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7


 

제 2 편

7

 

오끼는 불쑥 신정촌에 나타났다. 그가 려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다음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미야모도는 상전에게 인사할 경황도 없이 1등호실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는 방을 준비하는동안 오끼에게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릴것을 권해보았으나 오끼는 거침없이 복도를 지나 방금 열어놓은 1등호실에 들어섰다.

오끼의 반들거리던 낯은 윤기가 사라지고 수염이 꺼멓게 돋아났으며 어느때보나 정갈하고 주름 한갈래 없던 옷도 꾀죄죄했다. 그런데다 모든것을 시답잖게 바라보며 말없이 덤벼대는 행동을 보면 그가 매우 초조하고 피곤에 휩싸인것이 분명했다.

오끼는 세면장에서 더운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나서 얼굴에 비누거품을 바르고 고양이눈으로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해나갔다.

그사이 미야모도는 접대부들과 함께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한다, 책상에 걸레를 놓는다, 침대와 침구를 살펴본다 하며 바삐 돌아쳤다.

세수를 끝낸 오끼는 응접실에 나와 량편에 갈라져있는 문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한쪽방은 침상이 꾸려진 침실이고 다른 방은 서양식무리등이 낮게 드리운 식당이였다. 오끼는 그 방들이 비여있는것을 보고나서 응접탁을 마주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오끼가 앉자마자 호리호리한 접대부가 차잔 하나가 놓인 다반을 가져다놓았다. 그 녀자는 김이 몰몰 이는 차잔을 보며 어째선지 생긋 웃어보이고 오리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오끼는 발그스레한 차물을 보자 치미는 갈증을 이길수 없어 차잔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는 꽃배처럼 꾸려놓은 침상의 포근한 이부자리에 기여들어가 허리를 펴고싶었다.

《음, 차가 꽤 향기롭군. 》

오끼의 얼굴에는 피곤을 가셔내는 만족감과 안정감이 내비치였다. 그는 습관대로 차를 깡그리 마시지 않고 밑창에 깔릴만큼 남겼지만 곧 접시에 쏟아버렸다.

차를 마시고난 오끼는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영문을 알지 못해 눈이 퀭해진 미야모도에게 말했다.

《소문내서는 안돼. 복상은 지금 뭘하고있는가? 복상방이 어딘지 가봐야겠다. 》

오끼는 미야모도를 앞세우고 박차석이 들어있는 호실문앞에 다가섰다. 미야모도는 지금 그가 낮잠을 자고있다고 알려주었다.

방안이 조용한것을 본 오끼는 돌아서려다 말고 허리를 굽히며 열쇠구멍에 눈을 가져다대였다. 박차석은 침대우에서 자고있었는데 그가 덮고있는 호랑무늬담요는 아래로 흘러내려 겨우 한끝이 다리밑에 걸려있었다. 악을 쓰듯 팔을 뻗치고 다리를 꼬부린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오끼는 호실배치와 통로 등 려관의 내부를 깔끔하게 살펴보고나서 미야모도를 끌고 마당에 세워둔 승용차에 올라탔다.

《요새 복상이 어떤가?》

미야모도는 그가 무엇을 알고싶어하는지 알아맞추지 못한채 박차석에 대해 생각하고있던것을 말했다.

《뭐 새로 실토한것도 없구 찾아와서 걸려든것도 없습니다. 》

《기분이 어떤가말이야?》

오끼는 짜증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

《주면 먹고 안주면 굶는다는식입니다. 술을 마시면 지나간 시절이 그립다고 한탄도 하고 자기를 배반한 애인을 그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

오끼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아직도 제가 사람인가 하는 모양인가? 흥 추억도 있고 동경도 있는 인생이라? 그래 말은 잘 듣는가?》

《감히 거역하지는 못합니다. 속심은 모르겠으나 겁석겁석 합니다. 》

《눈앞에서야 겁석충신일테지. 혼자 내놓아도 우리가 시키는 일을 하고 우리가 시키는 말을 할수 있을가?》

미야모도는 손바닥을 박박 비비였다.

《그건 믿을수 없습니다. 마련만 있으면 어디론가 도망칠놈이지요. 그놈은 기와집에 과수원을 얻어가지겠다구 아글타글 애쓰고있는데 우리 일을 도울놈이 아닙니다···》

오끼는 그의 말을 중둥무이해버리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상책은 그놈이 우리에게 큰떡을 벌어줄 때까지 살려두고 써먹는것이다. 아직 과거에 대해 추억도 하고 동경도 품는다니 그게 불길한 징후야, 사실이 그렇다면 그놈은 필시 우리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을것이고 종당에는 딴 꿍꿍이를 할것이다. 하지만 대책이 있으니 잠간 기다려. 》

오끼는 미야모도를 승용차에서 떠밀어내보내고 차를 몰아 려관마당을 나섰다.

