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12


 

제 2 편

12

 

아담한 3층양옥집 앞마당에는 따뜻한 해볕이 쏟아지고있었다.

정두철은 행인들속에 섞이여 천천히 마당앞을 걸어가며 박차석이 보이지 않는가 하고 곁눈질해보았다.

마당 한쪽에는 구식《포드》한대가 각을 뜯기운채 서있었다. 몸이 실한 젊은놈팽이들이 차를 수리하는중이였다. 웃동을 벗어붙인 내복바람의 허리춤에는 권총집이 매달려있었다. 언제나 문이 열려있던 본채 정문앞에는 사복파수군이 수캐처럼 맴돌이치며 수박씨를 까먹고있었다.

려관마당에는 전에 느낄수 없던 살벌한 기운이 풍겼다.

(악당들이 오긴 왔구나. 오끼란놈이 지금 려관안에 있겠는가?)

정두철은 길을 지나가는체하며 승용차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런 산골에서는 흔히 볼수 없는 고급승용차였다. 특수공작반 우두머리쯤 되면 이런 차를 탐직도 했다.

그런데 《포드》는 멀고 험한 길을 헤쳐온듯 성한데가 없이 만신창이 되여있었다. 거울같은 차체는 마구 찌그러지고 갉히웠다. 유리도 금이 가고 눈알도 성하지 못했다. 백철완충판은 엿가락처럼 휘여들고 기관덮개와 흙받치개는 돌벼락을 맞았는지 여물지 못한 박통처럼 우글쭈글했다. 그옆에 떼놓은 네개의 바퀴는 모두 째지고 터졌는데 사람들이 매달려 주무르고있었다. 차가 저지경이 되였으니 그것을 타고다닌 사람도 곤죽이 되였을것이다.

(필시 오끼란놈의 차겠다. 특수공작반의 우두머리가 아닌 이상 누가 차를 저렇게 혹사하며 달려다니겠는가!)

정두철은 돌따서서 다시금 려관마당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박차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혹시 박차석이 자기를 먼저 알아보면 소리쳐 부를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행인들과 동떨어져 홀로 걸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부질없는것이였다. 어떤 까닭으로 박차석이 자기를 만나보고싶어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말것이다. 응하건 피하건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등대고 저 패당속으로 뛰여들어가 모략의 내막을 알아내야 한다.

그는 태연히 활개짓을 하며 마당을 꿰질러 려관본채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수박씨를 까먹던 사복특무가 놀란듯이 맞받아나왔다. 그자는 다짜고짜로 정두철의 앞길을 막아서서 눈알을 부라리며 턱짓을 했다. 돌따서라는것이였다.

정두철은 눈치무딘 시골서생처럼 천진한 기색을 지었다.

《왜 이러시오?》

특무는 입안에서 수박씨를 불어내치고나서 무례하게 말했다.

《못들어가. 돌아가!》

정두철은 이 완력군을 한번 떠보리라 생각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함부로 량민들의 길을 막는거요? 나는 구정촌학교 교장이요. 젊은이는 대관절 무슨 사람이요?》

특무는 그의 말뜻을 채 깨닫지 못한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교장이라는 말만은 알아들었는지 뜻밖에도 사근사근해졌다.

《왜 여기 왔는가?》

정두철은 그놈이 사정을 봐주려는줄 알고 차근차근 말했다.

《이 려관에 가까운분이 들어있소. 인사도 할겸 회포도 나눌겸 찾아오던길이요. 그분도 나를 만나자고 했고요.》

《친구? 누구인가?》

정두철은 박차석이 옆에서 듣는다 해도 기분이 거슬리지 않도록 멋을 부리며 대답했다.

《송죽 박차석선생이요.》

특무는 어째선가 돌따서서 려관방의 창문을 흘깃 스쳐보고나서 싱긋 웃었다.

정두철은 그 반응을 통해 박차석을 이자가 알고있으며 박차석은 지금 려관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 파수군도 마당에서 승용차를 뜯어고치는자들도 모두 박차석과 련관되여있으며 박차석을 타진해보면 이 패당의 모략을 알아낼수 있을것 같았다.

