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4


 

제 4 편

4

 

김주현은 압록강연안이 가까와오자 정든 고향땅에 들어선것처럼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가지가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산마루와 골짜기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정든 마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산한 벌에는 흰눈만이 쌓여있었다.

불과 서너달만에 다시 찾아오는 길이였으나 처음으로 걷는 길처럼 낯설고 서먹서먹하였다.

깊은 산속에는 움막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집단부락》에 밀어넣으려는 왜놈들의 손탁에서 새여나와 무인지경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이 대수 바람이나 가리자고 꾸려놓은 어설픈 거처들이였다.

그놈들에게 발각만 되면 온 가족이 멸살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들은 형제간이라 해도 한집에 모여살지 못하고 한두마장씩 떨어진 구석에 딴살림을 펴고있었다.

그들이 사는 산전막보다도 못한 납작한 반토굴집들은 숲에 가리우고 눈에 묻히여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려운데 오히려 겨우내 문밖에 내다버린 감자껍데기가 실농군의 두엄더미모양으로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동면하는 짐승들처럼 어둡고 척척한 움막속에서 감자 몇알씩으로 끼니를 에우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은 새벽마다 온 가족이 김일성장군님께서 하루빨리 조국을 광복하시여 자기들도 구원해주실것을 바라고있었다.

김주현은 피눈물이 고인 마음속에 투쟁의 결의를 굳게 다지며 백두산으로, 압록강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마침내 그는 압록강이 멀지 않은 백두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철길부설공사장에 도착하였다. 로동자들을 만나서 알아보니 정두철은 지금도 공사장의 서무로 일하는것이 확실하였다

김주현은 안희창이를 정두철에게 보낸 다음 그들이 올 때를 기다리며 숲속에 앉아서 철길부설공사장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공사장 여기저기에서는 골안이 자욱하게 우등불이 타오르고있었다.

언땅을 녹이고 얼어든 오금을 풀기 위하여 로동자들은 나무를 찍어다 집채같은 우등불을 일구어놓은것이다. 연기는 짙은 구름처럼 온 공사장을 뒤덮었다.

로동자들은 지독한 연기와 추위속에서 캑캑 마른기침을 깇으며 우등불도 녹여내지 못한 언땅을 까내고 질통으로 흙을 져날랐다.

이따금 광차가 번개치듯 달리고 앙칼진 발파소리가 일고 돌쪼박들이 사방으로 휘뿌려졌다.

철길은 왼편에 넓지 않은 골바닥을 끼고 산기슭을 따라 부설되고있었다. 숱한 로동자들이 개미역사를 하듯 달라붙어 산발을 깎아 뚝을 쌓았으며 뚝이 되는족족 로반을 닦고 레루를 놓았다. 레루가 놓이기 바쁘게 요란한 기적소리와 소란스러운 소음을 내며 기관차가 기여들었다.

골안막바지에서는 굴을 뚫고있었다.

골바닥을 지나 산기슭을 에돌며 자리잡아오던 철뚝은 병풍같은 산골짝 막바지에 이르자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좁고 깊은 막바지에는 인부들이 몰려들어 살통안의 고기떼처럼 비비대며 옥작거렸다.

그들속에는 개털외투를 뒤집어쓴 호로병들이 드문드문 박혀서서 경비를 서고있었다.

김주현은 금시 숨이 막혀오는것 같아 더는 골짜기를 바라볼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봄볕이 어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분비나무사이를 거닐었다. 마음속 웨침이 입밖으로 새여나올것 같았다.

(형제들, 동포들, 조금만 더 견디오. 당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장군님께서 이해 겨울에 참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시며 조선인민혁명군을 불패의 대오로 꾸리시였소.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오고 얼음이 풀리면 당신들을 이 생지옥같은데서 건져내시여 총도 들려주시고 조국광복의 위업수행에 앞장서도록 내세워주실것이요.)

김주현은 하루빨리 사령부에서 준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서 장군님의 구상을 받들고 조선인민들의 허리에 칭칭 감긴 구렝이같은 일제통치의 허리동강을 뭉청 잘라내는 장엄한 춘기반타격전에 든든히 한몫하리라고 속다짐하였다.