오끼는 최근에 조선에 나가있었는데 몇시간전에 이곳 지구헌병대장으로부터 짧은 전화를 받았다. 관동군사령부에서 전화로 오끼에게 긴급지시를 떨구었다고 하면서 빨리 와서 전달받으라는것이였다. 지구헌병대장은 그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했다.

오끼는 관동군사령부에서 걸어온 전화내용을 대체로 짐작할수 있었다. 필경 빨리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내라는 독촉일것이였다. 오끼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역증이 났다. 자기는 위험한 백두산주변과 유격대활동구역을 찾아다니면서 있는 힘을 다 하는데 우에서는 그냥 독촉이였다.

(독촉 안한다고 내가 할바를 모르겠는가?)

오끼는 상급의 긴급지시를 안받을수 없어서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온길이였다.

요즘 오끼는 초조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오끼는 여러차례에 걸쳐 제국에는 적색분자들의 시체보다는 순종하는 노예가 필요하며 설사 적색화된 일부 지역의 주민을 전부 죽인다 해도 그것때문에 인민혁명군이 없어지지는 않을것이라고 누구나 알아들을수 있게 말했다. 우에다나 도죠도 겉으로는 그의 말이 그럴상 하다고 생각하는듯 하였다.

그러나 사사끼의 맹목적인 《토벌》의 주장에 대해서도 결코 움을 지르지는 않았다. 결국 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이 맹렬해지자 사사끼의 주장에 기울어져 조선총독 미나미와 짜고 마침내 장백현을 비롯한 국경연안에서 무차별검거를 단행할 기미를 보이고있었다.

오끼는 제국의 희망, 제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서는 역시 자기의 주장대로 인민혁명군을 상대로 한 특수작전수행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드틸수 없었다. 우에다나 도죠가 그닥 신통해하지 않는 사사끼의 주장에 맞장구를 친것은 사세부득이하여 가만히 앉아있을수 없으니까 몸부림이라도 쳐보는데 지나지 않는것이지만 혹시 그속에서 뜻밖의 성과도 있을수 있는만큼 겉으로는 그 모의에 대해서 흔연한체하고 다녔다.

오끼는 여러번 다녀간바있는 지구헌병대로 차를 몰아갔다.

2층지붕이 묻히도록 높은 담장을 둘러친 지구헌병대 대문안에서는 지구헌병대장이 샤쯔바람으로 뛰여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지구헌병대장은 그와 같은 중좌견장을 단 사람이였으나 오끼는 그를 보자 짜증을 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누구한테서 전화가 왔다구? <토벌>사령관에게서 왔단말이요, 관동군사령관에게서 왔단말이요?》

그의 짜증에 헌병대장은 얼굴을 찌프리며 대답했다.

《전화는 관동군참모장각하가 걸어온것인데 명령은 관동군사령관각하가 내린것이랍니다. 》

《복잡하군. 내가 수집하라고 한 자료는 수집해보았소?》

오끼는 헌병대장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자기가 관심하고있는 일부터 물어보았다.

《예. 》

헌병대장은 사무실에 들어가 철궤문을 열고 뚜껑이 빳빳한 문서철을 가지고 와서 오끼에게 말했다.

《관동군사령관각하께서는···》

오끼는 문건철을 빼앗아들었다.

《내가 직접 보겠소. 》

오끼는 거드름을 피울 때와는 달리 정중한 자세로 앉아서 문건을 보았다. 발신자는 참모장이고 명령자는 사령관이였다.

명령내용은 그가 예기한것보다 더 엄중하였다.

장백, 무송, 림강, 몽강, 흥경, 반석, 집안, 휘남 등 넓은 지역에서 강력한 공격을 들이대던 조선인민혁명군 관하부대들이 며칠사이에 하나둘 자취를 감춰버렸는데 귀신이 곡할노릇이다. 인민혁명군이 장춘에 가려고 비밀행군을 하는지 모르겠고 혹은 위험한 대결을 피하기 위해 먼 북만땅으로 피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귀관은 최대의 정력을 경주하여 자취를 감춘 인민혁명군을 찾아낼것이며 숨어있다 해도 나타나지 않을수 없게 뚱그쳐낼 계획을 세울것이다. ··· 내용은 이러하였다.

