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7


 

제 4 편

7

 

숲속에 숨어 마동희의 어머니가 싸준 태식덩이로 대충 저녁요기를 한 김주현과 안희창은 단숨에 압록강기슭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고개턱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산에서부터 강까지는 꽤 넓은 폭으로 개활지대가 펼쳐지고 그 복판으로 압록강에서 갈라져나온 좁다란 개울이 눈속에 누워있었다. 개울의 흐름과 엇갈려 달구지길이 우불구불 건너갔다. 거기서 왼쪽으로 10여리 걸어가면 수리바위굴이 나진다. 지금 수리바위굴련락소에서는 조복례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굴바깥에 나와서 주대순을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고개마루에서는 사방이 환히 내다보이여 사람들이 나타나면 먼데서부터 먼저 볼수 있었다. 김주현은 고개마루에서 벌판을 내려다보며 낮에 이미 봐둔 주위의 지세를 다시 세심히 연구했다.

그는 만약을 생각하여 선손을 쓸수 있게 한걸음이라도 강쪽으로 더 바투 다가서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는 벌복판에 있는 나무다리가 보이였다. 달구지나 겨우 건너다닐수 있게 놓인 그 다리는 주변에 나무 한그루 없는 개울우에 떠있어 그 누구도 자기들의 눈길을 속이고서는 다가설수 없는 곳이였다.

김주현은 하나둘 별이 뜨기 시작하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다리를 가리키며 안희창에게 넌지시 고개짓을 하였다.

희창은 제꺽 김주현의 의도를 눈치채고 댓걸음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그들은 다리밑에 무릎을 맞대고앉아 묵묵히 압록강쪽을 살펴보고있었다.

날이 어둡기전부터 인적이 없다싶이하던 길은 차츰 별빛이 여물자 빈 절간같이 괴괴한 정적에 묻혀버렸다. 워낙 낮에도 행인이 드문 국경지대인데다 최근에는 왜놈《토벌대》의 기동이 잦고 국경 량기슭에서 무시로 총소리가 울려와서 당장 죽고사는 일이 아니라면 이런 때 이런곳에 나타날 사람이 없었다.

저쪽 산마루에 걸렸던 낫날같은 초생달이 어느새 창백해지면서 컴컴한 산발속으로 빠져들듯이 기울어졌다. 희미한 눈벌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그 산발들은 마치 거대한 흡반으로 세상만물을 자기의 암흑세계속에 빨아들이는듯 한 인상을 주었다.

묵묵히 언땅에 무릎을 꿇고앉아 컴컴한 골짜기와 간신히 드러나보이는 달구지길을 살펴보는 희창이의 눈앞에는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산골짜기로 사라지던 장길부어머니의 모습이 삼삼히 떠올랐다. 기둥처럼 믿고살던 외아들이 적들에게 모진 고문을 겪고있고 그것을 위로해줄 딸과 며느리마저 옆에 없으니 어머니의 마음인들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나 오직 아들딸들이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끝까지 잘 싸울것만을 바라는 어머니이기에 아들의 일을 도와주려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나온것이다.

이제 밀영으로 돌아가 국화를 만날것을 생각하니 안희창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국내로 떠나올 때 혹시 오빠를 만나거든 자기는 여기서 건강한 몸으로 학습을 잘하고있으니 걱정 말라고, 오빠와 상봉할 그날을 손꼽아기다린다고 전해달라던 국화, 얼굴에 기쁨의 웃음을 함뿍 담고 멀리까지 따라나오던 국화를 이제 무슨 말로 위로할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희창은 밀정놈에 대한 증오심이 가슴속에서 더욱 끓어번지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그놈을 처단하면 마음이 어느 정도라도 가라앉을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지도록 아무런 정황도 없자 안희창은 차차 초조한 빛을 나타냈다.

