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2


 

제 2 편

2

 

한낮이 되자 샘골의 아늑하고 오붓한 골안에는 따뜻한 해볕이 한가득 차넘치였다.

숲을 쳐갈긴 누런 산발에는 뙈기밭들이 멍석잎 깔리듯 하였고 짤막짤막한 사래토막들이 격자무늬를 이루고있었다. 손바닥같은 골바닥에는 강낭짚무지며 돌각담들이며 초라한 동기와집들이 흩어져있었다.

동쪽골안막바지의 오붓한 저수리나무밭속에는 우기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군하는 크지 않은 폭포가 있다. 겨울부터 초봄까지 그 폭포는 철새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데 그동안은 폭포밑에서 맑은 샘물이 쉴새없이 솟구쳤다. 그 샘물은 구정촌이라 불리우는 샘골의 넓지 않은 골안으로 흘러 서쪽 5리밖에 있는 신정촌버덩까지 내려갔다.

폭포터의 컴컴한 저수리나무숲속에는 지붕이 곰삭아 먼지를 날리는 자그마한 방아간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마을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시내물이 우불구불 뻗어나간 개장변의 돌각담과 최뚝옆에는 하얗게 껍질을 벗기고 알른알른하게 다듬은 키가 가지런한 나무를 어금지금 뉘여놓고 량끝을 돌로 지질러놓은 활창대가 챙겨져있었다. 그 활창대는 마치도 언제나 싸움에 나설수 있도록 준비된 마을사람들의 기상과 위엄을 나타내는것 같았다.

늙은 느티나무가 서있는 동구에는 길과 엇갈려 시내물이 흘러가는데 샘골에 들어서려면 이 시내물을 건너야 한다. 말짱만큼씩한 나무들로 산자를 엮고 그우에 흙을 덮은 넓지 않은 궁륭형의 다리가 시내물을 건너갔다.

밭에서는 감자캐기가 한창이였다.

쌍두마차 한대가 쇠테두른 바퀴를 번쩍거리며 바로 그 늙은 느티나무밑에 와서 멈추어섰다. 샘골에서는 희한한 구경거리였다.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물론 집에 있던 사람들까지 난데없이 나타난 쌍두마차를 바라보고있었다.

잠시후 두두룩한 다리우에 신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수수한 쥐색코트를 입고 검은 중절모를 쓴 자태바른 젊은이였다. 그는 느티나무밑을 지나 쌍두마차옆으로 다가가더니 마부를 향해 중절모를 벗어들고 인사했다. 검고 윤기나는 숱진 머리칼이 흘러내린 이마밑에서는 정기찬 큰눈이 깊숙한 눈확속에서 조용히 빛나고있었다. 정두철이였다.

그는 팔목시계를 보고나서 가볍게 마차에 올라앉았다.

《쩌, 쩌쩌!》

늙은 마부가 거쉰 목소리로 웨쳤다. 두마리의 밤색말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여덟개의 말발통에서는 누런 흙가루가 폭폭 일어났다.

열댓살 나는 소년이 느티나무기둥뒤에서 정두철을 바라보고있었다. 소년은 마차와 정두철의 옷차림을 깐깐이 살펴보는것이였다. 그 소년은 정두철한테서 글을 배우는 야학생인 조복남이였다. 정두철은 소년이 어째서 저녁마다 만나는 자기를 낯선 눈길로 바라보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선생이 뜻밖에 요란한 행차를 하자 그만 눈이 휘둥그래진것이였다. 그 소년은 마을사람들과 같이 정두철을 인정있는 훈장으로 알고있을뿐 지하일군이라는것은 모르고있었다.

정두철은 속으로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있게 될 일에 대하여 이리저리 예상해보았다.

어제저녁 신정촌을 다녀온 촌장은 그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신정촌 《압강루》에 박차석이란 사람이 들어있는데 촌장에게 정두철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것을 꼬치꼬치 캐여묻고나서 자기 하급생이 분명하다고 반가와했다고 한다. 박차석은 정두철을 자기가 든 려관방으로 꼭 보내달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더라는것이였다. 뜻밖에 박차석이 신정촌에 나타났다는 련락을 받은 정두철의 심중은 자못 복잡하였다. 만기전에 출옥한 박차석이 왜놈들과 함께 밀려다닌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있는 그였지만 이렇게 신정촌에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정두철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권영벽이 아직 사령부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나 박차석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떠나는 이 시각에도 갈피없이 떠오르는 생각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가 박차석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중학교시절이였다. 체대가 큰 박차석은 관지뼈가 불거지고 입술이 넓어 용감해보였다. 그는 곧 학우들과 친숙해졌다. 그때 많은 청년들이 다 그러했듯이 박차석은 열렬한 반일감정을 품고있었으며 기회가 있을적마다 일제놈의 죄행을 타매하였다. 정두철은 그의 하급생이였고 나이도 아래였다. 그러나 박차석은 허물없이 그를 대해주었고 친절하였으며 왜놈을 때려부시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추동하군 하였다.

