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2편 11


 

제 2 편

11

 

수업준비를 끝낸 정두철은 직원실의 창문곁에 붙어앉아서 운동장을 내다보고있었다. 땅거미가 들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의 부리부리한 두눈은 더욱더 커지는것 같았다. 그는 오래동안 한모습으로 앉아서 책보를 끼고 운동장을 지나 교사로 들어오는 학생을 하나하나 세여가며 마음속으로 출석을 긋고있었다.

직원실의 창가에 나가앉아서 학생들의 출석정형을 미리 알아보는것은 요사이 정두철에게 생긴 새로운 습관이였다.

학생들은 마을이 불타버린후 강한 충격때문에 공부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죽든살든 왜놈들과 결판을 내자고 의분을 터뜨리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까짓것 글은 깨우쳐 뭘하겠는가고 하는 학생도 나타났다.

정두철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학생네 집을 찾아가 일도 도와주면서 다짐을 받군 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해뜨는 아침등교시간과 달뜨는 저녁등교시간에는 창가에 붙어서서 마당에 들어서는 학생들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오늘밤 야학생들을 기다리는 정두철의 심정은 더욱 초조하였다.

운동장은 새까맣게 어두워 처마밑에 다가선 사람의 자태도 가려보기 힘들었다.

이윽고 운동장기슭에 서있는 황철나무우듬지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한쪽귀가 이지러진 달이 솟아올랐던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이 기다리는 조복례는 아직까지 등교하지 않았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수 없었다. 정두철은 가슴을 치미는 불안을 참아내며 태연하게 교실로 들어갔다.

이미 직원실에서 출석정형을 다 장악한 뒤였으나 그는 질서대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출석을 그었다.

《조복례학생. 》

물론 대답이 있을수 없었다.

그가 호명을 중단하자 학생들은 머리를 쳐들고 사방을 바라보며 복례를 찾아보았다.

《조복례학생. 》

정두철은 다른 학생들이 대답을 안했을 때와 조금도 다른 빛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러자 학생들은 수군거리며 조복례가 앉군 하던 빈 책상을 돌아보았다.

《안왔구나. 》

《왜 안왔을가?》

창문옆 맨뒤 복례의 자리옆에 앉아있는 순실에게 눈길을 던진 정두철은 다른 학생의 경우와 꼭같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순실학생!》

몸이 여위고 얼굴이 피여나지 못한 순실이는 겁질린 눈으로 선생을 바라보며 천천히 일어났다.

《조복례학생이 어째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까?》

순실이는 창밖을 흘끔흘끔 곁눈질해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선생님, 복례는 아직 안돌아왔습니다. 》

순실이는 선생이 복례가 무슨 일때문에 어디에 갔다는것을 다 알고있는줄로 여기는 눈치였다.

《복례학생이 어디에 갔기에 아직 안왔습니까?》

순실이는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지으며 다급히 설명했다.

《복례가 선생님께 말씀올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어머니 약지으러 아침에 큰거리에 갔습니다. 좀 늦더라도 이제 꼭 올겁니다. 》

순실이는 자기가 죄를 짓기라도 한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정두철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었다.

《사정이 있어서 학교에 오지 못하거나 늦을수 있다고 생각하면 미리 알려야 하겠는데 학생들이 규률을 지키지 않기때문에 수업에 지장을 주군합니다. 의사는 가까운 신정촌에도 있는데 왜 하필 먼 큰거리까지 갔습니까?》

《저··· 마을늙은이들이 큰거리에 가면 인정도 후하고 용한 의원이 있다고 가보라고 해서 그곳으로 간것 같습니다. 》

《앉으시오. 》

정두철은 시종 엄했다.

제일 뒤구석에 앉아있던 학생이 중얼댔다.

《이젠 오긴 다 틀렸지. 큰거리는 여기서 30리길인데 처녀가 깊은 밤에 산골길을 걷다가···》

부손이라는 그 학생은 무엇이 우스운지 킬킬하고 웃음소리로 말끝을 얼버무렸다. 부손이는 원래 괴춤에 손을 지르고 술판이나 투전판을 따라다니던 건달군인데 갑자기 야학에 받아달라고 성화를 먹이는바람에 정두철은 물론 학생들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서 수상쩍게 여기였다. 조직선을 통하여 알아보니 경찰분서의 끄나불이였다. 정두철은 야학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자를 써먹기로 결심하고 학교에 받아두었다. 그대신 씨먹지 않은 소리를 할 때마다 진땀을 빼놓군 하였다.

《부손학생, 일어서시오.》

오늘도 정두철은 에누리없이 그의 미련한 꼭뒤를 잡아일으키듯 꼿꼿이 일으켜세웠다.

