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3


 

제 2 편

3

 

정두철은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난데없이 온몸에 피로가 휩쓸었다. 그는 마차에 올라서자마자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였다.

말발통에서는 딱총처럼 옹골차고 되알진 소리가 고르롭게 울렸다.

소란하고 냄새 고약한 좁은 신작로를 지나 가을이 무르익은 들판에 나서자 향긋한 대기가 페부에 스며들고 찌거덕거리는 바퀴소리가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정두철은 깨끗하고 향기로운 대기에 깨여난듯 눈을 뜨고 가까와오는 골안을 바라보았다.

락조를 받은 오붓한 샘골마을이 정답게 안겨왔다. 노르스름한 지붕과 구새통에서 솟는 흰 연기까지도 다정했다. 두철은 먼곳에 갔다가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사람처럼 반가운 마음이 치밀었다. 동구의 첫집부터 방아간이 있는 막장끝의 마지막 집들까지 눈앞에 사물사물 떠오른다. 나무가지를 찍어다 엮은 울바자며 구새통굴뚝이며 마당마다에 무득무득 쌓여있는 장작더미들을 보아도 미더운 마을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다.

이 마을에 온지는 한해밖에 안되였으나 고향 못지 않게 정이 들었다.

정두철은 동구밖 멀리에서 마차를 내린 다음 슬렁슬렁 걷기 시작하였다.

달구지길섶에는 신선한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흩어져 선명한 색조를 띤 꽃송이를 살래살래 흔들며 가벼운 향기를 흩날린다.

밭머리의 노란 금잔디둔덕에는 들국화가 흐느적이고 가을을 끝낸 빈밭가운데는 아직도 여름철처럼 푸르른 칡넝쿨과 메넝쿨이 뒤덮인 돌각담들이 널려있었다.

그 모든것들은 박차석의 출현으로 하여 울분에 떠는 정두철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정두철은 옛일을 더듬듯 먼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가을하늘은 10여년전 박차석을 사귀던 그날처럼 티없이 맑고 깨끗하였다.

박차석은 전날과 다름없는 사랑을 품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탄실이를 찾아갔으나 몇번이나 차입품을 이고 감옥까지 찾아왔던 탄실이는 만나주지도 않고 쫓아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탄실은 박차석의 신변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을것이였다.

박차석은 어째서 과거의 귀중하고 보람찬 모든것을 버리고 그런 치욕의 나락에 떨어지게 되였는가?

(초목은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만 인간의 혁명적각오는 오랜 시련을 통해서만 꽃필수 있다. 사람으로 태여나 한평생 그러한 꽃을 피워보지 못한채 죽어버린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하랴. 박차석은 피와 땀을 바쳐 모처럼 지켜오던 꽃망울을 자기의 손으로 꺾어버린것이다!)

그는 인간이 그렇게도 변해버릴수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을이 가까와지자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였다. 그는 징검다리가 있는곳을 향해 개울가로 다가갔다.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개울가에는 세그루의 이깔나무가 가지런히 서있었다. 다정한 자매처럼 서있는 이깔나무밑은 마을사람들이 밭일을 하다가는 모여서 쉬는 널직한 최뚝이 도도록하니 솟아있었다.

무심코 이깔나무곁으로 다가가던 정두철은 최뚝이 눈에 뜨이자 걸음을 멈추었다.

깜장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입은 처녀가 데글데글한 감자가 그뜩 담긴 함지를 끼고 징검다리목을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하얀 버선우에 짚신을 신고 치마겉으로 잘룩하게 중둥매끼를 돌려맨 그의 적삼어깨에 검고 실한 머리태가 드리워있었다.

(복례가 돌아왔구나. 첫 통신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온 모양이지!)

울적하던 정두철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기쁨과 자랑이 솟구쳤다.

복례는 나이에 비해서 몸이 숙성한 편이였다. 그러나 말쑥한 얼굴과 순진하고 억실억실한 두눈은 한창 꽃피는 나이에 어울리게 애되여보였다. 그대신 복례는 남다른 불행과 고생을 겪어서 그런지 머리가 총명하고 의지가 강했다. 일찌기 아버지를 잃은데다 지하사업을 하던 손우의 오빠마저 놈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되고보니 그의 집에는 늙은 어머니와 오랍동생 복남이가 있을뿐이였다.