오끼는 피곤한듯 눈을 감으며 얼굴을 찌프렸다. 넓은 지역에서 인민혁명군관하의 무수한 부대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는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도세밀하고 통일적인 의도에 의한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전군적인 새로운 행동에 진입했다는것을 의미한다.

아직까지는 인민혁명군사령부의 위치를 알수 없다 해도 인민혁명군부대들과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전투를 벌리였는데 이제는 인민혁명군부대조차 찾을길이 없게 된것이였다.

어디에 가서 무엇으로 그들을 뚱그쳐낸단말인가?

오끼는 사령부의 전화지시에 대해서는 크게 여기지 않는척 하였다. 그만큼 대범한 사람으로 처신하고싶었다.

《알았소. 》

그는 명령서를 돌려주고나서 자기가 전날 요구했던 자료집을 보자고 했다.

헌병대장은 정성스럽게 잘 만든 두꺼운 자료집을 내놓았다. 그는 먹지를 깔고 미농지에 골필로 쓴 문서장을 직업적인 눈으로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깊은 산속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민간인 심산출입자 명부》였다.

사냥군, 약초 캐는 사람, 종교관습에 의해서 산으로 드나드는 사람, 소금장사, 방물장사, 어물장사들의 이름과 남녀별, 나이들이 적혀있었다. 그외에 산림지기, 배달부, 민간의생들도 적잖게 산속에 드나들었다. 그 수자는 현에 배치된 순경이나 밀정보다 더 많았다. 그들에게 과업을 준다면 인민혁명군의 위치는 인츰 알아낼것 같았다. 그는 상사들에 말하여 올해 약초와 모피류의 수매값을 올리게 하여 산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열의를 부쩍 높이리라 마음먹었다. 이 계략은 사사끼 《토벌》사령관이 알면 공연한짓이라고 비난할수 있는 하잘것없는 일이였지만 오끼는 이런데라도 매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오끼는 피곤과 졸음을 이겨낼수 없었다.

향기롭고 따끈한 차와 꽃배처럼 차려놓은 침상이 생각났다. 그는 요사이 단하루도 편한 잠을 자보지 못했다. 어제는 장춘, 오늘은 혜산, 래일은 통화 하는 식으로 승용차안에서 한두시간씩 눈을 붙이고는 또 차를 몰았다.

창밖은 캄캄하였다. 창밖에 그려지는 그림자들은 돌연 무섬증을 일으켰다. 그는 백두산기슭에서 발을 펴고 잠들수 없는 몸이였다. 성벽밖에 나서면 어쩐지 불상사가 들이닥칠것 같았다.

현병대장의 사무실에서 서성거리고있던 오끼는 책상곁에 다가서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복도와 창문밖에 사람이 붙어있지 않는가 하는것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 몽강에 있는 헌병분견대를 찾았다.

목소리로 분견대장을 알아본 오끼는 낮고 가는 소리로 말했다.

《나 오끼다. 그 방안에 딴사람은 없는가? 복도나 창문곁에 사람이 붙어있지 않나 확인해보라. 》

오끼는 쉼없이 자기 방 주위를 살펴보며 개미목소리로 말했다.

《선우가 잘 있는가? 탈은 나지 않았겠지? 너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라. 인민혁명군이 몽강현에 들어섰다는 징조는 안보이는가? 무송, 림강현계에서만 맴돌이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신네 유명한 몽강패자수림으로 기여든게 아닌가? 그런 징후가 없다? 응 하여튼 조심하라, 선우에 대해선···》

오끼는 잠시 통화를 멈추고 재빨리 생각해보았다. 선우제는 독립군 관여자로서 한때 참의부 서리까지 지낸자이다.

그자는 독립군자금을 사취하고 무기를 밀매하여 재산을 만들어쥔 다음 옛날 동료들의 보복이 두려워 젊은 예수쟁이 과부를 꼬여가지고 제일 외진 산골인 몽강으로 도망쳐서 선우제라는 가명으로 남몰래 숨어 살고있었다.

이러한 내막을 알게 된 동변도치안숙정위원회 책임자는 선우제를 체포하여 심문하다가 밀정으로 삼아버리였다.

