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9


 

제 2 편

9

 

사립문밖에서 그자들을 쫓아버리신 리보익녀사께서는 아직도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이제 원쑤들과 맞서 당해낼 일이 아름차신듯 한동안 사립문에 가슴을 기대고 서계시였다. 놈들의 잡도리로 보아 어차피 자신께서 멀고 험한 길을 떠나지 않을수 없을것 같으시였다. 지금 집안형편을 보나 놈들의 수작을 봐도 그렇고 자신께서 나서시여 모든 경난을 겪는것이 마음도 편하고 또 그래야 그놈들이 함부로 굴지도 못할것이였다. 그러나 누가 가든 헐치 않은 싸움의 길일것은 틀림이 없다. 목숨바쳐 싸우는 자손들에게 꼬물만큼이라도 억센 마음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렇다고 놈들이 그렇게 문문하지도 않을것이다. 앞일을 생각하며 막막한 생각에 잠겨계시는 녀사의 머리속에 문득 한줄기 즐거운 기대가 떠올랐다.

(내가 정말 증손이를 만나게 될수도 있지 않을가!)

녀사께서는 증손의 모습을 상상해보시였다. 임자년에 태여난 증손이가 이 집에서 이국땅으로 떠난것이 을축년이다. 올해가 정축년이니 열두해가 지났다. 그 기간에 녀사께서 무송에 찾아가시여 한번 본적이 있는데 그때로부터 열한해가 지났다.

(내가 무송에서 마지막으로 본것이 증손이 열다섯살때였다. 올해에 우리 증손이는 스물여섯살이지. 몸도 몰라보게 컸겠지.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그 나이가 되도록 부모의 사랑도 따끈히 받지 못하고 이날이때까지 산속에서 고생만 하고있구나.)

녀사께서는 가슴이 쓰리시였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정말 증손이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드시자 기운이 부쩍 솟았다.

녀사께서는 사립문을 여시고 토방에 올라가서 벽에 걸려있는 노란 싸리바구니를 벗겨드시였다.

(만날수만 있다면 한번 먹은 마음 죽어도 변치 말라고 당부도 할수 있으련만 웬걸 만나게야 될라구. 왜놈들이 우리 증손이를 찾아내지 못하겠으니까 저 야단이겠지. 그러나 풍문이라도 들을수 있고 인편을 만날수도 있지 않을가. )

녀사께서는 방금전까지 일하시던 오곳재콩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소매골 목화밭으로 가시였다. 고랑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소담한 다래송이가 주렁진 양지쪽자드락밭은 따뜻한 볕이 쪼이고 서느러운 바람이 스치고있을뿐 고요하였다. 드문드문 서있는 강낭대는 잎과 대가 누렇게 말라버려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는데 목화잎은 의연 한여름처럼 푸르싱싱하다. 그우로 마치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피여나듯 군데군데 희고 호함진 목화가 피여나있었다.

녀사께서는 밭귀에 바구니를 놓고 치마자락을 허리매끼에 찔러넣으시였다. 녀사께서는 잎을 떨굴세라 다래를 다칠세라 허리를 굽히고 목화포기들을 손으로 헤치시며 밭가운데로 들어가시였다.

잘 피여난 목화송이를 보시는 녀사의 마음은 기쁘시였다.

녀사께서는 올해 목화농사가 눈에 띄게 잘된것도, 여느해보다 닷새나 앞당겨 목화가 피게 된것도 다 례사로운 일처럼 여겨지지 않으시였다. 목화가 얼마나 잘되였는지 어떤것은 한줌에 쥘수 없는 형편이였다.

하늘은 푸르렀다. 깨끗하고 희디흰 송이구름이 하늘가에 피여있었다. 번개치고 비 쏟아지던 소란하고 어지러운 여름하늘이 어느새 활짝 개이고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자드락등판에 서신 녀사께서는 푸른 하늘에서 구름송이를 걷으시듯 정성들여 푸르른 목화밭에서 목화송이를 골라따시여 치마폭에 담으시였다. 치마폭이 차면 밭머리에 나와 또한번 한송이한송이 살펴보며 티검불을 골라내고나서 싸리바구니에 옮겨넣고 다시 밭가운데로 들어서시였다.