복례는 워낙 집형편이 너무 어려워 야학에도 못나오겠다고 하던 처년데 일단 야학에 다니기 시작하자 누구보다도 이악하였다.

후날 알고보니 복례를 야학에 떠밀어준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복례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과 아들이 못다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선 복례에게 글을 깨우쳐주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뒤받침과 마을사람들의 영향밑에 복례는 차차 혁명에 눈을 떴으며 지난 초가을에는 조국광복회원으로 되였다. 조직에서는 복례를 정두철의 방조자로 선정해주었다.

정두철은 자기에게 똑똑한 방조자가 생긴것이 기쁜 한편 복례의 부모와 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순진한 그를 참된 혁명전사로 키워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였다. 한편 복례는 정두철의 말이라면 그 어느 하나도 귀흘려 듣지 않았다. 복례는 마치도 정두철의 지하공작을 방조하기 위하여 태여난것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임무를 정두철이 바라는대로 능숙하게 해제꼈다.

이번에 정두철이 딴 사람을 보낼수도 있는 일이였으나 복례를 처음으로 중요한 통신련락에 내보낸것은 그를 실지투쟁속에서 단련시키려는 생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무명수건으로 흰 이마를 가리운 복례는 아직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듯 정두철이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정두철은 그의 침착하고 여유있는 행동이 그지없이 미덥게 생각되면서도 사령부소식을 듣고싶은 심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약속된 지점에서 그를 만나야 한다.

흥분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누르고 이른저녁을 치른 정두철은 조복례와 만나기로 된 수리바위굴을 찾아갔다.

안개낀 수리바위굴턱에서 흰 목테를 쓴 복례가 나타났다.

《선생님!》

《수고했소! 딴 사람들의 눈에 띄우지 않았소?》

복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흰 목테를 벗어들고 정두철이곁에 슬그머니 다가서며 말했다.

《돌아오셨대요. 곧 참나무골로 오시라고 해요. 우리 마을에 오실 형편이 못된다면서요. 》

복례는 긴장에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였다. 여기는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일없는 안전한곳이였지만 역시 첫 비밀통신을 가져왔다는 흥분때문에 목소리가 절로 낮아지는 모양이였다.

정두철은 간신히 들리는 그의 말을 가려듣는 순간 환희가 치밀었다.

(권영벽동지가 사령관동지를 만나뵈웠을가? 제기된 문제들은 어떻게 되였을가!)

그러자 그는 또다시 한가닥 새로운 불안이 가슴을 조이였다.

박차석이 지껄이던 마지막 수작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것이다. 머지않아 이 지방에서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질테니 살고싶으면 떠나라던 수작이 아무래도 놈들의 《집단부락》포고령과 관련된 소리같았다.

얼마전 장백일대에 《집단부락》포고령이 내리면서 샘골과 주변의 산재부락들에도 기한까지 정해놓고 불응하면 강제집행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강제집행이라는 말이 무슨 소린가 하는것은 벌써 장백땅곳곳에서 실물로 보여준대로 불과 피로 쓸어버리겠다는 수작이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 무서운 탄압선풍에 어떻게 대응할지 막막하였다. 맞서면 혁명조직들은 말할것 없고 무고한 인민들까지 피를 흘리게 된다. 그렇다고 순순히 《집단부락》으로 들어갈수도 없었다. 가을을 앞둔 농사를 핑게삼아 놈들과 교섭하여 한해겨울 지연전술을 써볼것인가, 아니면 버티는데까지 버티다가 막다르면 청장년조직원들이라도 뽑아내여 부대에 보낼것인가. 론의가 분분하였으나 신통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채 권영벽이 사령부로 떠났었다.

포고령에 찍힌 기한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박차석의 수작은 분명《집단부락》포고령 강제집행까지도 포함한 놈들의 그 어떤 탄압소동을 념두에 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촌장을 내세워 가을도 그렇고 겨울이 코앞에 닥쳤는데 집도 지울수 없으니 한해겨울 말미를 달라고 당국과 교섭하도록 림시조치를 취해놨으나 믿을만 한것은 못된다.