그가 이러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눈과 가랑잎이 밟히우는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김주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되여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들어선 아름드리 분비나무사이로 왜놈군대의 전투모를 쓰고 종다리에 각반을 둘러친 사람이 잰걸음으로 그를 맞받아오고있었다. 적구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옷차림이였다. 못본체 하며 곁눈질로 재빨리 그 사람을 살펴보던 김주현은 걸음을 멈추고 설레이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는 정두철이였다. 김주현을 먼저 알아본 정두철은 반가움에 휩싸여 눈무지와 가랑잎무지를 마구 걷어차며 달려왔다.

《두철이!》

김주현의 입에서는 뜨겁고 갈린 부르짖음이 새여나왔다.

정두철의 얼굴에 한순간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경련이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순간 터실터실 트고 여윈 그의 얼굴은 환희에 넘쳐 봄하늘처럼 환해졌다. 그는 엎어질듯이 달려들어 김주현의 손목을 으스러지게 거머쥐였다.

《주현동지!》

김주현은 정두철의 웃동아리를 그러안고 열띤 목소리로 속삭이였다.

《반갑소. 그간 고생이 오죽했겠소?》

정두철의 웃는 얼굴에는 눈물이 반짝이고있었다. 그는 도리질을 하며 대답했다.

《놈들이 하도 갈개니 고생을 좀 하기야 했지요. 그러나 모두들 굳게 믿고있었습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장군님께서 오시리라는것을 말입니다. 장군님께서는 편안하십니까?》

《장군님께서는 편안하시오.》

김주현은 어쩐지 목이 메여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정두철은 맞잡은 손을 흔들며 다른 손으로 눈귀를 빗씻었다.

그는 너무 정에 물러진것이 게면쩍은듯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곧 정색하고 말했다.

《어서 조용한곳으로 갑시다. 지금 사령부에서는 어떻게들 지내고있습니까? 부대소식을 좀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빨리 우리 공사장의 조직원동무들을 만나주십시오. 그들은 장군님께서 우리에게 공작원을 보내주셨다는 말만 들어도 용기가 백배할것입니다.》

정두철은 김주현의 손목을 잡아당기였다.

《소식이 한두가지라고 단숨에 다 말하겠소. 너무 덤비지 마오. 이제 다 말해주지 않으리.》

김주현은 두철이에게 끌려가다싶이 하면서 비죽이 웃었다. 원쑤들의 야수적인 탄압선풍속에서 거의 혼자힘으로 조직을 지켜싸운 그의 심정이 리해되여 눈을 슴뻑거리며 말하였다.

《두철동무, 사령관동지께서는 군정학습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시고 대대적인 춘기작전에 돌입할 차비를 하고계시오. 그래서 우리가 한걸음 먼저 나온거요. 우리 겨우내 참고 참았던 울분과 슬픔을 그때 풀어보기요.》

정두철의 표정은 심중해졌다.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묵묵히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는것으로 김주현의 말에서 얼마나 세찬 충격을 받았는가 하는것을 표현했다. 정두철은 김주현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산허리에 한줄로 내지은 《함바》집의 복판쯤에 있는 어느 한 방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김주현도 정두철도 자기들이 겨우내 겪어낸 시련에 대하여 말하고싶은 욕망이 강하였지만 곧 이마를 마주하고 사업을 벌리였다.

《우리는 이번에 우선 국경연안일대의 파괴된 지하혁명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할데 대한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해야 하오. 그다음에는 장백지구와 국경연안일대의 적의 무력배치정형을 료해하여 앞으로 있게 될 춘기작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해야 하오.》

《정말 목이 타게 기다렸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공작원을 파견해주실줄을 믿고있었습니다. 사실 형편은 간단치 않습니다.》

김주현은 신중한 기색으로 정두철이로부터 장백현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 지하조직들의 형편을 상세하게 료해하였다. 사태는 김주현이 여기까지 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것보다 더 엄중하였으며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현실적인 절박감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하였다.

적지 않은 조직들이 책임자의 희생과 체포로 하여 움직이지 못하고있고 어떤 지하조직은 련락이 두절되여 형편을 전혀 모르고있는가 하면 건재해있는 조직들의 경우에도 명백한 투쟁방침을 알지 못하여 적들과 주동적으로 싸우지 못하고있는 형편이였다.

