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2


 

제 4 편

2

 

장군님께서는 오늘도 어둑컴컴한 새벽에 회리봉꼭대기에 오르시였다. 사면팔방의 산마루들과 골짜기들이 한품에 안겨드는 봉우리에 서시여 사위를 깐깐히 살펴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밀영에 바깥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다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회리봉에 오르시여 려명을 맞군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오늘 새벽에도 바람세찬 회리봉꼭대기에 서시여 주변의 산속에서 불빛이나 연기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것부터 살펴보시였다. 아득히 산발을 타고 펼쳐진 회색빛하늘가에 떠도는 기류와 강우에 어리는 안개와 낮게 맴도는 구름까지도 그이께서는 범상하게 스쳐보내지 않으시였다.

사위가 환히 밝자 그이께서는 쌍안경으로 낯익은 골짜기와 산마루들과 산허리들을 거듭 살펴보시였다.

오백룡이며 전달장은 묵묵히 장군님의 시선이 가는곳을 살피고있었다.

남동쪽에 깔려있는 봉우리들을 쌍안경으로 살펴보던 장군님께서는 쌍안경을 떼시고 육안으로 보다가는 다시 쌍안경으로 살펴보기도 하면서 서쪽과 북쪽을 둘러보시고나서 다시 남동쪽을 오래동안 살펴보시였다. 다른 방향과 대조해보시는것이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쌍안경을 오백룡에게 넘겨주시였다.

오백룡은 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곳을 살펴보았다. 30리나 될 먼 산골짜기에 뽀얀 기류가 보일락말락하게 깔려있었다.

《경위중대장동무, 저기 저 방향으로 가느다란 안개같은것이 보이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예, 그쪽에 지금 안개가 좀 낀것 같습니다.》

오백룡은 쌍안경을 눈에 더 바싹 갖다대면서 대답하였다.

《안개가 꼈다? 만약 그것이 안개라면 유독 거기만 한줄기 가느다랗게 늘어져있고 다른데는 왜 안개가 없겠소?

그제아침에도 저런 현상이 없었고 어제아침에도 없었소. 오늘 새로 나타난 징후요. 중대장동무, 저것이 연기같지는 않소?》

오백룡은 저으기 긴장되였다.

그는 눈이 아리도록 남동쪽을 내려다보았다.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심상치 않았다. 어제까지도 없던 현상일뿐아니라 유독 그곳에만 안개가 꼈다는것이 이상하였다. 그곳에는 강도 호수도 없고 산새도 다른데와 구별되는것이 없으며 바람새 역시 그쪽에만 안개를 피워올릴 유난스런것이 없었다.

그이께서는 그것이 구름도 아니며 안개도 아닌 연기라는것을 벌써 확신하시였다.

《이만 내려갑시다.》

장군님께서는 미끄럽게 다져진 눈판우의 길로 내리기 시작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병실로 돌아오시며 두번다시 연기가 낀쪽을 돌아다보거나 말씀하시는 일이 없었으나 내내 방금 포착한 그것을 두고 깊이 생각하시였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급히 사실을 알아보아야 한다. 만약 그곳에 적이 있다면···)

장군님께서는 즉시 순찰조를 뭇고 구체적인 지시를 주어 떠나보낸 다음 언덕을 내리시였다.

그이의 발길밑에서는 서걱서걱 눈밟히는 소리가 났다.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두터운 성에가루가 부실부실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이의 뇌리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문득 족제비사냥군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족제비사냥군은 사흘전에 또다시 선우제의 두툼한 편지를 가지고왔는데 만일 그곳에 적들이 밀려들었다면 그가 모를수 없다.

(족제비사냥군 렴형로···)

그이께서는 사색을 집중하시며 그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상기해보시였다.

그동안 김주현은 우연히 맞다들린 사냥군을 료해하고 꾸준하게 사업을 벌리였다.