정두철은 권영벽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리다가 박차석의 소문도 있고 하여 부랴부랴 복례를 련락소에 보냈던것이다.

그런데 일은 잘된것 같았다. 조복례가 어려운 통신임무를 사고없이 수행하고 돌아왔으며 권영벽이도 만나보았다지 않는가!

이제 곧 권영벽을 만나 사령관동지의 가르치심을 전달받게 되면 그간의 안타깝던 일들이 곧 풀릴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으기 흥분되였다.

복례는 정두철의 흥분된 모습을 살펴보다가 말을 이었다.

《통신문에 쓴 내용은 만나서 토론하자고 해요. 》

먼길을 다녀온 복례가 정두철에게 전하기로 된 말은 이 두마디였다.

《알겠소. 수고 많았소!》

《이제 밤길을 걷자면···》

복례는 하나둘 솟아오르기 시작한 별들이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며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일없소! 난 복례동무가 무사히 다녀온것이 정말 기쁘오!》

정두철은 웃는 눈길로 복례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저는 선생님이 근심할것 같아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마을에 돌아오니 저도 막 기뻤어요. 》

복례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웃었다.

거물거물한 숲속에서는 이따금씩 놀란 날새들이 푸드득거리였다. 그때마다 복례는 걸음을 멈추고 량옆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삐죽삐죽 솟아있는 오솔길은 걸핏하면 발길에 채이였다. 복례의 몸에는 전날같은 무섬증이 보이지 않았다.

정두철은 앞서 걸으며 발길에 채이는 나무막대도 들어내고 앞을 막는 나무가지도 밀어주었다. 그것을 눈치챈 복례는 자기가 한걸음 앞서 걸으며 정두철에게 길을 틔워주려고 애썼다. 정두철은 이 순간 복례에게 자기의 뜨거운 심정을 말해주고싶었으나 엉뚱하게 딴소리를 하게 되였다.

《복례동무, 저 하늘을 보라구!》

복례는 웃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사람은 잠시 묵묵히 걸으며 령롱한 별이 휘뿌려진 티없이 맑은 창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제밤 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복례동무가 무사히 갔을가? 그리고 무사히 돌아올가 하고 생각했소. 》

복례는 피끗 정두철을 스쳐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런줄 알았어요. 》

복례는 얼굴을 약간 들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가늠할수 없는 기쁨이 어려있었다.

얼마후 두사람은 시내가에 나섰다.

정두철은 복례에게 길잡이를 해주려고 앞장서서 징검다리를 찾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한쪽발을 내디디였다. 조심스러운 그의 동작은 굼떴다.

갑자기 철벅철벅 하는 물차는 소리가 들렸다. 정두철은 저으기 놀라며 허리를 폈다.

《저의 손을 잡으세요!》

한걸음 앞질러 물속에 들어선 복례가 주저없이 팔을 내밀었다.

《허참, 복례의 발을 적시지 않으려고 내가 징검다리를 찾았는데!》

《발이 좀 젖으면 일있어요. 집이 고대인데요. 전 일없어요. 이제 밤새껏 밤길을 걸어야 할 선생님이···》

복례는 태연히 그의 몸을 부축하였다.

징검다리우에 올라선 정두철은 어쩔바를 몰랐다. 복례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리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것을 느낀 그는 당황해났다.

《왜 섰어요? 다음 돌이 보이지 않아요? 마음놓고 디디세요. 제가 부축하는대루 내디디면 실수없어요. 자요!》

복례의 목소리는 잔잔하면서도 다심하게 울렸다.

산골물은 속삭이며 어리광질치며 쉼없이 흘렀다.

징검다리를 건넌 정두철은 복례에게 집으로 가라고 이르고 참나무골로 향했다.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손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복례는 오래도록 내가에 서서 그를 바래였다.