잘하면 오끼놈도 만날수 있을지 모른다.

수박씨를 까먹던놈은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바투 다가서며

《안돼 돌아가! 만날수 없다.》하고 소리쳤다.

모든 타산과 기대가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는것 같았다.

《아니 이보소. 나는 전번에도 박선생을 이 려관에서 만났댔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만났댔단말이요. 송죽선생에게 아뢰여보지도 않고 문전에서 내쫓겠다니 무례하지 않소?》

놈은 부진부진 정두철의 가슴을 떠밀며 다시금 한웅큼이나 되는 수박씨를 꺼내여 입안에 하나씩 던져넣었다.

이때 유리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두철은 특무놈과 싱갱이질을 하는통에 미처 그쪽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게 누구요? 무슨 일이 생겼소?》

정두철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차석이 누런 털내복을 입은 웃몸을 유리창밖으로 쑥 내밀고 정문쪽으로 바라보고있었다. 파수군은 박차석이 보거나말거나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여. 날 찾아온 손님을 왜 함부로 떠밀어?》

박차석은 성이 나서 벌개진 눈으로 파수군을 바라보았다.

《중위님의 지시요. 일체 면회는 금지하기로 됐소.》

파수군이 중얼거리며 그냥 떠밀었다.

《아니 저··· 여.》

박차석의 얼굴은 험악했다. 정두철은 이 싱갱이질에서 누가 이기겠는지 예견할수 없었다. 파수군이 박차석을 지시할수 있는 사람인지 박차석이 파수군을 부릴수 있는지 그들의 촌수를 짐작할수 없었다. 박차석은 다급히 신을 끌며 뛰여나왔다. 그는 파수군의 가슴을 힘껏 밀어제치며 눈을 부라리였다.

《정 이렇게 내 일을 코코에 참견할텐가?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무슨 사람을 만나건 일체 상관하지 않게 되여있지 않나!》

파수군은 박차석의 완력을 당해낼수 없는듯 비칠하더니 입안에 물고있던 수박씨를 뿌하고 내뿜었다.

박차석은 숙어들지 않고 코날이 댕댕한 파수군을 쏘아보고나서 정두철에게 말했다.

《안됐네. 들어가자구. 오래 지체했나? 나를 소리쳐 찾을 일이지···》

박차석은 씨근덕거리며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박형, 이거 내가 공연히 와서 소란을 피운게 아니요? 로형이 려관에 있다는것을 확실하게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쓸수 있었겠는데 설마 또 오셨으랴 하는 미타한 생각도 없지 않아서···》

《음, 고맙소. 저 무지막지한놈들은 인정사정을 보려고 하지 않거던.》

그는 정두철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였다.

《당장 죽여버릴듯이 눈알을 부라리고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야 숙어든단말이야. 허허.》

정두철도 따라웃었다.

량옆에 손님방이 잇달려있는 복도는 낮에도 불이 켜져있어 환하였다. 박차석은 이번엔 1층에 자리잡고있었다.

정두철은 이 려관에 어떤자들이 몇놈이나 들어있으며 오끼가 어디 있는가 하는것부터 알아보려고 유심히 방들을 살펴보았다.

박차석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방의 맞은편 방은 문이 꼭 닫겨있는데 그앞에 한컬레의 녀자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는 고무신에 주의를 돌리였다. 특무들이 독차지하다싶이한 이 려관에 그것도 박차석의 맞은편방에 녀성의 고무신 한컬레가 놓여있는게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같았다. 그는 박차석의 방안에 들어서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저 방에는 누가 있습니까? 조선녀성이 들었는가보군요···》

박차석은 그 순간 저으기 놀라며 말없이 정두철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문을 꼭 밀어닫으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네. 자 어서 외투를 벗으라구. 모르고도 살수 있는것이라면 구태여 알자고 할 필요도 없지 않나.》

정두철은 그가 시키는대로 외투를 벗어 옷걸개에 걸었다. 방은 전번에 박차석이가 들었던 방보다 두배나 넓었다. 침대도 걸상도 모두 고급이였다. 침대우에는 방금까지 박차석이 딩군듯 한 흔적이 그대로 어려있었다. 머리앞에 놓여있는 상두대와 원탁에는 있을법한 책이나 신문은 보이지 않고 알락달락한 종이에 싼 당과류들과 과일접시가 놓여있었고 차종이며 술잔이며 모두 먹고마시는데 소용되는것들만이 널려있었다. 그러나 박차석의 기분상태는 전과 완전히 달랐다.