렴형로는 처음 사귀기가 힘든 대신 한번 가까와지면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형의 인간이였다. 김주현은 여러모로 촉박한 정황이였지만 서두르지 않고 그와 인간적으로 가까와졌으며 세상일에 대해 허심하게 터놓고 이야기하였다. 산속에서의 고독한 생활과 사람을 경계하는데 버릇된 사냥군의 굳게 닫긴 마음은 힘겹게지만 천천히 드티기 시작했다. 렴형로는 김주현의 부탁을 받고 서너차례나 현성에 들어가 적들의 출판물들을 구입하여 꼬박꼬박 메여오게쯤 되였다.

김주현은 마침내 족제비사냥군을 통하여 선우제에게 장군님의 친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며칠후에 선우제로부터 절절하고도 감격적인 회신이 왔는데 장군님께서 김형직선생님의 생전의 뜻을 꽃피워 왜군을 족쳐대고있으니 과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속담이 그른데 없다고 탄복하면서 자기도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조국광복을 위해 다시 싸움을 계속하겠다는것을 불같은 말로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선우제는 장군님께서 자기를 만나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면 몽강일경을 들썩하게 해놓겠다고 장담까지 하였다. 그런데 김주현은 아직 족제비사냥군령감을 통하여 선우제를 편지로나 사귄 정도이고 그의 정체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있었다.

김주현은 자기가 직접 가서 선우제를 만나 그의 정체를 료해해보겠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승낙하지 않으시였다. 좀더 두고 여러모로 료해하려고 생각하신것이였다.

병실처마밑에 다가서시던 장군님께서는 오백룡에게 말씀하시였다.

《족제비사냥군로인을 나한테 보내시오. 김주현동무가 안내해서 함께 오도록 하시오.》

···그때 렴형로는 해빛을 쪼이며 토방앞에 앉아서 족제비가죽을 손질하고있었다.

《아바이, 벌써 일손을 잡았소? 일은 그만하고 나하구 어딜 좀 다녀옵시다.》

렴형로는 잠시 물끄러미 김주현을 바라보다가 딴 기색없이 손질하던 족제비가죽을 바람벽에 걸어놓았다. 그는 손을 탁탁 털고나서 뿔뚝 솟은 털모자의 귀가리우개를 턱밑까지 내리웠다. 그다음 팔짱을 지르고 허리를 구부정하고 아무말없이 김주현을 따라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서 언덕을 지고 해빛을 안은 아담한 병실들이 나타났다.

병실에서는 랑랑한 글읽는 소리가 울려나오고 마당에서는 젊은 유격대원들이 땅을 울리며 제식훈련을 하고있었다.

(여기에 이렇게 많은 군대가 있었는가? 별천지였군!)

족제비사냥군은 눈더미에 발이 빠지는것도 모르고 먼눈을 팔다가는 몸을 비칠거리군 하였다.

《아, 넘어지겠수다. 바투 따라서시오!》

김주현의 친절한 말을 들은 그는 목을 움츠러뜨리며 걸음을 다우쳤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데도 관심이 없는것처림 태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밀영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더 복잡했다.

(저 많은 젊은이들속에 총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 저런, 마당마다 기관총이 뻗쳐져있으니 도대체 기관총이 얼마나 많은가?)

렴형로는 자기가 김주현이와 작은 련락소초막에서 살면서 왜 아직 이런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불섬에 군대가 있기는 좀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처럼 잘 무장된 많은 군대가 덮여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놈들이 입만 벌리면 다 소멸되였다고 고아대던 조선군대가 이렇게 장하게 살아있었구나. 이 군대는 필경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군대가 분명해.)

그는 가벼운 마음을 안고 오래도록 괃아들었던 가슴을 쭉 폈다.

《아바이, 이젠 우리가 어떤 군대인지 믿을만하지요?》

앞에서 슬렁슬렁 걸어가던 김주현이가 돌아다보며 말했다. 렴형로는 불시에 창끝을 받은듯 주춤하고나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였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둠침침해졌다. 다행히 김주현은 그의 이러한 변화를 보지 못한채 앞서걷고있었다.