정두철이 참나무골에 들어섰을 때는 새벽이였다. 이름그대로 참나무가 무성한 깊은 골짜기였다. 노랗게 단풍든 참나무숲도 바닥에 깔린 락엽무지와 그우에 떨어진 도토리알도 밤새껏 내린 무서리에 함빡 젖었다. 골짜기우에는 명주필을 펼친듯 새벽안개가 서리였다. 안개와 함께 마가을의 쌀쌀한 기운이 골짜기에 흘렀다.

정두철은 초조한 마음으로 권영벽의 도착을 기다렸다. 권영벽이 사령부로 떠난지는 며칠되지 않지만 정두철에게는 1년같이 길어보이였으며 그가 없는 기간에는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불안하여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두철은 권영벽이 없이는 지금과 같이 혁명사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갈것 같지 못한 위구심까지 느끼게 되였다. 그는 권영벽이와 같이 로련하고 견결하고 믿음직한 일군을 여기 장백현에 파견해주신 장군님께 마음속으로 심심히 감사를 드리고있었다.

사실상 여기 장백현은 전까지만 해도 국경과 접한 주요지구이기는 하였지만 지하조직이 많지 못한데다가 그 활동도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던것이 백두산근거지가 창설되고 권영벽이 도착하자 삽시간에 지하조직들이 확대되고 조국광복회조직망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으며 장백현의 넓은 지역이 하나의 불도가니마냥 끓어번지였다. 권영벽은 용의주도하게 장백현지하조직들을 한손에 틀어쥐고 장군님의 뜻대로 움직여나갔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앞에서 원쑤들은 당황하였다. 놈들은 유능한 지하일군이 여기 장백땅에 숨어서 지하사업을 지도하고있다는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였으나 충천하는 혁명기세앞에서 넋을 잃고 갈팡질팡할뿐이였다. 그럴수록 권영벽은 장백현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 등 넓은 지역을 무시로 뛰여다니면서 불철주야 일하였다. 일제놈들의 감시와 추격을 피하여 때로는 때식을 번져가며 이슬젖은 풀숲에 몸을 감추기도 하고 감자 한알로 끼니를 에우며 지친 다리로 새벽길을 걷기도 하는것을 정두철은 한두번만 목격한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도 권영벽의 숨은 노력과 수고를 다 알고있지는 못하였다.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뒤를 따랐으나 권영벽은 추호의 주저와 동요도 없이 일을 밀고나아갔다. 지금 권영벽에게로 가는 이 순간에도 정두철은 이 드넓은 장백현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일대에 그가 뿌려놓은 혁명의 씨앗들이 움트고 자라서 숲처럼 설레이는것을 보고있었다.

올 때마다 두드리군 하는 아름드리 늙은 참나무밑둥을 몇번 두드리자마자 응답신호가 울려오더니 이내 안개자욱한 저편 숲속에서 발자국소리가 났다.

《선전과장동지!》

안개를 감고 나타나는 후리후리한 모습을 보자 정두철은 이렇게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권영벽이 사령부선전과장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사귄 정두철은 그렇게 부르는데 습관이 되였던것이다.

《두철동무!》

권영벽이도 걸음을 빨리하였다.

두사람은 반갑게 손을 마주잡았다. 위험이 걸음마다 따르는 지하공작원들사이의 상봉은 하루를 건니여도 반가운 법이다.

《밤새 걸은 모양이구만. 》

권영벽은 정두철의 이슬에 화락하니 젖은 저고리자락이며 바지가랭이와 신발을 훑어보았다. 두철은 류달리 큰 머리와 널직한 이마, 기름한 얼굴 그리고 침착하고도 총명한 빛을 띤 권영벽의 눈을 쳐다보았다. 어질고 순박하면서도 박식하고 의지력있고 침착한 사람됨이 어쩐지 그 얼굴모습에 엿보이는듯싶었다.

《예, 좀 서둘렀습니다. 한데 언제 돌아왔습니까?》

《그저께 돌아왔소. 》

《늦어졌군요. 》

정두철은 권영벽의 얼굴을 궁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권영벽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일이 좀 있어서···》

《사령관동지께서는 무고하십니까?》

《무고하시오. 몹시 분망하게 지내시긴 하지만···》

그리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계속하였다.