박차석은 일거일동이 조심스러웠으며 그닥 말에 성수를 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수심이 비껴있었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속을 느끼는것 같았다. 어성도 전처럼 높지 않았고 활기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는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있는듯 자주 창문과 출입문쪽을 곁눈질해 보군 하였다. 좀 점잖아진것 같으면서도 처량해보이였다.

(타락할대로 타락한 배신자에게도 우울하고 쓸쓸할 때가 있는가? 왜놈들한테 배척을 받았는가?)

정두철은 마음속으로 그의 이러한 심정의 변화가 어디서 오는것일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는 우선 그 내막부터 알고싶었으나 초조해지는 마음을 지그시 눅잦히며 입을 열었다.

《참 반갑습니다. 이렇게 신정촌걸음이 잦아지다가는 장차 나와 함께 있게 되는게 아닙니까?》

박차석은 피끗 정두철의 얼굴을 쳐다보고나서 창밖에 시선을 준채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나야 사는 날까지 이렇게 끌려다니다말겠지. 백두산의 호랑이더러 어서 물어가라고 이 몸을 미끼처럼 내흔드는데 어째 물어가지도 않는구만.》

박차석은 종잡을수 없이 지껄이다가 문득 말을 잘못하였다는것을 깨달은듯 입을 꾹 다물고 정두철을 힐끔 쳐다보더니 전혀 다른 어조로 말머리를 돌리였다.

《나도 클클해서 침대에 누워 딩굴던 참일세. 실은 여기 오자마자 자네를 찾아보고싶었지만 나다니기가 싫었네. 갑갑한데 술을 들겠나? 별로 당기지 않는 모양이군. 실은 나도 생각이 없네. 이따 점심때 반주나 하지. 아직 적합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게로구만.》

그는 문쪽을 흘깃흘깃 곁눈질해보면서 자기와 관련된 말을 피하려고 하는것 같았다. 심중한 문제가 있는것은 사실인데 웬만해서는 스스로 말할것 같지 않았다.

《직업도 어디 마음대로 구하게 됩니까. 그런데 왜 세상이 이리 뒤숭숭합니까? 지금 시국형편이 어떻습니까?》

정두철은 자기도 속이 클클해서 못살겠다는 태도를 지으며 물었다. 박차석의 곪은 속을 뚱그쳐보자는것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박차석은 량미간을 찌프렸다.

《신문이랑 영화랑 못보나? 일본은 중국전장에서 승승장구한다는게구 올해 겨울안으로 7∼8년간 난치의 병처럼 물려받아오던 항일련군과 인민혁명군을 전멸해버리겠다는걸세. 이외에 다른 시국에 대하여서는 말이나 할수 있나?》

그에게서 말을 뽑아내기란 움츠러진 자라목을 일쿼세우는 일처럼 막연하게 생각되였다. 정두철은 한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있다가 갑자기 긴요한 말을 한다는듯 입을 그의 귀옆에 댔다.

《그런데 박형, 지금 우리 마을사람들이 뭐라고 소곤거리는가 하면 전번처럼 사람들을 마구 잡아갈것 같다고들 합니다. 그렇게 하려구 이 려관에 수많은 백정들이 모여들었다구 수군거리지 않습니까. 와보니 공연한 소리들이였단말입니다. 아마 못보던 자동차랑 사복한 경관들이 몇명 보이니까 지레 겁을 먹고 그런 소문을 돌린 모양이지요?》

순간 박차석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정두철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태연한 자세를 취하며 입을 벌렸다.