박차석은 한해가 차지 못해서 무슨 일로 해서인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얼마후에 다시 나타났는데 전보다 의젓해보였다. 그는 학우들을 모아놓고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떤 친구들은 아직 내가 독립군에 관여하고있는가고 묻는데 내 자세히 말해주겠소.》

박차석은 꽁꽁 닫아맨 문들을 거듭 살펴보고나서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ㅌ.ㄷ>성원이 되였소. <ㅌ.ㄷ>란 무슨 뜻인가?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뜻인데 이 조직은 조선혁명의 새로운 등불이요. 이 조직은 김성주라는 청년공산주의자가 조직하였소. 그 동무는 젊고 비범한 우리 혁명의 지도자요.》

박차석은 밤새 청년들에게 김일성동지에 대해 열정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정두철은 지금도 그때 느낀 흥분과 충격을 잊을수 없었다.

(나도 김성주동지의 지도를 받겠다. 기어코 김성주동지를 찾아떠날테다!)

정두철의 마음속에는 굳은 결심이 내려져있었다. 그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거쳐 마침내 김일성장군님의 지하조직선을 찾아냈으며 장군님의 뜻을 받들고 싸우는 지하일군이 되였다.

그후 정두철은 박차석을 만나보고싶어 그의 행방을 알려고 여러가지로 애를 썼지만 종시 알지 못하고말았다. 그러다가 몇해전에야 그가 국내공작중 체포되여 서울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여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는 박차석이 항일무장투쟁대오에 서지 못하고 옥중에서 고초를 당하는 일이 아쉬웠다.

그런데 문득 그 박차석이가 기별도 없이 신정촌에 나타난것이다. 그가 어떻게 감옥에서 나와 합법적으로 나다니며 더우기는 고급려관에까지 출입할수 있게 되였는가?

정두철은 심각한 생각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하공작상 의무를 두고 망설이던끝에 아무래도 그가 자기를 아는 이상 부딪쳐보는것이 필요할것 같아 길을 떠났다. 권영벽의 결론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그는 사령부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때문에 자체로 정황을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고보니 역시 마음속은 개운치가 않았다. 신정촌이 가까와지자 말발굽소리는 빈절구소리처럼 딱딱해졌다.

성문을 지키고있던 자위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들다가 하나둘 물러서고말았다. 정두철의 중절모자가 노방 올라갔다내려오군 했다.

성문을 들어서니 말발굽소리는 자못 소란했다. 추녀가 짧은 낮은 집들이 동냥군처럼 길옆에 바투 나앉아있어 자칫하면 말발굽에 채일것 같았다.

마차는 《압강루》라는 간판이 붙은 신식려관마당에 들어섰다.

정두철은 마차우에 앉은채로 려관의 겉모양을 훑어보았다. 동양식기와지붕에 서양식몸채로 지은 3층짜리 려관은 창문이 크고 창문앞에 로대를 달았으며 그우에 범포차일을 드리웠다. 촌에서는 보기 드문 호화로운 집이였다.

정두철은 현관문을 열고 홀에 들어섰다. 비단꽃천으로 지은 다부산자를 입은 처녀가 아양을 떨며 맞받아나와 손을 내밀었다.

정두철은 코트와 목수건을 벗어 그 녀자의 팔에 던져주었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벽시계가 누런 추를 젓고있었다. 대문만 한 체경을 세운 휴단에는 조밥알같은 꽃들이 달린 계수나무화분이 대리석받치개우에 놓여있었다. 홀안에는 계수나무꽃향기가 진동하였다. 이 화려하고 정숙한 홀안에서 갑자기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아··· 시간이 없소. 군소리 말고 최상으로 차리오. 돈은 걱정할것 없소.》

그 말소리와 함께 신 끄는 소리가 울리였다. 얼마후 정면휴단에 세워진 체경에는 와이샤쯔바람에 실내화를 신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신발을 끌며 계단을 내려오고있었다. 옷과 모자를 받아 걸어놓은 처녀가 그 사람앞에 다가가서 말했다.