《올라가기요. 몸을 녹이며 천천히 이야기하기요. 》

권영벽은 손목을 잡아끌었다. 조금 올라가니 깊지 않은 바위굴이 나졌다. 굴안은 훈훈하였다. 불무지를 크게 무져놓고 양철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마시오. 》

권영벽은 자그마한 오지종발에 더운물을 따라주고나서 부지깽이로 불무지를 헤쳤다. 이글이글 잉걸불이 살아오르는것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정두철은 더운물을 둬모금 마시고나니 배속이 훈훈해졌다. 불무지가장자리를 깊이 뚜지는 권영벽의 부지깽이끝에서 시커먼 주먹만 한 덩어리가 떼그르 굴러나왔다. 감자알이였다. 그는 감자알 한개를 옆에 있는 가랑잎으로 싸쥐더니 껍질을 벗기였다.

《시장하지?》

권영벽은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 감자를 내밀었다. 아닌게아니라 밤새 길을 걸은뒤라 허기가 졌다. 감자를 구으며 밤새 기다려준 다심한 정이 몸에 안겨왔으나 권영벽의 성미를 잘 아는 정두철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동안 샘골에선 별일 없었소?》

정두철이 감자 한알을 다 먹자 한개 더 집어주며 권영벽이 이렇게 물었다.

《뭐 아직 별일은 없지만 <집단부락>포고령이 아무래도 징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제 박차석이를 만났는데···》

《박차석이를 만나다니?》

권영벽이 정색하며 따져물었다.

《동무가 그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단말이요?》

《그녀석이 며칠전에 미야모도란 중위놈하고 신정촌에 나타났습니다. 》

정두철은 이렇게 전제하고나서 박차석이 신정촌에 나타나서 자기를 찾은 일, 박차석이와 중학교시절에 알게 된 경위 그리고 그와 만나본 사연을 자초지종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흠, 더러운놈같으니, 의리도 없지. 아무렴 왜놈의 사냥개가 되다니··· 그래 그놈이 무슨 수작을 했게 심상치 않다는거요?》

이렇게 물은 권영벽의 눈은 얼마간 열기를 띠였다. 배신자의 출현이 그의 결곡한 성미를 자극한것 같았다.

《자기모순에 빠져서 이소리저소리 넉두리하는데 들을만 한 소리는 없었지만 나더러 봉변을 당하지 않겠거든 곧 장백현을 떠나라고 권고하는 한가지 소리만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집단부락>포고령과 관련된 왜놈들의 무슨 흉계를 암시하는것 같습니다. 》

권영벽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두철동무···》 하고 정색하여 마주앉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집단부락>포고령은 백두산지구 우리 혁명조직들과 인민들에 대한 포악한 탄압소동을 예고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명확한 대응책을 가르쳐주시였소. 무모한 배격과 항거로써 놈들에게 피와 불의 탄압구실을 던져줄게 아니라 조직을 튼튼히 꾸려서 <집단부락>에 들여보내 그자체를 우리것으로 틀어쥐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소. 대담하게 조직원들을 안의 경찰, 자위단, 촌장자리, 구장자리 등 적기관에 박아넣음으로써 <집단부락>을 타고앉으라고 하시였소. 》

《<집단부락>을 타고앉는단말입니까!》

정두철은 눈빛을 세차게 번쩍거리며 다가앉았다.

《그렇소. 백두산기슭에 꾸려놓은 근거지가 아주 귀중한것이라고 하시면서 절대로 이것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소. 두철동무, 우리는 더욱 분발하여 자기 일을 실속있고 책임적으로 다그쳐야 하겠소. 》

권영벽은 정두철에게 웃몸을 숙이고 사근사근하고도 정력적으로 말했다.

《장군님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하여 치밀한 조직사업을 벌려야 하겠소. 우리는 핵심들을 더 많이 키워내고 그속에서 대상자들을 빨리 장악하여 당조직에 받아들여야 하겠소. 당원들이 어떤 역경에 처해도 혁명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도록 실속있게 교양하여야 하오. 적통치구역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혁명적신념을 잃지 않고 굳세게 인민들을 투쟁에 조직동원할수 있도록 그들을 교양합시다.