《체, 감옥밖이 감옥안보다 나은줄 아는 모양이지?》

정두철은 그의 기분이 점점 침울해지는것을 느낄수록 좀체로 그의 진속을 뽑아낼수 없을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놈들이 얼마나 극비에 붙이는 모략을 꾸미고있는가 하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문득 밖에서 가벼운 승용차의 경적소리가 울렸다. 박차석은 깜짝 놀라며 창문가에 다가서서 마당을 내다보았다. 정두철은 자연스레 그쪽에 눈길을 돌리였다.

려관마당으로는 지금 수리중에 있는 《포드》보다는 좀 작으나 그대신 경쾌해보이는 신형의 승용차가 미끄러져들어오고있었다. 그 승용차에서 운전수가 뛰여내리자 마당안의 특무들이 술렁거리며 차쪽에 대고 인사했다. 박차석이도 승용차를 보자 낯색이 질리여 마구 흩어져있는 침대우의 이불을 차곡차곡 포개여 머리맡에 쌓았다. 그자의 상전이 돌아온게 틀림없었다. 정두철은 모처럼 마련된 상면이 이로써 끝장날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였다.

잠시후 발걸음소리와 문기척소리도 없이 별안간 문이 활짝 열리였다. 그러자 박차석은 그 우람찬 몸을 활딱 일구어세웠다.

정두철은 그제야 문쪽을 바라보았다. 30을 넘겼을가말가한, 균형잡힌 사복신사가 거만하게 문고리를 잡은채 복도에 서서 방안을 살펴보고있었다. 네모반듯한 이마며 영채도는 눈길이며 도고한 자세가 그의 간단치 않은 신분과 위풍을 드러내고있었다. 덩지 큰 박차석은 매를 본 꿩처럼 꼼짝도 못하고 덤덤히 서있었다.

(그렇구나. 저놈이 차석의 상전이였구나. 그러니 저놈이 바로 오끼일지도 몰라.)

정두철은 점잖은 자세로 낯선 그 사나이쪽을 향해 묵례를 보냈다. 그러면서 오끼일수도 있는 그자의 낯짝과 차림새들을 머리속에 새겨넣었다. 오만무례한 그놈은 정두철을 힐끔 눈주어보고서는 문을 쾅하고 닫아버리였다.

《개새끼···》

박차석은 도적이 개 꾸짖듯 웅얼거리며 침대발치쪽에서 양말을 집어들고 엎디여 그것을 발에 꿰느라고 씨근덕거리였다.

정두철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에 더 머물러있어야 했다.

《참 모처럼 찾아왔지만 돌아가야 할가봅니다. 회포도 채 풀지 못하고···》

그가 마지 못해 일어서는척 하니 박차석은 객기를 부리며 소리쳤다.

《일없네. 앉아있게. 아마 그자가 나를 찾을게야. 갔다올 때까지 기다리게. 밖에 나가지만 않으면 되네. 이따 점심을 같이 나누고야 보내겠네.》

아니나다를가, 이때 문이 열리더니 차체에 몸을 기대고 해바라기를 하고있던 왜놈이 들어서며 뜻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중좌님이 부르오. 빨리 가보오.》

박차석은 서둘러 양복을 걸치면서 맞갖지 않게 중얼거렸다.

《흥 제기랄!》

그는 수건을 꺼내여 코를 요란하게 풀고나서 왜놈을 따라 나갔다.

혼자 남은 정두철은 응접탁에 팔굽을 고이고 이마를 짚었다.

(중좌라고 했지? 옳다. 오끼중좌, 이놈이 특수기관의 우두머리란말인가? 그러면 정통으로 맞다들렸는데··· 어떻게 해야 내막을 알아낼가? 한데 박차석이 나를 미주알고주알 불어대는건 아닐가? 오끼중좌가 이 지역의 지하조직색출에 관여한다면 혹시 나의 본명쯤은 기억하고있을수도 있지. 제발로 호박쓰고 돼지우리에 뛰여든건 아닐가?)

