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4편 1


 

제 4 편

1

 

설핏하게 땅거미 깔려드는 산촌에 눈이 부실부실 내리였다. 낮게 드리운 하늘은 컴컴했다. 그러나 겨우내 눈이 쌓이여 민둥벌판처럼 보이는 앞더기우에만 어설픈 잔광이 희미한 빛을 뿌리고있었다.

마동희의 아버지 호룡령감은 먼길을 떠날 사람처럼 털모자를 쓰고 솜둔자를 입은 나들이차림으로 토방에 나서서 한참동안 마을을 살펴보았다.

더기우에 널려진 마을의 인가들에서는 하얀 연기가 꼿꼿이 솟아오르고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늘 대상을 치르는 안주사네 높다란 굴뚝들에서는 더욱 실한 연기기둥이 솟구쳐올랐다.

마호룡은 더기끝에 패워진 동구쪽의 골짜기쪽을 바라보았다. 그 골짜기에는 이 마을사람들이 바깥세상과 통하는 오불꼬불한 달구지길이 놓여있었다.

눈이 하얗게 깔린 동구의 비탈진 길목에는 눈을 맞으며 길을 손질하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였다. 눈이 많이 내리고 눈사태가 일어나면 빈번히 그 외통길이 막히여 마을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마을에서는 이런 페단을 미리 막기 위하여 큰눈이 내릴 때는 부역을 풀어 길을 손질하군 했다.

어제 오늘은 호룡의 동생 청룡이가 그 일을 자진해서 맡아나섰다. 그는 안주사네 대상제에 멀고가까운곳의 여러 지방에서 귀한 손님들이 찾아오겠는데 그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길을 손질하면서 안내를 봐주기로 한것이였다.

생시에 면장도 지냈고 진흥회 리사도 지낸바 있는 안주사는 이 북관땅에서 이름있는 유지명사였다. 안주사는 말년에 자기 살림집 앞채를 떼내여 사립학교 교실로 쓰게 하고 자신은 명목상이긴 하지만 두 교원을 거느린 사립학교의 교장노릇도 한 일이 있는지라 실속이야 있든없든 수백명의 제자를 가진 스승인셈이였다.

바람세에 따라 돛을 올리듯 세상이 달라지는대로 유순하게 순종하면서 밥을 먹여주겠다는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따라다니던 안주사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생전에 뜻깊은 말 한마디 남긴것이 없었으며 마을사람들이 기억할만 한 덕행을 베푼것도 없었다.

안주사는 세해전에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혜산경찰서에서 순사노릇을 하는 제자의 생일잔치에 갔다가 만취하여 돌아오던중 동구밖에서 얼어죽었다.

그가 죽자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그를 회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자손들이라는것은 하나같이 부실해서 오늘이 대상날이지만 아무도 제사를 지낼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전부터 안주사네 집에서 글을 읽은바있는 마을청년들이 갑자기 은사의 대상날을 그대로 넘길수 없다고 하면서 제사에 쓸 물자와 경비를 모으고 원근수백리에 흩어져있는 친척친우들과 유지, 제자들에게 기별을 띄웠다.

꿈에도 생각할수 없었던 안주사의 3년상제사는 온 마을사람들뿐아니라 가깝게는 백암, 운흥, 걸치기, 일건, 중평, 갑산, 풍산에서 멀리로는 신흥, 부전, 리원, 단천, 북청, 성진, 함흥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와 안주사네 집안은 물론 온 마을이 손님을 겪어야 할 큰 제사로 번졌다.

기별을 받은 외지의 손님들은 어제부터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귀한 제물이라든가 식량을 장만해서 등에 지고 모여들었으며 청룡이는 동구에서 그들이 오는족족 미리 정해둔 마을집에 안내하여들이였다.

마호룡은 부엌문을 열고 이미 준비해두었던 술두루미며 북어짝과 쌀자루를 넣은 줄망태를 꺼내메고 슬렁슬렁 안주사네 집으로 향하였다.

마을복판에 덩실하게 자리잡고있는 안주사네 집은 큰 잔치집같았다. 원래 대상이란 상사가 난지 두돐이 되도록 상주들이 상복을 벗지 못하고 아침마다 산 사람과 똑같이 제상을 고여야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제사라 고인을 추모하는 슬픈빛보다는 해방감같은것이 더 진하게 떠돌아서 손님들뿐아니라 베감투를 쓰고 흰댕기를 들인 상주들까지 모두 제상앞을 물러나기만 하면 희희락락해서 돌아갔다. 오래뜰복판에는 낮에 피워놓은 우등불이 떨어지는 눈발을 날리며 높이 타오르는데 우등불주위에는 마을조무래기들이 몽땅 모여와서 갈갬질을 하며 벅싹 고아댔다.

한때 교실로 쓰던 바깥채의 네개나 되는 방들에는 이미 손님들이 그뜩그뜩 앉아서 상들을 받았는데 여름처럼 열어붙인 방문으로는 뻘건 등잔불빛과 연기같은 담배내와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말소리가 새여나오고있었다.

마을의 젊은 녀인들도 다 모여들어 끓었다. 그들은 줄지어서서 물을 길어들이고 음식상을 날랐으며 부엌과 고간과 사랑채에 북나들듯 하며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먹기도 하였다.