그리고 유사시 적통치구역에 내려보낼 사람, 적기관에 밀어넣을 사람,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 사람, 유격대에 입대시킬 사람들을 하나하나 갈라놓고 지시에 따라 즉시 움직일수 있도록 준비해두시오. 이 자리에서 우선 대상자들을 하나하나 갈라놓읍시다. 그리고 두철동무는 유사시 철길부설공사장의 로동계급속으로 옮겨앉을수 있도록 미리 조직사업을 해놓아야 하겠소. 》

《저도 옮겨야 합니까?》

권영벽의 이야기에 골똘해있던 정두철은 놀란듯 되물었다. 권영벽은 그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유사시에는 동무도 옮겨야 하오. <집단부락>안에 비하면 철길부설공사장은 활무대요. 철길부설공사장에는 이미 지하조직이 발을 붙인곳이니까 샘골 못지 않게 유리할게요. 》

두사람은 모닥불옆에서 오래도록 샘골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대책을 토론하였다.

적들의 탄압선풍에서 마을사람들을 구원할 대책에 대한 토의를 끝내자 정두철은 쭈밋쭈밋하다가 아무래도 궁금증을 금할수 없어 한마디 물었다.

《김주현소부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권영벽은 그런 질문이 있으리라고 기다리고있었던듯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걱정하던대로요. 김주현동무네는 소환되였소. 사령부당위원회에서 심각한 비판이 있었소. 》

《예에?!···》

정두철은 전혀 예견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정작 소부대가 소환되였다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두철이도 국내에 중대한 임무를 맡고나간 김주현소부대로부터 련락원이 들어온 사실과 금광을 친 사건을 알고있었다. 권영벽은 장백지구의 절박한 사정도 사정이려니와 김주현련대장의 제기가 너무 긴급하기때문에 뒤일을 정두철에게 위임하고 서둘러 사령부로 떠났던것이다. 그때 일이 썩 잘된것 같지 않아서 걱정도 나누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임무를 띠고간 소부대가 소환되리라고까지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권영벽은 물주전자가 김을 뿜는 불무지를 이윽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제멋대로 정세를 판단하고 조급증에 사로잡힌 주현동무는 사령부의 명령을 위반하여 금광을 치고 소부대를 로출시킴으로써 랑림산맥에 거점을 형성할데 대한 임무를 수행할수 없게 되였소. 주현동무가 범한 과오의 교훈은···》

권영벽은 발그레 아침해살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굴어귀쪽에 무거운 시선을 보내며 계속하였다.

《정세가 어렵고 복잡해질수록 우리 혁명의 근본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것이며 어떤 역경속에서도 사령부의 명령을 한치 드팀없이 실행하는것이요. 나도 가슴이 섬찍한것을 느꼈소. 》

정두철은 그것이 무엇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라는것을 알았다. 사령부로 떠나기전 《집단부락》포고령을 놓고 대응책을 의논할 때 배격, 지연전술을 써보다가 정 막다르면 폭동을 일으켜 적들에게 타격을 주고 청장년들을 부대에 들여보내자는데로 론의가 기울어졌었다. 론의의 마지막 계선에서 권영벽이 사령부의 결론이 없이는 절대로 백두산근거지에서 물러설수 없다고 버틴것이 천만다행이였다.

《우리도 엄중한 과오를 범할번 했구만요. 》

《우리의 머리에 일시나마 그런 생각이 떠오른것은 우리도 과오를 범한거나 같소. 하지만 우리가 과오를 범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혁명에 돌이킬수 없는 손실을 끼칠번 한것이 무서운 일이요. 백두산근거지를 말아먹을번 하지 않았소. 》

권영벽은 더욱 무거워진 시선을 정두철에게로 돌리더니 그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백두산근거지를 지키기요. 백두산을 지키는것은 사령부를 지키는것이고 조선혁명을 지키며 민족의 운명과 2천 5백만 우리 동포의 희망을 지키는것이요. 》

권영벽의 눈굽 어느 깊은곳에서 불꽃이 살아오르는것 같았다. 격한 정도를 넘어 비장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정두철의 심장을 흔들어주었다.

