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13


 

제 4 편

13

 

박차석에게는 설사 자기의 귀중한 땅을 걸구기 위한것은 아니지만 거름통을 메는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하등의 고통으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오끼나 미야모도의 독묻은 손아귀에서 벗어져났다는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시 얻은것만치나 기뻤다.

그렇기때문에 짐수레에 실려 집안 가까운 어느 으슥한 초원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비밀농장에 짐짝처럼 부리워지고 이어 감독이라는 일본사무라이영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스산하게 생긴자에게서 첫마디부터 상욕을 얻어먹으며 단벌신사복을 벗기웠을 때도 그는 아무런 모욕감도 불평도 느끼지 않고 예예하며 허리를 굽신거렸던것이다.

오끼가 관동군사령부에 불리워간채로 나타나지 않고 미야모도가 남몰래 할머니를 만경대로 돌려보낼 차비를 하고있을 때는 정말 간이 콩알만해졌었다. 오끼가 아무리 사납게 군다 해도 당장은 그자가 든든해야 자기 목숨도 붙어있는것이다. 그러나 특무졸개들사이에 돌아가는 뛰뛰한 소문처럼 오끼가 이번 사건실패의 전책임을 지고 목이 떨어진다면 그와 련결된 모든 인간들의 운명 역시 끈떨어진 뒤웅박신세를 면할수 없는것이다.

더구나 박차석에게 좋지 못하게 생각된것은 의례 자기가 개입돼야 할것 같은 할머니에 대한 문제처리를 미야모도가 서투른 조선말로 직접 진행하고있는 사실이였다. 이것은 벌써 자기를 제껴놓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는 현성북쪽의 어느 산속에서 우연히 유격대공작원에게 붙들려서 《최후통첩문》을 넘겨주고 구사일생으로 놓여나온후 한번도 할머니와 조용히 만나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고보면 자기가 일부러 그런 기회를 피해왔다고 볼수 있었다. 그는 오끼로부터 든든히 자갈을 물리웠다.

할머님께서 자기가 인민혁명군대원과 접촉했다는것을 아시면 응당 유격대형편을 물으실것이였으나 자기는 말 한마디 할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가 유격대한테 붙잡혔댔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새여나갔는지 려관은 물론 거리에까지 소문이 퍼져버렸다.

어느날 2층에서 내려오다가 굽인돌이에서 할머니와 딱 마주치고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할머니는 유난스런 표정을 지으신것 같지는 않았으나 가슴을 짓누르는 죄의식에 시달리고있던 그는 주춤하고 걸음을 멈추었으며 이어 고개를 깊숙이 떨구었다.

《자네 몹시 바쁜 모양이군? 통 얼굴을 볼수 없으니···》

할머님께서는 서느러운 눈길로 박차석의 후줄근해진 몰골을 아래우로 살펴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예, 두루두루···》

《자네가 우리 장군의 유격대한테 붙잡혔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적실한가?》

할머니의 거침없는 말씀에 박차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사위를 살피며 우물쭈물하였다.

《자네 하는양을 보니 천생 남의 발뒤축이나 핥고다닐 위인일세그려. 지금 그 소문이 온 거리에 퍼져서 자연 내 귀에도 들어온것이니 그때문에 자네가 죽고살 일은 없을걸세.

내가 이제 자네한테 따로 물어볼 말도 없네. 장군의 유격대는 지금 깊은 산속에서 훈련을 한다지? 우리 장군이 산삼 두뿌리를 보낸것도 다 아네. 나는 비록 못받았지만 그 소식을 들은것만도 내가 대접받은것보다 더 좋네.》

할머니는 산삼이야기를 하시다가 문득 손자분을 보신듯 즐겁고도 통쾌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흥 사내대장부가 세상에 한번 나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쳐 싸우는것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나? 자네도 우리 장군한테 왜놈들이 녹아난 꼴을 나하고 같이 보았지?··· 나는 그저 자네를 이런데서 다시 만나지 못할줄 알았는데 죽지도 않고 이렇게 돌아온 자네를 보니 하도 고이해서 이런 말을 하는거네.》

박차석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때마침 미야모도가 할머님의 행장을 꾸려들고 총총히 뒤따라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할머니앞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지금도 귀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용납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유격대와의 상봉에서는 애초에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부터 않았었다. 자기는 그들에게 용서를 빌거나 잘못을 뉘우친것이 아니라 관동군에서 보낸 《특사》로서 무익한 저항을 그만둘것을 권고하였고 마음속으로는 말도 들어보지 않고 쏘아죽일가봐 그것만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 위태로운 고비를 넘기자 총총히 꽁무니를 빼고말았던것이다. 할머니는 평소에 자기가 지껄인 량심상의 고통이며 인간으로서의 의리며 하는것들을 그대로 믿으시고 이번 기회에 적의 손아귀에서 대담하게 벗어져나기를 기대하신듯 하였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처음 화전이나 길림에서 조선독립을 웨치고다닐 때는 혁명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해서도 똑똑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정도 혁명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륜곽이 그려졌다. 혁명은 그의 눈앞에 손붙일데 없이 아찔하게 솟아있는 어떤 험산준령같은 형상으로 떠올랐다. 그에 비하여 자기라는 존재는 마치 병아리새끼같이 가느다란 다리와 영글지 못한 부리에 걸핏하면 눈물을 쥐여짜는 울보같은 못난이로 그려졌다.