기나긴 겨울을 외진 숲속에서 답답하게 보내고있던 마을사람들은 갑갑증을 풀 때가 되였다는듯 모두 제 먹을것을 꿍져들고 모여온것이였다.

학교로 쓰던 안주사네집도 비좁아 앞집 뒤집까지 모두 방을 내고 손님을 겪어야 했다. 안주사네집은 일찌기 주사생전에는 그래본적이 없을만큼 사람들이 찾아들어 들끓고 흥청거렸다.

마동희의 동띠친구들이 안주사네 사립학교에서 다만 며칠이라도 글을 읽었다는 인연을 중히 여겨 대문에 서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로부터 불을 지피고 음식상을 나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다사한 일을 다 주관해나섰다. 제상옆에 부의록을 들고앉은 안주사의 5촌조카령감은 부조를 받아 적기는 하지만 그것을 고방이나 부엌으로 처리하는것은 그옆에 붙어앉은 마동희의 딱친구인 주대순이가 하였다. 그는 제상앞에서 돌아치다가도 어느새 일어나서 손님들이 든 방을 한바퀴씩 바람처럼 돌아오기도 하였다.

마호룡을 대문에서 맞이한 사람도 주대순이였다.

워낙 성미가 덜렁덜렁하고 쾌활하던 주대순은 오늘은 제사를 주관하고있다는 생각때문인지 몹시 엄숙해져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석버석하게 대하였다. 마호룡은 상주들도 생념을 못하던 이 어마어마한 대상이 아들 동희가 주대순을 비롯한 마을의 그중 똑똑한 젊은이들과 짜고들어 꾸민 일이라는것을 짐작하고있기때문에 아닌보살하고 자기도 주대순의 엄숙한 거동에 짝을 맞추어 몸가짐을 틀스럽게 가졌다. 주대순은 상제들을 대신해서 격식바른 인사의 말을 한후 술두루미와 망태기를 받아 누런 돋보기를 끼고 부의록을 들고있는 안주사의 5촌조카에게 밀어주고 마호룡을 제상앞으로 안내했다. 제상은 고인이 생전에 쓰던 안채웃방에 차려져있었다. 바람벽에 산수를 그린 병풍을 둘러치고 그앞에 참지를 덮은 큼직한 교자상을 앉혔는데 밤, 대추, 곶감, 배따위 과일들과 목기우에 무드기 가려놓은 어육편포들이 만물상같은 광경을 빚어내고있었다. 그앞에 고인의 사진액틀이 세워져있었다. 검은천에 둘러싸인 액틀안의 안주사는 교장시절에 입던 검은 례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뺨이 불룩하게 처지도록 입을 꾹 다물고 생전에는 받아본적 없는 푸짐한 음식상을 좀 의심쩍은 눈매로 바라보고있었다.

제상우에 세운 네개의 초대는 어디서 얻어왔는지 서로 짝이 맞지 않는것들이였다.

마호룡은 토방에 서서 순차를 기다렸다가 다른 제객들처럼 혼상앞에 분향재배하고 상주들에게 문상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재빨리 안마당으로 내려왔다.

《집을 비워놓고 아버지 어머니가 다 오셨군요. 어머니는 젊은이들과 함께 점심때부터 음식을 만들지요.》

토방밑에서 기다리고있던 주대순은 마호룡이 제사범절을 끝낸 다음에야 바투 다가서서 사근사근 속삭이였다.

마호룡은 머리를 끄떡이면서

《마을사람들이 울면 울고 웃으면 웃어야지.》

하고 대꾸했다.

《아버님, 기왕이면 저 첫방에 들어가 앉으십시오. 그 방에는 유지들만 받게 했는데 아버님이 그 자리에 앉아계셔야 하겠습니다.》

마호룡은 묵묵히 주대순의 청에 응하였다.

《거기 끼여앉아서 어떻게든 손님대접을 푸짐히 잘해주십시오. 상은 제가 부지런히 섬겨바치겠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저 방에 든 유지들이 취해 자빠지게 돼야 이 제사가 빛이 날게 아닙니까.》

주대순은 성미가 고정하고 대발라서 노상 어렵기만 한 호룡의 귀에 대고 수군거린 다음 대문안의 첫방에 안내하였다. 그 방은 비여있는듯 조용했다.

유지들을 맞기로 했다는 그 방안은 양초불을 켜놓아 눈부시게 밝기는 했다.

《아버님, 이 방을 부탁합니다.》

주대순이 문을 열고 마호룡을 떠밀며 크게 소리치는데 방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적의가 번쩍이는 눈으로 문을 바라볼뿐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마호룡은 어리둥절해서 방안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구장과 촌장, 뚱뚱한 산림간수, 약삭바른 지주의 사위인 경방단의 젊은 계주사가 모두 성난 사람처럼 입이 삐죽해서 바람벽을 기대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두다리를 기껏 펴고 앉아있는 꼴이 마치 누구의 다리가 더 긴지 내기라도 하는것 같았다.

(우리 고장 유력자는 다 여기 있었군, 날더러 이 방에서 심부름을 들라는 소린즉 여기 량반들을 살피라는 소리겠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볼이 잔뜩 붓고 독이 올랐으니 야단아닌가.)

