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10


 

제 4 편

10

 

사령관동지의 모든 예견은 어김없이 딱딱 들어맞았다.

3월말에 접어들자 불섬은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박차석을 놓아준지 며칠 안되여 적들은 벼랑밑까지 밀려들어 여기저기에 천막을 벌려놓았다. 인민혁명군은 벼랑우에서 강변에 깔린 적들의 움직임을 빤히 내려다볼수 있었고 적들도 망원경없이 유격대의 움직임을 바라볼수 있었다. 적아쌍방은 치렬한 격전이 코앞에 다가든것을 감촉하였다. 새들만이 삼엄한 경계선을 넘나들며 한가스럽게 날고있었다.

사령관동지의 예견에 따라 군정훈련강령을 다그쳐끝내고 중대별 학습경연을 벌리고있던 어느날 아침 남동쪽벼랑초소에서 오중흡중대장의 련락병이 사령부로 뛰여왔다.

《사령관동지, 적들이 강을 건느기 시작했습니다.》

조복남이 총다루는것을 보아주고계시던 장군님께서는 《과연 성급한 놈들이군.》하고 련락병의 긴장된 얼굴을 살펴보시였다. 련락병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장군님의 뜻밖의 말씀을 리해해보려고 처녀눈같이 쌍까풀진 고운 눈을 슴뻑거렸다.

장군님께서는 복남이 분해해놓은 총의 부분품들을 다 결합한 다음 손수 검사해보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알겠소. 내 곧 나가겠소.》

장군님께서는 련락병을 떠나보내신 다음 박덕산에게 부대를 집합시키라고 명령하시였다.

《부대가 다 집합하면 전투준비정형을 검열해보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오. 벼랑쪽부터 가보고 오겠소.》

박덕산은 비상소집대책을 세우는 한편 경위중대원들을 장군님의 호위로 파견해보내였다.

벼랑초소에서는 강철룡이가 기관총을 안고 적들을 노려보고있었다.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우고 잠시도 강쪽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던 그는 사령관동지께 보고를 하고는 다시 좌지를 차지하였다. 그의 옆에는 안희창이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듯 팔을 걷어 붙이고 앉아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벼랑끝에 나서시여 강변을 내려다보시였다. 천막들이 무수하게 널린 강건너쪽에서 적들이 서렬을 짓고 차례차례 물가로 밀려와 떼목에 오르고있었다.

적들은 오래동안의 정찰을 통하여 확인한, 사람이 기여오를수 있는 유일한 길인 벼랑길에 련속 중대들을 들이밀었다.

이윽고 강바닥에서는 수백인지 수천인지 헤아릴수 없게 쭉 늘어선 적들이 벼랑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제놈들의 도하와 벼랑극복을 엄호하고 인민혁명군의 반격을 제압하려는 기도였다.

적들의 사격이 시작되자 서로 다른 위치에 진지를 차지하고있던 오중흡과 오백룡이 뛰여왔다.

《사령관동지!》

오중흡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사령관동지께서 서계시는 자리를 살펴보았다.

박덕산이도 달려왔다. 부대집합이 끝난것을 보고할겸 그이의 신변이 걱정스러워 달려온것이였다.

《동무들, 너무 걱정 마오. 땅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쏘아대는 총알이 박격포알처럼 거꾸로 내려오겠소?》

장군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고나서 적들이 한벌 깔린 강바닥을 가리키시였다.

《적들이 아무리 큰 무력을 밀어넣어도 결국은 마찬가지요. 우리와의 싸움에 실질적으로 나설수 있는것은 저 벼랑길에 올라붙을만 한 무력밖에 없소.》

장군님께서는 박덕산을 그자리에 남겨두고 부대가 집합되여있는 골안으로 가시였다.

전투준비를 끝낸 부대는 중대별로 대형을 짓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깊은 감회가 어리신 눈빛으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시였다. 나이가 제일 어린 조복남이를 비롯하여 권영벽이 들여보낸 신입대원들도 이번 군정학습기간에 끌끌한 유격대원으로 자라났다.