《박선생님께 반가운 손님 오셨어요.》

처녀는 정두철을 힐끗 곁눈으로 가리키고나서 박선생이라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박차석은 문앞에 선 정두철을 찬찬히 바라보고있었다.

정두철이도 그의 얼굴을 깐깐하게 살펴보았다. 얼굴의 색조가 짙어지고 주름살이 많아진것은 사실이지만 벌어질사한 두터운 입술과 커다란 두눈은 옛인상 그대로였다.

그러나 정두철은 그를 그전처럼 허물없이 대하게 되지 않았다. 그의 심중에는 반가움 절반 의혹 절반의 착잡한 감정이 뒤엉키고있었다. 그 착잡한 감정은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박차석의 얼굴에 옮겨졌다. 그쪽의 충격은 오히려 더 강렬한것 같았다. 흐리멍텅하던 눈알이 정두철을 보는 순간 섬광을 일으키며 광적으로 번쩍이였다.

《두철이, 두철이가 옳구만. 정말 반갑소!》

그는 다짜고짜로 정두철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텁텁한 성격과 거칠사한 행동, 터지는듯 한 말투와 뜨겁고 고르롭지 못한 숨결소리가 모두 그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어덴지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정두철은 그 옛날 중학시절처럼 온순히 몸을 맡기고 구슬퍼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소.》

박차석은 붙잡은 두손에 힘을 주더니 성급히 손목을 이끌었다.

그가 들어있는 침실은 이 《압강루》의 외양과는 달리 단출하였다. 바람벽에 붙여놓은 두개의 침대가 있고 옷장과 원탁이 하나씩 놓여있을뿐이였다. 3등호실이 분명하였다. 특전이 있다면 두사람이 쓸 방을 혼자서 쓰는것이였다.

그들은 기울어진 해빛이 새여드는 창문앞에 원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박차석은 감동에 넘쳐 말했다.

《이거 참 얼마만이요? 죽지 않고 살아나니 두철이까지 만나게 되는군. 나는 샘골에서 선생노릇을 하는 정두철이라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자 내가 아는 그 정두철이야 아니겠지, 그 사람은 아무튼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혁명에 관여할 사람인데 두메산골에 묻히여 선생노릇을 하랴 했소. 그런데 바로 자네라는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당장 찾아떠나려고 했소. 그러나 나는 움직이기 힘든 사람이고 해서 이렇게 오라고 한것이요. 자네도 뜻밖이였지?》

박차석은 분명 중학시절의 행복한 추억속에 빠져있었다. 그는 김이 오르는 차물을 따라서 정두철에게 다정히 권하였다.

《나는 박형이 령어의 몸이 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하두 번거롭다보니 면회 한번 못가고 그저 마음속으로 무사하기만을 바랐을뿐이지요.》

《고맙소. 나를 잊지 않고 근심해주니··· 그러나 내가 이 꼴로 자네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에, 그런 말은 그만두자구. 그래 자네 형편은 어떤가? 자네는 중학때 얼굴이 하얘지도록 책만 읽었지.》

박차석은 회상에 잠긴듯 눈을 감은채 한참동안 앉아있었다.

《참 좋은 시절이였지. 소중하기 그지없는 추억이고. 그때는 나도 행복했소. 지향도 있었고 주견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지··· 정말 자네 탄실이를 아나?》

정두철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탄실이는 학생때부터 반일감정이 강한 어느 독립군의 딸이였는데 박차석이가 은근히 마음을 두고있다는것을 학생시절부터 알고있었다. 그후 그의 운명에 대해서는 정두철이 모르고있었다.

《탄실이는 학생때 순박하고 감정이 풍부한 처녀였지. 허지만 지금은 전과는 달라. 칼날처럼 날카로운 녀자로 되였네. 그래도 감옥에 있으면서 탄실이생각에 가슴을 태웠는데 감옥에서 나와 찾아가니 영 돌아다보지도 않더군··· 하기야 탄실이를 원망할건 없지.》

그럴수록 박차석은 탄실이를 그리는 마음만은 버릴수 없었다. 젊었을 때의 뜻은 무서리에 맞아 꽃피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마음드는 처녀인 탄실에게 장가를 들어 부모를 모시고 애들을 키우며 살고싶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고통과 불행을 씹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인간들이 전혀 없는것도 아니지 않는가?