《혁명조직들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그러지 않아도 가족친척들을 잃고 집과 재산까지 잃은것때문에 슬픔에 잠겨있는 인민들이 더욱 괴로와하고있습니다.》

김주현은 현공작위원회가 우선 지하련락체계를 시급히 정비하여 혁명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보장하며 책임자가 없는 조직들에는 비록 사업경험이 어리다고 해도 이번 투쟁과정에 잘 싸운 검열된 사람들을 대담하게 선발배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주현은 군중조직들을 재정비하고 인민들속에 정치사상사업을 벌릴 구체적인 방법들도 알려주었다.

김주현은 백암지구를 비롯한 국내형편도 사흘후에 도착한다는 련락원을 통하여 료해한후 해당한 대책을 토론해주기로 하고 앞으로 주력부대의 춘기작전로정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현지를 밟아보며 료해하기로 하였다.

어느날 오후 김주현은 한 로동자의 안내를 받으며 산기슭에 숨어있는 자연동굴을 찾아갔다. 그 굴안에서는 안희창이가 이곳 로동자들과 만나서 사업을 벌리고있었다.

정두철은 희창이가 로동청년들속에서 인기가 있고 반영이 좋다고 말하였다.

안희창은 워낙 성격이 명랑하고 푸접이 좋아서 군중들에게 잘 섭쓸린다. 그러나 김주현은 아직 군중공작경험이 없는 그를 갑자기 많은 로동청년들앞에 내세운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정두철의 말에 의하면 사흘후에는 어김없이 마동희에게서 좋은 소식이 올것이라고 하는데 그사이에 쌍산자와 가재수쪽에 다녀오기로 결심한 김주현은 얼핏 굴에 들어가 로동자들도 만나볼겸 안희창이가 군중공작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것을 제눈으로 살펴보고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허리를 굽히고 한참 걸어가니 굴이 넓어지면서 차거운 바람이 맞받아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 굽인돌이를 돌아서니 과연 눈부신 불빛과 함께 그옆에 둘러 앉아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보이였다. 안희창이는 허름한 무명바지저고리에 수건을 질끈 동인 일공군차림으로 로동청년들속에 섞여앉아 무엇인가 열을 올려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그 모양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활달한지 손발이 모두 제가닥으로 놀아나는것 같았다.

땅바닥을 파고 카바이드를 묻은 다음 물을 주고 덮개에 구멍을 내서 불을 달아놓은 굴안은 대낮보다 더 밝았다. 로동자들은 싸리질통과 가마니를 깔고앉아서 웃음과 호기심에 번쩍이는 눈으로 희창이를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김주현은 그의 옆에 둘러앉아있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속에는 지난밤 100여리나 되는 외딴마을까지 가서 지하조직과 련계를 취하기도 하고 위험한 적병영에 들어가 적들의 무장상태와 경비상태를 알아온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젊은이들을 산지사방에 풀어놓으니 원근 수십리 일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손금처럼 꿰뚫어볼수 있었다.

주현은 이야기판을 깨뜨릴것 같아 그들의 등뒤에 슬그머니 가앉았다.

그를 안내한 젊은이는 조용히 굴밖으로 나갔다.

《로형, 형장은 방금 여기에 모인 우리들이 희망만 한다면 모두 인민혁명군에 입대할수 있다고 말했는데요.》

주현은 가늘고 애된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목소리를 듣고 겨우 스무살이나 될가말가하다고 짐작했는데 정작 입을 놀리는 사람은 체통이 희창의 두배나 되고 커다란 고리패랭이를 쓴 거인이였다.

《그렇소. 여기에 모인 동무들은 결심만 하면 모두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원이 될수 있소.》

안희창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리패랭이를 쓴 젊은이는 수집은듯 쭈밋거리다가 어줍게 말했다.

《난 아무래도 그 말은 좀 지나친 말인것 같수다. 우리 마음을 달래려고 그러는것 같아요.》

희창은 매우 중요한 화제를 발견했다는듯 카바이드불길옆에 둘러앉은 젊은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희창이가 어떻게 대답할는지 몰라서 조바심치고있었다. 고리패랭이를 쓴 거인은 내친김에 다 말하겠다는듯 가늘고 애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가령 나같은 사람은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판무식쟁이요. 내게 있는건 든든한 허리와 성한 발바닥뿐인데 유격대에 가야 밥이나 축내지 않겠수다?》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호기심을 품고 희창의 표정을 주시하였다. 희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딴 사람은 몰라도 억손동무는 제일 선참 입대할수 있는 동무요!》