마호룡은 마음속으로 웃으며 그들을 향해 두루거리로 인사를 하였다.

《모두 바쁘신 어른들이 어려운 출입을 하셨습니다.》

마호룡이가 경우에 맞지 않게 노는 사람들앞에서는 호랑이처럼 무서워진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촌장, 구장, 산림간수, 계주사는 하는수없이 폈던 다리를 약간 거두면서 알은체를 하는 기색을 보이였으나 누구도 입을 벌리지는 않았다. 다 귀찮다는 수작이였다.

문틈으로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던 주대순은 불빛속으로 웃몸을 쑥 내밀며 말했다.

《더 기다릴것이 없이 한 둬순 먼저 돌립시다. 주재소 소장님하고는 다 가까운 사이인데 먼저 한잔 했다고 해서 소장님이 노하시겠습니까?》

주대순의 말을 들은 마호룡은 유지들의 볼이 처진 까닭을 비로소 짐작하였다. 그들은 주재소 소장을 기다리느라고, 남들이 다 받는 술상도 받지 못하고 목만 초들초들 말리고있는것이다. 이곳 주재소장은 갑산일경에서 《백암오빠시》라는 별명이 붙은 사납고 독한 왜놈이였다. 촌장도 구장도 산림간수도 그자의 비위를 건드리고는 이 고장에서 배겨내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다보니 상을 미리 받으라는 주대순의 말이 비록 고맙기는 하였으나 산림간수건 구장이건 촌장이건 계주사건 누구하나 감히 그의 말에 호응해나서지 못했다. 구장은 주대순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고 벅작 고아대는 옆방을 쏘아보며 주먹으로 바람벽을 탕탕 쳤다.

《쟈식들, 제사집에 와서 떠들긴!》

삶아낸 가재미처럼 몸이 잔약하나 가시같은 독기를 풍기는 계주사가 구장의 말에 발을 달았다.

《우리는 너무 마셔서 등이 터지겠소. 난 이젠 가보겠소.》

주대순은 금시 큰일이 생긴듯 문턱을 넘어 들어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시다니 웬 말이요? 안주사님이 노하시겠습니다. 기다리고 말고 할것없이 제 이제 제꺽···》

숲속에서 사람의 자취만 보면 무작정 고함부터 치는데 습관된 산림간수가 새파랗게 성을 내며 꽥 소리쳤다.

《오겠다고는 했는가?》

주대순은 이게 무슨 소리냐는듯 눈을 흡뜨고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귀띔이라도 하듯 수군수군 말하였다.

《소장님이 안오실리 있습니까? 제가 그저께 갔을 때도 그랬고 오늘 낮에 다시 청하러 갔을 때도 꼭 오시겠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소임이 하도 중하니 우리 농군들처럼 마음대로 자리를 못뜨는것이지요. 지금 백두산일경과 압록강 저쪽이 몽땅 유격대세상이라는것이 드러났는데 우리 고장이 편안하다고 해서 소장님이 남의 일이라고 마음놓을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한번 약속한 일이니 눈보라가 아무리 불어도 소장님은 꼭 오십니다. 소장님이야 제술이나 마시자고 오시겠습니까. 나라일을 돌보자니 우리 백성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는거지요.》

주대순이 이처럼 입심을 부리니 산림간수가 듣기 역하다는듯 꽥 소리쳤다.

《오기로 약속했는가 하는것을 묻는데 무슨 긴 사설질이야!》

《그러게 오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약속도 했지만 우리 마을이 빨갱이물이 들가봐 그렇게 밤잠을 못자고 애써오신 소장님이 오늘같이 숱한 타관사람들과 온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자리에 어찌 안오실수 있습니까. 예, 오시기는 오시는데 바쁘니까 좀 늦어지겠지요. 그렇다고 새벽까지 이렇게 맹숭맹숭해서 앉아있을것이야 있습니까.》

촌장은 금방 술상이 들어오기라도 하는듯 기겁을 하며 말했다.

《오시겠다고 했으면 응당 기다려야지.》

구장과 산림간수는 왼고개를 짓고 촌장을 쏘아보는데 계주사는 발끈해서 일어섰다.

《난 가겠소. 제사집에 얼굴이나 내밀었다 가면 그만이지, 술대접 받겠다고 날 밝히겠소?》

주대순은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 사정하였다.

《아, 어찌 이러시유? 주사님이야 안선생앞에서 글도 읽은 처진데 그러면 되겠습니까. 내 얼핏 술상을 들이라고 하지요.》

계주사는 못견디는척 하고 다시 주저앉으며 일부러 상스럽게 욕설을 퍼부었다.

《개새끼들, 제사집에 술 얻어먹으러 왔나? 잔치집처럼 고아대긴 넨장, 수양이 없단말이요!》

주대순은 허리를 굽석굽석하며 선선히 받아주었다.