박차석의 마지막희망은 그것이였다. 모든것을 잃고 얼룩이 진 인생이였으나 이 한가지 희망만은 마지막까지 버리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희망은 마음속에만 있을뿐 마음의 의지인 탄실이는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있지 않는가.

어느덧 박차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학창시절에 탄실이는 박형을 사모했지요.》

박차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였다.

《자네는 혼자몸이겠지? 사상운동도 그만두고? 오히려 잘되였다고 말할수 있지. 나라를 위해 큰일을 못할바에는 차라리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가는게 낫지.》

《그러나 박형이 우리들의 열정을 들끓게 할 때 내 포부는 이런것이 아니였지요. 그때는 나도 박형이 걷는 길을 동경했고 리상으로 삼았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리타분한 훈장이 되여버렸거던요!》

《혁명, 독립··· 그것은 다 훌륭한 말들이지···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현혹되는 세계란말일세··· 나에게도 그때가 제일 보람있는 시절이였어. 젊음이 약동하던 때였거던.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나 비싼값을 치러야 해. 너무도 가혹하단말일세.》

정두철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박차석의 차디찬 눈과 랭랭한 어조속에서 그가 옛날을 동경하고있는것 같지만 이미 그전날 박차석이가 아니라는 명백한 판단을 내렸다.

《박형이 일곱해동안 형무소에서 겪었을 옥고를 가히 짐작할수 있습니다.》

《뭐? 옥고?》

정두철은 그가 이제 오래도록 제딴의 하소연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차석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명백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오히려 시퍼렇고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때 박차석의 뇌리에는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치욕스러운 운명의 갈림길이 떠올랐다.

일곱해째 감옥살이를 하고있을 때 왜놈들은 견뎌내기 어려운 고문을 사정없이 들이대는 한편 날마다 개준과 전향을 설교했다. 혁명과 인연을 끊겠다는 서약만 하면 감옥에서 내보내여 마음대로 살게 해주겠다는것이였다.

박차석은 철창속에 갇혀있기보다는 바깥세상에 나가는것이 모든 면에서 밑지지 않을것 같았다. 그때 박차석은 자기 몸만 감옥에서 풀려나가면 그다음은 자기 할 탓이라고 타산했을뿐 일단 혁명가의 절개와 지조를 버리고나면 만회할수 없는 배신과 반역의 함정에 깊이 빠져든다는데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만기전에 석방된 박차석은 조용한 려관에 안내되여 두어달 공밥을 먹으며 옥고를 가시였다. 몸도 회복되고 까닭없이 신세지는것이 께름하기도 하여 어느날밤 그는 비누를 싼 수건을 들고 목욕탕에 가는척 하고 슬그머니 려관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두번째 골목도 빠지지 못한채 괴한에게 붙잡혔다. 그놈은 다짜고짜로 박차석을 신작로복판에 메쳐놓고 매질을 했다.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와 도적놈처럼 패대는 그를 구경할 때 박차석은 아픔보다 치욕감을 금할수 없었다. 경찰이 달려왔다.

그를 자그마한 경찰서의 격검장에 끌어다놓은 놈들은 승냥이처럼 격검채를 들고 몰려들어 개패듯 했다.

《당신들은 나를 석방시키면서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고 과수원과 기와집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과수원과 기와집은 소용없소. 그저 나에게 자유만 주오. 당신들은 왜 사람을 속이오?》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자유? 개나발같은 소리 말아! 네놈은 우리를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가 하라는대로 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이 제국의 법이다.》

박차석은 그때 느꼈던 굴욕감과 고통이 되살아올랐다.

《난 감옥에서 도망을 치지는 못했지만 순순히 주저앉은것도 아닐세.》

그는 무슨 속이라도 남아있는듯이 이렇게 속삭이였다.

《박형 피차간에 해로운 소리는 말아주오. 난 이미 그런 길에서 멀어진지 오랜 사람이요.》

정두철은 경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속을 떠보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것 같아 정두철은 정신을 바짝 차렸으나 박차석의 표정과 어조를 보면 어쩐지 계교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박차석은 눈을 번쩍 뜨고 정두철을 쏘아보다가 쓸쓸한 추억에서 벗어난듯 활기차게 말했다.

《아, 오늘은 어찌다 생긴 좋은 날인데 좋은 이야기나 하자구. 중학때 우리는 비록 주리고 헐벗었지만 무서운것이 없었지. 희망, 정열, 사랑, 음악, 참 청춘답게 살았소!》

이때 손기척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리더니 가슴에 동그란 패쪽을 단 사환군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다 준비되였습니다.》

박차석은 그쪽에 눈길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다.