선우는 독립군관계자들과 독립운동후원자들의 명단을 그에게 바치였다. 그 명단에 의해서 수많은 독립군관계자를 잡아들일수 있은것은 더 말할나위도 없었다. 오끼는 자기 끄나불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자 막대한 돈과 여러가지 까다로운 청탁들을 다 들어주고 치안숙정위원회 책임자에게서 선우제를 사다가 자기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후 몇해동안 선우제에게서는 이렇다할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오끼는 외지고 깊은 산골인 몽강현에 자기의 한개 공작반을 파견할 대신 선우를 묻어두고 인내성있게 결과를 기다리고있었다.

오늘 우에다사령관의 명령을 받고보니 선우를 얼마쯤 로출시켜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독립군시절의 자기 이름도 아닌데 그 시절의 원명을 비쳐보이고 그로 하여금 커다란 반일조직을 무어보게 할것인가, 깊은 산에 드나드는 민간인들과 접촉하는 큰 물산상사를 벌리게 할것인가, 번듯한 교회당이나 학교를 지어주고 그 후견인으로 내세울가? 그렇게 하면 인민혁명군에서 정치공작원이 그를 찾아올수도 있지 않을가?

오끼는 다급한 나머지 자기의 심복인 헌병분견대장에게 이러한것을 지시하려고 전화를 시작했으나 막상 송수화기를 들고 몇마디 말을 나누고보니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부나비는 불빛을 보고 찾아들어와 결국 불에 타죽어버리지만 꿀벌은 빛이 없어도 꿀이 있는곳을 찾아와 꿀을 날라간다. 오끼는 꿀벌을 끌어들인 다음 그것을 따라가 꿀통을 찾아내자는 큰 욕심이였다.

선우를 내세워 유령의 조직을 찾게 하거나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학교, 교회당, 상사를 운영하게 하면서 불평불만을 말하게 하면 반일감정을 품고있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오끼의 사명은 반일감정을 품고있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는것이 아니라 인민혁명군 사령부와 직접 련계된 줄을 잡아쥐는것이다. 인민혁명군사령부와 통한 인물이 눈부신 불빛을 따라다니는 부나비처럼 처신하지는 않을것이다.

(큰 열매를 따려면 기다려야 한다!)

결심을 고쳐먹은 오끼는 분견대장에게 《민간인 심산출입자》 장악정형을 몇마디 알아보고나서 선우를 절대로 로출시키지 말고 더욱더 깊이 묻어둘데 대하여 엄격히 지시한 다음 통화를 끊었다.

오끼는 려관으로 가려던 계획을 철수하고 헌병대 수직실에서 새벽을 보내기로 했다.

서둘러 꾸린 잠자리는 불편했다. 그는 베개밑에 팔을 밀어넣고 그우에 머리를 기댔다. 불을 끈 다음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마음은 부산하였다.

(인민혁명군이 다 어디로 갔을가. 이것을 알아내자면 어디에 모를 박아야 하는가? 숨어있지 못하게 뚱그쳐내라고? 역시 내가 개척한 길을 달릴수밖에 없지 않는가?)

다시금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에 벌어진 새라새로운 현실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오끼는 커다란 관심을 품고 장춘으로 몰려든 큰 통로들을 직접 답사해보았다. 항일련군이 사면팔방에서 장춘을 향하여 행군을 시작한것은 명백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지대를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정보는 정확치 못했다. 그의 관심은 백두산지구였다. 현지를 싸돌아다니며 장춘작전의 동향을 탐지하던 오끼는 급급히 차를 몰아 백두산서남부일대로 달려왔으며 갑산경찰서를 비롯해서 사람들을 체포하여 차판으로 실어들인 경찰서들을 둘러보았다.

망탕 끌어들이는 사람들속에 혹여 유격대지하공작원이라도 걸려들지 않았을가 하여 명단을 훑어보고 만나서 관상도 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조선땅을 밟아보고 돌아온 오끼의 눈앞에는 체포된 수백수천의 조선사람들이 불타는 눈길로 절규하던 모습이 무섭게 떠올랐다.

《괘궁정, 세검정, 통군정, 연무정···》

오끼는 조선국경에서 본바 있는 고색창연한 정각들의 뜻깊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활을 걸어놓는 집, 칼을 가는 집, 군사를 지휘하는 집, 무예를 닦는 집···》

과거도 현재도 외래침략자들과는 타협할줄 모르는 이 민족을 하루빨리 영원히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를 써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민혁명군사령부에 접근할수 있는가?)

오끼는 정신이 또릿또릿해졌다. 그는 밤새도록 백두산의 깊은 숲을 뚫고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를 찾아들어가는 길을 어떻게 개척할것인가 하는것을 연구했다.