《할머니, 댁에선 벌써 목화를 따시우?》

누구인가 최뚝밑에서 말을 건늬였다.

녀사께서는 허리를 펴며 그쪽을 바라보시였다. 노닥노닥 기운 베잠뱅이에 희치회치한 무명적삼을 걸친 젊은이가 누렇고 주글주글한 얼굴에 어줍은 웃음을 담고 서있었다.

《상훈인가, 여직 콩가을을 다 못했나?》

녀사께서는 말씀을 범상하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생각이 깊으시였다.

(저 젊은이도 임자생이지. 우리 성주와 가깝게도 놀더니···)

상훈이를 볼 때마다 손자가 생각나고 손자가 그리울 때는 동갑인 상훈이를 찾아가 만나보군 하시던 녀사였다.

녀사께서는 최뚝으로 나가 상훈의 손목을 잡고 살뜰하게 말씀하시였다.

《소담한 송이들이 눈에 띄워서 몇송이 따는길일세. 아에미는 아직 젖살을 풀지 못했나?》

상훈의 처는 몸을 푼후 젖앓이때문에 고생하고있었다. 젖도 나오지 않아서 상훈이가 심봉사처럼 젖동냥을 다니였다.

《화침질도 해보구 바가지찜질도 해보았는데 젖살이 풀리지 않아요. 에미도 에미지만 아이가 구실을 못할것 같아요.》

상훈이는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녀사께서는 속이 답답하시였다. 상훈이도 녀사네처럼 강지주네 소작을 부치는데 살림살이라는게 솥안에서 붕어가 자랄 형편이였다.

상훈의 아버지는 집안살림을 추세워볼가 하여 성안에 품팔이갔다가 허리를 다쳐서 몸푼 며느리와 한지붕아래에 누워있었다. 상훈의 섬약한 어머니는 령감시중들래, 며느리시중들래, 아이젖동냥할래, 아주 폭삭 곰삭아버리고 지금은 정신까지 실성해서 흙을 쌀이라고 퍼오고 물을 젖이라고 아이한테 떠먹이고 해서 애를 먹이였다. 황소같던 상훈이는 온 집안이 가꿔야 할 농토를 묵이지 않으려고 시악을 부리는통에 자주 황달이 와서 눈알이 노래지군 하였다. 정말 가난한 만경대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상훈이네 정상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상훈이는 최뚝우에 앉아서 멀건 눈길로 하늘가를 쳐다보며 구슬프게 말했다.

《할머니, 일하다가 할머니를 보니까 성주생각이 못견디게 나요. 성주도 우리처럼 힘들게 살아가고있을가요?》

할머니는 밭귀에서 무우를 쑥 뽑아 잎을 따내고 상훈에게 들려주시였다.

《나도 그 생각일세. 우리 성주도 집에 붙잡아두었더라면 자네같이 고생하겠지. 자네를 보면 성주가 집을 뛰쳐나가 왜놈들과 싸우는것이 옳았다고 생각되네만 그래두 우린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살지만 성주는 백두산속에 있지 않나.》

녀사께서는 긴 한숨을 내쉬시였다.

《고생은 심하겠지만 큰뜻을 품고 왜놈들과 싸우고있지 않습니까? 혁명군을 령솔해가지고 국경을 뚫고 들어와 보천보를 들이답새겼다니 그게 어디 보통사람들이 엄두나 낼 일입니까? 우리 성주가 장군이 된다더니 정말 장군이 되였어요. 할머니, 저는 더 견디여배길것 같지 못해요. 아버지와 처는 다시 일어설것 같지 못하고 실성한 어머니가 불쌍해요. 그런데 나마저 골병이 들었으니 누가 우리 식솔을 살려줍니까? 올해에는 땅까지 떼울겁니다.》

상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볼을 적시였다.

(세상이라는게 사람이 태여나 살기 마련인데 정말 이 상훈이가 어떻게 살아나갈수 있을가?)

