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1편 5


 

제 1 편

5

 

낯익은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밀영이 가까와진것을 느낀 김주현은 차차 흥분되였다.

그는 검은 눈섭을 쭝깃 치켜들고 방금 들어서기 시작한 밀영어귀를 살펴보았다. 바른쪽에는 가파로운 높은 산이 있고 그밑으로 야산들이 바투 다가서있었다. 왼쪽에는 넓지 않은 벌판이 열리고 그 가운데로 풀숲을 가로질러 희미한 달구지길이 보이였다. 그 맞은편쪽에는 산발끝이 활등같이 밖으로 휘였는데 그것은 밀영주변을 따라 담장처럼 늘어섰다.

김주현에게는 그 모든것이 낯이 익었다. 정든곳이기도 하였다. 지난해 가을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얼마 안되는 대원들과 함께 밀영을 지었던것이다. 바로 여기, 그토록 땀흘리며 정성들여 마련한 밀영지에 지금은 사령관동지께서 와계신다는것을 생각하니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밋밋이 굽이쳐 사라진 골짜기 저편에서 금시 사령관동지께서 인자하신 웃음을 지으시며 나오실것 같고 그뒤로 안해와 아들이 졸졸 따라서며 기쁨에 넘쳐 자기를 맞이할것만 같았다.

그러나 김주현은 그 모든 흥분을 억제하고 긴장한 눈길로 사방을 날카롭게 살피면서 대오를 이끌고 밀영어귀에 들어섰다. 대오의 그 누구도 련대장의 이런 심중을 알지 못했다. 김주현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다잡을줄 알았으며 사령부가 가까이에 있다는것을 느끼는 순간부터는 곧 사령부의 안녕을 위한 순찰근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외모부터 엄숙해졌다.

《련대장동지, 여기가 밀영지로서는 그저그만이군요.》

문득 그의 뒤를 따르던 안희창이가 가슴앞에서 번쩍거리는 두타래의 탄띠를 추스르며 나직이 환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김주현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안희창은 김주현이가 자기의 말귀를 가려듣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던지 한발 앞서며 계속했다.

《정말 명당자리입니다. 앞은 멀리까지 바라볼수 있게 시계가 탁 트이고 뒤는 험한 산이니 교통이 편리할것이고 전투시에 빨리 유리한 계선을 차지할수 있겠습니다.》

김주현은 비로소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깊은 눈매로 안희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안희창이도 밀영지를 선택할줄 알만큼 자랐다는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왔다.

련대장의 눈빛을 보고 자기의 설명이 그에게 만족을 주었다는것을 느낀 안희창은 어깨가 으쓱해서 번쩍거리는 탄띠를 다시한번 추슬러올리고나서 뒤따르는 마동희를 돌아보았다. 밀영지에 대한 내 의견이 얼마나 그럴듯 한것인지 동무는 알만한가 하는 몸짓이였다. 아닌게아니라 김주현련대장에게서 그쯤한 인정을 받기도 쉽지 않는 일이였다.

이마에 질펀하게 내돋는 땀을 연신 훔치며 힘겹게 따라오던 마동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련대장의 칭찬을 받은것이 자기도 기쁘다고 그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던한 웃음을 지었다.

그바람에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주르르 미끄러져내려 면바로 안경알을 흐려놓았다.

마동희는 어쩌는수 없이 안경을 벗어들고 이번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서 앞서가라는 뜻으로 턱짓을 하였다.

안경을 벗어버리자 어딘가 엄하고 딱딱해보이던 그의 모습이 별안간 멍청해진것 같기도 하고 다시없을 호인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안희창은 성격에서나 외모에서나 모든 면에서 자기와 대조되는 마동희에게 날이 갈수록 마음이 끌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힘겨워할 때 공연히 으쓱해진 자기가 게면쩍기도 하였다.

《마동무, 이젠 다 왔어!》

안희창은 이렇게 말하며 동희의 배낭을 붙잡았다. 대신 메다주겠다는 뜻이였다.

그러나 동희는 행색에 비해서는 무던히 사치한 노란 우단쪼박으로 안경알을 분주히 닦을뿐 배낭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동희는 원래 곰의골밀영에서 떠날 때 희창에게 이번 행군길에서는 자기가 힘들어해도 못본척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기회에 자기를 더 단련할 결심이라고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 고백도 안희창이에게만은 했다. 그것은 동희를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성화를 먹이는것이 주로 안희창이였기때문이다.