《련락이 닿았을가요?》

희창이는 밑도끝도 없이 낮은 소리로 짧게 말했으나 김주현은 그가 묻는 뜻을 알아차리였다. 마동희의 어머니가 주대순에게 때맞추어 련락을 했겠는가 하는 뜻이였다. 그러한 갑갑증은 김주현에게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자체가 적들의 감시속에 있는것이다. 주대순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러니 주대순에게 미리 말하지도 말고 지내 늦어도 안되며 그가 련락을 받고 선자리에서 떠날수 있는 맞춤한 시간에 꼭 접촉이 이루어져야 하는것이다. 그래야 주대순은 부대의 지시니 선자리에서 움직일것이고 그를 감시하고있던 밀정은 어디다 련락할 사이도 없이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수 없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김주현이 머리속에서 한 타산이다. 그것이 아무리 면밀하게 타산된것이라 하더라도 현실생활은 상상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것이다. 그러나 김주현은 바위처럼 틀고앉아서 묵중하게 말했다.

《틀림없을게요.》

얼어붙은 개울에서는 이따금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저마끔 깊은 생각에 잠긴채 귀를 강구고있었다.

《혹시 주동무가 밀정을 달고 련락소로 오는것때문에 주저하지 않을가요?》

안희창은 또다시 안절부절 못하여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주대순은 다만 즉시 수리바위굴로 오라는 말만 들을것이고 그 지시가 인민혁명군에서 떨군것이라는것을 알뿐인데 아무런 내막도 모르고 밀정이 뒤따르리라는것을 알면서 지시대로 오겠는가?

김주현에게도 은근한 불안이 없지 않았다. 주대순이가 샘골련락소로 오게 된 날자를 어긴것자체가 뒤를 따르는 밀정때문이 아니였던가. 지금 적의 감시가 중중첩첩한 심포마을의 형편에서는 설사 주대순이가 판단과 결심을 바로 한 경우에도 즉시 떠날수 없게 하는 부득이한 정황이 얼마든지 생길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김주현은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희창이의 무릎을 지그시 잡아눌렀다.

아무 걱정 말고 듬직이 앉아서 기다리라는것이였다. 주대순은 틀림없이 올것이다. 그의 온 마음은 심포마을에 조성된 엄중한 사태를 빨리 사령부에 알리고 차후활동방향을 받으려는 일념에 사로잡혀있을것이 틀림없다. 마동희의 어머니가 사령부에서 파견된 공작원을 만나서 그런 지시를 받았다면 깊은 의도는 모른다 해도 정황을 다 파악한 조건에서 내린 지시라는것은 어머니와의 접촉과정에 다 판단할수 있는만큼 그가 웬만치만 조직성이 있으면 이 문제에서 동요할수는 없다. 그런데 주대순이가 어떤 사람인가? 마동희는 사령부와 련결되는 중요한 련락임무를 그에게 맡기였다. 주대순이가 겉보기에는 흔들흔들하며 놀기 좋아하는 사람같지만 실속은 깊은 사람이고 일단 조직의 일에 들어서면 작도날우에라도 올라설 사람이라고 마동희가 이번 공작을 준비하면서 여러번 말하였다.

《꼭 오오, 동희동무를 믿는다면 그 동무도 푹 믿을수 있소.》

김주현의 말은 뜨겁고도 무게있었다.

이때 희창이가 갑자기 김주현의 소매를 잡아당기였다. 어스름달빛이 쏟아지는 눈길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난것이였다. 목수건으로 량볼을 감싸고 바지저고리차림을 한 그 사람은 마치 세찬 눈보라를 머리로 들이받듯 고개를 짓수굿이 숙이고 온몸을 비청거리며 걸어오고있었다. 추위와 피로때문에 몸을 걷잡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저기 누가 나타났습니다.》

희창이가 입안의 소리로 부르짖었다. 김주현은 그 사람이 다리목에 들어설 때까지 살펴보고나서야 희창이의 무릎을 툭 쳤다. 틀림이 없다는 신호였다.

희창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알았다는듯 고개를 한번 끄떡하더니 몸을 움쭉하였다.

《덤비지 마오. 아직 시간이 있소.》

김주현의 말은 엄엄했다.

《일없을가요?》

희창이는 자신없이 중얼거리더니 옹송그리고 앉았다.