《예···》

정두철은 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한데 정두철동무가 한동안 계속 무거운 짐을 맡아주어야겠소. 》

권영벽은 손을 잡은채 이런 소리를 하였다.

《무슨 일인데요?》

《나는 얼마간 자주 국내로 드나들어야 하오. 우선 리원땅에 다녀오겠소. 내가 자주 자리를 뜨게 되겠으니 그동안 동무가 이 지구의 일을 책임적으로 돌보아야겠소. 》

두철이는 직감으로 김주현련대장이 저지른 과오의 후과를 수습할 임무가 권영벽에게 지워졌다는것을 느꼈으나 캐묻지 않았다.

그것은 지하공작원들사이의 규률이기도 하며 서로 지켜줘야 할 도덕이기도 하였다.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제힘으로 감당해내겠는지···》

《별소릴··· 편안히 앉소. 천천히 의논하기요. 》

정두철은 진심으로 이 지구 엄청난 규모의 혁명조직들을, 그나마 어려운 시련이 박두한 때에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으나 그보다 몇갑절 어려운 임무를 맡고 국내로 들어가는 권영벽을 바라보니 더는 약한 소리를 할수 없었다.

두사람은 무릎을 맞대고앉아 실무적인 의논을 시작하였다.

토의를 마치고 련락선들에 대한 인계까지 끝내고보니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정두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덧저고리를 입었다.

권영벽은 이때 갑자기 잊었던것이 생각키운듯 정두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박차석이말이요. 》

정두철이도 그때야 자기가 제일 관심을 품고있던 일에 대해 의논을 못하고 헤여질번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곧 그의 말에 끌려들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박차석이가 만기전에 석방되여 왜놈들과 함께 밀려다닌다는 보고를 들으시자 그것은 큰문제가 아니니 지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였소. 》

권영벽은 잠시 생각에 잠기였다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자가 두철동무의 정체를 똑똑히 모르고있는것이 사실이고 지난날의 우정을 운운한다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적당한 방법으로 접근해보오. 우리는 무슨 수단을 다해서라도 그놈의 흉계를 빨리 알아내야 하오. 사령부의 안전과 직접 관계되는 일이라고 봐야 하오. 》

정두철은 안타깝게 모대기던 문제들에 대하여 명백한 방향을 받아안고보니 신심이 생기였다. 그는 정상적으로 야학의 저녁수업을 보장해야겠기때문에 총총히 권영벽이와 헤여져서 샘골을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

 

해가 서산에 지고 노을이 붉게 탈무렵 샘골로 넘어서는 마지막등성이에 올라섰을 때 정두철은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냄새를 맡으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골안에는 푸른 연기가 엷은 안개같이 자욱히 끼였다. 눈정기를 돋구어 살펴보아도 골안은 연기가 감도는데다가 어둑어둑 어둠속에 잠겨놔서 동네모습을 가려볼수 없었다. 덜컥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과 함께 정두철은 마을을 향하여 반달음쳐 내려갔다.

초저녁에 복례를 만나던 마을어구 개울둔덕에 올라선 그는 다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골안에 100여호나 모여앉았던 큰 마을이 졸지에 사라졌다. 집대신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무덤같은 시커먼 무지들에서 부실부실 푸른 연기가 피여오르고 코를 들수 없게 매캐한 연기냄새가 골안에 가득찼다. 재무지가 된 집터들에는 군데군데 가래나무, 느릅나무들이 외롭게 남아서 바람을 안고 쓸쓸하게 가지를 설렁거리고있었다.

정두철은 휘청휘청 마을로 걸어들어갔다. 걸음마다 발목이 풀썩풀썩 재무지에 묻히였다.

마을어구의 그가 1년가까이 하숙하던 집도 재무지가 되였다. 마당자리에 타다남은 휴지장같은 종이쪼박들이 바람에 딩굴고있었다. 인정후덥던 주인집 령감 로친이며 그들의 아들인 마을청년회 책임자는 어떻게 되였는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페허가 된 마을에는 인적기가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마을주변에 경계도 포치하고 피난조직도 해두고있었지만 보아하니 간밤에 급습을 당한게 틀림없는데 모두 어떻게들 됐는지 궁금증에 입안이 바싹 말라들었다.

