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8


 

제 2 편

8

 

좁고 울퉁불퉁한 신작로로 반짝이는 승용차 한대가 달리고있었다.

장대재기슭 검정다리밑을 지나고 보통문을 에돌아 서성교를 건는 차는 지난 늦장마때 감탕이 움막집들을 갈게구멍처럼 만들어버린 토성랑을 꿰질러 뺑대거리로 향했다.

송산코숭이에서 달구지길에 들어서자 승용차는 더욱 들추며 허우적이기 시작했다.

만경대 땅이 시작되고있었다.

차안에는 운전수외에도 두사람이 타고있었다. 운전수옆의 앞자리에는 오끼의 특별부탁을 받은 평양지구헌병대장이 으리으리한 제복을 차려입고 수탉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있었고 뒤자리에는 회색코트를 입은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무릎우에 손을 얹고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그 사람은 수수알처럼 도드라진 눈따라치를 자주 만지며 수건을 가져다대군 하였다. 박차석이였다.

차가 만경대 땅에 들어선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는 차차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박차석은 차창카텐을 밀어버리고 차창에 이마를 기댄채 바깥을 살펴보고있었다.

맑은 대기, 푸르른 하늘, 푸르싱싱한 소나무숲이 우거진 다감하고 유순한 산봉우리들, 나타났다 사라지군하는 대동강과 순화강의 은빛물결, 여기가김일성장군님의 고향이라는것을 아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박차석도 하늘밑에 차고넘치는 서기와 일목일초에 비낀 위엄을 감득하게 되는것이였다. 그의 얼굴에는 신정촌려관방에서 겪은 뭇매가 남겨놓았던 흔적이 어느정도 가셔졌으나 눈길에 남아있는 원한의 빛은 갈구리처럼 여물었고 이마에 패인 주름살과 함께 번민의 빛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그는 분하고 억울하였다. 지금에 와서야 신정촌려관방에서 품게 되였던 의문이 깡그리 풀리였다.

(나한테 이런 역사질을 시키자고 그렇게 모진 독을 뿜었구나. 이런 일에 내가 가볍게 응할수 없다는것을 아니까···)

박차석은 신정촌의 려관방에서 벌어졌던 일이 생각나자 다시금 진저리를 쳤다. 박차석을 가죽이기듯 짓밟아놓고난 다음날부터는 오히려 더 살틀하게 대했다. 그들은 려관방에서 있은 일은 단순히 술김에 롱이 지나친것으로 치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박차석은 몸이 추서자 그들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접하게 되였고 따라서 자기에게 가해진 폭행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다는것을 눈치챘다. 그들은 박차석에게 만경대에 가서 조모님과 인사하는 말까지 다 짜주고 그대로 외우게 했다.

왜놈들의 엄청난 새 모략을 알게 된 박차석은 가슴이 떨리였다. 그것은 함부로 말려들수 없는 죄악의 길이였다. 박차석은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반발심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매맞은것을 구실삼아 방안에 붙박히여 끙끙 앓았다. 장군님의 추상같은 위엄을 생각해보아도 그렇고 자기와 함께 갇혔다가 영용하게 전사한 김형권선생님을 생각해도 그렇고 그런 일에까지 끼여들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왜놈들에게 감히 못하겠다는 말은 할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박차석의 비극이였다. 그는 만기전에 감옥문을 나올 때도 이러한 갈림길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어설픈 자기 변명으로 량심을 달래여 신념을 버렸던것이다. 그때 량심을 달래던 그 비슷한 자기 변명을 그는 다시 끄집어냈다.

장군님의 생가에 가면 이미 낯을 익힌 조모님과 숙부님, 숙모님이 계시는데 그분들에게 자기의 딱한 처지를 실토정하여 리해를 얻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렇게 되면 왜놈들한테서도 다시 고초를 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질수도 있을것 같았다.

어리석을대로 어리석어진 박차석은 죄악과 죽음의 나락에 더 깊이 뛰여들면서도 그것이 삶과 속죄의 길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새로운 배신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아, 만경대, 김장군이 그처럼 뜨겁게 사랑하며 자랑하던 만경대···)

얼핏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이마를 차창에 맞대인채 온몸을 떨며 눈을 감아버리였다.

고두막재마루에 이르러 차는 서고 그안에서 헌병대장과 박차석이가 기여나왔다. 그들은 담배를 한모금씩 빨면서 생가를 바라보았다.