그래도 안희창은 그런 장한 결심같은것을 그리 대단하게 쳐주지 않았다. 어느 벼랑길에서 또 배낭끈을 서로 한끝씩 붙잡고 옥신각신할 때 정일권이였든지 한초남이였든지 누군가가 옆을 지나치면서 동희동무한테 고운 누이동생이 있다는 눈치를 벌써 챈 모양이라고 악의없는 롱담을 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딱히 새겨듣지 못하고 억지로 배낭을 빼앗아서 메다주었는데 밤에 숙영을 하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뭔가 께름직하였다.

《여보 마동무, 동무한테 고운 누이동생이 있다는것이 사실이요?》

본래 곰상스럽지 못한 안희창의 말투는 별로 더 퉁명스럽게 따짐조로 나왔다.

마동희는 웃지도 않고 심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있지.》

《있다니? 그냥 보통누이동생이 하나 있다는거요, 진짜 고운 누이동생이 있다는거요?》

《고운 누이동생이 있지.》

《뭐 진짜···》

안희창은 대번에 풀이 죽어버렸다. 동무들이 그 누이동생때문에 배낭을 져주겠다고 그렇게 극성을 부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였다.

그는 시무룩해서 하루밤 잠자코 있더니 그이튿날부터 배낭을 져다주겠다고 더 극성을 부렸다.

안희창의 성격이 어떻다는것을 대개 짐작하고있는 마동희였지만 이렇게까지 엇먹어나오리라고는 생각 못했기때문에 한동안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안희창은 한술 더 떠서 배낭을 나한테 맡기면 누이동생까지 떼울가봐 그러느냐고 생억지를 썼다.

《그건 두고봐야지.》

마동희는 이렇게 선선히 응수하면서도 배낭만은 내주지 않았다. 그 역시 안희창이만 결코 못지 않게 검질긴 성격이였다. 그러나 안희창은 마동희의 그런 성격쯤 역시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히쭉 웃으며 저만치 앞서가는 련대장 몰래 동희의 귀전에 대고 수군거렸다.

《광복이 되기전에는 남들앞에서 처남이라고 부르지 않을테니 마음놓소.···》

희창이는 눈을 끔벅하고나서 솜씨있게 동희의 배낭을 벗겨 자기 어깨우에 걸치였다.

《허 참, 국화의 귀가 또 가렵겠군.》

마동희는 누이동생의 귀여운 얼굴이 피끗 떠올라 벙긋 웃으며 희창에게 배낭을 맡겨버렸다.

두 젊은이가 뭔가 옥신각신하는 눈치를 챈 김주현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무들, 다 왔소. 의복들을 단정히 하라구.》

련대장의 말한마디에 웅성거리던 대렬은 전류라도 통한듯 대번에 정숙해졌다. 일행은 봇나무가 하얗게 들어선 골안의 공지로 들어섰다.

벌써 밀영에서는 유격대원들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알싸한 연기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주현은 오랜만에 정든 제 집뜰안에 들어선듯 기쁨과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밀영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이때 봇나무가 늘어선 공지에서 유격대원들이 렬을 지어 행군해가고있었다.

김주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비록 사민복은 입었으나 렬을 지어가던 유격대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미소를 보냈으며 허리에 목갑총을 찬 지휘원이 반가운듯 이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련대장동지, 안녕하십니까.》

《잘 있었소?》

김주현은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빛이 빛나는 2중대장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그래 어델 가기에 이렇게 기분이 들떴소?》

《전투하러 갑니다. 일본놈 독립대대가 무송과 서강으로 통하는 도로에 나타났답니다.》

김주현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멋있는판이로군. 동무네 중대는 휘남현성진공전투에서도 한몫 든든히 했다지?》

《뭐 자랑할건 못됩니다. 휘남땅에서 왔다고 휴식만 하다가 겨우 오늘에야 전투임무를 받게 되니 모두 기세가 높습니다.》

《괜찮소. 그런데 다른 부대들은 어데 있소. 오중흡동무네 중대는 무얼 하오?》

《아마 더 중요한 전투임무를 받았을겁니다. 4중대야 언제나 제일 중한 임무만 받지 않습니까!》

김주현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안희창이도 마동희도 김주현과 2중대장의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눈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벙글거리고있었다. 이제는 정말 밀영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때문에 절로 가슴이 설레였다.