(내가 왜 함부로 내색을 하는가? 나는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사는 사냥군이 아닌가.)

렴형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의 등은 다시금 길마처럼 휘여들었다.

그는 뒤늦게야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본것이 없다는듯 머리를 저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늘그막에 본 자식들을 키우고 돌봐주는것외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굳이 자신을 납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생각은 하고싶은대로만 하는것이 아니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아도 복잡한 심정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이상한 일도 있다. 세상에 누구도 이 산속에 조선군대가 있다는것을 모르고있는데 정작 조선군대가 섬멸되였다고 고아대는 왜놈들만은 이 사실을 알고있지 않는가. 이게 별일 아닌가?)

그의 눈앞에는 초겨울 어느날 처음으로 곱새막에서 김주현을 만난후부터 지금까지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선우제의 회신을 받으러 몽강에 들어갔을 때 렴형로는 까닭없이 왜군헌병대에 붙잡혀 캄캄한 지하실에 끌려들어갔었다. 그 지하실에는 천만뜻밖에도 자기가 날라주는 김주현의 비밀편지를 받군 하던 선우제가 와있었다. 선우제가 아직 애국적인 지조를 굽히지 않고 지금도 왜놈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알고있던 렴형로는 기절할만큼 놀랐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새겨볼 짬도 없었다.

왜놈들은 다짜고짜 산속에서 본것을 사실대로 대라고 고무호스로 등을 패댔다. 놈들은 불섬주변에 수많은 유격대가 있겠는데 왜 세명밖에 없다고 하는가고 을러멨다.

그러나 렴형로는 사실 김주현의 소부대성원 세명만 보았기때문에 모른다고 끝까지 뻗치였다. 그러자 왜놈들은 렴형로의 아들딸 세남매를 끌고와서 자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아니 여보소, 당신들이 하라는 일을 하면 그만이지 새끼들은 왜 해치겠다는거요?》

렴형로는 입귀로 번져나오는 걸찍한 피덩지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40이 되여 장가를 든 렴형로는 늦게야 본 자식들이 제 목숨보다 더 귀하고 사랑스러웠다.

그에게 있어서 자식들은 온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렴형로는 자식들을 내놓고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미련도 없었다. 그는 리조말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자진해서 군대에 나갔고 일제강점후에는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군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간데족족 뜻은 꺾이고 힘은 진해갔다. 우둔하고 탐욕스러운 독립군 상관들에게 애국충정마저 짓밟히고 모욕당한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애착도 남아있지 않았다.

옛독립군의 우두머리였던 선우제는 그가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있던 량심마저 왜놈들에게 섬겨바치도록 만들었다.

그는 선우제를 저주했다. 그놈이 변절하여 자기가 그만 왜놈한테 걸려든것이였다.

일본놈들은 선우제의 정체를 절대 말하지 말며 제놈들의 요구대로 편지나르기를 계속하라고 강박하였다. 그리하여 렴형로는 자기를 혈육처럼 대해주는 김주현에게조차 이 내막을 말할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날라다주는 편지로 인해서 무슨 큰일이 생길것은 없으며 그런 조짐이 보이면 그때 귀띔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자신을 위안하고있었다.

렴형로는 골안에 깊이 들어설수록 다 떼던진줄 알았던 량심이 띠끔띠끔 아파나기 시작했으며 이미 단념해버린 옛날의 포부와 짓밟혔던 애국충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인민혁명군의 위용을 보는 그의 눈앞에는 항간에서 오가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독립군시절에는 꿈도 못꾸던 저런 속새포를 보통 병사들이 척척 메고다니지 않는가? 쩌렁쩌렁 울리는 저 구령소리와 노래소리는 얼마나 씩씩하고 우렁찬가?···)

김주현은 산허리를 타고 올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허리를 깊숙이 굽힌 렴형로는 뒤짐을 지고 따라걸었다.

산발에 오르자 눈가루가 섞인 가벼운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숲속에서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일어났다.