《지당한 말입니다. 안주사가 생전에 겨우 고양이눈물만큼 수양을 주고갔는데 그만 한잔 술에 다 씻겨나간가봅니다. 그러나 이 긴긴 겨울 메돼지도 갑갑하겠는데 젊은것들이야 얼마나 놀고싶겠습니까. 리해해주셔야지요. 그리고 요구되는것이 있으면 이 아버님한테 말하십시오.》

마호룡은 속으로 주대순이 놀아나는 모양에 은근히 놀랐다. 아들 동희가 산에서 돌아오기전까지만 해도 팔짱을 끼고 할일없이 동네를 으슬렁으슬렁 돌아다니며 실없는 소리나 곧잘하던 젊은이였다.

그러던것이 동희가 온 다음부터 사람이 몰라보게 변신을 해서 이제는 동네의 한다하는 유지들을 줌안에 넣고 마구 구슬리게쯤 되였다. 동희가 유격대에서 어떤 임무를 띠고 왔는지 구체적인 내막은 알수도 없고 별로 참견할 생각도 해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요즘 동네 젊은이들의 어둡고 거칠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피기가 어린것이 다 동희가 유격대에서 돌아온것과 상관되여있다는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결국 구장, 촌장, 산림간수, 젊은 계주사는 주대순에게 주물리워 좀더 기다렸다가 주재소장이 온 다음에 상을 받기로 락착짓고 제자리에 앉았다.

마호룡이는 은근히 자기가 맡은 일이 중하다는것을 깨달았다. 주대순이는 자기네 반일청년회원들에게 말짼 사람들이 나타나면 모두 이 방에 밀어다넣고 자기에게 떠맡기자는 심산인듯 한데 그러고보면 별안간 크게 벌어진 안주사의 대상이라는것이 다 동희가 유격대에서 받아온 임무와 관련되여있는듯 하다. 그렇다면 이 방의 유지라는것들을 하나도 바깥에 내보내지 말아야겠는데 아무래도 나살이나 건사한것이 주대순이처럼 능청을 떨면서 보기만해도 역한 인간들을 구슬려낼것 같지 못했다.

주대순이가 방에서 나간지 얼마 안되여 문밖이 환해지더니 홰를 잡은 사람이 다시 방문을 열었다. 홰잡이뒤에는 술상을 든 젊은이들이 주런이 따라섰다.

《오셨수다?》

방안에 있던 유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대두병을 든 대순이가 문앞에 나타났다.

《한정없이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선 상을 받고 한순배 돌리십시오.》

주재소장이 오지 않은것을 알아차린 유지들은 저마끔 다른 표정을 지으며 도로 주저앉았다. 마호룡은 아무말없이 개발상에 차린 술상을 하나씩 받아 산림간수, 구장, 촌장, 젊은 계주사앞에 차례로 옮겨놓았다.

《기왕 늦은김에 좀더 기다려보는것이 좋지 않겠소?》

촌장은 술상앞에 다가들지 못하고 근심에 잠긴 눈으로 주대순을 바라보았다.

《일없습니다. 우리 소장님이 그만 한 아량도 없겠습니까. 촌장님이 끝까지 기다리자고 했다는 말을 제 주재소장에게 꼭 말하겠습니다.》

주대순의 말을 들은 계주사는 눈초리가 꼿꼿해서 꽥하고 소리쳤다.

《말 옮기각질은 그만둬!》

주대순은 두손에 받쳐든 술병에서 철썩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굽석하고나서 능청을 떨며 말했다.

《공연한 걱정을 다 하시우다. 내가 아무리 덜덜이라고 한들 유독 계주사가 소장님을 기다리지 말자고 했다는걸 다 고자질할 사람같수다?》

계주사는 미심쩍은듯 눈을 흘겼으나 더 캐고들지는 못하였다.

주대순은 시비곡절을 길게 따질것 없이 술이나 들자는듯 청주병을 기울여 잔마다 술을 그뿍그뿍 따랐다. 몇번 문쪽을 바라보며 소장이야기를 하다가 잔을 기울이기 시작한 유지들은 주대순이 숨쉴사이 없이 따라주는 술을 연거퍼 마시더니 먼저 취한 옆방의 마을젊은이들 못지 않게 큰소리로 고아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대순이 나가자 제 스스로 병을 끌어다 자기 잔에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계주사는 술이 취하자 앉아있지를 못하고 자주 방을 나갔다. 그녀석은 오줌을 누러 가는척 하고 비청거리며 이방저방에 뛰여들어가 방안의 사람들을 살펴보군 하였다. 그때마다 문밖을 비우지 않고 마을젊은이들이 서있다가 때이르게 고주망태가 돼버린 계주사의 팔목을 끌어다 다시 유지들방에 밀어넣군 하였다.

유지들이 술에 곯아떨어져 실한 저가락이 부러져 나가도록 술상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그렇게도 애를 말리며 기다리던 주재소장의 제복입은 모습이 나타났으나 누구하나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주재소장을 방으로 안내해온 주대순은 몹시 당황한듯이 주재소장의 기색을 살펴보고나서 방안으로 뛰여들어가 귀띔을 해주려고 했다.