김주현은 다시 물었다.

《부대들이 많이 모인것 같은데··· 새 과업이요? 어떤 임무요?》

2중대장은 눈빛을 더욱 빛내이며 좀 우쭐해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항일련군이 <장춘작전>을 벌렸습니다. 그때문에 적들의 이동이 분주해지고 일제의 중국관내에 대한 침략이 더욱 확대되고있습니다. 이번에 련대장동지가 오게 된것도 이와 같은 정세변동과 관련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세가 복잡하고 긴장합니다. 그래서 사령부에서 큰 회의를 예견하고있는것 같습니다.》

2중대장은 낮은 목소리로 심중한 낯빛이 되여 말했다.

김주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부대들이 새로운 임무를 받고 떠나는것이 분명했다. 김주현은 자기가 소부대의 활동과 관련하여 권영벽에게 통신을 보낸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련대장동지, 우리가 때마침 왔습니다.》

안희창의 들뜬 말이였다. 그러나 김주현은 벌써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그는 이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던 예감이 면바로 들어맞았다는 강한 흥분을 느끼고있었다.

김주현은 소부대를 이끌고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일제가 《7.7사변》을 전면전쟁으로 확대하고 북부, 중부, 남부전선을 폈으며 한편 《장춘작전》에 일떠선 항일련군원정부대들이 대하처럼 적의 집결처를 향하여 흐르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이와 함께 광범한 중국인민들의 반일기세를 타고 오래동안 끌어오던 국공합작도 곧 실현될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런 급변하는 정세하에서 이제 사령부에서도 새로운 전략전술적대책을 세우게 될것이라는 예감이 순시도 진정할수 없는 흥분속에 번쩍하고 떠올랐던것이다. 그것이 어떤 대책이겠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김주현은 혁명의 급격한 앙양과 그에 따르는 보다 적극적인 군사행동이 있을것이며 그것이 우리 혁명의 승리를 앞당기게 되리라는것을 확고하게 믿었다. 그리하여 김주현은 정치공작과 지하활동보다 공개적인 무장활동으로 넘어갔고 이와 관련한 사령부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권영벽에게 련락을 띄운것이였다.

밀영에 도착한 이 순간 김주현은 자기의 결심이 사령부의 의도와 퍽 가깝다는것을 느끼였다.

그러면 새 임무는 무엇인가. 분명 국내정치공작보다 더 중대하고 보람찬 임무일것이다. 김주현은 사령관동지의 구상을 실현하는 싸움에 한몸바칠 결심을 굳히며 걸음을 다그쳤다.

김주현은 빨리 사령관동지께 달려가 소부대가 명령대로 돌아왔음을 시급히 보고해야 하겠다는 한가지 생각에 골몰하고있었다.

김주현이 봇나무숲 변두리를 지나 약간 둔덕진 소나무숲어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소나무줄기사이로 가름대를 두르고 풀대로 웃썰미를 한 풀막이 바라보이였다. 서늘한 그늘을 던져주는 그 풀막밑에서는 키가 크고 어깨가 쩍 벌어진 장대한 유격대원이 이쪽을 등지고 서서 무엇인가 하고있었는데 그의 손끝에서 예리한것이 해빛에 번쩍이였다. 김주현은 그의 약간 굽어든 어깨와 군모를 뒤로 제껴쓴 모습을 보고 그가 기관총소대장 강철룡임을 인차 알아보았다. 이쪽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강철룡은 사민복차림을 한 김주현을 의아스레 쳐다보더니 이윽하여 《련대장동지!》 하며 커다란 몸집을 날파람있게 움직여 달려나오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총기름이 한벌 발린것을 발견한 그는 어쩔수 없다는듯 손을 비켜들고 웃기만 하였다.

《왜 손이 총기름에 푹 젖었소. 무얼 하오? 새 기관총을 분해결합하던길이요?》

《련대장동지, 도착을 축하합니다. 내 오실줄 알았지요. 국내에 들어가자마자 왜놈들을 족치고 금을 빼앗아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강철룡은 묻는 말에는 관심이 없는듯 제 말만 하였다.