렴형로는 자주 고개를 돌려 골짜기마다에 차고넘친 군대와 그들이 들고있는 총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왜놈들이 겉으로는 흰소리를 치면서도 어째서 김일성장군님의 군대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가히 짐작할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무서운 자책에 휩싸이였다. 숲속에 이렇게 큰판이 벌어지고있는것을 알았다면 응당 유격대편에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그리고 선우제놈과 절대로 거래를 하지 말라고 일깨워주어야 했을것이다.

유격대가 화를 입기전에 그자를 고발하고 왜놈의 꿍꿍이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결심이 가슴에 들어찼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사실을 다 말한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자기를 믿어주겠는지 신심이 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도리질을 했다. 제일 무난하자면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척 해야 할것이다.

그는 조선군대앞에 죄를 지을수도 없었고 적들의 손탁안에 들어있는 아이들에게 화를 입힐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심한 모순에 빠져 잠시도 진정되지 않았다. 발길은 이제라도 옳은 길로 돌따서려고 하였으나 마음이 가볍게 따라서지 않았다.

심한 모대김속에 빠져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득 다른 생각에 잠겨들었다.

(내가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있는가? 이 사람들이 모든것을 눈치챈게 아닌가? 내가 속이고있다는것을 다 알고 처단해버리자는건 아닐가?)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별스레 싱글싱글 웃는 김주현의 웃음속에도 다 깊은 뜻이 숨어있는것 같았다. 그는 다시금 얼굴이 돌처림 굳어지고 새까맣게 질리였다.

잣나무숲속에 아담한 집 한채가 나타났다. 마당은 깨끗이 쓸려있었고 뙤창앞에는 싸리광주리로 만든 새덫이 놓여있었다.

가벼운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처마끝에서는 눈석임물이 흘렀다. 길쭉길쭉한 고드름이 해빛에 녹아내려 철썩하고 눈우에 떨어졌다.

여태 군대와 병실과 무기들을 보고 얼이 나간 렴형로는 뜻밖에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귀틀집이 나타나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것에 깊이 관심을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기를 이미 산 사람으로 여길수 없었다. 그저 김주현이가 하라는대로 정신없이 방안에 들어서자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있는것을 보았다.

방안은 밝고 훈훈하였다.

렴형로는 눈길을 들지 못한채 김주현이 이끄는 자리에 가서 소리없이 앉았다.

잉걸불이 하나가득 담긴 화로에서는 화끈한 불땀이 퍼져나오고있었다.

화로앞에는 색이 바랜 여름군복올 입고 그우에 솜저고리를 걸친분이 부저가락으로 재를 불더미우에 덮으면서 맞은편 사람의 말을 듣고있었다. 렴형로는 무슨 까닭인지 대뜸 그분을 대장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분은 멀찌감치에 둘러앉아있는 김주현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우람차거나 나이가 많은것도 아니였다. 그렇지만 감히 머리를 들고 그분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볼수 없었다.

김주현이가 뭐라고 말하자 색이 바랜 여름철군복을 입은 그분께서 인자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아, 사냥군로인을 모시고 왔소? 반갑습니다. 군수관동무의 보고를 마저 듣고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우리는 겨우내 편히 앉아서 공부도 하고 훈련도 했는데 군수처동무들이 고생을 많이 했소. 동무도 여기 앉아서 후방밀영에 남아있던 한길복동무의 이야기를 들으시오. 재미있소.》

렴형로는 오고가는 말속에서 자기의 운명이 비낀 암시라도 찾아내려고 고개를 떨구고 귀를 솔깃이 강구었다.

《저희가 옷을 얼마나 지었는지 김윤화동무가 한배낭 메들인 재봉실이 거덜날 지경이였습니다. 양력설이 지나고 음력설이 다가오는데 일손이 딸려 생각다못해 나중에는 천을 찢어 감사리로 돌리였습니다. 그래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까지는 가난한 집에는 몽땅 설빔과 설빔감을 돌려주었습니다.》

《정말 수고했소.》

군수관의 보고를 받은 젊은분은 무척 기뻐하시였다.