녀사께서는 동정어린 눈으로 상훈이를 바라보시며 타이르듯 말씀하시였다.

《마음을 굳게 먹으라구. 가난한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아가야지. 우리 성주가 조선사람들은 왜놈과 싸우지 않으면 다 죽게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옳은가부웨. 한쪽에서 강심을 품고 군대를 일으켜 왜놈들과 싸움을 하고있으니 그러느라면 이제 좋은 세상이 오겠지.》

녀사께서는 가까스로 상훈의 마음을 달래시였다. 상훈이가 콩밭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오래동안 녀사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일손이 잡히지 않아 잠시 허리를 펴고 만경대 궁촌을 내려다보시였다.

조갑지만 한 초가집들이 가난을 감추려는듯 나무그늘밑 산허리뒤에 숨어있다. 지주집 하나가 번듯하고는 하루 두때 굴뚝에 연기올리는 집이 쉽지 않았다. 가을부터 굶어서 얼굴이 누래진 사람들이 이제 새봄에 다시 일어설 기력이 있을가? 둔덕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온 마을판에서 어느 집 하나를 꼬집어보아도 상훈이네보다 밝은 앞날을 기약할만 한 집은 없었다. 녀사께서는 논과 밭에 먹을것이 그뿍한 이 계절에 좁쌀되나 벌자고 땅파는 일에 품팔러 갔다가 담이 무너지는바람에 팔죽지를 다친 가운데아들 일이 생각되시였다. 이대로 가면 가난한 조선사람은 몇해 지나지 않아서 모두 죽어버릴것이 뻔했다.

(이 꼴을 하고 살바에는 왜놈들과 싸우는것이 백번 옳지. 지금 우리 처지가 어디 산 사람이라고 말하게 됐나.)

녀사께서는 더욱더 손자생각이 나시였다. 혹시 연줄이라도 닿으면 고향사람들의 이런 참상을 일일이 알려서 마음을 굳게 먹도록 당부하고싶으시였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어린 손녀애가 담방거리며 뛰여올라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성, 아버지성 다 와서 할머니 빨리 집에 오시래요!》

손녀는 숨을 할딱이며 째진 목소리로 웨쳐댔다.

녀사께서는 손녀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으신채 저으기 기쁨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시였다.

《그래그래 가야지. 밭에 들어서지 말아라. 》

녀사께서는 큰 바구니가 넘치게 목화를 따시고나서 손녀에게 이워 앞세우시였다.

《할머니, 왜 콩꺾다가 목화따나요?》

앞서 걷는 손녀가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 녀사께서는 자신이 어째서 콩밭으로 돌아가지 않고 목화밭에 들어갔는지 똑똑한 까닭을 알수 없으시였다. 녀사께서는 기실 어떤 타산을 세우시고 목화를 땄다기보다 마음에 이끌리여 목화를 따신것이다.

《목화가 너무 소담해서 땄다. 목화라는건 핀 다음에 오래 두면 그만큼 솜이 뻣뻣해지느니라. 오늘 딴 목화는 양털보다 더 따뜻할게다.》

녀사의 눈앞에는 포근한 이불솜이며 따뜻한 목테며가 번갈아 떠오르시였다.

새벽일찌기 콩밭에 나갔던 가족들이 어느새 왜놈들이 또 왔다갔다는 소문을 듣고 방안에 모여와 있었다. 대바르고 결기센 며느리가 밥상을 차려놓았지만 김보현선생과 김형록선생은 침통하고 울분에 찬 얼굴을 하고 앉아계시였다.

녀사께서 길게 설명하시지 않아도 가족들은 벌써 할머님께서 만주로 떠나실 결심을 하셨다는것을 소문을 통해 다 알고있었다.

《어서 점심을 들지, 아애비 팔 저린건 좀 난가?》

녀사께서는 아드님을 살펴보신 다음 김보현선생께 식사를 권하시고나서 상앞에 다가앉으시였다. 녀사께서는 몇해가다가 처음 좋은 목화를 한바구니 따신것이 기쁘기만 하시였다.