대오를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문득 지난해 가을 이 밀영으로 들어설 때의 일이 떠오르시였다. 강철룡이 개탄한것처럼 절도가 없고 단정치 못하였으며 《차렷》구령을 주어도 곧바로 서지 못하는 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대원들은 명령서를 받고도 글을 보지 못하는 까막눈이였다. 그런데 한해겨울사이에 얼마나 달라졌는가! 인민혁명군 전대오가 모두 글을 깨치고 혁명리론을 배웠으며 사격술과 전술훈련을 받았다. 그리하여 대원들 한사람한사람이 과학적세계관을 세우고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소유한 일당백의 혁명전사로 자라났으며 지휘원들은 보다 큰 임무를 능히 감당할수 있도록 준비되였다. 대오를 짓고있는 대원들은 모두 지난 가을에 들어올 때와는 겉보기부터 달라졌다.

장군님께서는 조선혁명의 핵심력량인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이 이 몇달동안 몰라보게 성장하였다는 생각에 기쁨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동무들!》

사령관동지께서는 긴장된 빛을 띠고있는 대오를 향해 웃음을 짓고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하에서 근 다섯달에 걸친 력사적인 군정학습을 끝마치고 이제 1938년의 춘기작전에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

장군님께서는 문득 근엄한 빛을 띠우시였다. 지난겨울 이 장기군정학습을 보장하기 위하여 부닥치는 애로와 난관을 피눈물로 헤쳐나가던 일들과 사령부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싸운 사랑하는 전사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이해 겨울에 적들은 온갖 비렬하고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우리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갖 애로와 난관, 불행과 희생을 참아내면서 우리 혁명을 더 높은 승리에로 올려세울수 있게 튼튼히 준비되였습니다.

우리는 새해의 봄을 맞이하여 겨우내 길렀던 힘을 시위하며 놈들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하여 재빨리 적후방으로 진출하여 이해 춘기작전의 불을 지펴올려야 하겠습니다.》

가슴이 부풀어오른 대원들은 총을 높이 쳐들고 만세 환호를 올리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당면한 국제국내정세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1938년 춘기작전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벼랑밑에서는 적들의 눈먼 총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오고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피워대는 우등불의 연기냄새가 하늘땅에 배여왔다. 그럴수록 적의 코앞에서 새 작전방침을 받아안는것이 대원들에게는 더욱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적들의 이목이 몽강일대에 쏠려있는 이때 우리는 장백, 림강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의 국경일대에로 신속히 진출해야 한다고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앙양된 목소리로 계속하시였다.

《춘기공세의 기본타격대상을 장백, 림강의 국경연안일대로 정하려고 하는것은 왜놈들이 이 지역에서 우리 혁명조직과 인민들에 대한 탄압을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강화하고있기때문입니다. 장백과 국내의 많은 혁명조직들이 파괴되였습니다. 권영벽동무는 적들에게 체포되고 마동희동무는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적극적이고 맹렬한 군사활동과 정치선전활동을 벌림으로써 적에게 타격을 주고 파괴된 혁명조직을 복구해야 하며 중요하게는 광범한 인민들속에 혁명적영향을 주고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적들에게 체포되여 옥중투쟁을 벌리고있는 권영벽이며 희생된 마동희의 이름을 외우는 장군님의 목소리는 저으기 갈리시였다. 그이께서는 먼 국경연안쪽을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격조높이 말씀을 이으시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의 깊은 함정에 빠져 허덕이고있습니다. <속전속결>로써 전중국땅을 단숨에 삼키려던 일제의 야망은 여지없이 부서졌습니다. 일제는 지금 장기전에 말려들어 수습할수 없는 정치, 경제, 군사적혼란속에서 헤여나려고 발악하고있습니다. 단숨에 전중국을 강점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일제는 지난 1월 22일 그 무슨 <의회>라는것을 벌려놓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르는 긴급대책을 토론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비상대책도 일제를 멸망의 운명에서 구원하지 못할것입니다.》

확신과 정열에 넘친 장군님의 음성이 벼랑쪽에서 울려오는 총소리를 제압하며 밀림우에 높이 나래쳐올랐다. 그 음성은 대지우의 장설을 녹이고 새싹들을 움틔우며 자연의 모든 꽃들을 망울지게 하는 봄의 훈향처럼 대원들의 가슴에 새로운 힘과 용기와 찬란한 래일을 안겨주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전투계획을 발표하고 전투명령을 내리시였다. 당면한 불섬방어전투와 행군로정, 서렬편성으로부터 이동에 따르는 준비 등 치밀하게 째여지고 빈틈없이 예견된 명령가운데는 전혀 예상밖의 조항도 들어있었으니 그것은 일과에 예견되였던대로 오늘오후에 중대별학습경연 최종경연과 훈련총화를 보장하라는것이였다. 중대장들은 벼랑목에서 터지는 총소리를 들으며 의아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런 눈치를 전혀 못느끼는듯 명령을 그대로 집행할것을 엄하게 요구한 다음 강철룡이 있는 벼랑턱으로 가시였다.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불섬을 내놓고 사라진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벼랑밑으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적 선두부대가 벼랑허리에 오르고 그뒤로 개미때처럼 적들이 밀려올랐다.