그사이 다리에 들어선 주대순은 손을 소매안에 넣고 우들우들 떨면서 누가 자기뒤를 밟는지 살펴보고나서 걸음을 다그쳤다.

《보십시오. 가만두면 저 동무가 먼저 제끼자고 할수 있습니다.》

희창이는 다시 안절부절 못하여 김주현의 귀전에 입을 대고 속삭이였다. 김주현은 아무말없이 희창이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주대순이 다리를 건느자 안희창은 목메인 소리로 하소하듯 중얼댔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기미라도 알게 해주는것이 좋지 않을가요?》

《계획대로 행동하오. 주대순동무는 지금은 좀 불안하겠지만 그래야 뒤를 따르는놈에게 그럴듯 하게 보일거요. 주대순동무는 오직 부대에서 부른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앞뒤를 돌보지 않고 달려오는 동무요. 이제 수리바위굴까지 10리만 가면 복례를 만나 모든것을 다 알게 될테니 그편이 안전하고 좋소.》

안희창은 입을 다물었으나 앉은 자리가 불안한지 공연히 웅크리고앉은 다리를 번갈아 옮겨짚으며 부시럭거렸다.

조용한 정적을 깨치며 메돼지가 기여오는것 같은 소란스러운 발자취소리가 들려왔다. 두터운 털슈바를 걸치고 털모자를 쓴 놈팽이가 코소리를 흥흥 내며 달려오고있었다.

《나타났습니다!》

희창이가 눈에서 불빛을 튕기며 말했다.

(저놈이 우리가 불러낸 재선이가 분명하단말인가?)

안희창은 새벽에 마동희의 체포경위와 재선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후부터 줄곧 머리속에 그려오던 그놈의 형상이 정작 눈앞에 나타나자 오히려 뜻밖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둠속이고 아직 거리가 멀어서 얼굴의 모상은 알수 없지만 걸어오는 꼴을 보면 그가 막연하게 그리던 그 어떤 비인간적인 형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털슈바가 너풀거리고 숨이 가쁜지 코소리를 흥흥거리는것이 어딘가 자기의 상상과 비슷한것 같았지만 어쨌든 먼빛에 보기에도 인간의 탈을 쓰고있는것이 사실이였다. 그것이 순진한 안희창의 격분을 더 참을수 없는 지경으로 끓어오르게 하였다.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고 저를 구원해준 은인을 원쑤에게 고발하는 저따위놈이 어떻게 인간이란말인가. 마동희같이 사람좋고 혁명에 충실한 우수한 동무가 저따위놈때문에 체포되다니··· 저놈을 당장 목을 눌러 죽여도 시원치 않겠다.)

안희창은 너무나 격분하여 몸을 와들와들 떨며 당장 달려나갈 차비를 하였다.

《필경 저놈이 재선일게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하고 봅시다.》

김주현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먼저 다리우로 올라갔다.

안희창은 김주현의 너무나 태연한 말과 거동이 다 뜻밖이여서 멍하니 지켜보다가 김주현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서둘러 다리밑에서 나와 일부러 자갈 굴리는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재선이의 뒤를 밟았다.

인기척을 느낀 그놈은 걸음을 늦추며 자주 뒤를 살펴보았다. 놈은 이미 자기뒤에서 활개치며 걸어오는 안희창이를 띄여보고 몸을 가드라뜨렸다.

일부러 거치른 걸음걸이로 뒤를 바싹 따르던 안희창은 거리가 가까와지자 순경들처럼 건방진투로 말을 걸었다.

《이봐, 이봐, 게 좀 서! 뭘 힐끔힐끔 살피는가, 도망빼려고 눈치를 살피는가?》

《뭘 살피는게 없는데요. 죄없이 도망은 왜 치겠나요?》

그놈은 개털슈바의 깃을 일으켜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 죄가 없어? 이자식 봐라, 왜 일곱시가 지났는데 빈 벌판을 나돌아치는가? 고개마루를 넘어서 이쪽으로 바삐 오다가 내가 나타나니까 돌따섰지? 너 몰래 강을 건느자고 했지? 뻐꾸기 같은 국경경비대는 속여도 내 눈은 못속여. 칙쇼!》