주재소장은 눈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얼른 태연한 기색을 지으며 주대순의 덜미를 끌어내고 방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그만둬. 나쁜노미새끼들.》

주재소장은 입안으로 중얼대며 옆방으로 걸어갔다. 그는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방안에서 흥탕멍탕 놀고있는 젊은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나서야 문을 닫고 다음방으로 건너갔다. 같은 유지라 하지만 역시《백암오빠시》라는 별명이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그 놈은 안주사네집 바깥채와 안채를 샅샅이 들여다보고나서는 앞뒤집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제사집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눈으로 확인해보고나서야 못견디는척 하고 정해진 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억병으로 취해서 고아대던 귀빈들은 주재소장이 왔다는 말을 듣자 말끔히 정신이 들어서 정숙하게 앉아있었다. 모두 벙어리가 된듯 입을 다물고 자리를 정돈했으며 나쁜짓을 하다가 훈장에게 들킨 생도들처럼 조심스러운 얼굴이 되여 주재소장을 기다리고있었다.

주재소장은 숙연해진 방안에 들어서서 개털슈바를 벗어메친 다음 밑도끝도 없이 고함쳤다.

《이 비상시국에 온 마을이 몽땅 모여들어 술추렴이나 멍가?》

그는 하얀 칼자루를 희번뜩이며 술상들을 차버릴듯 그 주변을 맴돌아쳤다.

《야외에 우등불은 왜 피워놓았는가? 촌장과 구장은 마을에 어떤 외인들이 들어왔는지 알아보기나 했는가, 아?》

술내가 떠돌고 노래소리가 흥청거리던 방안은 한순간 취조실로 변해버린듯 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재소장의 괴벽스러운 성미를 잘 알고있는 마을유지들은 가책에 잠긴듯 한 표정을 지을뿐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주재소장은 아무때나 사람을 보면 우선 이렇게 한참씩 고아대고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였다.

《당신들은 유격대가 정말 다 없어진줄 아는가? 유격대가 당신네 마을에는 내려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앙?》

주재소장은 술상이 올라올 때까지 뻗치고서서 누구도 듣지 않는 욕질을 한참이나 퍼부었다. 그러나 술상이 다시 푸짐하게 차려지고 그가 좋아하는 한쌍의 백학을 그려붙인 대두병이 련달아 들어오자 성화스럽게 권하는 주대순의 말에 못견디는척 하고 자리에 앉았다. 황송한 얼굴로 꾸중을 듣고있던 유지들이 저마끔 차례를 다투어 잔에 찰찰 넘치게 술을 따랐다. 마침내 주재소장은 히죽이 누런 이를 드러내보이더니 잔을 들기 시작하였다.

《후래삼배까? 그것은 나쁜 말이다. 당신들도 마시자.》

주재소장이 숨가쁘게 들이대는 술잔에 한손을 휘저으며 이렇게 말하자 다소 긴장되였던 유지들의 얼굴은 다시 누그러지고 갈증이 든 그들의 목구멍으로는 술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안채에서는 상주들이 물레질소리같은 곡소리를 내고있었다. 제사가 시작된것이였다. 벅작 고아대던 마을젊은이들은 이 순간 안주사의 명료치 않은 생전의 덕행을 찾아보려는듯 모두 추모의 정에 잠겨 침묵하고있었다. 다만 유지들의 칸에서만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소리가 울려나오고있었다.

몇잔의 고뿌술을 들이킨 주재소장의 기분은 돌변하였다. 그 표독스럽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성미가 누그러져서 모자를 벗어 방구석에 집어던지더니 촌장, 구장, 산림간수, 젊은 계주사들을 돌려앉히고 가위주먹을 하면서 지는 사람이 한사발의 술을 단숨에 먹기로 된 벌주놀이를 하자고 덤벼치기 시작했다.

마호룡은 놈들이 연거퍼 찌워내는 대두병을 끌어다 자기가 앉아있는 문옆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그 빈병 한개면 만약의 경우에 원쑤놈의 대가리를 하나씩 까버릴수 있는것이였다.

상주들은 법도를 따라 대상제를 벌리고나서 두해동안 산 사람처럼 모셔온 안주사의 혼상을 헤치고 그동안 써온 허리띠며 지팽이, 녀인들의 흰 댕기들을 마당에 내다놓고 불을 달았다. 그때 또다시 물레질소리같은 곡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벌써 몸을 가눌수 없이 푹 취한 주재소장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마을유지들의 덜미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귀신에게 절하러 가자》고 하면서 제사방으로 끌고갔다. 모두 발을 가눌수 없이 취한 몸이였으나 주재소장의 갸륵한 말을 뿌리칠수 없어 줄레줄레 따라나섰다.

대상제의 마지막 절과 곡까지 끝낸 상주들은 이제는 좀 쉬여볼가 하다가 주재소장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다시 총망히 옷매무시를 하며 이미 혼상을 치워버린 제상곁에 다가섰다. 베감투며 상장 따위들은 화로불속에서 타고있었기때문에 외양을 봐서는 누가 상준지 가려볼수도 없었다.

주재소장은 군화를 신은채 제상앞에 다가가서 보천보전투때 죽은 제 동료들의 주검앞에서 묵도를 할 때처럼 왼손에 관모를 들고 서서 잠시 상고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놈은 간신히 몇초동안을 그렇게 서있었으나 취할대로 취한지라 몸을 비청거리였다. 애고애고 하고 곡을 하던 안주사의 딸이 어느새 날아와 비청거리는 주재소장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주재소장은 아예 몸을 맡겨버린듯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속된 제고향노래를 입안으로 흥얼거리면서 마당을 건너왔다.