렴형로는 며칠전에 항간에서 떠돌던 소문이 생각났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새해 음력설을 맞으며 늙은이들과 고아들,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잔치를 베푼 다음 옷을 한벌씩 지어 보내셨다더니 지금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 아닐가? 헛소문이 아니였구나!

그러면 군수관에게서 보고를 받으시는분이 김일성장군님이 아니실가?

렴형로는 머리를 저었다. 하늘이 낸 명장 김일성장군님은 백발이시고 흰 수염이 땅에 끌리게 길다고들 했다. 그처럼 인망을 고이고 명성을 떨치자면 100살도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닐것이다. 움이 질리워 감히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체구며 어성을 보면 30전의 청년이지 결코 백발의 로인은 아니였다. 그는 바짝 정신을 차리였다.

군수관은 얼굴이 불깃불깃해서 흥겹게 자기 보고를 계속하고있었다.

《가재수 중앙포대옆에 사는 조오선아주머니는 이번에 돌아올 때 들리여왔는데 병도 다 나았고 기분상태도 좋았습니다. 그 집 아주머니는 난생처음으로 설을 잘 쇠고 긴병도 뗐다고 하면서 이전까지는 왜놈군대가 보기 싫어 포대를 피해 멀리 이사가려고만 생각했으나 이제는 거머리처럼 포대옆에 딱 붙어있다가 장군님께서 군대를 이끌고 나오시면 자기손으로 왜놈의 포대문을 열어 길을 안내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듣던중 반가운 소식이요. 왜놈들한테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외롭게 살자니 얼마나 고생스럽겠소. 이제 봄이 오면 한번 나가서 만납시다.》

그이께서는 흥미진진하게 군수관의 보고를 들으시였다. 군수관은 김주현이 낯선 사람을 데리고 들어온것을 보고나서는 곧 보고를 마무리짓고 물러설 차비였다. 그는 무릎앞에 놓여있는 털모자를 그러쥐며 말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밀영주변에는 왜놈들이 몰려들고 정탐군들이 욱실욱실합니다. 놈들이 무슨 냄새를 맡긴 맡은 모양입니다.》

렴형로는 몸이 오싹했다. 드디여 자기가 은근한 공포와 불안속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있던 그 문제가 제기된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엄숙해지시며 말씀하시였다.

《충분히 그럴수 있소. 그런데 밀영주변에서 붙잡았다는 사람들을 똑똑히 알아는 보았소?》

초막에 나타나군 하던 경위중대장이 대답하였다.

《네, 한사람은 왜놈들이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온 가족을 멸살시키겠다고 강박하여 할수없이 바라나와 돌아다니였다고 솔직히 실토하는데 한놈은 자기가 정탐임무를 받았다는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제특무기관으로부터 신표로 받은 여우이발까지 옷자락혼솔에서 나졌는데도 부인합니다.》

그이께서는 오래도록 깊이 생각하시였다.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듯 밝던 량미간에는 한줄기의 주름살이 패이고 가느다란 음영이 깃들었다.

《어떻게 하겠소. 왜놈들이 제놈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온 가족을 멸살시킬것은 뻔하지, 눈뜨고 그 참경을 참아내지는 못하겠지, 조선사람들이 지금 모두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깨끗한 량심을 지키며 살수 없는것이 굶고 헐벗은 불행보다 더하단말이요.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시오. 몸이 얼지 않게 옷을 입었는가 하는것도 알아보고 필요하면 옷도 해주고 로자도 길량식도 마련해주시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반역의 올가미에 매이지 않도록 처신하라고 잘 타일러보내시오.》

그이의 말씀은 어딘가 측은함과 안타까움에 갈리는듯 하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어조가 격하게 울리였다.

