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3편 12


 

제 3 편

12

 

구류장의 어슴푸레한 전등불밑에서는 이 며칠동안 하루에도 몇번씩 거듭되는 고문으로 상한 사람들이 빈틈없이 누워서 신음소리를 삼키며 밤을 지새고있었다. 이미 쓰던 구류장 다섯칸도 모자라서 놈들이 새로 사무실을 내고 부랴부랴 꾸린 일곱칸의 구류장에도 사람들이 차고넘쳤다. 마지막 구류장에 감금당한 권영벽은 방금 고문실에서 정신을 잃고 들어온 만섭이라는 청년을 간호하고있었다. 그 청년은 지하조직원이였다.

권영벽이도 여러차례의 고문을 겪고난 뒤라 온몸에 성한데가 없고 기력도 쇠진해졌지만 본래의 몸자세를 꿋꿋이 지탱하고있었다.

권영벽의 극진한 간호의 덕분으로 만섭이는 언제나 정기가 넘치던, 그러나 지금은 뻘겋게 충혈된 눈을 떴다.

《만섭이, 정신 차리라구. 여기 물이 있네.》

권영벽은 만섭의 무거운 상체를 일으켜세우고 물고뿌를 들었으나 만섭은 물을 마실 생각이 없는듯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피멍이 든 입귀에 이지러진 미소를 애써 지어보이며 신음소리처럼 말했다.

《무사하구만요··· 정말··· 정말··· 반갑군요.》

그것은 조직책임자를 알아본 지하조직원의 기쁜 심정이였다.

《무사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기에 꺾이겠소. 만섭이, 힘을 내라구.》

《내 걱정은 말아요. 나는 자신이 있어요.》

그러더니 만섭이는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으면서도 뜨거운 손으로 권영벽의 손을 꼭 잡고 거듭 흔들며 오히려 그에게 힘을 주려고 애쓰는것이였다.

만섭이는 권영벽이 장백으로 나왔을 때 처음으로 길안내로 나선 애된 청년이였다. 양순하고 순박한 그는 탐구심이 강한 청년이여서 권영벽으로부터 혁명서적들을 많이 빌려보았다. 그러는 과정에 두 사람은 아주 가깝게 되였고 마주서면 혁명리론에 대한 론쟁도 벌리군 하였다. 권영벽이가 질문을 들이대면 만섭이편에서 매번 대답에 급급하다보니 종당에는 일장 《강의》처럼 되여버리는 때도 많았다.

오늘밤 만섭은 그런 론쟁도 더는 할 형편이 못되였다.

권영벽은 그의 이지러진 미소와 애정이 담긴 음성에서 지하조직책임자인 자기의 신변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쓰는 동지의 사랑을 다시한번 뜨겁게 느끼였다. 적들의 고문은 인민들속에 뿌리박은 지하조직책임자들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권영벽은《혜산사건》이 터지기전에 벌써 원쑤들의 발광적인 검거선풍이 있으리라는것을 예감하고있었다.

현실적으로 적들의 만행이 극도에 달했고 적통치기관에서 공작하고있는 지하조직원들도 그와 같은 움직임을 알리는 정보들을 보내여왔었다. 그리하여 권영벽은 지하조직원들중에서 유격대에 보낼 청년들을 선발하여 입대시키였고 어떤 사람들은 피신시키는 등 각방으로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었다. 그는 인민들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마음먹고 마을에 남은것이였다. 권영벽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놈들이 불의에 들이닥쳐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감행한것에 놀랐을따름이였다.

권영벽은 이번에 놈들이 감행하고있는 이 무차별검거선풍의 목적을 환히 꿰뚫어보고있었다. 놈들은 지하조직핵심들을 제거하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인민들의 흠모의 감정과 비등된 반일기세를 눌러버리려고 미쳐날뛰는것이였다.

지하조직원들은 비밀을 굳건하게 지키고있었다. 원쑤들은 아직까지 그 어떤 단서도, 조직원도 잡지 못한채 고문을 들이대고있을뿐이였다.

감방창문으로 차거운 달빛이 흘러들었다.