《내 방에 옮겨오오.》

《그건···》

《내 방으로 옮겨오라는데!》

사환군은 마지 못해 물러섰다. 잠시후 하얀 겉옷을 입은 애젊은 총각이 소반에 료리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박차석은 모태주병을 자그마한 술잔에 기울이려다 말고 커다란 차잔에 꿀럭꿀럭 쏟았다.

《우리의 상봉을 축하해서 한잔 드세! 식당보다는 내 방이 편안해!》

그는 서너번 권하고나서 손님이 들건말건 술이 흘러넘치는 차잔을 들어다 입에 부어넣었다.

《그때는 그래도 짓밟힌 조국을 생각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기도 했고 항거의 마음으로 조선민요를 부르기도 했지. 모두들 주리고 헐벗었으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 오직 광복을 위해 한목숨 바치는것을 가장 숭고한 일로 여기였고 처녀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떠받들었지.》

박차석의 눈길은 창밖의 먼 남쪽을 헤매고있었다. 술방울이 떨어진 원탁우에 두팔을 놓은 박차석은 숨을 갑자르다가 돌연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박차석의 이그러진 얼굴에는 어느덧 야릇한 애수가 어리였다. 그는 팔을 높이 들었다가 정두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같이 부르자구. 자네는 노래를 늘 혼자 불렀지. 어디 나하구 같이 불러보자구!》

그는 숨이 답답한지 손을 더듬거려 단추를 풀어헤치였다.

(학창시절을 눈물겹게 그리워하고있구나. 그에게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남아있단말인가?)

정두철은 그자의 진속을 가늠할수 없었다.

박차석은 문이 꼭 닫긴것을 확인하고나서 계속하였다.

《마셔, 마셔. 똑똑한 정신으로 살아가긴 괴로운 때야. 자네는 아직 나를 무슨 선배요, 혁명가요 하고있는데 그건 다 옛날일일세. 나를 쳐다보지 말게. 가슴이 조이네. 자네에게는 아직 날개도 있고 또 똑똑한 눈도 있네만 나는 그 모든것을 다 빼앗기우고 살덩이만 남았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 승냥이들이 다 뜯어먹고 백골만 남아 이역땅에 뿌려지겠지.》

《박형, 왜 그렇게 불길한 말을 하오. 옛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박차석은 진저리를 치고나서 몸을 옹송그리였다.

《그때는 나도 목표가 있는 인간이였구 사랑스러운 련인이 따르는 젊은이였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어느 한순간에 왜놈이 나를 죽이지 않으면 유격대가 나를 죽여버리고말걸세. 유격대도 왜놈도 나를 배신자라고, 반역자라고 하면서말일세. 그러나 나는 나지 누구겠나? 나는 전혀 바라지 않았지만 왜놈에게 체포되였구 또한 바라지 않았지만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한채 출옥하여 이렇게 끌려다니고있네. 왜놈들은 날더러 김일성장군의 사령부와 련결된 선을 찾아내라는게야. 자, 이제는 알만한가? 만기전에 석방된 까닭이며 감옥대신 이런 려관집에서 살수 있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흥, 내가 끌려는 다니지만 제놈들이 찾는 사람을 본들 봤다고 할가!》

정두철은 놀랐다. 그가 감행한 반역행위도, 그것을 공공연히 말하는 태도도 모두 상상밖의 일이였다.

《나는 자네가 혁명에 관여하지 않고있다고 믿기에 이런 말을 하는걸세. 이런 소리가 유격대에 들어가는 날에는 자네도 나도 이거야.》

박차석은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고는 눈을 내리뜨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우리 겨레는 영원히 나를 두발가진 개, 변절자, 배신자, 왜놈의 앞잡이라고 침을 뱉을걸세!》

《이거 왜 이러시오. 박형, 사람은 손발이 얽매일수 있지만 뜻이야 얽맬수 없는건데 지금 처지에서라도 뜻대로 살수 있지 않겠소.》

《내 넉두리나 좀 들어달라구. 이봐, 임금도 고기비늘을 쓰면 그물에 걸리고 개가죽을 쓰면 승냥이가 달려들고 말가죽을 쓰면 역마차를 끌어야 해, 난 어떤놈인가? 한발 자칫 잘못 내디딘 결과 이미 바른길에 다시 들어설수 없는 몸이 되였네. 뛰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하고 죽고싶어도 죽지도 못하게 감시를 당하고있어. 지금에 비하면 감옥에 갇혔을 때가 얼마나 자유로왔던가? 지금 특무놈들이 내 일거일동을 감시하고있지. 보라구, 이제라도 내가 비명을 지르면 왜놈중위가 바람처럼 달려올거야. 나는 이런 사람일세.》