대동강물과 순화강물이 합쳐지는곳에는 청솔빛의 장풍숲이 도련을 치듯 서있고 그안에 부평초들이 바닥에 깔리운 굴포만 한 오미가 배겨있었다. 그옆 멀지 않은곳에는 오미의 기름진 물을 흠뻑 먹으며 자란 세그루의 미루나무가 하늘중천에서 황금빛 소담한 잎을 와실렁거리며 곧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고두막재마루에서 보면 왼쪽으로는 해뜨는 만경봉이고 오른쪽이 룡악산인데 품안으로 달려드는것은 장엄한 대동강과 그뒤에 펼쳐진 넓은 벌이였다.

불청객들은 어실렁어실렁 검붉은 찰바위부리가 군데군데 솟아있는 금잔디밭을 밟으며 만경봉 산발아래로 내려섰다.

락락장송의 그늘에 기대이고 배나무, 복숭아나무로 뒤울을 돌려친 나지막한 노란 지붕의 초가집이 나타났다. 바로 이 집이였다.

불청객들은 오래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약속이나 한듯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겁게 드리운 정적조차도 그들에게는 위압이 된 모양이였다.

깨끗한 오래뜰 한구석에는 락엽과 곡식짚이 타는 향긋한 냄새와 함께 실연기를 사려올리는 모닥불이 있었다. 모닥불옆에는 분홍색 석새무명저고리에 새까만 몽당치마를 걸친 소녀애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디여 몽우리돌을 톡톡 맞쪼으면서 부동갑지로 깜팽이를 벼리고있었다.

키낮은 사립문안으로는 매흙으로 토방과 바람벽을 깨끗이 바른 사랑채가 들여다보이고 짐승이 없는 외양간에는 깨끗하게 손질한 갖가지 농쟁기들이 놓여있었다. 마푸리 몇마리가 한가롭게 모이를 찾아거니고 안마당으로 건너다보이는 맞은편에는 벼짚나래로 둘러친 다락채가 보인다.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울바자를 대신한 뒤뜰안에는 덮개방석우에 락엽이 얹혀있는 몇개의 장독과 바탱이가 놓여있었는데 그중에는 거푸짚투성이가 끼여있어 이 집의 궁색한 살림형편을 말해주고있었다.

박차석은 그 정경이 눈에 퍽 익은듯 말없이 깔끔히 살펴보았으며 깊은 감회에 잠기였다. 가난하고 근면한분들이 사는 평범한 집이여서 어디서나 볼수 있는것이기도 하였지만 늘 이 집을 그리며 상세하게 추억하시던 장군님의 말씀이 방불하게 상기되였던것이다. 초가집에 뿌려지는 밝은 빛과 감겨도는 깊은 정숙은 어디라없이 그에게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야, 아버지, 어머니 어데 갔는가?》

헌병대장이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이런 경우에 얼마나 치여났던지 끔쩍도 안했다. 소녀는 조금도 놀라거나 이상해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제치고 령롱하고 침착한 눈길로 헌병대장을 쳐다보았다.

박차석은 부지불식간에 긴장되여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말없이 오래뜰에 들어선 사람들을 살펴보고나서 미루나무밑을 지나 오미쪽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 기운찬 물방치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순화강기슭에 다달으자 물방치소리가 끊어졌다. 잠시후 드세찬 방치질소리가 다시 이어지고 소녀는 더펄더펄 순화강흐름을 거슬러 순화골을 지나 오곳재로 치달아올라갔다.

이윽해서 뒤울안쪽에서 인적기가 들려왔다. 흰수건에 흰옷차림의 모습이 복숭아나무뒤에서 나타났다. 뒤울밖에 난 오솔길로 리보익녀사께서 잠착히 걸어오시였다. 녀사께서는 울바자를 따라 오래뜰에 들어가 집을 등지고 사립문앞에 서시였다. 가볍게 내려앉은 눈시울밑으로 정기찬 눈동자가 반짝이고있었다. 내리뜰사한 녀사의 눈가에는 찌그러진 세상만물을 흘겨보고 비난하시는듯 한 특징적인 표정이 어느때보다 명료하게 나타났다. 녀사께서는 질책하듯 엄숙한 눈길로 오래뜰에 서있는 불청객들을 바라보실뿐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아, 조모님께서···》

박차석의 입에서 신음처럼 터져나온 소리였다. 박차석은 어깨죽지사이에 목을 움츠러뜨리며 황황히 중절모를 벗어들고 달려가 녀사앞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조모님, 그간 기체만강하셨습니까?》

그는 공손하게 큰절을 한채 오래도록 허리를 펴지 못했다. 녀사께서는 그의 언행이 너무나 경건하고 성실하여 눈을 번쩍 뜨시였다. 만약 모닥불뒤에서 뻔뻔스럽게 이쪽을 살펴보고 서있는 왜놈장교가 없었더라면 녀사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몸을 일으켜세워주시였을것이다.