희창이가 이렇게 장담을 하고나서니 그를 둘러싸고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얼핏 안도의 숨을 내쉬는듯 한 표정이 깃들었으나 의문이 깨끗이 풀린 개운한 낯빛은 아니였다. 사실 말은 몸집이 우람찬 청년이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불쑥 꺼낸것이였으나 그것은 결코 누구를 떠보자는것도 아니였고 몸매 크고 목청비린 그 유난스런 젊은이에게 한한 문제도 아니였다. 이 굴안에 모여든 로동청년들모두가 자기들의 운명이 실로 안희창이의 대답 한마디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수 있다는 긴장을 느끼고있는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희창이를 바라보는 젊은이들뿐아니라 김주현이조차 안절부절을 못할만큼 긴장되였다.

안희창이도 분명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듯 신중한 표정이 깃들었다. 그러나 인차 시무룩한 웃음으로 그것을 지워버리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두툼하게 껴입은 무명솜저고리자락을 헤치고 품속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아무래도 내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는 모양인데 억손동무를 생각해서 내 목숨보다 귀중한 보물을 구경시킬밖에 없구만.》

굴안의 사람들은 유격대에 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별안간 품속에서 무엇을 꺼내자고 저러는가싶어 모두 무릎을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지켜보는데 한참 갑자르던 희창이가 새하얀 천에 싸고 정갈한 봇나무껍질로 둘러감은 흰 봉투 한장을 꺼내들자 사람들의 호기심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런 심정을 다 알만하다는듯 희창이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제 억손동무가 무식쟁이라고 했는데 사실이 그런가? 아까 억손동무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놈이 일제놈과 자본가놈이라고 하면서 하루라도 그놈들의 압제를 받지 않고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했소. 그런데 이게 무식쟁이가 할수 있는 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단말이요. 그건 멀리 갈것도 없이 이 안희창이를 보면 알수가 있소. 내가 내 말을 해서 안됐는데 이 안희창이가 유격대원이 옳소?》

희창이가 편지를 한손에 쳐들고 다른 손으로 제 가슴을 툭툭 두들기자 순박한 로동청년들의 눈에는 더욱 짙은 의문이 비끼면서 다소 초조감이 어린 목소리로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소리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공작원인데 유격대원이 아니면 뭐겠느냐 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썩하게 호응하였다. 김주현이도 저 괴짜가 이야기를 어디로 끌고가자고 저러는가싶어 은근히 왼심이 씌여졌다.

《그렇다면 말해봅시다. 이 안희창이는 어떻게 유격대원이 되였는가? 나는 이렇게 철길까지 들어오는 번한 고장이 아니라 앞바라지를 열고 보아도 산, 뒤바라지를 열고 보아도 산, 앞산을 넘어도 산, 뒤산을 넘어보아도 산,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심심두메에 태여나서 부대기를 파먹으며 자란 사람이요. 그런데 왜놈들이 그런 산속에까지 쳐들어와서 <토벌>을 했단말이요. 나는 부모형제들을 다 잃고 헤매다가 마침 유격대를 만나 장군님의 품을 찾아갔댔소. 장군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친부모처럼 나를 따뜻이 품어주시였소. 부모의 원쑤를 갚고 그렇게 악독한 침략자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면 혁명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나를 유격대에 받아주시였소. 그때 나에게는 우리 부모를 악착하게 학살하고 화전마을을 불사른 왜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있고 원쑤를 갚겠다는 생각이 있었을뿐 억손동무만 한 혁명적각오도 없었단 말이요. 나는 억손동무보다 더한 까막눈이였소. 그런데 장군님께서 나를 유격대에 받아주시였을뿐아니라 유격대원으로서, 혁명가로서 갖추어야 할 사상과 군사지식까지도 다 눈띄워주셨단말이요.》

굴안이 웅성거렸다. 세상 모든 일을 제 손금 들여다보듯 하면서 국제국내정세며 앞으로의 투쟁방법에 대해서 청산류수로 내리엮던 이 유격대공작원이 까막눈이라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였다.