기관총을 안고있는 강철룡과 안희창, 오중흡, 오백룡이들이 장군님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적들을 바싹 접근시킬수록 좋소.》

장군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눅잦혀주시였다.

하늘에서 늘이워진 한오리의 실에 개미떼가 매달리듯 적들은 가느다란 벼랑길에 까맣게 매달렸다. 적의 선두가 벼랑턱에 거지반 기여올랐을 때 장군님께서는 길목을 지키고있는 오중흡에게 사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오중흡이 선참 기관총을 쏘자 여러명의 기관총수들이 련발사격을 들이댔다.

겨우내 눈사태소리, 글읽는 소리에 날이 새고 저물던 불섬의 태고연한 정적을 깨뜨리며 온 산판이 기관총소리에 뒤흔들리였다. 강변에서는 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오르고 강에서는 물기둥이 치솟았다. 여울물소리만 조잘대던 벼랑밑에서는 벼락이 날고 천둥이 일었다. 벼랑에 붙었던 왜놈들은 강바닥으로 굴러떨어지거나 나무가지에 걸려 데룽거렸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은 통쾌한 웃음소리를 날리며 벼랑밑을 향해 일제사격을 들이댔다. 벼랑밑에서는 겁에 질린 적의 아우성이 그칠줄 몰랐다. 살아남은놈들은 떼에 오를념도 못하고 물에 뛰여들어 물장구를 치며 대안으로 건너갔다.

선두부대가 밀려가자 적들은 다시 새 부대를 들이밀었다. 혼비백산한 패잔병들이 강을 건느기 바쁘게 대기하고있던 새 부대가 벼랑에 오르기 시작했다. 강철룡은 놈들이 다시 벼랑이마에 올라붙자 드세찬 불벼락을 퍼부었다.

적들은 다시 진격할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장군님께서는 소수인원으로 경계근무를 조직한 후 중대별학습최종경연과 훈련총화를 짓도록 하고 몸소 시험관으로 참가하시였다. 최종경연에서는 오중흡중대가 1등을 하고 훈련총화에서는 강철룡이 신입대원들을 잘 키웠다는 치하를 받았다.

밤에도 적들은 공격을 단념하고 우등불을 피워올리였다. 강건너는 온통 우등불의 바다였다. 추위에 단련되지 못한 왜놈들은 천막밖으로 기여나와서 우등불두리에 몰켜앉아 밤을 새울 잡도리였다. 아직도 밤에는 차거운 바람이 불어 여울에 살얼음을 얼어붙였다.

장군님께서는 벌써 날이 슬핏해지자마자 련대장들과 중대장들을 벼랑앞에 소집하시였다.

《낮에는 적들이 공격해왔으니까 밤에는 우리가 공격합시다. 중대별로 낮에 충분히 휴식한 대원들로 10명씩 기습조를 조직하고 중대장동무들이 직접 습격전투를 지휘하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낮전투에 참가한 인원들은 밤에 쉬라고 하고 오중흡과 오백룡 등 불무지습격전의 명수들이 낮에 휴식한 대원들로 습격조를 무어 나가게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기습조들의 활동구역과 도화지점을 정해주고 수건으로 왼쪽팔을 동여매여 아군의 표적을 삼으라고 가르치시였다.

수많은 기습조들이 하나하나 떠나갔다.

그들은 어둠을 타고 벼랑을 내린 다음 도하지점을 향해 한조씩 헤여졌다.

오중흡은 오늘 제일 어려운 임무를 받은것이 여간 흡족하지 않았다. 그의 기습조는 놈들의 천막촌복판에 돌입하여 제일 먼저 공격을 단행함으로써 적들을 혼란시키고 재빨리 변두리로 빠져나온 그다음에는 그때까지 숨어있던 다른 기습조들이 종심을 향해 몰사격을 퍼붓게 된다. 결국 오늘전투의 승패는 전적으로 자기네 기습조의 역할여하에 달려있었다.

