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3편 4


 

제 3 편

4

 

마국화는 헤여질 때 오빠가 하던 당부를 하나하나 돌이켜보며 홀로 숲속을 거닐었다.

오빠는 자기가 군정학습에 참가하지 못하고 떠나는데 그 대신 국화더러 자기 몫까지 공부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희창이를 만나지 못하고 떠나니 후날 만나면 똑똑히 인사를 차리라고 하면서 희창이앞에서 함부로 처신하지 말라고 은근히 귀띔하였다.

오빠는 자기때문에 이모저모로 마음을 놓지 못하는것이 분명하였다.

국화는 오빠가 몇번이나 《이담에 만날 때는 너도 나도 모두 딴 사람이 될게다.》고 하던 말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총다루기를 배우리라 거듭거듭 결심하였다.

그런데 글을 배우는것은 이미 어려서 오빠한테서 익혀둔것이 있기때문에 그닥 짝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사격술을 높이기 위한 훈련은 저혼자서는 남들을 따라잡을 자신이 영 없었다.

(오빠가 희창동무앞에서 마구 처신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사격술을 배워달라고 해도 일없을가?)

그는 몇번이나 망설이였다. 자기는 희창이에게 글을 깨쳐주고 희창이는 자기한테 사격술을 배워주면 안성맞춤일것 같은데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병실에 돌아와 동무들과 함께 둘러앉아서 재봉대에 차례진 자질구레한 잔손질들을 하면서도 내내 희창이한테 갈가말가 망설이던 국화는 오후에 휴식시간이 차례지자 결심을 내리였다.

국화는 배낭속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던 수첩을 꺼내여 날쌔게 솜군복품안에 찔러넣고 병실문을 나섰다.

《어딜 가요?》

등뒤에서 누구인가가 묻는 말이였다.

국화는 눈을 꼭 감고나서 방긋 웃었다.

《바람 좀 쏘이자고 그래요. 가긴 어딜···》

재봉대원들은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하얀 털모자를 쓰고 조심히 문을 나서서 마당으로 나왔다.

자기가 희창이한테 찾아가는것을 알면 동무들이 놀려줄것 같았다. 국화는 어떻게 되여 자기가 희창이와 가깝다는 소문이 나게 되였을가 하고 생각해보다가 소리없이 웃었다. 발그스레하고 노근노근한 말가죽으로 만든 탄띠때문에 그런 소문이 터진것 같았다.

그 탄띠는 자기가 써오던 무명천으로 만든것에 비하면 보기도 좋았고 쓰기도 편리했다. 희창이는 국화가 그 탄띠를 보고 부러워하자 하나를 선뜻 넘겨주었다.

부대들이 모여와 불섬에로 행군해올 때 많은 동무들이 마국화가 띤 탄띠를 부러워하며 만져보고 쓸어보았다.

국화네 녀동무들은 안희창이한테도 그와 똑같은 탄띠가 있는것을 보자 어리둥절해졌다. 어떤 대원들은 그 탄띠를 국화가 희창이한테 주었다고 말하고 어떤 대원들은 희창이가 국화에게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희창이와 국화가 동시에 꼭같은 탄띠를 띠고있는것을 보고나서는 그 둘사이의 내막을 짐작할수 있다는듯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무는것이였다.

마국화는 안희창이한테서 탄띠를 넘겨받던 일을 회상하고는 혼자서 웃었다. 그리고 싸움판에서는 호랑이같은 희창이가 글을 못깨쳤다고 놀림을 당하는것이 분했다.

(글을 모르는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제 배우면 될걸! 그 동무는 남먼저 글을 깨칠거야. 기관총다루기가 힘들지 글깨치기가 힘들가!)

그는 희창이가 누구보다 공부에 열성을 내리라고 생각했다. 희창이가 누구보다도 총기가 좋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국화는 그가 학습에서도 곧 앞장서리라고 믿었다. 우리 나라 글은 배우기가 헐해서 얼음녹는 사이면 깨칠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슨 일에서나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승벽이 센 희창이가 공부라고 남에게 짝지겠는가.