《박형의 말을 듣고야 누가 감히 혁명에 나서는것이 숭고하다는 생각을 하겠소?》

《혁명?··· 혁명을 하겠으면 마음속으로나 하게.》

박차석은 입을 쩝 다시며 커다란 손을 휘저었다.

《륙혈포를 차고 독립운동을 할 때와 같은줄 아나? 지금 왜놈의 무력은 세계적으로 륙군이건 해군이건 공군이건 모두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야. 혁명을 하자면 이런놈들과 싸워이겨야 하는건데 언제면 승리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거던.

속절없이 태여났다가 속절없이 죽어버리기가 싫구만. 사람을 제 살고싶은대로 살다가 죽을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게야!》

시간이 흐를수록 정두철은 그의 진면모를 깊이 알수 있었다.

박차석은 타락할대로 타락한 넝마쪼각이 되고말았다. 타락한자는 신념, 의지, 힘같은 인간의 면모를 지닐수 없는것이다.

정두철은 이런 배신자, 비렬한 변절자와 한상에 마주앉아있다는것을 느낄 때마다 벌떡 일어서고싶은것을 겨우 참았다.

《실은 인사도 할겸 박형이 운수가 틔운것 같아서 마참한 직업을 하나 알선해주었으면 했는데···》

박차석은 정색해서 되물었다.

《왜 훈장노릇에 싫증이 났나? 어떤 직업을 바라는가?》

《식구를 거느릴만 한 수입이 생기는데면 족하오. 그러나 동족을 내리누르거나 뜻있는 사람을 밀고하는 직업은 싫소. 그런데다 밥줄을 달았다가는 언제건 귀신몰래 죽어버리기가 일쑤지요.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호랑이보다 귀신을 더 꺼리는 습관이 있지 않소. 동족한테 맞아죽는게 개승냥이한테 뜯겨죽는것보다 나을수야 있소?》

정두철은 박차석이 그런 순탄한 말로는 정신을 차릴것 같지 않아 다시한번 오금을 박아놓았다.

《박형, 내가 후배로서 별로 도울길이 없소만 한가지만은 명심하시오. 우리 고장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왜놈들과 묻어다니는 조선사람이 있으면 한사코 요정내고마오. 이 고장 사람들은 용하게도 일본사람과 내통한자를 알아내고 총알을 날리지요. 그 총알이라는게 누가 어디서 쏘는지 알수 없지만 눈이 달린것처럼 명중시키거던요. 여기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지요?》

박차석은 몸을 비칠거리였다. 긴장된 표정이였다.

《자네는 역시 영민하구만. 고맙네, 나도 자네에게 한가지 귀띔해주겠네. 이제 딴 직업을 구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우선 몸부터 떠나는게 좋겠네. 여기서 어물거리는건 재미없어. 머지않아 꼭 상서롭지 못한 일이 터질것 같아.》

그는 취중에도 문쪽을 피끗피끗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두철은 태연한척 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였다. 그리고 넌지시 말했다.

《일본은 그래도 법치국인데 아무러면 망탕 죄없는 사람까지 다치겠소?》

《법치국인지 김치국인지 자네는 다 몰라. 자네길래 하는 말이지만 수입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멀리 피하라구.》

박차석은 피끗 말머리를 돌리였다.

《그리고말이야. 후날에 나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묻는놈이 있거든 내가 김일성장군의 유격대지하공작원 비슷한 사람은 없는가고 묻더라고 대답해주게. 그래야 나도 자네도 후환이 없을걸세.》

실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자 두사람은 랭랭해졌다. 수선과 위선은 더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면은 조금도 흥겹지 못했다. 더 앉아있을 멋조차 없어졌다.

박차석은 원쑤들의 손탁에 들어있으면서도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끊을수 없어 모대기며 울부짖고있었다. 아직은 적들이 끌고 다니니까 끌려다닐뿐 왜놈들에게 성실하게 봉사할 생각은 없는것 같았다. 이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한가닥의 량심이 아니겠는지?

정두철은 그에 대해 차후에 좀더 알아보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