《손은 뉘신지요?》

그의 얼굴을 살펴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려던 녀사께서는 깜짝 놀라시였다. 녀사께서는 받지 말아야 할 절을 받은듯 희여진 귀밑머리에 손을 대며 한걸음 물러서시였다.

(이게 누구인가?)

녀사께서는 박차석을 알아보시였다. 박차석이라는것을 아셨을 때 뒤이어 번개치듯 생각키우시는것이 바로 장손이였다. 손자때문에 알게 된것이고 손자때문에 기억하며 손자때문에 상기된것이다. 녀사께서 너무나 장손이 보고싶고 다시 볼것 같지 못해 무송에 가셨던 일이 있었다. 그때 왜놈을 내쫓고 나라를 찾은 다음에 모두 함께 고향에 돌아오겠다던 손자의 동무였다. 그래서 녀사께서는 왜놈을 내몰고 나라를 찾은 다음 돌아오면 모두 자신의 손자로 여기고 반갑게 맞아주겠다고 말씀하시였었다. 그후 녀사께서는 많은 손자의 동무들이 왜놈에게 죽거나 감옥에 갇히여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언짢아 손자가 당한 일 못지 않게 왼심을 쓰군 하시였다.

그런데 그 박차석이 어떻게 되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향수내까지 풍기면서 사립문앞에 나타났으며 그뒤에 찔러선 왜놈장교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있는지 알수 없으시였다.

녀사의 날카로운 눈길은 헌병대장놈한테서 떠나지 않았다.

《글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녀사께서는 속삭이시였다. 그이의 눈길에는 다시금 온 세상을 힐난하고 조소하는 기색이 어리였다.

《조모님, 옷을 바꿔입었다고 저를 몰라보신단말입니까? 예?》

박차석은 애타게 부르짖었다. 눈을 가볍게 내리뜨신 녀사께서는 간신히 알릴만큼 도리질을 하시였다.

《제 박차석이 아닙니까. 조모님께서 아드님들과 손자를 잊으시기전에야 어찌 저희들을 잊으실수 있단말입니까?》

박차석은 녀사께서 정말 자기를 몰라보시는줄 알고 코트단추를 끄르고 넥타이를 풀어헤치였다.

녀사께서는 전에는 그처럼 똑똑하게 보이던 이 젊은이가 그만 실성해버린게나 아닌가고 생각하시였다.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 녀사께로 다가서던 박차석은 녀사의 눈에서 비수보다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자 가슴에 창날을 받은듯 주춤했다. 그는 비로소 녀사께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사람취급을 안하신다는것을 알아차린것이다. 그는 어깨를 푹 떨구었다.

박차석이 찍소리 못하고 물러서는것을 본 헌병대장은 일이 랑패되는줄 알았던지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는 언제 한번 조선사람들앞에서 그래본적이 없는 겉웃음을 짓고 서툰 조선말로 사근사근 말했다.

《이제는 이 집의 아들 하나 남았다. 아들 하나 잡으러 온것이다. 할머니는 필요없다. 빨리빨리 아들 오라 해라. 헌병대에서 호출한다. 》

녀사께서는 눈섭 하나 까딱하시지 않고 서리발 이는 눈으로 헌병대장놈을 뚫어지게 쏘아보시였다.

박차석은 기를 펴지 못한채 말했다.

《조모님 세상만사가 여의치 않습니다. 그동안 파란곡절도 많았고 또 앞으로의 일도 순탄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지사동지들은 싸움터에서 총알에 맞아죽거나 감옥안의 옥귀가 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유독 백두산속에서 풍찬로숙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전날의 싸움을 계속하고있으니 그 승산은 막막하고 고초는 형용할수 없습니다. 한편 일본정부에서는 장군의 지략과 덕성 그리고 조선민족의 장군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흠모를 귀히 여겨 장군께서 산에서 내려와도 독립운동을 계속할수 있다는 특혜를 베풀었구만요. 독립운동은 상해나 하와이에서도 하는중이고 심지어 서울이나 도꾜 한복판에서도 하는것인데 유독 혼자서 산속에서 고생할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때 장군을 도와나섰던 우리가 끝까지 장군을 위해 량책을 주선하느라고 예까지 찾아왔습니다. 삼촌이 백두산에 가시여 장군을 설복하여 산에서 내려오게 하면 장군은 물론 조모님께서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왜장교 혼자 오면 무엄하게 굴수 있을것 같아서 제가 이렇게 같이 왔습니다. 이 세상이 어디 가고프면 가고 말고프면 마는 세상입니까. 현명하게 조처하도록 할머님께서 자제분을 잘 타이르시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장군의 숙부께서는 어디 가시지 않았겠지요?》

박차석은 상전이 시킨대로 주절댔다.