《왜 내 말이 실없는 소리같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요. 나는 유격대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부모의 원쑤를 갚는데 총이 있으면 됐지 글은 해서 무엇하는가 이렇게 미련한 생각을 했댔소. 그러다나니 지난해 가을까지도 유격대에서는 보기드문 까막눈으로 남아 있었단말이요. 그런데 장군님께서 나한테 명령서를 보내주셨소. 이게 바로 그때 그 명령서요.》

안희창은 손에 들고있던 흰 봉투를 쳐들어보이였다. 새로운 웅성거림이 퍼져갔다. 안희창은 한참이나 말을 끊고 사람들이 그 편지를 충분히 바라볼수 있도록 여유를 둔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 편지를 받게 된 사연이 참 기가 막히오. 그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선 이 편지를 한번 읽어보겠소. 겉봉에 어떻게 씌여있는고 하니 내 부대 소속과 이름우에 <이 명령서를 아무도 대신 읽어줄수 없음>이렇게 장군님의 친필로 찍혀있단말이요. 그러니 까막눈이 안희창이가 명령서내용을 어떻게 알겠소. 온 밀영을 다 돌아다니며 읽어줄 사람을 구하다가 결국은 장군님께로 돌아가니 공부를 해야 된다고 타이르시면서 이다음에 글을 읽게 되면 읽어보라고 이 명령서를 나에게 그대로 주셨소. 나는 한달후에야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지었소. 그리고 이렇게 보배처럼 언제나 내 몸에 품고 다니오. 자 들어들 보시오.》

안희창은 편지를 다시한번 쳐들어 보이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대원은 누구나 다 학습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학습을 하지 않고는 혁명을 잘할수 없기때문이다, 조선인민혁명군대원은 누구나 군중속에 들어가 혁명을 선전하고 인민대중의 힘을 조직동원할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혁명의 최후승리를 확신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러자면 죽는날까지 꾸준히 학습해야 한다고 하시였소.》

안회창은 편지를 소중히 가슴에 갖다대고 웃음이 담긴 번쩍이는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뜬금으로 엮어내려갔다.

《학습을 하지 않고는 혁명의 원리와 사령부의 방침을 깊이 리해할수 없고 정세도 똑바로 볼수 없다, 우리와 함께 조선혁명을 끝까지 해나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학습을 해야 한다, 기관총수 안희창동무는 사령부의 의도를 깊이 명심하고 당면한 동기군정학습기간에 소속된 학습반에서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학습할뿐아니라 일생을 꾸준히 학습하는 혁명적기풍을 세워나갈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편지로 나를 깨우쳐주시였소.》

편지를 뜬금으로 외우고 난 안희창은 그때의 감회에 잠긴듯 고개를 푹 떨구고 잠시 말없이 서있더니 이윽고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동무들 보시오. 나는 몇달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장군님의 속을 썩여드린 미련한 목매지였소. 그런걸 장군님께서 이런 명령서까지 써가시면서 나같은 목매지들을 하나하나 사령부에 불러다 앉혀놓고 자모부터 가르쳐주셨소. 그러니 이 안희창이에 비해보면 억손동무는 선생이라고 볼수 있소. 그러나 앞으로 학습은 해야 한단말이요. 원쑤들의 세상에서 공부를 못한것은 흠이 아니지만 혁명조직이나 유격대에서 생활하면서 학습을 안한다는것은 곧 장군님의 사상을 받들지 않는것으로 된단말이요.》

희창이는 눈을 슴벅거리며 편지봉투를 전처럼 습기가 받지 않게 봇나무껍질로 정성스레 돌려감고 새하얀 천으로 차곡차곡 싸서 가슴깊이 간수하였다.

굴안에 모여든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경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올랐다.

안희창은 봉투를 다 건사하자 다시 히죽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볼 때 억손동무는 앞으로 유격대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할 각오만 가지면 얼마든지 유격대에 입대할수 있소. 억손동무는 자기에게 있는것은 든든한 허리와 성한 발바닥뿐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게 얼마나 귀중한 밑천인지 모르오. 아마 억손동무가 싸움터에 나가면 난쟁이왜놈들을 한두름씩 붙잡아 바위우에 태질해버릴게요. 그 몸에 중기관총이나 한문 안겨주면 일제침략군 한개 대대도 벌벌 떨게 할수 있단말이요!》

희창은 고리패랭이로 얼굴을 가리우고있는 억손이의 넙적한 어깨를 탁 쳤다. 억손이는 벌떡 일어나서 부르짖었다.

《야, 그런 혁명군이 됐으면! 나를 어서 징역살이같은데서 빼내주시우!》

젊은이들은 억손이가 희창의 웃동을 그러안자 박수갈채를 올렸다.