《적들이 준 신표까지 찾아냈는데 부인하는놈은 나쁜놈이요. 그놈을 어디서 붙잡았소?》

《여기서 10리도 못되는 산속에서 붙잡았습니다. 불섬내막을 알아보려고 기여든놈이였습니다.》

경위중대장이 송구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이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련대정치위원들이 모두 모여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시오.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심하지 않고 계속 반역의 길로 나가려는자는 겨레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처단해야 하오. 반역자 한놈의 짧은 혀가 민족의 위업을 망쳐먹을수 있소. 》

렴형로는 부저가락으로 엉치를 찔리운듯 흠칫하다가 고개를 숙이였다. 그이의 말씀은 꼭 자기더러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같았다. 그는 목을 움츠리며 가슴을 옥죄였다,

자기 역시 방금 처단해야 한다는 그 간첩과 다를바 없는 사람이였다. 두 간첩의 운명은 곧 자기의 운명이기도 하였다.

《사령관동지,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군수관이 털모자를 들고 일어서서 인사했다. 렴형로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펄쩍 들었다.

(사령관이라니··· 정녕 이분이 불세출의 영웅명장 김일성장군님이시란말인가?)

족제비사냥군은 난생처음 힘이 용솟음치는것을 느끼며 장군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이의 모습은 이른새벽 노을빛과도 같이 청신하였다. 그이의 볼에는 웃으실 때마다 보일락말락 볼우물이 패이였고 유순하고 그윽한 눈길에서는 별빛과도 같은 빛이 뿜기였다.

(이분이 과연 왜놈의 100만대군을 쥐락펴락하는 김일성장군님이신가? 내가 과연 김일성장군님앞에 앉아있단말인가?)

렴형로는 놀라왔다. 머리속에 그려오던 구척장신의 거인이 아니라 어디선가 여러번 만나뵌것 같은 친근한 겨레의 모습이시였다.

어떻게 이렇게 평범하고 인자하신 장군님께서 산속에 차고넘친 조선군사를 일으키시고 지휘하실가? 어떻게 이렇게 젊으신 나이에 일제의 100만대군을 사시나무 떨듯 하게 할수 있을가?

한평생 마음을 의지할곳이 없이 고아처럼 살아온 렴형로는 그이께 마음이 끌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죽기전에 다하지 못한 민족의 도리에 대해서와 겨레의 암담한 전망에 대해 하소할 사람조차 찾아보지 못하고 고목처럼 늙어온 그는 대뜸 장군님앞에 엎드려 모든것을 털어놓고 속을 기울이고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그러나 자기몸에는 이미 왜적의 검은 손길이 미쳐있고 민족의 량심은 덞을대로 덞은 뒤였다.

장군님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고 그를 바라보시였다.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화로곁으로 오시오.》

장군님께서는 허물없이 그를 대해주시였다. 렴형로는 펄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김주현은 민망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그의 팔을 쥐여끌었다.

《아바이,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기탄없이 말씀을 나누십시오.》

렴형로의 몸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럽니까? 진정하시오.》

장군님께서는 의아한 생각을 누르시며 너그럽게 로인을 바라보시였다.

《몸이 불편한게 아닙니까?》

김주현은 자기도 뜻밖이라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으로 장군님을 바라보았다.

김일성장군님···》

렴형로는 목메인 소리로 한번 부르고나서 다시 고개를 푹 꺾고 눈물을 흘리였다.

렴형로는 자기가 죽고 아이들을 다 잃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김일성장군님 앞에서 거짓말을 할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기다싶이하여 장군님 앞에 다가갔다.

《장군님, 김일성장군님, 때늦게 알아뵙게 되였음을 용서하십시오!》

사이문곁에 앉아있던 오중흡이며 오백룡이들이 놀라 로인을 저지시키려고 몸을 붙잡았다.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계시던 장군님께서는 낮으나 책망기가 어린 음성으로 그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냥 두시오.》

지휘원들은 한발작 물러서서 담벽처럼 서있었다.