안희창은 놈의 기를 눌러버리기 위하여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천천히 재선이의 뒤를 따르던 김주현은 앞뒤에 다른 정황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다음 슬금슬금 안희창에게로 다가갔다. 안희창은 김주현이 다가서자 차렷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반장님, 이놈이 방금 저 고개마루를 넘어오다가 우리가 나타나자 슬그머니 돌아서서 되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감히 속여볼가 해서··· 몰래 압록강을 건너 심포쪽으로 침투하려는놈이 틀림없습니다.》

놈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가지 않는다는듯 입을 항 벌리고 두팔을 내흔들다가 김주현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천만에요. 방금 강을 건너 다리를 지나오는길인데 고개너머에서 오다니 이런 생트집이 어디 있소? 반장님!》

안희창은 소리쳤다.

《허튼수작 말아! 우리도 방금 다리를 건넜는데 왜 네놈을 보지 못했어? 우리가 뭐 장님인줄 알아?》

《참, 이런 변 봤나, 버선목이라고 뒤집어보일수도 없고···》

놈은 고개마루쪽을 보며 입을 쩝쩝 다시였다.

《누가 버선목을 보겠대? 우리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어?》

놈은 안희창의 손목을 거머쥐고 대들었다.

《여보 당신네는 누구이게 애매한 사람을 붙잡고 생트집이요? 당신이 무슨 사람인지 알아야 나도 내 신분을 밝히겠소. 당신이 그럴만 한 사람이라면 공연히 생트집을 걸지 말고 조용조용 례절바르게 처신하는것이 좋소. 후회하지 말고···》

안희창은 손을 뿌리치며 총을 비껴들었다.

《야 이자식 봐라. 말투를 보니 무슨 형사나 특무쯤 되는 모양이다. 건방진놈의 자식! 잘 만났다. 내가 경찰나부랭이라면 기를 쓰고 해보는 성미를 부모한테서 물려받았다는것을 몰랐지? 어디 죽어봐라. 네따위 여기서 죽여버리면 유격대한테 뒈진줄 알지 내가 죽였으리라고 누가 생각해. 귀신 몰래 죽어봐라!》

놈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여보 반장, 이 젊은이가 분별있게 처신하도록 다잡소!》

김주현은 속으로 웃음이 나가는것을 참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여보 우리더러 반장이고 뭐고 망탕 말하지 마오. 당신이 보는바와 같이 우리는 반장도 오장도 아니요! 당신이 자기의 신분을 순순히 밝히지 않는이상 이 젊은이는 직무상 당신을 단속하지 않을수 없단말이요. 정말 쏘아죽인대도 죄될게 하나도 없단말이요. 밤중에 허가없이 국경연선을 헤매는 사람은 얼마든지 총살할수 있다는것을 이 근방사람이라면 알겠는데···》

놈은 고개를 푹 떨구고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수없이 김주현에게 다가들며 길옆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좀 단둘이 만납시다,》

《만나고말고할것 있소? 당신이 불온분자가 아니고 량민이라면 증명서나 내놓소.》

김주현은 놈의 팔을 떠밀었다.

《내 딱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오. 이제 내가 무슨 일을 하러 떠난 길인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나를 도와줄것이요. 이것은 함부로 소문낼수 없는 일이요. 내 걸음을 지체시켰다가 일을 망쳐놓은 다음에는 목을 내놓아도 죄를 다 씻을수 없소.》

김주현은 마지 못해 따라가는척 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길옆의 홈타기로 들어섰다.

놈은 홈타기에 들어서자마자 주머니안에서 성냥을 꺼내여 불을 켜려고 하였다.