그는 마침내 단순하고도 명백한 진리를 발견하였다. 인민혁명군이 환영할수 없는 자기 같은 사람은 인민혁명군사령부를 찾기 힘들지만 인민혁명군에게 귀중한 사람은 인민혁명군이 스스로 맞아갈수도 있는것이다.

오끼는 자기의 새로운 발견에 스스로 흥분했다. 그의 생각은 점점 깊어졌다. 인민혁명군에서 무조건 맞아갈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여 그의 꽁무니에 《실꾸리》를 채워서 백두산주변을 맴돌이치게 하면 꼭 자기의 목적이 이룩될것 같았다. 오끼는 자기의 책략이 그럴듯 하다고 스스로 감탄하면서 《실꾸리》를 채울 사람으로 누가 제일 적합한가 하는것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인민혁명군사령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인물이거나 도리상 외면할수 없는 친척친지면 될것 같았다.

오끼는 이 일에 박차석을 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끼는 그 준비단계로 박차석에게 남아있을듯싶은 과거에 대한 미련과 있다면 있을수 있는 민족정신을 깡그리 뭉개버릴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오끼는 이른새벽에 미야모도를 불러앉히고 그 방법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주었다.

《박차석의 코를 왜 든든히 끌어매야 하는가 하면말이다···》

오끼는 밝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고나서 말을 계속했다.

《정세는 시시각각 우리 편에 불리해지고있어, 이제 우리는 큰 일판을 벌려야 하는데··· 제국의 운명과 관련되는 일이지··· 박차석은 하찮은 미끼지만 우리는 이 미끼로 룡을 낚아야 해. 》

그날저녁 미야모도는 제가 거느리고 다니는 특무들을 앞세우고 박차석의 방으로 몰려갔다. 박차석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골을 싸쥐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복상, 무슨 생각을 하시우?》

오끼와 미야모도가 짠 각본에 따라 특무들이 박차석을 골탕먹이는 놀음이 서서히 시작되였다.

《아니 뭐 별로···》

박차석은 부시시 일어나며 무표정한 눈길로 예고없이 들어서는 미야모도와 특무들을 살펴보았다.

《갑갑한데 술이나 한잔 먹지, 생각없소?》

특무중의 하나가 이렇게 말하자 미야모도와 다른 특무들은 의자를 끌어다 원탁주변에 놓고 주런이 앉았다.

《방금 저녁밥을 먹었는데 술은 갑자기···》

박차석은 떠듬거리며 흥심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후 원탁옆을 비집고 들어앉았다.

누구인가가 술을 따랐다. 반병가량 남았던 술이 다 찌워지자 접대원을 불러 배갈을 서너병 안아오게 했다. 닦아서 소금을 바른 락화생알과 꼬치에 꿴 닭의 내장들이 들어와 갑자기 큰 술판이 벌어졌다.

《먹어, 먹어, 단숨에 마셔!》

특무들이 번갈아가며 박차석에게 술을 권했다. 시퍼런 빛이 배인 배갈이 반병이나 드는 차잔을 넘치게 부어 섬겨댔다.

《복상, 주량이 줄었나?》

박차석의 얼굴에는 차차 우울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말없이 주는대로 받아마시였다.

《거보라구, 복상은 산에 남아있었다면 꼭 대장이 됐을걸세. 딴사람이야 어디 술을 이렇게 먹나?》

그들은 박차석이 푹 취해서 맥을 추지 못하게 될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도발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복상, 아까 무슨 생각을 하댔소?》

박차석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딴놈이 께끼였다.

《음, 전날 옛친구를 만났다고 하더니 그 생각인가? 탄실이가 보고픈가?》

딴놈이 그의 말을 받으며 박차석의 잔등을 툭툭 두드렸다.

《복상이 어째서? 의젓하기만 한데. 나기는 또 얼마나 잘났다구. 호걸풍이구 임금골격인데. 》

박차석은 그 소리들이 듣기싫어 눈알을 번쩍이며 쏘아보았다. 그는 주먹으로 원탁판을 치려다가 꿀꺽 참으며 또 한잔의 배갈을 단숨에 들이켰다. 모두들 그의 잔등을 두드려주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미야모도는 말 한마디 없이 락화생알을 씹으며 박차석의 표정만 살펴보고있었다.

《그런 말을 비친적이 없소. 》

박차석은 드디여 그들의 입씨름에 감겨들기 시작했다.

