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16


 

제 4 편

16

 

해빛은 밝고도 따뜻하다.

푸른 잔디가 깔린 산허리와 골바닥은 볼수록 포근한데 노란 병아리꽃이며 보라빛 할미꽃들이 띠염띠염 피여있었다. 얇은 구름은 허리를 편 산봉우리를 천천히 지나고 어디선가 어슴푸레 물소리가 들린다.

이름모를 새 한마리가 야들야들하고 윤기나는 봇나무의 애순사이로 뿌르릉 날아난다.

홀로 숲속을 거닐던 장군님께서는 날아나는 새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시였다. 새가 마음놓고 날으는 푸른 하늘은 얼마나 맑고 넓은가. 그 넓은 하늘밑에서 봄볕을 받으며 새움을 틔우는 숲은 얼마나 청신한가. 공간에 차고넘친 온화한 대기와 특유한 정적은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나 부풀게 해주는가.

온몸으로 이해의 봄을 느끼는 사령관동지의 심정은 사뭇 감개무량하시였다.

지난 가을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봄의 승리를 믿은것은 아니였다.

대자연이 사나운 추위를 이겨낼 때 우리 혁명은 또한번 시련의 불길속을 헤쳐왔다. 그 뜨거운 불길속에서 아주 타버린것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어차피 세월이 가면 동녹이 쓸게 마련인 그런 우연한 요소들일것이다. 불길속에서 재를 털고 우리 혁명대오는 이제야말로 겉과 속이 똑같이 그윽한 은빛을 뿜는 강철로 다져지고 벼려졌다.

장군님께서는 생각에 잠겨 인적없는 숲속을 그냥 홀로 걸으시였다. 그러다가 문득 멀찌감치에서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소리를 감촉하시였다. 잠시 걸음을 늦추시며 기다려봐야 그 발걸음소리는 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이께서는 숲이 성기여진 나지막한 버덩에 나서서야 훤해진 뒤를 돌아보시였다. 역시 짐작하신대로 깊은 생각에 잠긴 김주현이가 묵묵히 따라오고있었다.

(주현동무도 겨울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지. 주현동무도 준엄한 시련속에서 더욱 억세여졌다. 그런데 종철이랑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왜 따라오는가? 참 사람두···)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며 김주현을 향해 돌아서서였다. 김주현은 그때야 앞으로 다가왔다.

《주현동무!》

장군님께서는 그의 어깨우에 손을 얹고 깊은 감회가 어리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지난 겨울 무척 힘들었지?》

김주현은 웬일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겨울 정작 가장 큰 불행과 슬픔을 겪으신분은 사령관동지이시였다. 김주현은 장군님께서 이겨내신 고통의 백분의 일도 다 알지 못하고있지만 자기가 알고있는 그것만 해도 다 초인간적인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것들이였다.

《사령관동지, 지난 겨울은 저의 일생에서도 가장 뜻깊은 해였습니다. 저는 비로소 조선혁명의 진리를 깨달은듯 합니다. 장군님의 의도를 잘 받들어나갈 때 우리 혁명은 어떤 곡절도 랑패도 있을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제가 이따금 괴로움을 느낀것이 있다면 응당 혁명전사로서 제가 해야 할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한데서 오는 정신상의 고통이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회포에 잠기시여 말씀하시였다.

《이제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맙시다. 나 역시 그때는 마음이 좋지 않았소. 망망대해에서 룡을 낚아야 할 장수가 실개울에서 미꾸라지나 잡고있는것 같았으니말이요. 그러나 나는 오늘을 믿었소.

지난 겨울은 우리 인민혁명군모두에게 참으로 잊지 못할 겨울이였소. 이 겨울에 우리 혁명은 또하나의 자랑스러운 년륜을 새겼다고 말할수 있소.

일이 모두 뜻대로 잘되였소.》

김주현은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가을부터 자기가 겪어온 파란곡절을 돌이켜보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김주현의 손을 다정히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주현동무, 이제부터 동무는 새 임무를 수행해야 하겠소.

동무는 다시 7련대장으로 사업하면서 겸해서 인민혁명군의 후방사업을 책임지고 맡아보아야 하겠소.》

김주현은 가슴속 깊은곳에서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며 장군님을 우러렀다.

실로 뜻밖의 신임과 믿음이였다. 그이께서는 기대에 찬 안광으로 김주현의 흥분한 얼굴을 바라보시였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김주현은 그이앞에 차렷자세로 섰다.

《사령관동지, 높은 신임에 보답하···》

김주현은 격정에 넘쳐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됐소, 그만하고 사업문제를 토의합시다.》

하고 그이께서는 몇걸음 앞서 걸으시였다.

《지난해 초가을에 있은 〈열하원정〉이 당분간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줄것 같소. 우선 우리는 끌끌한 부대들을 보내여 곤난에 처한 〈원정〉부대들을 도와줍시다.

그리고 그곳 군장이 간절히 소원하는데 그의 요구대로 호위병과 련락병을 보내줍시다. 사령부에서는 안희창동무를 기관총수로 보내고 조복남이를 련락병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소.》

《그 동무들은 다 준비된 동무들입니다.》

김주현은 자신있게 대답올렸다.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눈길을 떨구고 서있는 김주현의 탐탁한 몸매를 살펴보시였다.

《주현동무가 이제부터 큰 몫을 감당해야 하겠소.