렴형로는 장군님의 발밑에 쓰러져 목갈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놈은 저지른 죄가 죽어마땅한놈이웨다. 장군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숨이 붙어있을 때 한마디만 여줍게 하여주십시오. 땅에 묻힐 늙은것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여기까지 숨가쁘게 말한 렴형로는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잦아 든 방안분위기에 스스로 압도된듯 잠시 목을 비틀더니 이윽고 침통한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저 편지는 선우제가 쓰기는 했지만 그놈은 왜놈과 한통속이 되였습니다. 편지는 왜놈이 시켜서 쓴 거짓편지올시다. 선우제는 알고보니 숨어있는 왜놈의 개였습니다. 저는 이왕부터 참의부 관련자들이 하나하나 왜적에게 붙잡혀가 죽음을 당하는것을 보고 무슨 연고가 있다고 생각해오던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선우제가 참의장 서리를 지낼 때 가지고있던 공과기가 왜놈헌병대사무실 책상에 놓여있지 않겠습니까?

공과기에는 독립군의 공적과 과실이 적혀있을뿐아니라 참의부에 금품이나 식량, 피륙을 희사한 애국동포의 주소, 성명, 생년월일이 다 적혀있은즉 그 책만 번지면 누가 왜놈을 미워하는지 손금보듯 알수 있습니다. 그놈은 어려울 때 나라와 겨레를 잊지 않은 애국자들을 후세에 알려주어야 할 공과기마저 팔아먹은 극악무도한 역적이올시다. 선우제놈은 이번에도 이쪽에서 보낸 편지를 왜놈의 손에 넘겨주고 들은 족족 고발하여 왜놈들도 이 어방에 유격대대군이 있다는것을 다 짐작하고 그 소재지를 확정하자고 날뛰고있습니다. 놈들은 무엄하게도 장군님을 모해하려고 저를 꼬여 모르는체하라 하고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몽강으로는 지금 무수한 왜병이 밀려오고있습니다. 이 늙은것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놈들은 저더러 밀영에 사령부가 있는가 하는것을 알아오거나 련락할길이 막히면 밀영이 있는 숲에 산불을 지르라고 하면서 상금 만원을 주겠다고 꾀이였습니다. 제가 그런짓을 못하겠다니까 이 늙은것을 개패듯 때렸습니다. 자, 말을 못믿겠으면 왜놈들이 제몸에 낸 상처를 봐주십시오!》

렴형로는 옷깃을 거머쥐고 가슴을 터치듯 옷을 마구 잡아당겼다. 후드득하고 단추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였다.

갈비대가 알른알른한 로인의 여윈 몸뚱이에는 얼룩덜룩한 상처가 있었다.

그것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뜻있는 눈길로 김주현을 바라보시였다. 김주현이도 얼마전에 로인의 몸에 갑자기 상처가 생긴것이 이상하여 물어보니 로인은 구적바위에서 미끄러져 생긴 흠집이라고 말했다. 김주현은 그 말이 그닥 미덥지 않아서 장군님께까지 보고드린 일이 있지만 지금 와보니 왜놈들의 악형으로 생겨난 상처였다.

웃몸을 벗어보인 족제비사냥군은 심장이 터진듯 구름노전우에 엎디여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장군님께서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것을 느끼신듯 주런이 서있는 지휘원들을 보시며 지시하시였다.

《동무들은 잠간 나가있으시오.》

장군님께서는 오래도록 렴형로의 이야기를 혼자서 들어주시였다.

밖으로 나온 김주현은 족제비사냥군과의 사업에서 자기가 놓친것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찾으려고 그와 접촉한 전과정을 회고해보았다.

그는 첫날부터 족제비사냥군을 혈육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족제비사냥군 역시 그를 오랜 친지처럼 생각하고 속을 터놓는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와서 보면 족제비사냥군은 가장 크고 중요한 비밀만은 제 가슴속에 깊숙이 감추어두고 빛도 드러내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가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김주현에게 쉽사리 기탁할수도 없는 형편이였다. 오로지 김일성장군님을 알아뵙는 순간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이 발동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비밀을 털어놓은것이였다.