한때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하고 개인영웅주의가 심해서 비판을 받군 하던 박차석이가 자기자신을 이처럼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는것은 놀라운 일이였다. 그러나 오늘의 박차석의 립장에서 볼 때는 자기를 그렇게 너절하고 보잘것없는것으로 자인하는 길밖에 살길이 없었으니 자기에게서 조금치라도 인간다운것을 남겨둔다면 그는 백번 죽어야 마땅하지 단 한구멍이라도 살아야 할 리유를 찾아낼수 없었던것이다.

박차석은 육신이 힘들고 거름통에서 풍기는 냄새가 좀 참기 어려운 점은 있었지만 조선인민혁명군과 일제와의 가장 첨예한 대결점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의 집 변소를 부셔내고 남새밭에 잘 썩은 거름을 오물바가지로 주어나가는 일이 마치 옛시인이 꿈꾸었던 무릉도원에라도 들어온듯 심신이 다 홀가분해졌다.

물론 무릉도원이라는것은 상대적비유이고 거기도 인간세상인만큼 때로 괴로운 일도 없지 않았다. 한번은 장교사택에서 변소를 퍼내고있는데 새파란 장교녀편네가 달려나오더니 대낮에 냄새를 피운다고 악을 썼다. 박차석은 속으로 울컥하였으나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섰다.

다음부터 박차석은 될수록 그 장교사택쪽으로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거름은 모아야 했고 또 장교사택의 변소는 무한정 깊은것도 아니였다. 게다가 그가 일하는 농장은 특수공작반에 전속된 비밀농장으로서 거름원천을 찾아 아무데나 함부로 나다닐수도 없었다. 어느날 감독은 장교사택의 변소가 넘어날 지경인데 왜 제때제때에 깨끗이 쳐내지 않는가고 멱살을 틀어쥐고 발길질을 하였으며 거름바가지로 면상을 후려갈겼다.

박차석은 남 다 자는 한밤중에 장교사택으로 거름달구지를 끌고가서 달그락소리도 내지 않고 장교사택의 변소를 퍼냈다.

일을 끝냈을 때 박차석은 묵묵히 악취풍기는 변소옆에 퍼더앉아 따뜻한 불빛이 얼비치는 사택의 창과 제 손에 쥐여있는 거름바가지를 번갈아보며 눈물지었다. 한때 그 손에도 신성한 혁명의 무기가 쥐여져있었다. 거름냄새가 가득 배인 그 가슴에 한때에는 혁명가의 긍지가 차있었다고 생각하니 죽고싶었다.

문득 스스로 혀를 물어끊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마동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다음순간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면서 눈물은 삽시에 말라버렸다. 마동희를 상기한것부터가 제 생각에도 너무나 주제넘게 생각된것이였다.

(이 세상은 혁명가나 영웅호걸들만 사는 세상은 아니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거름달구지를 조심조심 끌고 밤길을 걸었다.

그러나 박차석은 마지막까지 이 세상은 혁명가나 영웅호걸만 사는 세상은 아닐지언정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야 할 인간세상이라는것을 리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인간다운 면모를 깡그리 널어먹으면서 거름통을 메고 온갖 모욕과 천대속에서도 정신의 안정을 찾아보려고 모대겼지만 놈들은 그런 자유마저 주지 않았다.

박차석은 이지러진 달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저 달이 커졌다작아졌다하면서 세월이 지나가면 왜놈들이 자기를 내놓을것이며 그렇게 되기만 하면 탄실이한테 찾아가 왜놈들만이 아는 자기의 어지러운 내막을 숨기고 살아보리라는 꿈을 꾸군 하였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간 어느날 미야모도가 승용차를 끌고 불쑥 나타나 옛날에 입던것과는 퍽 다른 군복 비슷한 《국민복》한벌을 꺼내놓고 또다시 특무기관으로 가자고했을 때 박차석은 들고있던 거름바가지를 털썩 떨구며 비칠거렸다.

(또 시작되는구가. 진작 죽었어야 할걸, 진작 죽었어야 할걸···)

박차석은 일본놈들이 아무리 강요한다고 해도 이제 다시는 인민혁명군 사령부에 접근할수 없다는것을, 만약 두번다시 접근하면 유격대원들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제의 요구를 거역하면 그들의 칼에 맞아죽을것이라는것도 알고있었다.

(인제는 죽었구나!)

그것은 모든 배신자들이 어느때건 한번은 토해보는 마음속의 울부짖음이였지만 모든 배신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듯 박차석이 역시 그것으로써 이미 썩어문드러진 정신과 육체를 스스로 구원할만 한 힘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