마을복판으로 걸어들어가니 눈에 익은 가래나무가 바라보였다. 중둥에서 량쪽으로 벌어졌던 두가지중에서 오른쪽의 가지는 불에 탔는지 부러져서 뿌다귀만 남았다. 복례네 집이다. 그의 동생 조복남이 늘 가래나무를 가리키며 오른쪽 큰가지는 누나것이고 왼편의것은 자기의것인데 인제 자기의 가지는 얼른 자라서 누나가지보다 더 하늘높이 올라간다고 우쭐렁대군하였다. 그런데 그 《누나의 가지》가 아주 부러져버렸다. 어쩐지 가슴이 섬찍하였다.

정두철은 마음이 황황하여 재무지를 마구 헤치며 걸음을 다우치다가 무엇에 걸채여 비칠하였다. 이때 맞은편의 연기자욱한 골목길에서 《선생님-》하고 부르짖는 목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났다. 굴러오듯 마주 달려오는것은 복남이였다.

《복남아-》

두철이도 허둥지둥 달려갔다.

소년은 떠박지르듯 두철이를 부둥켜잡으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두철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소년을 꽉 마주 붙안고있다가 물었다.

《복남아,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마을이 이렇게 됐느냐?》

《왜놈군대가 새벽에 자동차를 타고 달려들어서 공산부락이라고 막 불지르고 총쏘고··· 울 엄마도··· 울 엄마도 붙잡혀갔어요···》

복남이는 와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엉? 어머니가 붙잡히다니···》

복남이는 대답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흐느낌을 씹어삼키며 가까스로 한두마디씩 더듬거리는 복남이의 말을 통하여 피해정형을 대충 짐작이나 할수 있었다.

부락사람들의 피난을 조직하느라고 미처 몸을 빼지 못한 청장년들 셋과 경계근무를 나간 복남이를 찾느라고 헤매던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밖의 마을청년들 두사람이 상처를 입은채 잡혀갔다고 한다.

복남이는 재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된 얼굴에 고랑지어 흐르는 눈물을 무명저고리소매로 벅벅 문지르며 울부짖듯이 말하였다.

《선생님, 어서 산에 가자요. 누나가 나더러 이제 선생님이 돌아오실텐데 마중나갔다가 모셔오라고 하였어요. 어서 가자요. 마을청년들이 지금 윽윽해요. 》

《윽윽하다니?》

두철은 복남이의 불에 그을은 팔소매를 잡고 물었다.

《누나더러 선생님이 뒤산에 총 묻어둔 자리를 대라는거예요. 총을 파가지고 <토벌대>를 쳐서 원쑤를 갚고 유격대에 찾아가겠다는거예요. 어서 가자요. 가서 총을 파내달라요. 나도 총가지고 어머니 원쑤갚으러 가겠어요!》

복남이는 두철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만있거라. 복남아, 그래 누나가 총 묻은데를 대주었단말이지?》

《안대주니까 모두 야단야단하지요. 누난 참, 정말 모르는지 딱 잘라맸어요. 선생님이 오신 담에 의논하자고 하면서··· 마을형님들이 어머니를 구할 생각도 없는가고 막 대드는데도 누난 움쩍 안해요. 누나는 총 묻은데를 아는것 같은데 어쩌면···》

복남이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뒤등성이쪽으로 보냈다.

복례는 총 묻은 자리를 알고있었다. 그것은 장차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두철이 마련해둔 총이였다. 어머니가 놈들에게 붙잡혀갔는데도 조직의 지시가 없기때문에 총을 내놓지 않은 복례의 갸륵한 심정이 눈물보다 뜨겁게 가슴을 적셔내렸다. 복례가 버텨주지 않았더라면 원쑤들이 원하고 사령부가 꺼리는 엄중한 사태가 이 샘골에서도 벌어질번 한것이였다.

《가자!》

정두철은 복남이에게 한마디 던지고는 뒤등성이쪽을 향하여 달음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