《학생은 호명도 하지 않았는데 왜 함부로 떠들어서 수업규률을 어지럽히려 합니까? 그리고 처녀가 밤길을 걷는게 어쨌단말입니까?》

부손이는 뒤덜미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처녀가 혼자 다니다가 나쁜놈들한테 걸리면 야단 아닙니까?》

《부손학생, 학생은 아주 인식이 잘못 섰습니다. 경찰과 군대가 철통같이 치안을 유지하고있는데 무슨 나쁜놈이 초저녁부터 행인에게 달려든단말입니까? 부손학생과 같이 말하는것은 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것입니다. 》

정두철은 부손이가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단단히 오금을 박았다.

사실은 부손의 말이 별로 그른데가 없었다. 정두철이 불안해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경찰서에서 놓여나와 앓고있는 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간다는 구실을 대고 복례는 오늘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될 자기 대신 큰 거리에 련락을 간것이였다. 그런데 날이 어두울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복례가 험한 밤길을 걷는것도 걱정스러웠고 조직에서 어떤 임무가 떨어졌는가 하는것때문에도 왼심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정두철은 금시 복례가 두주먹을 부르쥐고 뛰여들수도 있는 운동장쪽을 살펴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상적인 수업을 계속하였다.

정두철은 《일심동체》란 단어를 자세히 깨우쳐주고나서 다음과정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지금까지 선생이 설명해준 <일심동체>란 말을 가지고 단문을 지어보겠습니다. 》

정두철은 오늘 국어시간에도 전번에 이어 《조국광복회창립선언》문에 나오는 어려운 낱말들을 골라서 설명해주었다. 부손이는 선생이 내놓은 낱말이 어데서 나온것인지 모르고있지만 반일회나 반일청년회, 부녀회에 망라된 학생들은 그 출처를 대체로 알고있었다.

순실이는 선생이 문제를 제시하자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있는지 미소를 띤 얼굴을 들었다. 정두철은 그를 처음으로 호명했다.

순실이는 정작 지명을 받자 얼굴을 붉히며 쭈밋쭈밋하더니 간신히 일어났다. 그는 고름끝을 주무르며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들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면 가난을 견디여낼수 있고 겨레가 일심동체가 되면 외적이 무섭지 않습니다.》

간신히 말을 끝마친 순실이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주저앉았다.

정두철은 저으기 놀랐다. 순실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설사 그런 말을 안다고 해도 조심스러워 말하지 못할것이다. 그는 한참후에야 순실이가 어떻게 그런 말을 대담하게 할수 있었겠는가 하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순실의 아버지는 반일감정이 강한 늙은이로서 몇해전까지 서당의 훈장이였다.

학생들은 조용히 순실의 단문을 입안으로 외우고있었다.

정두철은 또 다음 학생을 지명하였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복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가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부손이만 없대도 둬사람 마중을 보낼수도 있을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수업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부손학생이 대답해보시오. 》

학생들의 동정만 살피고있던 부손이는 물맞은 강아지모양 온몸을 흔들어대면서 힘겹게 일어났다. 아무런 생각도 해두지 않은 그는 희고 큰 손으로 커다란 머리정수리를 벅벅 긁었다.

《우리 식구는 아침에 일심동체가 되여 밥을 먹었다. 》

교실안에는 갑자기 와- 폭소가 터져올랐다.

녀학생들은 입을 싸쥐고 삿자리에 엎디다싶이 허리를 굽히고 웃어대는데 남학생들은 몸을 젖히고 교실이 떠나갈듯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교실의 뒤쪽문이 소리없이 열린것은 이때였다. 학생들은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두철은 자기의 온몸이 긴장되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문쪽에 눈길을 던졌다.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복례의 조심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왼쪽팔에 무명목테를 걸치고 손에는 크지 않은 보꾸레미를 든 복례는 바른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에서 노란 솔잎과 보긋딱지를 뜯어내면서 조심스럽게 정두철을 바라보았다.

(오긴 왔구나. 밤길을 걸어서···)

큰 시름에서 벗어난 정두철은 자기도모르게 긴숨을 내쉬였다. 어찌나 긴장되였던지 입에서 단김이 새여나오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 복례에게 임무수행정형을 알아볼수도 없었지만 그가 온것을 모르는척 할수도 없었다. 정두철은 다른 학생들이 지각했을 때 늘 그렇게 해온것처럼 지각한 리유를 학생들앞에서 따지였다.