놈은 어중이떠중이들을 다 제자리에 끌어다앉히고 다시 벌주놀이를 벌리였다. 주대순은 놈들에게 술을 대느라고 땀이 흐르게 뛰여다니였다.

마호룡은 말짼놈들이 새여나가지 않을가 해서 토방에서 물러서지 못하고 마당을 살피고있었다.

이때 안주사네 앞집의 정지칸에서는 한패거리의 마을젊은이들이 모여앉아 흥겹게 놀고있었다. 이 방에도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술내며 담배내며 음식내가 짙게 차있었으며 젊은이들이 거나해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이따금 주대순이가 와서 방문을 열고 술이나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물어보고 돌아가군 하였다.

이 집의 웃방에도 좁은 방이 미여지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있었다. 그러나 새문틈으로 흘러드는 희미한 불빛에 흥분된 얼굴들이 드러날뿐 별로 떠들지는 않았다. 상도 제대로 차려져있었으나 허물어낸 자리는 없었다. 다만 아무때나 낯선 사람이 들이닥치면 제사집에 문상온 손님들답게 처신할 차비를 갖추어놓았을뿐이였다. 실상 저 유지들이 들어간 안주사네 안채로부터 이 집 아래방까지 총총히 늘어서고 들어앉은 마을의 젊은이들은 안주사의 대상을 핑게대고 각지에서 모여온 조직핵심들이 이 방에서 모임을 안전하게 가지도록 호위를 하고있는것이였다.

마동희는 벽을 등지고앉아서 지금 북부지방일대에서 모여온 조국광복회지방조직대표들과 련락원들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뜻밖에 안주사의 대상기별을 받은 그들은 사정이 저마끔 달랐으나 그래도 백암의 안주사라면 꽤 알려진 인물이라 그럭저럭 주재소를 속여넘기고 때맞추어 모여온것이였다. 방안에는 걸치기에서 잡화상을 펴고 련락소책임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40대의 장년이 있는가 하면 동원령을 피하여 산에서 헤매다가 조직에 흡수된 원산출신의 젊은 학생도 있었다. 행상으로 가장하고 갑산, 풍산, 리원, 홍원 일경을 드나드는 련락원이 있는가 하면 성진과 길주에서 검거를 피해 갑산쪽으로 은신해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지난가을 김주현과 함께 사업을 벌리였던 일건광산과 중평금광에서도 끌끌한 로동자대표들이 왔으며 장백현에서 권영벽이 체포전에 뽑아돌렸던 사람들도 참가하였다.

그중에는 권영벽이 자기들을 부른줄 알고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권영벽이 체포된것을 알고 락심천만해있다가 달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여온 사람들속에서 마동희를 아는 사람은 서너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동희가 최근 사령부에서 파견되여왔다는것을 알자 그들은 너무나 반가와 두손을 움켜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마동희는 그들의 심정이 십분 리해되였다.

적들의 무차별적인 총검거를 목격한 그들의 마음속에는 적개심이 용암처럼 이글거리고있었다. 그런데 일제의 무차별적인 총검거로 북부조선일대의 국내조직에 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실현하는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권영벽이마저 체포되고 련락이 두절되자 적지 않은 지방조직은 일시 혼란상태에 빠져있었다.

마동희는 백암의 심포마을에 침투해들어오자 깊숙이 숨어앉아서 주대순이를 통하여 지방조직들의 이러한 실태를 샅샅이 료해하여 걷어쥐였다. 조직의 형편과 사람들의 동태를 깊이 파고들수록 자기를 이곳에 보내주신 장군님의 의도와 깊은 통찰력에 새삼스러운 감탄과 감격을 느꼈으나 그런 내심의 움직임은 일체 두꺼운 도수경속에 깊숙이 감추어두고 한사람한사람 조직원들을 묶어나갔으며 원근의 조직들을 차곡차곡 정비해나갔다.

그가 보건대 당면해서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사람들에게 격동하는 정세와 원쑤들의 야수적인 탄압속에서 꿋꿋이 견디여나갈 혁명의 신심을 주는것이였다. 그러자면 다른것이 없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지금 인민혁명군 전대오를 학습시키고계시는것처럼 이 피비린 백색테로속에서 싸우고있는 사람들에게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전달하고 장군님의 전략적구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정형을 알려주는것이 무엇보다도 절박할것이였다.

《백암오빠시》는 마동희가 입대한것을 똑똑히 모르고있지만 가장 위험한 적수였다. 마동희는 지난날의 조직관계도 있는것만큼 그자의 독스러운 눈초리에서 완전히 벗어난것도 아닌데 서뿔리 사람들의 눈에 띄는 날이면 언젠가는 놈의 의심을 사기 쉽고 의심만 사는 날이면 이 암흑의 땅에 사령부의 해빛이 비쳐드는 유일한 통로는 막혀버리는것이다. 자기가 의심을 사거나 체포되는것은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령부의 지도선은 끝까지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마동희는 여러날을 궁리하던 끝에 주대순을 내세워 안주사의 대상제를 크게 벌리기로 마음먹었다. 입대초기 장백에서 무송쪽으로 행군해갈 때 적의 《토벌대》와 치렬한 전투를 하다가 멀리 피하는척 하고 되돌아와서 바로 적의 코앞에서 숙영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놀라서 어리둥절해있는 신대원 마동희에게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상기시키시면서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마동희는 주대순이를 비롯한 마을의 조직핵심들과 이 일을 꾸며나가면서 한번도 웃지는 않았지만 그 뚝뚝한 표정속에 자신만만한것이 내풍기고있었다. 정세가 정세인것만큼 《백암오빠시》의 날카로운 감시의 한복판에다 《백암오빠시》까지 불러다 앉혀놓고 바로 그 코앞에서 북부조선일대 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큼직하게 소집하자는 마동희의 생각은 대단히 충격적이였지만 조직핵심들에게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마동희는 지금도 묵묵히 앉아서 각 조직의 형편을 들어보고나서 여느때 사담을 할 때나 별반 다름없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하였다.