《어머니는 못가셔요. 날이 우등우등 추워오는데 환갑을 치른 어머니가 어디로 간다고 그래요. 죽어도 제집 울타리안에서 다같이 죽자요!》

며느리는 격분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녀사께서는 태연한 기색으로 말씀하시였다.

《사는게 죽는것보다 나은것이 없는것 같지만 그래두 살아야지. 살아서 집을 지키고있다가 증손이가 돌아오는 날을 보자는게다. 》

녀사께서는 콩박은 조밥덩이를 숟갈로 꾹꾹 꺼시여 찬물에 말아드시였다.

무명수건으로 다친 팔을 메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짓고있던 김형록선생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안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녀사께서는 아드님의 소청을 받아들이신듯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였다. 식사를 건성 치르고난 다음에야 녀사께서는 식전에 한 아들의 말에 응답하시였다.

《너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자중해야 한다. 령감님이 이제 앉아있으면 몇해나 더 앉아있겠다구. 왜놈들이 김씨문중을 도륙내지 못해 이를 갈고있는데 하나 남은 너마저 아무데나 몸을 내대서는 안된다. 왜놈들은 나더러 내가 할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할게구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테니 그놈들은 결국 나를 해칠것이야. 이 에미나 저 며느리가 이 집에 낭자를 올리고 들어섰을적에는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남편을 받들고 자식을 키워주면 된다고 생각한 한갖 아녀자의 마음이였다만 이제는 나라를 찾는 일을 가업으로 삼은 김씨일문의 높은 뜻을 안 이상 처마밑에서 맴도는 아낙네가 될수 없어. 마음을 굳게 먹고 가문을 유지하고 자식들을 키워 떳떳이 대를 이어 싸움터에 내보내야 한다. 세상을 쥐락펴락한다는 왜놈이 우리 증손이를 만나 귀순하게 하라고 사정하게끔 되였으니 왜놈들 처지가 가히 짐작할만하지. 그러나 왜놈들은 무슨 수를 써도 우리 증손이를 산에서 내려오게 하지는 못해.

내가 증손이를 만나게 된다면 더 말할것도 없고 못만난다 해도 우리 증손이가 이 할미 마음을 짐작 못하겠나. 걱정들 말라구. 김일성장군의 조모로서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겠으니.》

녀사께서는 찬물을 한모금 마시고 토방으로 나서시였다. 그리고 처마밑에 매달려있는 지적퉁구리를 내리여 해빛이 따갑게 쪼이는 토방우에 펴시였다. 손녀애더러 걸레질을 하게 하고 바구니에서 목화송이를 꺼내여 지적우에 골고루 펴시였다.

녀사께서는 손녀에게 긴 회초리를 들려주시고 새들을 쫓으며 목화를 지켜보게 하시였다. 그리고 저녁때식을 끓일 때는 부뚜막에 옮기여놓고 밤에는 아래목에 널어 목화송이를 말리시였다.

녀사께서는 이렇게 이틀동안에 목화를 다 말리우고나서 씨아로 씨를 뽑고 활로 솜을 타시였다.

녀사께서는 해수수대에서 빼낸 뺑대에 햇솜을 감고 장다리우에 살살 굴리며 고치를 마시였다.

가족들은 녀사께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찮은 일감을 만들어놓고 그에 열중하는것으로 여기고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이 일에 비할수 없는 정성을 고이시는것이였다.

녀사께서 고치를 잠재우고나서 곧 물레가락에 대롱을 씌우시고 실을 앗기 시작하시였다. 녀사께서는 날자라도 받아놓은 일거리처럼 밤잠도 잊고 꼭지마리를 놓지 않으시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 일이 녀사께서 심심풀이로 벌린 역사가 아니라는것을 눈치채였다.

손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할머니, 요것가지구 무명날래요?》

며칠간 녀사의 말동무는 어린 손녀뿐이였다.

《글쎄 실을 앗아 무엇을 할가?》

녀사께서는 이렇게 되물으시였다. 천진한 손녀는 녀사의 무릎에서 떨어지지 않고 맴돌다가 발딱 일어나며 말했다.