그는 문옆에 다가가서 열쇠구멍으로 맞은편 방의 문앞을 살펴보았다. 한컬레의 코고무신이 놓여있을뿐 여전히 닫겨있었다.

그는 방안을 거닐며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잠시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차석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자바람으로 양복저고리를 벗어 침대우에 내던지고 양말을 뽑아 여기저기 집어던졌다.

《개같은자식, 체통에 맞지 않게 잔소리질만 하면서···》

그는 게두덜거리면서 상두대쪽문을 열어제끼더니 사기병을 들고 응접탁으로 다가왔다. 그는 두개의 잔에 성급히 술을 부었다.

《마시라구. 마시구 밥먹지!》

정두철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나때문에 말을 들은게 아닙니까?》

박차석은 도리질을 하면서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흘금흘금 문쪽을 바라보며 거퍼 석잔을 랭수마시듯 하고나서야 대답하였다.

《잔소리를 했을뿐일세. 내 저놈새끼들을··· 엥히···》

박차석은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띄게 흥분해있었다.

《내 말을 들어보라구. 저놈들은 나를 낚시미끼처럼 써먹으면서도 말끝마다 무슨 은총을 베풀고있는듯이 우쭐대며 을러메네, 두벌세벌 죽이고서도 무슨 호강을 시킨다는거야!》

그는 벙거지시욱 긁듯 분명치 않은 소리로 주절댔다.

건넌방에 관심을 두고있던 정두철이 문쪽을 바라보자 박차석은 문이 열린줄 알고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었다. 그는 문이 닫긴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다시 머리를 젓기 시작했다.

《박형, 무슨 그런 듣기 거북한 말씀만 하십니까? 더구나 내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시면 오히려 내가 자리를 피해야 옳을것 같습니다.》

주기가 오른 박차석은 긴팔로 정두철의 목을 휘감았다. 정두철은 진저리가 나는것을 겨우 참았다.

《세상은 다된 세상이야. 자네 아까 날더러 지금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지?》

박차석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망탕 지껄여댔다. 그는 마침내 속을 터놓기 시작한것이였다. 그러나 말소리는 낮았다.

《저 맞은편방에 갇혀있는분이 뉘신지 모르지?··· 정말 모르는가?》

그는 술을 쭉 따라마시고나서 부르짖었다.

《김성주의 할머님이시야. 김일성장군의 조모님을 왜놈들이 앞세우고 다닌단말이야!》

박차석은 주먹으로 책상을 탕 치고나서 가슴을 쥐여뜯었다.

《네? 무슨 그런 소릴···》

정두철은 믿을수 없다는듯 입을 하 벌리였다.

《놀라지 말게. 글뒤주인 자네는 더구나 의아해할걸세.》

순간 정두철의 눈앞에는 문앞에 놓여있던 한컬레의 고무신이 또다시 떠올랐다.

(이게 정말일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수 있을가?)

정두철은 박차석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외람된 말이지만 믿기 힘든데요.》

《정신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하겠나. 저 오끼란자가 만경대에서 조모님을 련행해오게 했네. 전쟁으로써는 유격대를 없앨수 없다면서 장군님을 설복하여 마음을 돌려세우겠다는 수작일세. 할머님을 자동차에 모시고 백두산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느라면 소문이 나서 유격대가 할머님을 모셔가겠다고 맞받아나온다는걸세. 그렇게 되면 할머님이나 그 시중군들의 입을 통해서 장군님께 제놈들의 말이 전달되게 하자는 수작이야.

장군이 귀순하면 일본군 대장을 시키고 재만조선인자치회 주석자리든가 동삼성총도독자리를 주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나. 장군의 마음을 괴롭히고 부담을 씌우려는 목적이 하나있고 혹시 할머님과 그 시중배들이 유격대에 걸려들어 유격대사령부까지 안내되는 경우가 생기면 뒤를 밟아 장군의 소재지를 밝혀내겠다는게야. 개같은놈들! 아까 오끼라는놈을 보았지? 그놈은 지체도 별로 없고 나이도 젊지만 무슨 재간이 있는지 관동군사령관, 관동군참모장, 군정부최고고문의 수염을 잡았다놓았다 하면서 롱간을 부리는 간악한놈일세. 이제는 아까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한가?》

정두철은 눈을 퀭하니 뜬채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의 말을 더 들어야 할것 같았다.