녀사께서는 그의 떠벌임을 들으시기보다 그의 눈을 보시였다.

(이 녀석이 실성하다 못해 제 죽을 소리를 하고있군!)

녀사께서는 박차석의 속이 빤드름히 드러나보이시였다. 머리칼은 기름을 발라 반들거리게 빗고 옷과 신발은 말쑥하였지만 박차석의 마음속은 벌써 썩었음을 넉넉히 가려보시였다.

녀사께서는 입을 옥다무신채 눈을 부릅뜨시고 박차석을 찬찬히 살펴보시였다.

그의 뒤집힐사한 시퍼런 입술은 조골조골 죄여들고 갈청이 돋았으며 왼쪽눈두덩에는 수수알같은 쌍따라치가 삐여져있었다. 그의 일거일동에는 내키지 않는 일을 마지 못해 하는 울분과 안타까움이 어려있었으며 지난날에 맺었던 뜻깊은 인연을 스스로 무참히 짓밟아야 하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그전에 품었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쓸개빠진 녀석이 분명했다.

박차석은 불안한 눈길로 왜놈을 곁눈질해보면서 씨벌여대는데 조모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기보다도 왜놈더러 그들이 시킨 말을 한다는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녀사께서는 놀라운 눈길로 변절자의 상판을 살펴보시였다.

(사람이 이처럼 말끔히 변할수 있단말인가?)

녀사께서는 도리질을 하시였다. 문득 무송에서 만났을 때 고향에 있는 늙은 어머니가 보고싶다고 하던 박차석의 말이 떠오르시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우는줄 알고있을 아들이 이처럼 왜놈의 개가 된것을 그의 늙은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절통해하겠는가. 녀사께서는 자신께서 그 심정을 겪는듯 분하고 억울하시였다. 부모자식간에 이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변절자는 녀사께서 자기의 말뜻을 알아차렸을가, 뭐라고 대답하실가 하는 불안이 담긴 눈길로 녀사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태웠다. 녀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고 여전히 대답 한마디 없었다. 그러나 가슴이 서늘하게 느껴지는것은 녀사의 눈에 어린 분격과 굳세인 반항심이였다.

박차석은 숫제 눈길을 떨구고 머밋머밋 뒤걸음을 쳤다.

그는 이 뜻깊은 초가집 밝은 마당안에서 사소한 불상사나 폭행이라도 터질가봐 두려웠다. 왜장교놈은 당장 일을 치고야말 험악한 기색이였다.

이러한 참사만은 눈뜨고 볼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기운을 버쩍 내여 할머님을 설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왜놈이 짜준 대본을 집어던지고 자기의 속심을 터뜨렸다.

《조모님, 우리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우리는 장군을 욕되게 하고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총칼을 쥐고 겉웃음을 치는자는 승냥이보다 모진 불한당입니다. 때리면 우는척 하랬다구 못견디는척하구 숙부께서 우리와 함께 만주땅에 가보십시다. 어차피 왜놈들은 강권을 발동해 제놈들의 계획대로 해보고야말터인즉 무지막지한 딴사람들과 동행하기보다는 저와 동행하시는편이 편리할것입니다.》

녀사의 억센 가슴이 떨리며 짧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일의 내막만이 아니라 쓸개빠진 녀석의 넋도 짐작할만 하시였다. 실은 박차석의 말이 옳기도 했다. 매가 꿩을 잡아주고싶어 잡아줄가. 박차석이 실토정을 하니 불쌍한 감도 없지 않으셨다. 박차석이 아니래도 왜놈들은 이 계획을 강행하려 할것이다.

헌병대장은 벌건 가죽칼집을 절컥거리며 고아댔다.

《김형록이 어디 갔는가, 빨리빨리 나오라!》

놈은 당장 사립문을 내지르고 안마당 처마밑으로 뛰여들 잡도리였다. 녀사께서는 왼팔을 드시여 사립문울짱에 얹으시며 헌병대장앞에 나서시였다.

