 적들은 할머니에 대한 효성을 악용하여 어리석게도 자신께서 스스로 내려오기를 고대하고있으며 유격대가 제놈들에게 거의나 전멸당했거나 나머지 잔여부대들도 주림과 추위로 자멸당할것이라고 떠들어대고있었다.

이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있기가 괴로우시였다. 한무리의 쥐새끼들을 찍소리 못하게 하자면 고양이 울음소리 한마디면 되듯이 이제 부딪치게 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면 적들의 허위선전과 허장성세의 허울은 산산이 부서져나가겠지만 그렇다고 간교하고 너절한 놈들의 행위를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으셨다. 그이께서는 적들에게 보낼 가장 억세고 생동한 대답방법을 탐색하시였다. 적들이 박차석에게 편지를 안겨보낸것은 더러운 주구의 목숨하나를 던지여 우리를 괴롭혀볼가 해서 꾸민 모략이다. 그래서 제놈들의 바람을 불어넣자는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놈들에게 바람이 아니라 벼락을 안겨주어야 한다. 무엇을 박차석에게 안겨보내야 적들에게 벼락이 될것인가? 강경한 회답문을 낼것인가. 어떤 문구를 골라쓰겠는가?

장군님께서는 하시고싶은 말씀이 많았으나 적들을 향해 글을 쓰고싶지는 않으시였다.

적본영에 미칠수 있는 화살이 스스로 생겨난 좋은 기회에 적들에게 벼락을 안기자! 어떻게 하면 이놈들을 전률케 할것인가?

장군님께서는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계속 탐색하시였다. 군수관이 지나가는것을 보신 그이께서는 돌연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군수관동무, 전번에 이야기 들어보니 산삼이 몇뿌리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있습니까?》

군수관은 그이께서 느닷없이 산삼을 찾으시는것이 놀라와 눈이 둥그래졌다.

《그걸 몇뿌리 가져오시오.》

군수관은 잠시 생각하고나서 물어보았다.

《조제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올가요?》

《좋은 함을 만들고 귀중히 쌀수 있게 하시오. 잘 생기고 오래 묵은것을 두뿌리 가져오시오. 내가 본 다음에 포장할수 있게 하시오.》

얼굴에서 기쁨이 가셔진 군수관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돌아갔다.

방안에 들어서시니 김주현과 박덕산은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원쑤를 심판할 때처럼 엄숙해서 인기척도 제때에 느끼지 못했다. 붓을 휘갈기는 김주현의 얼굴과 쓴 글을 들고보는 박덕산의 손에는 먹방울이 묻어있었다.

(이 동무들이 갑자기 무슨 문서놀음을 벌리였는가?)

장군님께서는 박덕산이 읽고 넘긴 문서를 드시였다.

 

조선인민의 불공대천의 원쑤 일제침략군들 보아라!

 

먹내가 풍기는 먹글씨였다.

(아, 이 동무들이 적들에게 편지를 쓰고있었군! 적들을 절규하고싶은 충격이 일었던 모양이군!)

장군님께서는 기관총을 쏠 때처럼 글쓰기에 열중한 김주현을 보시자 자신도 모르게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문장을 더듬어보시였다.

 

···강도의 수법으로 우리 조국을 강탈한 서른세해에 네놈들은 가소롭게도 《동조동근》이니 《내선일체》니 갖은 기만술책을 다하며 우리 겨레의 고혈을 짜내고 단 하루도 편히 지낼수 없도록 철제의 무단통치를 가강해왔다. 네놈들이 조선동포앞에 저지른 죄악은 너무도 크고 중해서 실로 필설난형이라 모석검취의 이 드바쁜 순간에 일일이 렬거함이 불가하도다···

 

편지는 일제가 조선인민앞에 저지른 죄악을 낱낱이 렬거하고나서 특히 최근 인민혁명군과 대결하기 위한 악랄한 죄행을 지적하였다.

 

···네놈들은 아시아와 전세계를 강점하겠다는 헛된 야망을 실현할수 없게 되니 말끝마다 자랑하던 대의명분도 다 집어던지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인민혁명군이 전멸됐다는 가소로운 기만선전을 벌리는 한편 교전상대방의 원수를 모함하기 위해 연거퍼 자객을 들이미는가 하면 가긍하게도 륙순고령의 혈육까지 볼모로 써먹으려 하니 이는 상처를 다스린다고 하면서 생살을 베내는것 같은 밭은수로서 끝없이 미련한짓이고 붙는 불에 알몸으로 뛰여들기다. 네놈들은 정예의 큰 무력과 간악한 모략으로 불길처럼 일떠서는 우리 겨레의 반일애국감정을 압살하려 하지만 호로박에 담긴 몇잔의 물로 산불을 막아낼가!