강가에 이른 오중흡은 조원들에게 미리 마련해둔 나무토막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조원들은 나무토막을 안고 차거운 물속에 들어섰다.

《물소리를 내지 마오. 강안에 닿으면 일어서지 말고 기여서 접근하시오!》

오중흡은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며 강을 헤염쳤다. 강을 절반도 못건넜는데 몽땅 젖어버린 옷이 꽛꽛해지면서 몸이 얼어들기 시작했다.

적들은 추위때문인지 아니면 무서움때문인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우등불곁에 모여앉아 졸고있었고 보초병놈들은 총을 안고 몸을 우들우들 떨면서 우등불주위를 맴돌고있었다.

강을 건너 적들의 천막들이 널려있는 복판에 기여든 기습조는 사격신호를 기다리며 젖은 몸으로 얼음처럼 차거운 돌밭에 엎디여있었다.

마침내 바랑우에서 요란한 한발의 총소리가 울리고 탄알이 별찌처럼 흘러갔다. 그것을 본 오중흡은 겨우내 피멍이 든 가슴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것을 느꼈다.

(드디여 때가 왔구나! 우리가 어떻게 참으며 기다리던 결전의 시각인가!)

이제는 괴로움과 슬픔에 대하여 침묵으로 묵새기지 않아도 되였다.

오중흡은 불무지옆에 기관총을 뻗쳐놓고 졸고있는 기관총수쪽에 대고 련발로 쏘아댔다. 때를 같이하여 아홉명의 기습조원들이 한참동안 천막촌의 중심부에 몰사격을 퍼붓고나서 돌아앉아 방사형으로 변두리를 향해 내쏘았다.

적들은 그들이 실컷 사격을 퍼부은 다음에야 벅작 고아대며 천막에서 뛰여나왔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느 한놈도 대응사격을 못했다.

오중흡은 자기네 기습조 혼자서도 놈들을 전멸시킬 자신이 있었으나 첫번째 임무수행을 끝내고나서 바람처럼 강안쪽으로 빠져나왔다. 기습조원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왔다. 그는 수건을 동여맨 팔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모두 무사하다는것을 확인한 다음 명령했다.

《이제부터는 적종심을 향해 사격해야 하오. 종심에는 아군이 없으니 마음놓고 사격하시오!》

오중흡은 어느새 적한테서 빼앗아 끌고온 탄알상자를 총가목으로 가볍게 두드리였다.

《총알은 여기에 많소!》

열개의 습격조는 이미 명령받은대로 적들을 향해 몰사격을 퍼붓고있었다.

캄캄한 밤이라 적들은 사격방향을 잃고 저희들끼리 쏘아대기 시작했다. 점점 저희들끼리 싸우는 원쑤들의 총성이 높아지고있었다.

 

×

 

벼랑밑에서 불무지습격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밀영에 남아있던 주력은 중대별로 북쪽의 깊은 수림속으로 들어가고있었다. 총과 배낭을 진 대원들은 련련한 눈길로 멀어져가는 밀영을 돌아보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였다.

벼랑밑에서는 자지러지는듯 한 총소리가 울리고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아 하늘마저 붉게 물들었으나 그들이 찾아보고싶어하는 병실들은 어두운 숲속에 가리워 처마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오의 선두에는 몸집이 장걸한 박덕산과 강철룡이 걸어가고있었으며 그옆에는 김주현과 안희창이 따라걷고있었다. 깊어지는 숲속을 헤치며 높다란 산언덕을 올라서는 그들도 자주 걸음을 멈추고 낮게 드리운 빨간 하늘밑에 숨어있는 밀영지를 돌아보군 하였다.

박덕산도 김주현도 말이 없었다. 싸움터를 향해 행군해갈 때면 늘 명랑하고 유쾌한 이야기로 온 대오를 떠들썩하게 하던 강철룡이와 안희창이마저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부대는 지금 백두산을 향해 마당거우밀영지를 떠나가고있었다. 겨우내 글을 읽던 불밝은 병실들과 훈련장을 떠나는 그들의 마음은 짙은 석별의 정에 휩싸여있었다. 다섯달전 첫걸음을 들여놓을 때는 너무나 낯설고 어수선하여 눈이 감기던곳이였다. 처음에는 다섯달이라는 말이 10년처럼 길어보이고 그 기나긴 낮과 밤을 어떻게 이 좁다란 골짜기에서 공부할가 하고 의아해하던 그들이였으나 정작 겨울이 가고 봄이 다가와 정든 골짜기를 떠나게 되고보니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잊지 못할 사연과 곡절이 얽혀있는지 가늠할수 없을 정도였다.