권영벽은 상처입은 넓은 이마를 들고 별이 총총한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하조직책임자를 대기만하면 고문도 면하고 풀려나갈수 있는것을 목숨을 바쳐가며 의리와 량심을 지켜 비밀을 고수하고있는 마을사람들··· 얼마나 좋은 인민들인가. 그런데 그들이 이 엄청난 시련앞에서 신심을 잃고 락심하여 힘을 놓고있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과 새로운 투쟁의욕을 불러일으킬것인가.)

권영벽은 이 생각을 거듭하였다. 이 며칠동안 그는 감방안에 있는 조직원들을 통하여 지금 수감중인 인민들에게 선전교양사업을 벌려 승리의 신심을 주도록 하였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원쑤들의 고문이 악착한데다가 그들모두가 가족친척을 원쑤들에게 학살당했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여서 슬픔과 고통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권영벽은 자신이 당하는 일신상의 위험과 고통보다도 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앉아있는것이 제일 가슴아팠다.

(어떻게 한다? 내가 놈들한테 손을 들었단말인가?)

권영벽은 물집이 엉켜붙은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무슨 수로 어떤 방법으로 저락된 사람들의 투쟁기세를 끌어올리겠는가, 어떤 방법으로? 지하사업도 해보고 유격대에서 정치사업도 해본, 투쟁경험이 많은 권영벽이였지만 이때처럼 자기의 무력함을 통탄해본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한목숨을 내대여 인민들의 기세만 일궈세울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수 있었다.

감방안에 드리운 컴컴한 어둠과 가슴을 어이는 신음소리 대신 밝은 해빛과 투쟁의 노래를 안겨주지 못하는것이 권영벽에게는 참을수 없이 안타까왔으며 바로 그것때문에 때식도 잠도 잊었다. 여기 와서 지하조직을 꾸리고 정치사업을 벌린 그 모든 수고가 이렇게 결말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그의 가슴은 찢기는듯 아팠다.

그러던 권영벽은 이튿날 이른새벽에 뜻하지 않은 쪽지를 받았다. 그 쪽지는 경찰서에 잡부로 있는 늙은이가 들여보낸것이였다. 그 늙은이는 지하조직의 영향하에 있었다.

권영벽은 서둘러 그 쪽지를 읽었다.

 

사흘전 정안툰전투가 있었음.

김일성장군님께서 전투를 직접 지휘하시여 대승리!

 

권영벽은 그 통신쪽지를 읽고 또 읽으며 백두산쪽을 우러러 숙연히 머리를 들었다. 김일성장군님! 그것은 장군님께서 보내시는 뜨거운 손길이였고 자애에 넘친 사랑이였으며 고무였다. 그것은 권영벽을 위하여 장군님께서만이 단행하실수 있는 전투였다. 장군님의 영상을 우러르는 권영벽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였다.

권영벽은 무릎우에 상체를 기대고 누워있는 만섭이를 흔들었다. 만섭이는 겨우 눈을 떴다.

《만섭동무, 기쁜 소식이요.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안툰을 들이치시였소. 원쑤놈들이 대참패를 당했소.》

그렇게도 힘을 잃었던 만섭의 눈에 정기가 돌았다. 그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더듬더듬, 그러나 기쁨이 어린 어조로 물었다.

《언제요? 언제요?》

《사흘전이요. 사흘전- 우리 장군님께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셨소.》

《그래요···》

만섭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번뜩였다. 영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것 같던 만섭은 숨을 몰아쉬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권영벽은 곧 소식을 통방으로 감방마다에 알리였다. 그리고 정안툰전투를 경축하여 감방에서 투쟁을 벌릴 계획을 세웠다. 그와 함께 권영벽은 밖의 조직에 련락하여 이번 정안툰전투를 계기로 인민들의 혁명기세를 불러일으킬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아침식사가 배식된 때였다.

감방마다에서 일제히 폭풍같은 웨침이 터져올랐다.

김일성장군 만세!》

《정안툰전투승리 만세!》

《일제를 타도하라!》

하늘을 찌를듯 한 웨침소리는 경찰서의 양철지붕을 들었다 놓으며 거리에로 퍼져갔다. 어제저녁까지만 하여도 슬픔과 수심에 잠겨 묵묵히 앉아있던 마을사람들이, 권영벽이가 그토록 불러일으킬수 없어 애타하던 사람들이 폭풍같이 들고일어서서 목청껏 팔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경찰서는 일조에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정안툰전투의 참패를 비밀에 붙이고있던놈들은 하늘을 찌를듯 한 수감자들의 기세에 겁을 먹고 갈팡질팡하였으나 그럴수록 인민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갔다.