숲우듬지에는 연한 노을이 비껴들고 희끗희끗한 눈우에는 까치 한마리가 꽁지를 초싹거리며 앉아있었다. 숲속에서는 흥겨운 하모니카소리와 구성진 피리소리가 울려오고 두간두간 글읽는 소리도 랑랑히 들려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오던 국화는 정작 기관총소대병실이 저만치 바라보이자 어색한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이며 주변의 동정을 샅펴보았다.

소대병실마당은 조용했다. 대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국화는 안희창을 만나지 못하고가면 또 언제 찾아오랴 하는 생각으로 빈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끝에는 키높은 이깔나무가 서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그 이깔나무밑에 묵묵히 서있는 희창이를 발견하였다. 마국화의 얼굴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함박꽃처럼 환해졌다.

《아이 여기 있는걸 한참이나 찾았군요. 학습준비는 다 했어요?》

마국화는 상냥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희창이한테 다가갔다.

그런데 희창이는 전에없이 꿋꿋해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돌아서려다가 국화가 다가가자 이번에는 별로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 있었소? 어떻게 우리 소대엘 다 왔구만.》

마국화는 자기를 대하는 안희창의 태도가 어딘가 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반가운 마음이 앞서 그것을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 잘하고 웃기 잘하던 희창이가 오늘은 과묵하고 점잖고 틀져보이였다. 그리고 엄숙할사한 표정과 군동작이 없는 꿋꿋한 몸가짐도 어쩐지 남자대장부로서 갖추어야 할 위엄으로 느껴졌다. 어찌보면 약간 서먹서먹해하는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심정은 그와 단둘이 마주선 국화자신에게도 없지 않는것이였다.

《참 병실도 알뜰하고 마당도 깨끗하구만요. 기관총소대에서는 요사이 학습준비에서 제일 열성이라던데요. 학습목표도 높이 세웠구요···》

《높아야 그저 그렇지. 동무는 글을 알아서 좋겠구만. 그런데 재봉대에서는 계속 일이라면서?》

《공부하고난 사이에 심심풀이나 할 정도지요. 여기서는 뜨는 해도 잘 보이고 지는 해도 잘 보이겠어요. 저 아름다운 노을을 보니 겨울같지 않은데요!》

《겨울같지 않다니. 꼼짝하지 않고 서있자니 오금이 얼어붙을 지경인데···》

안희창은 여느때없이 초조해하면서 딴 사람들이 오는가 하여 근심어린 눈으로 사방을 힐끔힐끔 살폈다. 마국화는 오늘 그가 자기를 반가와하지 않는것 같아 불쾌한 생각이 들면서 여기서 오래 지체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병실에도 좀 놀러오시겠어요? 같이 모여서 글을 읽자요. 》

안희창은 그 말에는 마음이 동했던지 목을 빼들며 되물었다.

《동무, 나한테 글을 배워주겠소?》

《그건 문제도 없어요. 그대신 저한테도 뭘 배워줘야 하지 않아요···》

안희창은 인차 국화의 말뜻을 알아챈것 같았으나 웬일인지 뻣뻣해지며 별로 흥심없이 대답했다.

《글쎄, 봐가면서···》

희창이는 국화같은것은 안중에도 없다는듯 왼고개를 짓고 계속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국화는 무안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했다. 오빠 못지않게 살뜰하게 대해주던 희창이가 이처럼 자기를 본척만척할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국화는 희창이가 쓴외먹은상을 짓고있는것이 자기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딴일때문인지 알아보고야 발걸음이 돌아설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당돌해져서

《잠간 저 나무뒤로 가자요!》

하고 말했다.

안희창은 저으기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말을 되받아 외웠다.

《나무뒤로?》

마국화는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꼭 할말이 있어서 그래요···》

안희창은 안절부절 못하며 헤덤벼치기 시작했다.

《건 안되우. 할말이 있으면 여기서 제꺽 말하오 선자리에서.》

그는 국화의 얼굴에 무안해하는 기색이 비끼자 자기 말이 무례해진것을 느끼고 사정하듯 덧붙였다.