《도루 집어넣소!》

김주현이 어마어마하게 소리쳤으나 놈은 조금도 기가 눌리지 않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어느 계렬인지 모르겠는데 최경부를 아오? 난 최경부의 직속이요. 지금 유격대사령부로 련락가는 지하조직원의 꼬리를 물었는데 이 일을 망쳤다가는 당신들의 목이 무사하지 못하오. 빨리 길을 비키오!》

안희창은 그 말을 듣자 더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듯 독수리처림 홈타기로 뛰여내리였다. 김주현은 그의 가슴을 한손으로 막으며 재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체시켜서는 안되겠는데 증명서나 보여주오. 그래야 우리도 믿을게 아니요.》

김주현의 침착한 말에 재선은 답답하다는듯이 주대순이 사라진쪽을 얼핏 돌아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양복안주머니에서 붓대만 한 짧은 대나무빨주리를 꺼냈다. 그자는 그안에서 달달 만 종이쪼박을 꺼내여 펴면서 다른 손으로 전지불을 켜려고 하였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김주현은 얼른 그자의 전지쥔 손목을 붙잡고 종이쪼박을 빼앗았다. 그는 홈타기벽에 바투 다가앉아 몸으로 불빛이 새지 않게 가리운 다음 그놈의 팔목을 비틀어 전지불을 켜게 하고 얇으나 가죽처텀 빳빳한 종이쪼박우에 씌인 글자들을 재빨리 읽어보았다.

붓으로 쓴 증명서에는 재선의 이름, 나이를 쓰고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단속하지 말것이며 의문이 있을 때는 경찰서나 헌병대사령부에 문의할수 있다는 글이 씌여있었다.

《아, 당신이 재선씨였구려, 이젠 알만하오.》

김주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재선이는 오만하게 증명서를 빼앗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안희창은 놈의 팔목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놈, 증명서는 해서 뭘해? 조국과 겨레를 반역하고도 숨이 붙어배길줄 알았는가? 너같은놈이 우리 혁명동지들을 골라가며 물어없애다니, 원통하다!》

재선이는 제놈이 스스로 뛰여든 홈타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주현은 마동희를 밀고하였으며 감히 사령부를 해치려고 한 이 철천의 원쑤놈을 자기 손으로 요정내고말았다.

김주현은 수첩을 꺼내여 연필끝에 침을 발라가며 《반역자는 죽는다》는 일곱글자를 수첩 한장에 한자씩 쓴 다음 송진을 묻혀 특무놈의 잔등에 붙여놓았다.

김주현은 일을 끝내고나서 달구지길녘의 숲속으로 빠른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개마루뒤에서 갑자기 세찬 불빛이 솟아오르더니 새까만 승용차가 불쑥 나타났다. 김주현은 앞서걷던 희창이의 팔목을 붙잡고 불빛이 비치지 않는 숲속으로 끌어다 앉히였다.

고개마루를 방금 넘어선 승용차가 스르르 멈춰서더니 차안의 전등불이 켜졌다.

김주현은 재빨리 차안을 살펴보았다. 앞자리에는 운전수 혼자뿐이고 뒤자리에는 두사람이 앉아있었다.

차안에서 운전수가 기여나오자 뒤자리에 앉았던 우직하게 생긴자가 따라나왔다. 두사람은 일본말로 소곤소곤 몇마디의 말을 나누는데 김주현은 그들이 나누는 말속에서 《장백이 멀지 않았다.》《혜산진은 장백에서 강 하나를 건느면 된다.》는 말을 가려들을수 있었다.

(저놈들이 장백을 거쳐 혜산으로 가자는 모양인가? 어떤놈들인가?)

김주현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거동과 말투와 차림새를 살펴보았으나 놈들은 막대기처럼 앞으로 비쳐나간 전조등불빛밖에 서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두사람의 허리춤에 권총이 숨겨져있다는것과 운전수가 뒤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해라》투로 말하는것으로 보아 승객보다 지체가 높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을뿐이였다. 그리고 그놈들이 사복을 입고있지만 승용차의 번호판을 보니 군용차라는것이 분명하였다.

김주현은 특무놈들이 혜산으로 급히 간다는것을 판단하였다. 그 순간 밑도끝도 없이 놈들이 마동희때문에 달려가지 않는가 하는 예감이 번개치듯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후 승용차는 불빛을 까불거리며 언덕을 내달리였다.

김주현은 그 승용차가 감방에 갇힌 마동희와 관련되는것 같은 예감을 버리지 못한채 오래동안 서서 승용차의 전조등불빛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펴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