희창이는 청년들의 심장을 완전히 쥐락펴락하는것이였다.

혁명은 그를 저렇게 성장시키였다. 그는 어제날의 신입대원이 아니였다. 김주현은 문득 우리 혁명이 자기도 포함하여 수많은 청년들과 인민들을 억세게 키워내고있다는것을 가슴뜨겁게 느낄수록 이날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우시는 장군님의 영명하신 영상을 부지중 흐려드는 망막속에 그려보았다.

희창이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여기 모인 동무들속에 당장 입대하지 못하는 동무들도 있는데 절대로 락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백사람이 제가끔 제 고향에 가서 자기 마을을 하나씩 혁명화하면 백개의 마을이 생기게 됩니다. 공장에 가게 되는 사람은 공장로동자들을 묶어세우고 학교에 가게 되는 사람은 애국적인 선생들과 학생들을 묶어세우고 교회당에 례배보러 다니는 사람은 량심적인 교인들을 묶어세울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김일성장군님께서 내놓으신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 있는것입니다.》

이때 한 청년이 자기옆에 앉아있는 로동자를 바라보며 시까슬렀다.

《최형, 형장의 안댁은 뭐 남편이 공산군에 가면 치마를 푹 뒤집어쓰고 매돌을 안고 원소에 뛰여들겠다고 했다면서? 그러니 최형은 떠날수 없지 않나?》

김주현은 저으기 놀라서 최동무라고 하는 얼굴이 해사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최형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모욕을 느낀듯 얼굴이 하얘지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거야 협화회연사가 밤새도록 사람들을 끌어다놓고 공산당은 네것내것이 없어서 심지어 녀편네들까지 공동소유한다니까 무서워서 한 말이 아니요? 난 사실말이지 그런 맹물단지같은 처를 험한 세상에 남겨두고 가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소.》

이때 안희창이가 말참녜를 들자고 나서는것을 본 김주현은 또다시 마음이 죄여들었다. 서뿔리 다쳤다가는 복잡한 거스르미를 많이 일구어놓을수 있는 이야기거리였다. 그러나 희창은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일제놈들은 조선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못된 말로 혁명군을 헐뜯습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 혁명군은 어디에 내다놓아도 책잡힐 구석없는 조국의 가장 훌륭한 아들딸입니다. 유격대에는 부부도 있고 약혼자도 있습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남편과 안해가 함께 총잡고 싸워나가는것처럼 멋이 있는 부부간이 어데 있겠습니까. 우리 유격대에는 아이까지 데리고 다니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런 훌륭한 가정이 왜놈들 세상에는 단 하나도 없을것입니다. 입대를 결심하면서 가정일을 돌아다보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처자를 가진 사람이 어찌 뒤일을 돌아다보지 않겠습니까?》

희창은 상대방의 심정도 풀어주고 원칙도 일깨워주는데 아주 의젓했다.

모두 수긍한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는데 유독 억손이만은 얼굴이 시뻘겋게 충혈되여 벌떡 일어섰다.

《가족과 친척이 해를 입는것은 물론이고 우리자신이 죽을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사나이로 태여나 한평생 마소처럼 왜놈들한테 굽석이지 말고 기를 펴고 나라를 찾는 일에 몸바쳐 싸워보잔말이요.》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올리며 《옳수다!》하고 웨쳤다. 최동무도 절절히 웨치며 손벽을 쳤다.

이때 아까 김주현을 여기로 안내해온 청년이 뛰여들어왔다.

《안동무, 한가지 일이 생겼수다.》

그 젊은이는 될수록 침착하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목소리에는 벌써 억제할수 없는 흥분이 느껴졌다.

《난장에서 기관차가 탈선했는데 감독놈이 인부들을 몽땅 모아 놓고 당장 기관차를 철길에 올려놓으라고 소동입니다.》

희창이는 얼떠름해진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다가 자신없는 소리로 되물었다.

《기관차라니?》

《대가리만 혼자 들어왔다가 그 꼴이 된 모양입니다.》

희창은 잠시 눈을 꾸무럭거리다가 말했다.

《음, 몸뚱이를 떼놓고 대가리 혼자서 호뜰거리니까 털썩 떨어졌지.》

젊은이들은 희창이가 원래 말을 재미있게 한다고 하면서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다만 이 소식을 날라온 청년만은 놀음이 아니라는듯 신중한 자세를 고치지 않고 말했다.