《그럼 여기서 말하고말고 할것없이 후날 나하고 저기 벼랑끝에 단둘이 가서···》

《알겠어요. 그럼···》

끝내 희창이의 마음을 가늠해보지 못한 마국화는 마당주변을 둘러보고나서 수첩이 들어있는 가슴속에 손을 밀어넣으며 재빨리 안희창이쪽으로 한걸음 내디디였다. 그러자 희창이는 얼굴을 찌프리며 다가서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아이 참, 오늘은 왜 이럴가? 겉으로는 웃음을 짓지만 나를 쫓아버리지 못해 안달아하는게 분명하지···)

모욕감을 참을수 없었다.

그러나 안희창은 여전히 한본새로 그가 빨리 물러갔으면 하는 기색을 감추려고도 안했다. 마국화는 낯색이 변해서 꺼내들었던 수첩을 재빨리 품안에 찔러넣고 돌아서버렸다.

《참, 눈치도··· 국화동무, 후에 저 바위우에서 만나자니까···》

안희창은 돌아서서 몇걸음 걸어가는 마국화의 등뒤에 대고 빌붙듯 말했다.

이때 마침 등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국화동무 왔댔소?》

예나 다름없이 친절하게 말하는 사람은 강철룡이였다. 국화는 저도 모르는 사이 반가와서 돌아서려다가 주춤하였다. 그는 입대한후 늘 살뜰히 대해주는 강철룡을 허물없이 따랐었다. 남들은 강철룡의 성격이 거칠다, 과격하다 하지만 국화생각에는 무한정 대범하고 너그러워보였다. 국화가 이번 행군과 전투에서 별로 큰 고생을 안하고 대오를 따라올수 있은것도 희창이와 함께 그의 각근한 도움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이 순간은 강철룡에게도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을수 없었다. 그는 무안을 당한 자기 얼굴조차 보이고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자세히 살펴보면 강철룡의 행동도 오늘은 전날같지 않았다. 국화를 만나면 언제나 작은 눈이 눈두덕에 묻히도록 소리없는 웃음을 짓던 강철룡의 표정은 오늘따라 엄엄한듯 했고 별로 말도 하고싶지 않아하는 기색이였다.

《국화동무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겠지?》

국화는 그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 안한다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기때문이다.

강철룡은 언제나 명랑하던 국화가 전에없이 침울해진 까닭을 대번에 눈치챘다. 안희창이의 근신처벌때문에 그들사이에 풀지 못할 오해라도 생길것 같은 위구심을 느낀 강철룡은 한동안 눈을 껌벅거리다가 국화를 안심시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안희창동무는 지금 근신처벌을 받고있는 중이요. 둥둥 떠서 공부를 안하거던. 그래서 저 동무가 저러고있으니 다르게는 생각하지 마오.》

마국화는 비로소 깜짝 놀라 안희창이가 서있는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안희창이가 넘어설수 없고 딴 사람이 들어갈수도 없는 보일듯말듯 한 금이 동그랗게 그어져있었다.

그때에야 모든 내막을 알아차린 마국화는 갑자기 기가 탁 꺾이였다. 그는 희창이와 눈길이 마주칠가봐 겁이 났다.

《전 그만 돌아가겠어요. 안녕히 계십시오.》

실낱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린 국화는 급히 마당에서 도망쳐나와 삭정이밭을 꿰질러 달리였다.

《국화동무.》

강철룡이 소리쳤다.

그러나 마국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마국화는 길이 아닌 숲속을 헤치며 달려온 자기의 모습을 남들이 띄여보면 흉이 될것 같아 길에도 나설수 없었다.

이때 멀지 않은 오솔길로 장군님께서 천천히 지나가고계시였다. 마국화는 얼굴이 화끈해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국화는 혹시 장군님께서 근신처벌중에 있는 희창이를 띄워보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 몇번이나 기관총소대쪽을 곁눈질해보았다.

장군님께서는 길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시였다. 희창이는 다행히 그이의 눈에 띄지 않은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