《산에 있는 맏오빠 장갑 떠드리자요.》

녀사께서는 문득 물레를 멈추시였다. 그애가 바로 녀사의 깊은 마음속을 곧바로 알아맞힌것이다.

녀사께서는 반가운 웃음을 지으시며 두손으로 손녀의 머리를 쓸어주시였다. 기특하고 령리한 손녀였다.

녀사께서는 맏손자가 사무치게 그리우시였다. 일단 떠나게 된다는것을 생각하시니 혹 이번에 맏손자를 만나볼수도 있을것같아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시였다.

녀사께서는 물레옆에 있는 반짇고리에 손을 넣으시고 무슨 물건을 찾아든 다음 그것을 두손으로 만져보시였다. 여러번 기운 버선이였다. 녀사께서는 그리운 손자의 따뜻한 손을 어루만지시듯 그 버선을 만지고 또 만지시였다. 맏손자가 슬하를 떠나 먼 이국땅으로 건너간 다음 녀사께서는 맏손자가 걸치던 적삼이라도 보고싶어 살림살이를 몽땅 들춰보셨는데 그럼직한것은 하나도 없고 뒤지바닥에 이 버선 한짝이 묻혀있었다. 그것을 찾아보신 녀사께서는 버선뒤축이 닳도록 만경봉기슭과 대동강반을 뛰여다니던 활달한 손자와 함께 가난한 살림에 혁명사업 뒤바라지까지 하느라고 고생하다가 먼저 간 근면하고 마음 착한 며느리까지 만나본것처럼 반갑고 기쁘시였다. 그것을 품에 안으신 녀사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였다. 이 버선은 이처럼 녀사께 소중한 기념물로 되여 언제나 반짇고리에 넣어두고 마음이 쓸쓸할 때면 바라보며 손자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시는것이였다.

(우리 증손이에게 어떻게 이 할미의 마음을 다 말할수 있을고···)

실을 다 앗은 다음 녀사께서는 꾸리를 결었다가 두겹실을 감으시였다.

며느리와 손녀는 각기 실꾸리를 하나씩 들고 녀사앞에 마주앉고 녀사께서는 두오래기의 실을 얼레질하시며 퉁구리를 감으시였다. 그옆에서는 잠을 깡그리 잃으신 김보현선생께서 삼노를 드리고계시였다.

그 일이 끝난 다음 며느리와 손녀는 웃방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래방에는 로인내외뿐이였다. 날은 훤히 밝는데 왜놈들이 새날을 더 넘기지 않을것이라는 예감이 휩쌌다.

《이 소문이 퍼져서 증손에게 닿으면 증손이한테 좋을 일이 없지 않겠소. 소문이 나지 말아야 하겠는데···》

김보현선생께서는 일손을 놓고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그애한테 무슨 일이나 생긴건 아닌지 걱정스럽소. 만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혹시 그애를 정말 만나거든 힘들어도 결심을 굽히지 말고 끝장을 보고 돌아오라고 이르우. 로친도 절대로 굴하지 말고 꼭 돌아오우. 기다리겠소.》

녀사께서는 로인님의 말을 깊은 마음속에 고이 새겨넣으시였다. 자신의 심정도 그러하시였다.

박차석은 다음날 아침에 나타났다. 그자들이 나타나자 녀사께서는 빗접을 빗접고비에 지른 다음 나들이옷을 갈아입고 깨끗한 수건을 쓰시였다. 녀사께서는 몸에 궁색이 끼지 않도록 새 버선을 신고 실겅우에서 깜장고무신을 내리워 문밖에 내놓으시였다. 며느리가 녀사의 어깨우에 밤색무명목테를 얹어드리며 가볍게 흐느꼈다.

박차석의 구역질나는 모습이 사립문앞에서 얼씬거리는것이 보이자 며느리는 부엌문 뒤편에 피해서고 김보현선생께서는 문턱앞에서 되돌아서서 아래목에 올방자를 짓고 앉으시였다. 김형록선생께서는 토방밖에 나와서시여 저주의 눈빛으로 그자들을 쏘아보시였다.