사실 그것은 모든 세상일을 다 외면하고 가족들과 오붓하게 살아가기만을 소원하는 족제비사냥군으로서는 대용단이라고 볼수 있었다. 자신과 사랑하는 아이들이 다 처단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적량심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품은 사람들만이 이런 용단을 내릴수 있는것이다. 애국과 반역, 삶과 죽음의 기로에 들어섰던 렴형로는 마침내 장군님을 믿고 오직 장군님을 따르겠다는 립장에 확고히 돌아선것이였다.

족제비사냥군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신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를 돌려보내고 잠시후에 마당으로 나서시였다.

이때 군복아래도리에 눈가루가 묻은 순찰조가 마당안으로 들어서고있었다. 그들의 급한 걸음걸이와 긴장한 표정을 살펴보신 장군님께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있음을 짐작하시였다.

순찰조는 안개같은 연기가 피여오르던곳에서 왜놈들의 대숙영지를 발견하였다. 적들은 흰 천막을 치고 숙영위치를 교묘하게 위장하였지만 불섬주변을 따라 그물처럼 펼쳐놓은 천막을 다는 감추지 못하였다. 순찰조의 보고를 통하여 장군님께서는 적의 대병력이 불섬을 포위하고 기회를 노리고있음을 간파하시였다.

(족제비사냥군도 그런 말을 했지. 그런데 이 화단이 진정 선우제의 변절때문인가? 선우제가 우리의 위치를 적들에게 고발했겠는가?)

족제비사냥군은 선우제가 사령부의 위치를 고발했기때문에 적들이 포위진을 쳤을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마당에는 련대장들, 련대정치위원들, 중대장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소?》

이렇게 맡씀하며 지휘원들을 둘러보시던 장군님께서는 긴장되여있는 김주현의 모습을 띄여보자 웃음을 머금으시였다.

《김주현동무가 족제비사냥군과의 사업을 잘하였소!》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면구해서 눈길을 들지 못하고있는 김주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였다.

《김주현동무가 족제비사냥군에게 일상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면 그 늙은이가 우리에게 모든 내막을 실토하지 않았을것이요.

적들은 족제비사냥군을 리용하여 우리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였으나 우리는 반대로 적모략기관의 내막을 알아냈소.》

장군님께서는 통쾌하게 웃고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동무들이 이번 사건의 내막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것이 필요하겠소.》

장군님께서는 족제비사냥군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선우제의 고발에 의해서 일제특무기관에 체포된 후 자기에게 달려있는 아이들을 살리자는 생각으로 놈들의 거짓편지를 가지고왔다고 알려주시였다.

《그 로인이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당장 큰 일이 터질것은 없겠지만 커다란 위험에 빠질번했소! 그리고 중요한것은 반역의 길로 굴러떨어질번한 겨레의 한 사람이 사상정신적으로 구원된것이요. 》

장군님께서는 온화한 빛을 띠우고 지휘원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실무적으로 볼 때 족제비사냥군은 오늘 비로소 여기에 큰 군대가 있고 사령부가 있다는것을 알았다니까 우리에게 큰 후과가 미칠것도 없을거요.》

김주현은 자기가 족제비사냥군에게 밀영의 내막을 알지 못하도록 한것도 있지만 족제비사냥군자신이 애써 아무데도 관심을 돌리지 않았으니 십분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선우제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나서 내가 나가든지 박덕산동무나 김주현동무를 내보내여 몽강에서 선우제를 만나게 하려고 계획했댔소. 그런데 어떻게 될번했소? 선우제는 적들의 두발가진 개로 전락되였다고 하오. 더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지만 아무튼 위험했소!》

장군님의 얼굴에는 그 순간 준엄한 빛이 어리였다.

김주현은 자기가 선우제를 직접 대면하러 가겠다고 제기했을 때 아직 그러기는 이르니 좀 더 두고 관찰해보고 결심하자고 하시던 장군님의 말씀을 돌이켜보면서 먼 앞날을 내다보시는 그이의 넓은 안목과 통찰력에 새삼스럽게 탄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