올해 10월까지 우리 인민혁명군과 그 다섯배에 달하는 인원들에게 줄수 있는 무기와 겨울옷을 마련하고 석달동안 공급할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야 하오. 큰 과업이요. 적들에게서 로획도 하고 장사군들에게서 사들이기도 하고 후방밀영에서 생산도 하여 어김없이 전량을 확보하여 극비밀리에 남패자주변에 날라놓아야 하겠소. 나는 이 큰 사업을 동무에게 맡기지만 동무의 손에 들려줄것이 없소. 동무를 믿는 마음뿐이요.》

김주현은 눈굽이 뜨끈해졌다.

《사령관동지, 이제 부대들이 적들에게 호된 징벌을 가할것이고 겨울을 이겨낸 지하조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으니 빈손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지난 한해동안 겪은 일들이 상기되여 심각한 표정이 엇바뀌며 지나갔다. 그이께서는 그의 억센 표정을 보다가 미소를 띠우시였다.

어느새 길옆에 나타난 개울을 따라 내려가니 귀틀집의 저쪽 잔디판에 한마리의 말이 서있었다. 그 둘레에는 박덕산을 비롯한 지휘원들이 주런이 서있는데 전달장이 고삐를 잡고 새파란 잎이 달린 나무가지를 말주둥이에 대주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군마를 쓸어주며 찬찬히 살펴본 다음 김주현에게 말씀하시였다.

《목재소로동자들이 우리에게 보낸 선물이요. 동무가 한번 타보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오중흡이가 주현을 붙잡아 말우에 올려앉혔다.

《잘 어울리오! 멋있소!》

장군님께서는 말우에 앉은 김주현을 바라보며 매우 기뻐하시였다.

《주현동무한테는 일이 많소. 말을 타고 계속 뛰여도 다 해낼것 같지 못하오.》

장군님께서는 군마의 잔등을 철썩하고 가볍게 치시였다.

잘 길들여온 군마는 성큼성큼 걸으며 언덕을 에돌았다.

《사령관동지!》

갑자기 김주현이 목메인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말에서 뛰여내렸다.

《사령관동지, 반드시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집행하겠습니다.》

《나도 그러리라 믿소.》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굳게 잡고 힘있게 흔드시였다.

미구에 지휘원들은 다 돌아가고 둔덕은 조용해졌다. 김주현이까지 돌아가고보니 어쩐지 마음속이 허전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봄이 무르녹는 시내가를 따라 다시 상류로 오르시였다.

땅이 부풀어나는 냄새며 새싹이 움트는 향기며 겨울을 묵고난 락엽속에서 풍기는 냄새들을 그이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였지만 이 순간은 화창한 하늘도 기지개를 켜는 수림도 다 감득하실수 없었다. 그이께서는 가슴이 묵중하여 걸음을 내여디디실 때마다 한가슴 차고넘친 슬픔의 눈물이 흘러넘칠것 같으셨다.

장군님의 귀전에는 활기에 넘친 마동희의 말소리가 쟁쟁히 들리는것 같으시였다. 마동희의 모습은 다시금 권영벽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권영벽은 무수한 장가지들을 벌리고 높이 솟은 락락장송처럼 정세의 흐름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할줄 알았으며 땅이 솟구치게 튼튼한 뿌리를 박은 나무기둥처럼 근본이 뒤흔들리지 않았다. 엄혹한 시련이 닥쳐오고 간고한 환경에 빠져도 그의 순결한 지조는 소나무처럼 변색을 몰랐다.

장군님께서는 시내물이 시작되는 샘터에 이르러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두텁게 쌓인 락엽을 밀어젖히시였다. 손등으로 흙을 파내고 돌을 추어내시였다.

기나긴 한해겨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온갖 고통을 참아오면서 이제 새봄에 백두산에 나가 지하정치일군들을 만나면 흉중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자고 별러오신 그이시였다.

(지난 겨울 우리가 겪어야 했던 시련은 험난하였다. 한걸음 잘못 내여디디면 우리 혁명은 파국의 나락에 빠질번 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시련을 이겨냈을뿐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을 강대한 혁명무력으로 장성강화시키고 1938년의 춘기작전을 큼직하게 벌릴수 있었다. 권영벽동무와 마동희동무들에게 부대의 자랑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것이 안타깝구나. 수많은 동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혁명력량을 지켜낸것이 우리의 의도와 구상을 실현하는데서 얼마나 큰 기여가 되였다는것을 그들이 볼수 있다면···)

척척한 흙을 파헤치고 돌을 뽑아내시니 물씬하고 변두리의 흙벽이 무너지면서 실오리만 한 샘줄기가 탁 터지였다. 그이께서는 샘줄기밑을 오목하게 파고 그밑으로 도랑을 째주시였다. 돌을 한겹 들어헤치시니 바닥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다가 훌떡 넘어 락엽이 깔린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수정같이 맑은 물은 진록색과 연두색의 이끼가 겹싸인 뭉글뭉글한 돌들을 적시며 찰랑찰랑 흘러내렸다. 마침내 새봄의 첫 흐름이 나타나고 버들잎이 날려와 흐르는 물우에 떠서 맴돌이쳤다.

장군님께서는 허리를 굽히고 그 정갈한 샘물에 손을 씻으시였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조국땅의 하늘가를 바라보시였다.

그날저녁 밀영을 떠난 주력부대는 그 개울을 따라 압록강연안으로 행군했다. 새로운 골짜기가 나설 때마다 전국 각지에 파견되여가는 정치공작원들의 소조며 적을 기습하기 위하여 떠나가는 부대들이 갈라져나갔다.

김일성장군님의 비범한 혁명적의지의 소산인 인민혁명군의 불패의 대오는 불의와 암흑에 찬 세상을 밝게 비치며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