《안동무,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수다. 이게 아주 좋은 기횐데 때를 놓치지 않고 기관차를 폭파해치우고 몽땅 산으로 들어가는것이 어떨가요? 그놈의 기관차대가리를 까치우면 되게 골탕을 먹일수 있수다.》

젊은이들은 어느새 그의 말을 듣고 바투 모여들며 속삭이였다.

《아주 비슷한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새 기관차를 끌어올 때까지 공사를 중단해야 할게 아닌가.》

억손이는 벌떡 일어서서 몸에서 바위돌부스레기를 털었다. 오래 앉아서 꾸물거릴것없이 일어난 김에 해제끼자는 잡도리였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들도 우르르 묻어일어났다.

안희창이가 한마디만 《그러세!》하는 날이면 당장 행동이 시작될 판이였다.

김주현이도 구경만 할수 없게 되여 엉거주춤 허리를 일으켰다.

안희창은 련락온 젊은이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옆에 앉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혁명투쟁이란 그렇게 마음내키는대로 마구 치고박는것이 아니요. 총 한방을 쏴도 전반리익에 맞아야 하는거요. 설사 원쑤 백놈을 죽였다 해도 대사를 망치게 하면 오히려 큰 과오로 되는거요. 그러니 침착히 앉아서 토론해보고 상부에 제기해봅시다. 이 문제는 책임자동지의 지시를 받고 행동해야 합니다.》

김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희창이한테로 다가가서 그의 손을 쥐였다.

《수고했소. 수고했소!》

안희창이는 이때 김주현이가 어째서 이처럼 새삼스럽게 자기의 손을 잡고 흔드는지 알수 없어서 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김주현은 그런것은 아랑곳않고 청년들을 둘러보며 빙긋이 웃었다.

《자, 담배나 한대씩 피우오. 》

김주현은 주머니안에 건사해가지고 온 담배를 희창에게 주어 옆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눈짓했다. 주현은 이 젊은이들을 위하여 줄수 있는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당장은 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난 가을에 희창이가 숱한 사람들한테 담배동냥을 하여 자기 주머니에 넣어주던 일이 떠올라 눈굽이 뜨거워졌다. 지금의 안희창이는 그때의 자기보다 얼마나 옳게 처신하는가! 희창이는 아무런 기색이 없이 담배를 받아 구석에 앉아있는 동무들에게 한가치씩 나누어주었다.

김주현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새롭게 앙양되여가는 우리 혁명의 거세찬 숨결을 감촉할수 있었다. 정세도 좋고 인민들의 투쟁열의도 높다.

김주현은 밀영밖에 나서자부터 걸음걸음 장군님의 탁월한 구상과 예견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것을 보았다. 지금 일제침략자들은 국경일대에서 죽자하고 몽강땅으로 밀려가고있다. 이런 때 백두산기슭의 중심에서 서뿔리 불집을 터쳐놓으면 놈들은 다시 장군님의 예견대로 몽강땅만 아니라 이쪽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할것이다. 이것은 그가 사령부에서 받은 임무와는 전혀 상반되는 행위였다.

김주현은 로동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드팀없는 어조로 말했다.

《싸움은 이제 김일성장군님께서 명령하신 다음에 합시다. 지금은 사람들속에서 더 많은 동지들을 획득하고 적 주구들을 갈라내는것이 중요합니다. 입대할수 없는 동무들은 지하사업을 벌리기에 맞춤한 고장을 물색하여 그곳과 련계를 가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후날에는 기관차를 폭파해치우더라도 오늘 당장은 가서 기관차를 철길에 올려세웁시다.》

로동자들은 더 고집쓰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모든 일이 예상밖으로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김주현은 철길부설공사장에서 벌려놓은 일에 대해서도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쌍산자, 가재수쪽에 갔다가 마동희에게서 련락원이 오기로 한 안날밤에 어김없이 돌아왔다.

김주현과 정두철은 아침부터 남쪽 골안이 잘 보이는 산허리에 올라가서 오솔길을 살펴보며 마동희가 보낸 련락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점심때가 지나고 해가 서산에 기울자 정두철의 얼굴에는 차차 초조한 기색이 비껴들었다.

《좀 늦어지는구만. 길을 잘 아는 동무요?》

안절부절 못하는 정두철이가 딱해서 김주현이 이렇게 묻자 그는 오히려 세차게 도리질을 하였다.