용장하무약졸이라 천출명장의 신출귀몰하고 승천입지하는 전법을 따라 싸우는 인민혁명군은 모두가 일당백의 신병으로서 일제 타도, 조국광복의 표대를 향해 결사의 각오로 맹진하고있거늘 네놈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는다 비방할소냐···

 

장군님께서는 종이를 놓으시고 계속 붓을 휘갈기는 김주현의 열중한 모습을 내려다보시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혁명이 끝나는 날까지 써도 못다 쓰겠습니다.》

김주현은 붓을 벼루에 대며 장군님을 쳐다보았다.

《제 왜놈들한테 하고싶던 말을 몽땅 써보겠습니다.》

그이께서는 미소하시였다.

《김주현동무가 식자나 좀 있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이처럼 명필에 문장가이라는것까지는 몰랐습니다. 필소천군이라 그야말로 글씨의 기상이 천군을 쓸어버릴만 합니다.

그런데 왜군장교놈이 해득하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편지는 쓰지 않는것이 좋겠습니다.》

《예?》

김주현은 실망기를 감추지 못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사색에 잠기시였다가 도리머리를 저으시였다. 더욱더 생동하고 위력하며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수 있는것이여야 하는데 그 점에서는 명문도 직관보다는 무색한것이다.

기척소리가 나더니 군수관이 머리를 들이밀고 눈치를 살피였다.

《들어오시오.》

장군님께서는 어리둥절해있는 김주현과 박덕산에게 눈길을 보내신 다음 책상우에 널려있는 종이들을 한쪽으로 밀어내시고 군수관이 가져온 꾸레미를 받아놓으시였다.

나무함 뚜껑을 여니 머리와 팔다리가 뚜렷한 산삼이 노란 이끼우에 태평스러운 잠을 자듯 활개를 펴고 누워있었다.

《이게 모두 여러해 묵은 산삼입니다. 산에서 10년가까이 살아오지만 이런 희귀한것은 맞다들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긴히 건사해 왔었는데···》

장군님께서 쓰실줄 알고 좋아하다가 함에 싼채 가져오라는 말씀을 들은 군수관은 차차 흥심이 사라지여 김주현과 박덕산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장군님께서는 들은척도 안하시고 산삼을 자세히 살펴보시고나서 김주현과 박덕산에게도 보라고 하시였다.

《탐스럽습니다. 나도 이렇게 큰것을 처음 봅니다. 이 산삼은 포삼 30편짜리는 실하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아쉬움을 가시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군수관의 어깨를 다독여주시고나서 문쪽으로 떠미시였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쓰니 섭섭해 마시오.》

군수관이 사라지자 장군님께서는 의아해있는 김주현과 박덕산에게 말씀하시였다.

《박차석을 되돌려보내시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이 산삼을 나의 할머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하시오.》

박덕산은 뜨아해하였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할머니에게는 차례지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삼은 박차석의 손을 거쳐 적들의 손에 가닿을것이고 할머님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라도 들으실것입니다. 박차석이 나의 부탁을 받았으니 자기 반생을 돌이켜볼 기회가 될것입니다. 산에 있는 장생불로약 산삼이 여름을 맞고 겨울을 맞을 때마다 뿌리가 실해지고 효험이 많아지듯이 우리의 힘, 우리의 기상은 날마다 억세여진다. 우리는 추위와 주림때문에 시달리우지 않을뿐더러 산삼처럼 만년불사할것이다! 나는 이 산삼을 나의 할머님께 대접하고싶다! 하하하··· 어떻습니까? 적들의 통첩과 할머니를 우롱한데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으로 원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주현과 박덕산은 묵묵히 산삼이 담긴 함을 싸기 시작했다.

장군님께서는 박차석이때문에 지으셨던 얼굴의 그늘을 다 날려보내신듯 명랑하게 웃으시였다. 박덕산과 김주현은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말할수 없었다.

《모두 방어공사장에 나가봅시다.》

장군님께서는 한가지 문제를 락착지으신 개운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군복자락을 날리며 지휘원들과 전령병들을 거느리고 회리봉 정수리로 오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