《온 세상을 떨떨하게 할 전고미문의 모략이야. 아직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 못하겠나? 할머님과 함께 차에 앉아서 유격대에 걸려드는 날까지 무한정 백두산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는것이 내 업일세. 자동차가 폭파되거나 유격대에 붙잡혀 처단되는 날까지 어서 나를 잡아갑소사 하고 전조등을 켜대고 경적소리를 울리며 백두산기슭을 돌아다녀야 한단말일세.》

진실을 말하면서부터는 그는 기염도 객기도 부리지 않는 온전한 사람이 되였다. 정두철은 문득 불성모양이 된 자동차가 떠올랐다. 정두철은 차차 피가 끓기 시작했다.

《박형!》

정두철이는 그의 손목을 쥐면서 다정히 말했다.

《듣고보니 박형의 처지는 참말 딱하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박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형이 지금이야말로 처신을 똑바로 할 때라고 봅니다.》

《처신? 어떻게말인가? 감옥에서는 탈옥도 기도했고 석방되여서는 도망도 쳐보았네. 하지만 겨레의 사랑을 받을 박차석은 없어지고 처단받아야 할 박차석이만 남았네.

왜놈들 총에 죽었더라면 후날 조국이 광복된 다음에 수많은 애국렬사들의 이름속에 이 이름도 렬거될수 있을거야. 그러나 이미 나는 눈잃은 준마라 용장을 섬길수 없고 날개잃은 수리개라 날고싶은데로 날지 못하게 되였네. 아직 남아있는것은 숨통뿐인데 이제 전날의 내 전우들인 유격대원들이 쏴버리면 나의 이름이 상기될 때마다 사람들은 침을 뱉을거네.》

사실 그는 한쪼각이나마 진실을 말하고있었다. 이번에 와보니 박차석은 한걸음 더 타락의 길에 들어섰으며 더 깊이 반역의 나락에 빠지였다. 이제는 동정도 련민도 가지 않고 역겹고 가증스럽기만 하였다. 이미 그의 운명의 더러운 종말은 불보듯 명백했다. 정두철은 자기 리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증오와 분격을 억누르면서 태연하게 말하였다.

《박형, 다시는 내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지 마시오! 지금 박형이 장군님의 조모님을 모시고다닌다니 조선사람으로서 량심을 지켜야 할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봅니다. 이것은 나의 우정의 호소라기보다 민족적감정의 호소입니다.》

박차석은 미소를 짓고나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 소용없네. 죽을놈은 나 하나뿐이야. 그러나 누구든지 나같은 처지에 빠져봐. 그때는 모두 나처럼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할게구 말해도 믿지 않을거야. 우정이 무엇이고 애국심이 무엇인가? 겨레도 있고 동무도 있지만 나는 나대로 죽어간단말일세.》

정두철은 마음을 진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옆방에 할머님께서 계신다니 백배로 자중하게 되였다.

정두철은 그를 점점 곤궁에 밀어넣는것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약간의 리성이라도 가지고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그 화가 조모님께까지 미칠것 같았다.

정두철은 침착하게 생각해보고나서 그의 손목을 움켜쥐였다.

《박형, 우리가 뭐 당장 죽게 된 사람이요? 탄실이가 이런 때 박형의 몰골을 보았으면 기절하겠소.》

박차석은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정두철을 뻔히 바라보았다.