《그럴게요. 이제 내가 계집을 하나 실어다가 철써덕 안겨줄가? 십원짜리쯤하면 괜찮아.》

박차석은 징글스러운 눈길을 피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버렸다. 왼쪽에 앉아있던자가 바른쪽녀석을 쏘아보며 고아댔다.

《여보, 복상은 리도령이요, 고향에서 춘향이같은 탄실이가 기다리고있는데 리도령이 헌것들을 끼고 놀가?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 복상은 이래뵈도 수절장부요.》

바른쪽녀석이 음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히히히 10원짜리면 어떻고 1원짜리면 어떤가.》

박차석은 참고참다가 벌떡 일어서며 원탁을 내리쳤다.

《야 이것들아! 내가 이꼴이니까 개돼지로 보이느냐?》

박차석이 분수를 차릴수 없을만큼 성난것을 본 특무들은 매우 유감인듯 모두 일어나서 사죄의 뜻을 표시했다.

《복상은 개돼지가 아니라 사람이요, 누가 복상더러 개돼지라고 말했소?》

어떤자는 쏟아진 술을 걸레질하며

《그러나 너무 떡떡거리지 마오. 뭐 투옥되기전에 사귄 처녀하구 다시만나 살아보겠다구? 흥, 개떡같은 소리를 하고있군. 》

하고 약을 올렸다.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다. 네놈들은 도대체 어떤 짐승들인지 아는가?》

박차석은 고래고래 고함쳤다.

《복상, 이러지 마슈, 성은 왜 내시유? 싫으면 말게지, 꼬박꼬박 먹이고 입혀주었는데 그게 무슨 망발이요?》

간사한놈들이 박차석을 말리는척하며 화를 더욱 돋구어주었다. 다른 한놈은 더 도전적으로 나섰다.

《야, 이 개보다도 못한자야. 벌써부터 죽여치웠을걸 살려두니까 감히 눈을 부라리고 주둥이질을 해? 한번 죽어볼래?》

박차석은 자기의 처지와 뒤일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방구석에 비자루가 서있는것을 보자 그것을 쥐고 험한 욕질을 한 왜놈특무를 조겨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취한 그는 힘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비자루는 매번 빗나가며 자기 몸만 휘저어놓았다.

《아하, 복상 이러면 안되겠는데, 앉아서 술이나 계속 먹자!》

미야모도가 사나운 소리로 웨쳤다.

그러나 박차석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닥치는대로 손에 집어들고 그놈들을 내리조겼다.

《안되겠다. 그놈 버릇 바로 가르쳐라. 》

미야모도가 명령하자 특무들은 달려들어 박차석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네따위가 개보다 나은게 뭐냐? 네가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내 당장에 사지를 찢어 까마귀무리들에게 던질테다. 밥먹이고 술먹이고 차 태워주는게 어째서?··· 네놈은 생각하는것도 말하는것도 우리가 시키는대로 해야 숨을 부지할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죽여버릴테다. 》

특무 한녀석이 발로 박차석의 배를 차며 벽모서리에 밀어박았다. 그러자 놈들은 바자치듯 박차석을 둘러싸고 저마끔 발길질을 하였다.

《무릎을 꿇고 빌겠나, 죽어버리겠나? 말해, 살고싶으면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맹세해. 죽겠나? 살겠나?》

술이 거나해진 특무들은 차례를 다투어가며 절구공이처럼 박차석의 꼬부린 몸을 짓밟았다. 구석에 몰리운 박차석은 팔다리조차 버둥거리지 못했다. 그는 마구 뭉그려놓은 한무지의 누데기처럼 되여버렸다.

특무들은 박차석의 뼈를 부스러뜨리거나 가죽을 터치지는 않았다.

박차석은 간신히 눈을 뜨고 자기를 둘러싼 패당을 둘러보았다. 의아해하는 눈길은 마치도 그 누구를 찾아보는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가? 나를 오해하고있는가? 나를 어떻게 하자고 이럴가?)

그의 눈길은 이렇게 묻고있었다. 잠시전까지도 다정하게 술을 나누던자들이 무슨 까닭으로 자기 몸을 짓이기듯하는지 알수 없었다. 빛을 잃은 그의 눈은 마침내는 감기여지고말았다. 그러자 깊숙한 눈확속에 지적지적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신은 아직 멀쩡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앉아서 그 모든것을 지켜보고있던 미야모도는 마침내 빙긋 웃고나서 부어놓았던 술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