《실정을 대개 알겠습니다. 동무들이 어려운 조건에서 잘 싸우고있는데 대해 사령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저를 동무들에게 보내시면서 국내에서 어려운 싸움을 벌리고있는 동무들에게 뜨거운 전투적인사를 보내셨습니다.》

마동희의 말은 어딘가 굳어보였고 말투도 뜻밖이리만큼 소박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침침한 방안에 한아름 광망을 휘뿌리는듯 하였다. 성실하고 가식을 모르는 그 말은 한꺼번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켜잡았으며 자기들이 비록 피비린 탄압의 광풍속에 휘말려있어도 조직에 련결되여있는 한 김일성장군님의 지도의 손길아래 놓여있다는 확고한 신심을 주었다.

마동희의 목소리가 너무나 침착하고 조용하기때문에 조직성원들은 저도 모르게 마동희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귀를 강구었다. 그것은 부채살모양을 이루어 마동희를 통하여 사령부에로 달려가는 그들의 지향을 형상적으로 드러내였다.

마동희는 말을 이었다.

《지금 형편은 대개 비슷비슷한데 구체적인 문제들은 따로 토론해봅시다. 물론 운흥이나 성진 뒤산에 떠돌아다닌다는 개별적인 운동자들을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하는 문제같은것은 방향이 명백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우리가 흡수해야 합니다. 그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업할것인가, 지금 각 조직이 처해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풀것인가 하는것은 따로따로 이야기하기보다 밀몰아서 우리가 장차 무엇에 근거해서 어떻게 사업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먼저 아는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지난해 가을에 복잡한 내외정세를 낱낱이 꿰뚫어보시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큰 론문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현단계에서 우리 혁명의 옥편과 같습니다. 무슨 문제든지 이 옥편만 펼쳐들면 딱딱 들어맞는 대답이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유격대에서는 장군님의 이 론문을 가지고 전군이 학습을 하고있습니다. 이 론문의 골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의 성격과 과업을 똑똑히 알고 자기 힘으로 조선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것입니다. 내가 사령부에서 떠나올 때 부수를 많이 가져오지 못했고 여기 와서도 등사를 많이 할수가 없어 푼푼치는 못하지만 각 조직에 한부씩 돌아가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실무적인 문제들은 여러가지로 복잡하게 제기되는것도 있겠지만 모든 문제의 해답은 여기에 다 있습니다. 모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깊이 학습하고 그것을 조직성원들과 광범한 인민들에게 선전해야 하겠습니다.》

마동희는 거치장스러운듯 안경을 벗어서 문턱우에 놓고 옆차기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가 실린 신문과 규격이 각이한 등사본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는 차례를 떼우기라도 할가봐 저저마다 앞다투어 손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우묵한 근시를 들어 찬찬히 살펴본 다음 한부씩 나누어주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한꺼번에 다 읽자고 하지 말고 우선 잘 건사하시오. 돌아가서는 등사를 할수 있으면 좋고 등사를 할수 없는데서는 모다붙어서 베끼는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서로 련계를 짓기 어려운 형편인데 이런 옥편만 가지고있으면 어디서나 혁명을 잘할수 있습니다.》

등사본을 다 나누어주고나서 안경을 도로 찾아 낀 마동희는 목이 마르는지 상우에서 김치보시기를 들어 국물을 찌워 마시였다.

《그러나저러나 우리도 뭘 좀 드는척해야 하지 않겠소. 불시에 누가 달려든다 해도 이렇게 맹숭맹숭해서야 되겠소. 자, 이제 기본문제는 끝났으니까 뭘 좀 음복을 하면서 주근주근 이야기해봅시다.》

마동희는 아까와 똑같이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왜 그런지 그의 말은 여태 긴장되여있던 사람들의 입가에 히죽이 웃음이 떠오르게 하였다. 조직의 긴급한 회의와 대상집의 음복판이 한데 겹쳐서 사람들의 앉음새는 자연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지만 마동희의 말투는 조직적인 발언이나 사담을 할 때나 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시절이 시절인것만큼 어떤 피비린 탄압속에서도 눈섭 하나 까딱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요란을 떠는것도 없이 침착하게 앉아있는 마동희의 소박한 모습에서 우리 혁명의 드팀없는 신념을 온몸으로 감득하는것이였다.