《복례학생, 가운데로 나오시오.》

정두철의 말투는 퍼그나 쌀쌀하여 복례자신은 물론 순실이까지도 저으기 휘둥그래진 눈길로 정두철을 바라보았다.

《왜 늦었습니까?》

정두철은 그를 면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복례는 머리를 푹 숙이였다.

《복례학생, 대답하시오.》

복례는 한참동안 아무말없이 서있다가 천천히 보꾸레미를 풀었다. 보꾸레미에는 참지로 싸서 첩을 지은 한제의 초약이 들어있었다. 약첩에서는 감초내가 짙게 풍겼다.

《어머님 병에 쓰려고 약지으러 갔다가··· 학교에 늦지 않으려고 뛰여왔지만···》

복례는 휘줄근해진 치마자락을 감싸며 떠듬떠듬 말했다.

《어머님의 병구완때문에 갔다온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학교에 이름을 올려놓은것만큼 사전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례학생 말해보시오.》

복례는 마른기침을 깇고나서 간신히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고치겠습니다. 》

《필기장을 가지고 왔습니까?》

복례는 연필을 매단 공책을 들어보이였다.

《수업에 참가하시오.》

정두철은 수업을 계속했다. 나머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무척 지루했다. 빨리 조직의 지시내용을 알고싶어 조바심이 치밀었으나 꾹 참고 마지막까지 수업시간을 다 채웠으며 공부가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간후에도 천천히 교실과 직원실을 거두고 등잔불을 건사한 다음 손수 현관문의 자물쇠를 채웠다.

마을은 고요하였다. 야학생들이 집에 헤쳐져가면 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밝은 달빛은 마당과 지붕우에 쏟아지고 어둠속에 잠겨있는 이깔나무들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가에 세모난 우듬지를 가지런히 그려놓았다.

운동장에 나서서 깊이 잠든 마을을 내려다보던 정두철은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가 언덕을 다 내려섰을 때 가벼운 인기척소리가 들리고 나무뒤에서 복례가 나타났다.

정두철은 자주 만나는 사이이지만 이 밤은 어째선가 복례의 모습이 변한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목테빛이 달라졌다.

조복례는 늘 눈같이 흰것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흰 목테를 두르고 다녔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색인지 진하게 물든 목테를 두르고있었다. 아마 복례는 흰 목테를 두르고다니면 표가 난다고 한 자기 말을 듣고 물을 들인 모양이였다.

《걱정을 끼쳐드려 미안해요. 》

복례는 가깝게 다가서며 속삭이였다.

《수고했소. 어두워질 때까지 오지 않아서 아닌게 아니라 걱정스러웠소. 리원과 신흥에 갔던 일이 잘되였다오?》

정두철의 질문은 밑도끝도 없었으나 복례는 김수남에 대해 묻는다는것을 알아차렸다. 현재 권영벽은 품팔이군 김수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있었다. 큰거리조직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라는 련락이 왔을 때 정두철은 권영벽이가 리원에서 돌아온게 분명하다고 지레짐작하고 그 소식을 알고싶어했었다.

《리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한테 련락을 보냈더군요.》

정두철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에게로 다가섰다.

《일이 잘된것 같아요. 김수남선생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

《음, 얼굴이 밝다면 일이 잘되였다는것을 말하오. 동무가 가니 반가와하지?》

정두철은 권영벽과 관련한 이야기를 더 듣고싶었다. 그런데 복례는 그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머리를 숙이였는데 달빛이 어린 그의 얼굴에 수집은 미소가 어리고있었다.

《김수남선생님의 부인을 보셨어요?》

복례의 물음은 뜻밖이였다. 정두철은 라명희를 알고있었다. 그렇지만 복례의 뜻밖의 물음과 더구나 수집은 웃음때문에 인차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는 그렇게 예쁘고 살틀한 아주머니는 처음 보았어요. 인정이 있고··· 저더러 앞으로 가깝게 지내자고 손목을 꼭 잡아주더군요. 공부도 많이 한것 같더군요. 》

정두철은 소리없이 웃으며 혼자서 생각했다.

아마 복례는 그 예쁜 라명희가 산에서 총을 메고 싸우던 강직한 인민혁명군 녀성소대장이라는것을 알면 놀랄것이였다. 오래지 않아 복례는 라명희와 손을 잡고 지하사업을 벌려나갈것이다. 정두철은 라명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비치지 않고 말을 돌리였다.

《그래 김수남선생한테서 무슨 지시를 받았소?》

복례는 재빨리 주변을 곁눈질해보면서 속삭이였다.