대원들은 혁명대오에 들어선후 낯선고장에서 벌린 군정학습이 자신들의 운명에 얼마나 심각한 자욱을 새겨놓았는가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며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밀영지를 돌아보게 되는것이였다.

박덕산은 령마루에 올라서자 걸음을 멈추고 밀영을 내려다보았다. 그 령마루를 넘어서면 밀영지는 다시 보이지 않을것이였다.

밀영지는 영원히 불타지 않는 크나큰 바위처럼 불바다속에 억세게 틀고앉아있었다.

박덕산은 지난 가을 밀영지에 들어설 때 조모님의 소식을 전달받고 급히 큰 싸움을 벌리자고 억지를 쓰던 일이 떠올랐으며 강철의 의지로 대오를 밀영지로 이끄시던 경애하는 사령관동지의 영명한 영상이 그려졌다. 오늘 밀영을 떠나며 그때 일을 생각하는 박덕산의 가슴은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과 경모의 정에 뜨거워졌다.

이 밀영에서 우리 전사들이 받아안은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을 무엇에 비길수 있겠는가.

이 밀영에서 우리 전사들은 모두 몰라보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자신도, 김주현도, 강철룡도, 안희창이도···

박덕산이 생각에 잠겨 걸음을 멈추어서니 방금 밀영을 떠나기전만 해도 적들의 포위속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던 중대별 학습경연과 군사훈련총화에 대하여 그리고 표창으로 받은 만년필이며 하모니카며 학습장이며를 두고 열기를 띠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김주현도 강철룡도 안희창도 모두 그의 옆에 주런이 서서 마당거우를 바라보았다. 명령이라도 받은듯 주력부대의 모든 중대들이 날카로운 산릉선에 주런이 서서 잊지 못할 추억과 인상을 남긴 마당거우를 내려다보는것이였다.

《이제 몇해 지나면 우리가 공부하던 병실들이 모두 곰삭아버리겠지요?》

어둠속에서 안희창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강철룡이 뜨아해서 흥심없이 대답했다.

《그럴테지···》

《밀영에다 큼직하게 패말을 세웠으면 좋을번 했어요.》

《패말? 건 뭣하러?》

《후날 조국이 광복되면 꼭 한번 찾아보겠어요. 지난 마가을에 여기서 공부를 다섯달씩이나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그런데 학습을 다 끝내고 밀영을 떠나게 되니 다섯달동안 공부한것이 또 꿈같거던요. 참 이런 세월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겠나요.》

박덕산은 안희창의 소박한 말을 들으니 더욱더 감개가 무량했다.

그때만 해도 자기자신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기둥처럼 믿던 김주현은 과오를 범하고 가마를 메였지, 적들은 조모님을 련행하고 부대의 뒤를 따르지··· 그때의 괴로움을 어찌 다 말할수 있으랴!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정세가 준엄할수록 인민혁명군대원들에게 확고한 혁명적신념을 키워주는것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하시며 모든 불행과 고통, 애로와 난관을 이겨내시며 전군을 장기군정학습에로 이끄시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우리 혁명은 확고한 승리의 앞길을 내다볼수 있는 오늘에 이르렀다.

김주현은 비록 과오를 범했지만 꾸준한 학습을 통해 다시 미더운 동지로 자라났으며 갓 입대한 수백명의 신입대원들이 안희창이, 조복남이처럼 눈에 띄게 자라났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번의 장기군정학습은 농사로 치면 거치른 대지를 갈아엎고 씨를 뿌리는것에 비길수 있다. 아직 피땀을 흘리며 김매고 가꾸어야 할 많은 일이 앞에 놓여있지만 벌써 풍요한 가을, 아름찬 결실은 약속되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당거우의 한해겨울은 조선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배태한 진통의 겨울이였다.

박덕산은 마음속의 격정을 지그시 누르며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땀을 들였으면 행군을 계속합시다. 이제부터는 적들의 포위를 뚫고 나가는만큼 총창을 꽂고 탄알을 장약한 상태에서 산을 내립시다.》

령마루에 즐비하게 섰던 사람들의 모습은 곧 숲속으로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