그것을 보는 권영벽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어리였다.

이 순간 권영벽은 문득 라명희를 생각하였다.

그도 정안툰전투소식을 분명 들었을것이고 그러면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것이였다.

그는 지금 어떻게 되였을가. 그냥 집에 남아서 지하조직을 수습하고있을것인가? 지금같이 어려운 정황속에서 권영벽은 그것을 믿고싶었으며 사실 그것을 마음속으로 절절히 바라고있었다.

아직까지 그는 라명희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한것이였다.

라명희는 권영벽이 체포된 이후 몸을 피할수도 있었지만 지하조직원들을 그냥 두고 더구나 권영벽이 체포된 형편에서 자기자신의 신변만 생각할수 없었다. 마을에 남아 침착하게 지하조직을 수습하고 있던 라명희도 인차 체포되였다. 그러나 권영벽이 가슴아파할것 같아 그는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권영벽은 아직 그의 체포소식을 알지 못하고있었다.

권영벽은 이제 자기앞에 준엄한 시련이 기다리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어수선하고 피비린내나는 구류장속에서나마 똑똑한 정신으로 자신의 반생을 돌이켜보는 권영벽은 무한한 자부심과 끝없이 용솟음치는 힘을 느끼였다.

한사람의 참된 혁명동지를 쟁취하자면 생명도 헌신짝처럼 버려야 한다. 살벌한 환경속에서 일을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백두산서남부땅에 눈서리에도 지지 않는 붉은 꽃이 황무지를 밀어버리고 활짝 피여났으며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붉은 노을이 불타고있었다. 원쑤들은 숨쉬는 사람을 몽땅 묶어다 실어와서 때리고 지지지만 일단 혁명적으로 각성된 백두산서남부지역의 인민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완강하게 싸우고있지 않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인류의 참된 자유와 행복, 정의를 위해 싸우는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로서 인민들을 각성시키는 길에서 자신의 자그마한 기여도 있다는것을 느낄 때 그 이상의 행복과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적들은 지금 지하혁명조직을 색출하기 위하여 김일성장군의 전사인 권영벽이 누구인가고 심문하고있었다. 심지어는 김수남이더러 권영벽이를 대라고 고문했다. 그러나 놈들은 아직까지 김수남이가 바로 권영벽이라는것을 모르고있다.

적들은 미구하여 김수남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것이다. 아니 그전에라도 필요하다면 그자신이 스스로 나설것이며 그리하여 김일성장군님의 전사인 권영벽은 놈들을 상대하여 새로운 투쟁을 벌릴것이다.

그는 무서운것이 없었다. 총칼로 싸우지 못할 때에는 말로써라도 우리 혁명을 옹호할것이며 그 불패의 위력, 승리의 필연성을 론증할것이였다.

그것이 장군님의 전사로서 장군님의 혁명사상을 지켜가는 옳은 자세일것이다. 그는 장군님의 연설들과 말씀들을 되새기며 앞으로 있을 거대한 싸움을 준비하고있었다.

언제인가 때가 되면 그는 떳떳이 원쑤들앞에 나설것이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장군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조국광복의 성전에 떨쳐나서게 할수 있다면 권영벽은 한몸을 기꺼이 바칠것이였다. 그는 오늘 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그 어떤 힘으로도 인민들의 혁명적기세를 꺾을수 없음을 다시금 절절하게 느끼였다. 그리고 장군님의 명성이 지니고있는 위대한 힘과 영향력을 다시한번 심장으로 체험하였다.

(내 우리 장군님을 목숨으로 받들리라!)

권영벽은 수감자들의 만세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속으로 거듭 맹세하였다.

만섭이는 권영벽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는 주먹을 높이 쳐들며 만세를 불렀으나 입술만 떨뿐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섭은 권영벽의 품에 안기며 어깨를 들먹거리였다. 한번도 장군님을 만나뵈온적이 없어 늘 유격대에 입대하겠다고 하던 만섭이, 권영벽은 만섭의 어깨를 쓸어만지였다.

그러나 그는 만섭이보다 몇곱절 장군님이 그리웠으며 그이의 품에 다시 한번 안기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