《지금 오끼라는 일제특무기관우두머리와 박차석이라는 변절자가 다시 신정촌려관에 와서 배겨있답니다.》

정두철은 얼떨떨해서 그의 말을 두번 세번 되뇌여보았다. 일제특무기관의 우두머리가 변절자를 끼고 이 지방에 다시 나타났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놈들이 무엇때문에 백두산주변을 계속 돌아치는가? 이 사실에 대하여 조직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있으며 자기에게 어떤 지시를 주겠는가?

그런데 복례는 어째선지 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정두철은 환한 달빛속에서 그의 얼굴에 짙은 불안이 깃든것을 보았다. 복례는 아름다운 달을 바라볼 경황조차 없는듯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걷기만 하였다.

정두철은 복례가 어머니의 병때문에 매우 근심하고있는것을 알고있으면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것이 가책되였다.

《참, 어머니가 저녁이나 끓여자셨는지도 못알아보았겠구만.》

정두철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제가 약을 가지고 온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것이 더 자연스러울것 같아서 집에 들리지 않고 곧장 학교로 갔댔어요.》

복례의 일거일동은 신중하였다. 그를 비밀사업에 인입시킨지는 몇달 되지 않았으나 생각하고 처신하는 품이 로숙한 지하공작원같이 빈틈이 없었다.

《그 약을 대접하면 어머니의 병이 좀 나을가?》

《좋은 약이라고들 해요. 참 김수남선생님도 인정이 후한분이더군요. 어머님에 대해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권영벽의 모습을 그려보는 그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어려있었다.

《어머니가 욕하시겠소. 자주 찾아가 병문안이라도 드려야 할걸.》

《어머니도 선생님을 자주 외워요. 그러나 집에 오시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두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좋은 어머니요. 어머니가 나를 리해해주지 않으면 어쩌나해서 언제나 마음이 가볍지 않았소. 그 대신 복례가 더 잘 구완해드리오.》

《알겠어요. 저는 어머님 병때문에 그러는게 아니예요.》

복례는 분명 전달하기로 된 사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오끼와 박차석을 어떻게 하라고 했소? 지시한것이 있을게 아니요?》

복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다음 더 끌수 없다는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박차석을 만나는척 하면서 빨리 오끼가 왜 싸다니는지 내막을 밝히라고 했어요. 아주 심상찮은 일이라면서요.》

지시는 간단명료하였다.

《그게 다요?》

복례는 고개를 쳐들고 정두철을 바라보다가 다시 숙이며 나직이 한숨을 쉬였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예요? 놈들은 선생님과 같은분들을 찾아내려고 돌아칠수도 있지 않아요?》

복례는 다시 곧바른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에는 말로 형용할수 없는 불안과 걱정의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그의 온 정신은 정두철에게만 쏠려있는것 같았다.

정두철은 고개를 젖히며 가볍게 웃었다.

《내가 걱정스럽소? 복례가 전번 <토벌>때에는 굳세고 기민하게 행동해서 무모한 희생을 내지 않게 했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약해진것 같소.》

그는 몇걸음 걸었으나 복례는 못박힌듯 서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두철은 돌따서서 그에게로 되돌아갔다.

《제가 할 일이라면 위험하다 해도 걱정을 안하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이 위험한 일을 하면 안돼요.》

그는 복례의 류다른 감정을 느끼자 기쁨보다 두려운 감정에 휩싸이였다. 순진한 녀성의 사랑을 감당할수 없는 사람이라고 마음먹고있던 그는 자기 한몸으로도 겪기 어려운 시련을 이 순진한 처녀에게까지 들씌울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정두철은 조복례가 자기의 모든것, 현재와 미래까지도 서슴없이 자기에게 기울이는 모습과 그 진정을 못본체, 못느낀체 외면해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복례는 한걸음 다가서며 따지였다.

《찾아가 만나시겠어요?》

《래일 당장.》

그는 조복례의 근심이라도 덜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없소. 박차석은 나하고 동창생이였으니 자연스럽게 만날수 있소. 범을 잡자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못들었소?》

정두철은 큰소리를 치며 슬금슬금 복례네 집쪽으로 앞서 걸었다.

《늦었소. 빨리 집에 들어가오. 어머님이 걱정하겠소.》

복례는 자기 집을 지나서도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조심하세요!》

복례는 입가에 손을 대고 정두철이쪽으로 허리를 숙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정두철은 복례가 자기 집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간 기미를 채고야 뒤를 돌아다보았다.

방금까지 자박자박 발걸음소리를 내며 자기를 따라오던 복례대신 가래나무가지끝에 한쪽귀가 이지러진 달이 걸려있었다. 자기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달을 쳐다보는 그의 가슴은 얼얼하게 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