《늙은이의 말을 듣소!》

박차석은 여차직하면 헌병대장의 팔목을 붙잡아 제지시키려는듯 뒤에 바투 다가갔다.

녀사께서는 얼굴을 약간 드시고 헌병대장놈을 똑바로 쏘아보시였다.

《아들은 못가오. 일하다가 팔을 다치였소. 며느리도 못가오. 이달이 해산달이요. 이 늙은이도 갈수 없소.》

초가집의 사립문을 지켜선 녀사의 기상은 도고하시였다. 사실 이자들은 벌써 주구들을 통해 하나 남은 이 집 아들이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며느리가 산달을 맞고 손자의 잔치가 있다는것까지 꿰들고있는 처지였다.

놈들은 한걸음 다가서며 다그쳤다.

《그럼 아무든지 끌고 가겠소!》

헌병대장놈은 당장 폭력을 행사할 기상이였다.

녀사께서는 저 짐승같은놈들이 순순히 물러설 형세가 아니라는것을 아시였다.

《아무도 못보내겠소!》

할머님께서는 엄엄한 기상으로 한걸음 놈들앞에 다가서시였다. 그러자 박차석은 겁에 질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좋지 않소. 정 이렇게 나오면 좋지 않소.》

헌병놈은 허세를 부리며 큰소리를 쳤다.

《인제는 무서운것 없소. 마음대로 하오. 아들, 며느리 다 빼앗아간 네놈들을 내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잊을수 없다. 천하에 나쁜놈들!》

추상같은 호령소리에 그놈은 목을 흠칫했다가 정 이러면 재미없다고 거듭 위협했다. 그러나 놈들은 종시 시원한 대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놈들이 돌아간 다음 할머님께서는 밤새 생각을 거듭하시였다. 이번에 떠나면 그리운 손자의 안부라도 알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시였다. 그리고 손자가 싸우고있는 백두산지구에 한번 다녀오시고싶은 생각도 없지 않으시였다.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적들은 계속 만경대에 나타나 위협했다.

사흘째되는 날에 할머님께서는 결심하신듯 말씀하시였다.

《내가 떠나겠소. 당신들이 가자고해서 떠나는게 아니요. 나도 생각이 있소. 그러나 당장은 떠날수 없소. 험한 길을 떠나면서 어떻게 마련없이 떠나겠소. 다음달말경에나 떠날수 있겠소.》

녀사께서는 오래뜰에 널린 마푸리새끼들을 불러 사립문앞에 몰아넣으시고 서성거리는 불한당들을 쏘아보시였다.

박차석이 타협안을 모색하듯 헐레벌떡이며 다가와 말했다.

《차라리 조모님께서 가시는편이 나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달까지는 미룰수 없을것 같아요. 극상해서 사날동안 말미를 줄것입니다. 그리 아시고 절기에 맞는 옷이나 간단히 차려입으십시오. 왜놈들이 지금 장군이 호되게 들이답새기는통에 하루를 천추처럼 여기고있는데 한달씩 미루어주겠습니까.》

이러는 사이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헌병대장이 녀사앞에 다가섰다. 그는 참으로 좋은 일이 있다는듯 방금 승용차안에서 꺼내들고 온 불룩한 가방을 헤치고 목침덩이만 한 돈묶음을 꺼내여 박차석에게 들려주고 눈짓을 했다.

《조모님, 가환도 있고 대사도 있다니 얼마나 궁색하시겠습니까. 이것으로 보태여 쓰십시오. 이것은 돈이고 이것은 약입니다.》

녀사께서는 눈을 번쩍 뜨시였다. 배신자가 소중히 떠받들고있는것을 찬찬히 바라보시니 돈묶음과 약봉지가 분명했다. 너무나 기가 막히신 녀사께서는 바른팔을 칼처럼 치그으면서 단호하게 꾸짖으시였다.

《우리는 까닭없이 남의 신세를 지지 않소. 자력으로 병도 고치고 잔치도 하겠소. 》

녀사께서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시고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사람을 때리거나 잡아가는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 뜻대로 할수 있을것이지만 남의 마음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못하는 법이요. 욕을 보지 않고 떳떳이 살자고 나라를 찾겠다는것이고 그 연고로 끌끌한 장정들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웠소. 이 늙은이한테서 그런 마음까지 다 사그러진줄 아오? 내앞에서 썩 사라지오!》

누구 하나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놈들은 물벼락 맞은 쥐새끼꼴이 되여 제놈들끼리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수걱수걱 절하고나서 고두막재로 달려가 승용차를 타고 평양성으로 뺑소니쳐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