《탄실이··· 그 계집도 똑똑치 못해. 사람의 겉만 보고 속은 보려고 하지 않는단말이야. 왜놈들과 함께 다니니까 나를 매국노처럼 여기지. 코 한번 내밀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시켜 문전에서 내쫓았단말일세. 탄실이는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도 않아. 나처럼 자기를 사랑하고 위해줄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다구!》

눈을 절반쯤 감은 박차석은 가늠할수 없는 표정으로 술에 취하기라도 한것처럼 고개를 건둥거리고있었다.

열두시 고동이 앵하고 울려왔다. 점심시간이 되였다. 복도에서 신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르르 문이 열리였다. 려관의 심부름군처녀가 식사가 준비되였다고 알리였다.

《기왕 알게 되였으니 주저할것도 없네. 나같은 쓸개빠진놈한테야 무슨 도리가 있고 타산이 있겠나? 나같은건 개돼지처럼 고통도 가책도 없고 친척친지도 리해해주지 않을거네. 그러나 할머님의 처지는 정말 보기 안타깝네. 손자를 만나보고싶은 할머님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하겠나만 할머님께서는 손자가 왜놈의 올가미에 들것 같아 아예 그런 소문도 내지 못하게 하신다네.》

정두철은 목이 메였다. 그 말까지 듣고보니 정말 사령관동지의 조모님이 옆방에 계신다는 믿음이 갔다. 그리고 박차석이의 일거일동이 전보다 달라진 까닭도 리해되였다.

《뜻은 영원하고 인생은 순간이라고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엉망진창일세! 사람의 힘으로 이 혼탁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기나 할걸 이러는지?···》

박차석은 실망과 비관 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정두철은 무쇠주먹으로 그자의 건둥거리는 골을 치고싶었다.

(세상이 깨끗할걸 바라면 너부터 깨끗해라. 혼탁된 세상이 저주스러우면 너부터 투쟁의 길에 나서야 할게 아니냐?)

정두철은 할머님께서 치욕과 고초를 겪고계신것을 안 다음부터 마음속에 맺혀진 의분이 화산처럼 터져올라오는것을 겨우 참아냈다.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정두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차석은 정두철에게 방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눈짓한 다음 조용히 맞은편 방문을 열었다.

(박차석의 말이 정녕 사실이였단말인가? 그렇다면 녹초가 되여버린 승용차는 할머님을 모시고 다니느라고 그 꼴이 되였단말인가?)

그는 조모님께서 겪으실 고통과 신고를 짐작할수록 그것이 너무나 엄청나고 상상할수 없는것이여서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두철은 맞은편 방을 살펴보았다. 마주보이는 방안은 해빛이 비쳐들어 환했다.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는 하얀 조선치마저고리에 하얀 수건을 쓰신 늙은이 한분이 홀로 앉아계시였다. 평안도의 풍습대로 머리수건의 량끝이 우로 솟게 쓰신 조모님의 눈과 입언저리에는 장군님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자취가 력력했다.

정두철은 가슴이 후두두 뛰고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이였구나. 이게 사실이였구나!)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의식을 잃어버린듯 조모님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끌리듯 허둥지둥 문가로 다가갔다.

조모님께서는 먼 고향하늘을 찾아보듯, 손자가 있으리라고 믿는 백두산상상봉을 살펴보듯 눈길을 창가로 돌리고 먼곳을 바라보고계시였다.

조용하고 엄숙한 눈길에는 내키지 않는 험한 길을 걸으시는 괴로움과 혈육을 근심하는 처량한 빛이 어려있었고 기운을 내고저 안깐힘을 쓰시는 억센 기상은 한몸이 지칠대로 지쳤다는것을 나타내고있었다.

두팔로 방바닥을 짚고 하얀 바람벽을 지시고 까딱없이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시는 할머님의 옆에는 술방치가 큼직큼직하고 굵직굵직하게 뜬 밤색목도리가 포개여져있었고 그옆에는 조롱박만 한 보따리가 놓여있었다.

(조모님,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벌써 나라를 찾고 혈육들에게 자유를 가져다드렸더라면 이런 괴로움을 겪으시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는 눈이 이글거리였다. 가슴속에 사품치는 끝없이 많은 말을 한마디도 여쭐수 없는것이 더 안타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