《길을 헛갈릴 동무가 아닙니다. 주대순동무를 모릅니까? 꼭 올것입니다. 주대순동무는 여기에 벌써 두번씩이나 왔댔습니다.》

김주현은 그런데 왜 이처럼 늦어지는가고 묻고싶었으나 말과는 달리 정두철의 얼굴에 무겁게 떠도는 불안의 빛을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또다시 한식경이 지나서 그들이 눈이 빠지게 지켜보는 오솔길에 자그마한 등짐을 진 소년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아무런 관심도 돌리지 않던 정두철은 그 소년의 얼굴이 보이자 깜짝 놀랐다.

《아니 저게 영수가 아닌가?》

정두철의 부르짖음속에는 랑패감이 풍기고있었다. 영수는 복남이의 자치동갑동무로서 지금 복례의 일을 돕고있는 샘골마을의 소년이였다. 복례는 자기가 여기에 직접 올수 없는 부득이한 정황이 생기면 영수를 보내군 하였다. 영수의 형이 이 공사판에서 일공로동을 하고있기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나들수 있는 점을 타산한것이였다.

정두철은 마음속에 갈마드는 불안을 더는 감추어내지 못했다. 영수가 나타났다는것은 오늘 이곳에 오기로 약속된 주대순이가 오지 못한다는것을 의미하며 조복례에게도 자리를 피할수 없는 딱한 정황이 생겼다는것을 의미했다. 정두철은 걱정스런 얼굴로 김주현을 바라보고나서 영수를 맞받아 달려갔다.

김주현은 태연한체 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조이며 정두철과 영수가 만나는것을 지켜보고있었다.

정두철은 영수의 등짐멜빵에서 성냥개비만 한 통신쪽지를 꺼내여 황황히 펼쳐들고 읽어나갔다. 그 얼굴을 지켜보던 김주현은 눈앞이 새까매지고 정신이 아찔해지는것을 느꼈다.

(아뿔싸, 그게 무슨 련관이 있는 말이 아닐가?)

김주현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금 정두철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는것이였다.

김주현은 이번에 쌍산자, 가재수쪽에 갔을 때 한 지하조직원으로부터 백암쪽에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갑산쪽에서 경찰들이 자동차를 타고 몰려 가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김주현은 경찰이 자동차를 타고 몰려다니는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기때문에 류념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온다던 주대순이 대신 소년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며 통신쪽지를 읽는 정두철의 표정이 컴컴하게 질리는것을 보자 자동차를 타고 백암으로 달려갔다는 경찰놈들과 이 일이 련관이 있다는것을 깊은 추리없이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정두철은 눈속에서 굳어진듯 한자리에 선채 움직일줄 몰랐다.

김주현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정두철이 멍청한 눈길로 들고있는 통신쪽지를 빼앗아 읽어보았다.

복례가 보냈다는 그 쪼글쪼글 구겨진 통신쪽지에는 날자가 지나도록 주대순이 나타나지 않고 국내에서는 마동희가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혜산경찰서에 갇혀있다는 소문이 떠돌고있으며 지금 갑산, 백암일대는 경찰, 밀정이 쫙 덮였다는것과 자기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혹시 그쪽에서 련락이 올지 모르기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한다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이럴수 있습니까. 한주일전만 해도 그쪽일이 잘되여간다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정두철은 눈에서 불꽃을 튕기였다.

김주현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만일 마동희가 체포된것이 확실하다면, 더구나 그것이 변절자의 밀고에 의한것이라면 즉시에 대책을 세워야 할것이다.

김주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가서 안희창동무를 여기로 보내주오. 수리바위굴련락소에 내가 나가봐야겠소. 만일 밤이 늦도록 주대순동무가 오지 않으면 곧 다른 대책을 세워야 하겠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정동무는 여기서 계획된 일을 드팀없이 내미시오. 이미 확인한 적정이 그사이 변동되지 않는가 하는것을 예리하게 살펴봐야겠소. 조직을 로출시킬수 있는 사소한 모험도 해서는 안되겠소. 이 일대는 미구에 장군님께서 진출하시게 될 로정에 놓인다는것을 명심하시오. 어서 안희창동무를 나한테 보내주오.》

얼마후 김주현과 안희창은 멀찌감치에서 앞서걷는 영수를 따라 샘골뒤산에 있는 수리바위굴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