막 음복을 시작하려 할 때 걸치기에서 온 잡화상주인이 자기네 동네에는 지금 길닦기부역에 마을사람들을 모두 내모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자신없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중평에서 온 날파람있게 생긴 로동자대표도 손에 들었던 저가락을 엉거주춤 놓으며 자기네한테도 그런 문제가 제기되고있다고 말했다.

마동희는 다시 김치국물을 한모금 마시고나서 별일 아니라는듯이 말했다.

《왜놈들이 급해맞아서 물자를 뽑아내자는 수작이지요. 아마 앞으로 다른 지방에서도 다 그런 문제들이 제기되겠는데 어떻게든 파탄시켜야 합니다. 그놈들이 하자는것이야 못된짓밖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물자를 날라다 우리 혁명군<토벌>에 쓰고 중국을 침략하는데 쓰자는것이니까 무슨 구실을 대든지 모두 나가누워서 끌려나가지 않도록 하고 끌려나가게 되면 태업을 해야지요. 제놈들이 아무리 눈을 밝히면 부역에 나온 사람을 다 살피는 재간이야 있겠습니까.》

근심에 잠겼던 걸치기련락소책임자나 중평광산조직원은 마동희의 말을 듣고보니 너무나 뻔한걸 가지고 공연히 속을 썩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게면쩍은듯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어디선가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일 떠들썩하던 안주사네집에서도 마지막제사가 끝나자 차츰 조용해지고 이따금 돌아가는 손님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넨장, 벌써 새날이 잡혔군. 오래간만에 만난김에 실컷 이야기라도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길주쪽에서 피신해왔다는 더벅머리청년이 아쉬운듯이 말하였다.

《앞으로 만날 기회가 얼마든지 있겠는데 너무 조급해말고 뭘좀 드오.》

마동희는 그 청년의 무릎을 지그시 잡아누르며 말했다.

이때 마당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술병을 든 주대순이 정지에 들어섰다.

마동희는 새문앞에 옮겨앉아 손짓으로 주대순을 불렀다.

《이제는 집행부를 선거하고 회의를 해도 되겠습니다. 개들은 모두 술에 곤죽이 되고 동희동무의 어른이 그놈들을 지켜서고있수다.》

주대순은 새문을 넘어서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신바람나게 하였다. 마동희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좌중앞에 끌어다세우고 말하였다.

《동무들, 낯을 익히시오. 주대순동무입니다. 주대순동무는 사령부와의 련락임무를 수행하고있습니다. 앞으로 동지들과의 중요한 련락도 주대순동무가 맡아하게 됩니다.》

소개받은 주대순은 방금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을 골라가며 손목을 굳게 잡고 인사의 말을 나누며 낯을 익히였다.

인사를 끝낸 그는 초면인사턱을 낸다고 하면서 부엌에서 큼직한 함지 하나를 들고들어왔다. 따로 준비시켜둔것인듯 함지속에는 떡이며 부침 따위들이 듬뿍 담겨져있었다. 주대순은 손에 집히는대로 종이를 북북 찢어서 떡이며 지짐이며 전 따위들을 몫을 갈라 싸가지고 주머니에 찔러넣어주었다.

《여기서 음복은 음복대로 하고 이건 따로 건사했다 가져가야겠수다. 먼 고장에서 온 동무들은 도중요기도 해야 하겠지만 돌아가서 제사집음식냄새라도 풍겨야 의심도 덜 살것 아닙니까. 그러니 다 없애지 말고 지짐쪼배기라도 남겨가도록 하는게 좋겠수다.》

마동희는 평소에 꽤 덤비고 덜렁덜렁하는 성미인 주대순이가 이처럼 일을 빈틈없이 꾸미는것을 보고 히죽이 웃었다. 역시 책임을 진다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책임이면 이만저만한 책임인가. 북부조선일대에서 장군님의 의도를 관철해나가는 문제는 이 방안에 모인 사람들의 투쟁여하에 달려있는것이다.

주대순은 정지에 내려가 이번에는 사발이며 대접이며 접시, 목기에 담긴 음식그릇들을 연신 올려보냈다. 이런 기회에 고생하는 혁명동지들을 실컷 대접하겠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조직핵심들은 음식에는 별로 흥미가 없고 한마디라도 마동희의 말을 더 들어보겠다고 음복을 대충 끝내고 입언저리를 서둘러 씻으며 동희를 향해 다가앉았다.

《참 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한꺼번에 다 할수가 없으니 섭섭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낯을 익혔으니 나도 차례차례 동무들을 찾아가고 또 동무들도 기회를 봐서 찾아오고 이렇게 련계를 자주 가집시다.》

마동희는 두루거리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한사람 한사람 따로따로 떠나보내면서 앞으로의 접촉방법을 약속하였다.

새벽대기는 얼어붙은듯 차거웠다. 마동희는 더기에까지 나와 동지들과 작별하였다.

장군님의 뜻을 가슴깊이 받아안고 곳곳으로 떠나가는 지하조직책임자들과 련락원들의 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마동희는 피곤이 삽시에 사라지고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는것을 기쁨속에서 느끼였다.

그날 오후 주대순이도 소문없이 마을을 떠났다. 이곳 조직의 활동정형에 대한 보고를 가지고 강을 건너 샘골을 거쳐 정두철에게로 가는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