《령감님, 다녀오겠수다. 앓지 마시우.》

녀사께서는 입을 억다물고 천반을 쏘아보고계시는 김보현선생께 범상한 인사의 말씀을 남기시고 토방을 내려서시였다. 녀사께서는 굽석거리며 인사하는 주구놈들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살림집과 외양간채를 찬찬히 훑어보시였다. 녀사의 왼쪽손끝에는 창졸간에 목화를 타시여 물레질하여 앗은 두퉁구리의 실이 든 자그마한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갑자기 부엌문뒤에서 며느리가 뛰여와 녀사의 손목을 쥐며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어머니, 저렇게 하늘이 서늘해오는데 어떻게 만주벌판에 나서십니까!》

녀사께서는 오히려 비장히 미소하시며 며느리를 달래시였다.

《일없네. 집에 앉아있다고 언제 한번 마음편해봤나. 집일이 산데미처럼 쌓인걸 보면서 아에미한테 맡기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강심품고 살림을 틀어쥐게.》

며느리는 시모님을 더 만류할수 없었다. 곧 출발하신다는것을 느끼자 그는 왜놈과 주구놈들을 쏘아보며 안마당둘레에 서있는 자식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조모님앞에 와서 절해라. 조모님 길떠나신다!》

손자손녀들이 모여들어 차례로 녀사께 큰절을 드리였다. 며느리는 자신도 시모님앞에 절을 드리고 자식들은 물론 사립밖의 원쑤놈들까지도 다 들으라는듯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장군을 만나면 가족때문에 마음 약해지지 말란다고 꼭 말씀하십시오. 사람이 사람이라니까 사람인가부다 하지 이게 무슨 사람입니까. 이따위로 살고있는 죽은 목숨들때문에 근심하거나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일가멸족이 되여도 원이 없으니 꼭 나라를 찾아주십사 하늘처럼 믿고 바란다고 장군에게 말씀해주시우!》

녀사께서는 며느리와 손자손녀들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시면서 조용히 속삭이시였다.

《너희 어미 말이 옳다. 장군은 응당 그렇게 할게다. 할미가 말 안한다고 장군이 싸움을 중단할가. 떠들지들 말아라. 아무튼 장군을 만날수만 있다면 오히려 좋겠다.》

녀사께서 주저하시면 세월없이 지체될것이였다. 녀사께서는 강심먹고 걸음을 떼놓으시였다.

사립문을 나서시려는데 마푸리새끼들이 구구거리며 발길에 묻어왔다. 녀사께서는 울짱에 걸려있는 둥치에 손을 넣으시고 겉수수를 한웅큼 꺼내시여 마푸리들앞에 뿌려주시고 문을 나서시였다.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하늘은 푸르청청 맑고 소나무숲은 추위를 맞느라고 시퍼렇게 독을 쓰는데 정다운 물소리를 따라 한떼의 기러기가 머리우에서 처량한 소리를 내며 푸덕이고있었다.

녀사께서는 눈물이 솟구쳤지만 강잉히 참으시였다. 뒤에는 눈이 새까만 손자자식들이 따라서고 앞에는 걱정에 휩싸인 마을사람들이 몰려오고있었다.

녀사께서는 소매안에서 수건을 꺼내시여 눈굽을 몇번 찍으시고나서 단호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녀사께서는 찬바람을 안고 사립문을 나서 만경대를 떠나시였다. 이 만경봉기슭에서 자식들을 거느린 맏아들내외를 떠나보내고 셋째아들도 그렇게 떠나보낸 녀사이시였다. 자식들은 사립문을 떠날 때 품었던 결심을 지켜 왜놈과 싸우다가 하나하나 장렬하게 전사했다.

일제침략자들을 쫓아내고 조국을 광복하기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어엿한 김씨문중의 후손들이였다. 녀사의 눈물젖은 눈앞에는 증손과 그 조상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영상들이 또렷이 나타났다. 녀사께서는 자식들을 떠나보낸 싸움의 그 길에 오늘은 직접 자신이 나서신것이다.

(기왕지사 잘되였다. 할미의 힘이나마 너에게 보태주마. 그런데 증손아.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어디에서 이 할미가 너를 만나게 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