《그래 우리가 올줄은 어떻게 알았소?》

《아, 이런 때에 련대장동지가 부대에 없어서야 됩니까?》

김주현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 머리를 끄덕이며 풀막앞에 시선을 보냈다. 김주현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본 강철룡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작년에 묻어두었던 박격포를 파내서 결합해보는 참입니다.》

《박격포를? 그건 어데 쓰려고?》

《우리가 적들한테 로획한 박격포를 많이 묻어두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쓸모있게 되였지요. 우리도 박격포를 메고 대사변을 맞이해야 할게 아닙니까?》

《그게 동무의 생각이요, 사령부의 지시요?》

《아직까지는 저의 짐작입니다. 그러나 곧 명령이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련대장동지, 오중흡동무를 만나지 못했습니까. 련대장동지가 오신줄 알면 기뻐서 춤을 출것입니다. 련대장동지가 없다나니 전투에서 언제나 앞장이던 4중대가 맹랑하게 되였습니다. 지금 도끼와 톱을 준비하느라고 여념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김주현은 좀 놀란 표정을 짓고 강철룡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철룡은 약간 난색을 짓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가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자, 제가 길을 대드리지요. 련대장동지 혼자 가시자면 두루 시간이 걸릴겁니다.》

강철룡은 가둑나무잎을 뜯어 손에 묻은 총기름을 씻고나서 안희창과 마동희의 손을 차례로 잡아흔들었다.

김주현은 부대에 커다란 변동이 있는것 같았으며 그것이 자기의 소환과 관련되는 일일것이라고 믿었다. 강철룡의 그 박격포이야기는 좀 들뜬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분위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오중흡중대가 도끼와 톱을 준비하고있다는것은 무슨 소린가?···

김주현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강철룡은 안희창과 마동희를 향해 벙긋거리며 말했다.

《우리 밀영에 희한한 처녀대원이 새로 나타났소. 밀영의 함박꽃이요. 누구겠소. 어디 한번 맞혀보지?》

강철룡은 별스럽게 눈웃음을 짓고 어깨를 낮추며 마동희를 바라보았다.

좀 어색해진 마동희는 안경을 코등으로 올리밀며 옆으로 얼굴을 돌리였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물음이라는 기색이였다.

《마동무, 누이동생 소식을 아오?》

강철룡이가 지꿎게 거듭 묻자 마동희는 그때야 비로소 의아한 눈초리로 강철룡을 쳐다보았다.

이때 안희창이 강철룡과 마동희사이에 불쑥 끼여들며 되물었다.

《동희동무의 누이동생이 어떻게 됐단말입니까?》

강철룡은 작은 눈을 크게 뜨며 책망조로 말했다.

《동무는 왜 중뿔나게 끼여드오? 동희동무의 누이동생이 누군지 알기나 하오?》

안희창은 입을 다물고 쭈밋거렸다.

(흥, 내가 모르기는 왜 몰라. 곱다는것도 알지, 이름도 알지. 그만하면 알건 다 아는셈이 아닌가. 마동희의 누이동생이니 혁명성은 더 말할것도 없고···)

동희의 누이동생이 여기에 와있다는 말을 동희보다 먼저 알아들은 안희창은 정말 자기가 국화와 잘 아는 사이기라도 한듯 앞질러 말하다가 엄격한 자기 소대장한테서 면박을 당하고보니 창피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제 성미대로 중얼거리는것을 잊지 않았다.

강철룡은 뾰족한 눈길로 안희창을 멀찌감치 쫓아보내고나서 마동희에게 싹싹하게 말했다.

《국화동무가 이 밀영에 있소!》

마동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듯 이사람저사람의 얼굴을 바라볼뿐 아무 말도 못했다. 안희창은 아무 말도 못들은듯 턱을 높이 쳐들고 장승처럼 찔러서서 하늘복판을 바라보고있었다.

밀영골안을 바라보고있던 김주현이 강철룡쪽으로 돌아서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요?》

마국화가 입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놀란 사람은 김주현인것 같았다. 그는 장백에 나가 지하사업을 할 때 국화를 몇번 만나본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김주현은 그의 입대청원을 미루군 하였는데 결국 국화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입대한 모양이였다.

《아니, 우리 국화가 입대해서 여기에 와있단말입니까?》

한참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은 마동희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어조로 물었다.

《이제 만나보기요. 마동희동무, 축하하오. 오늘은 여러모로 마동무에게 기쁜 일뿐이군.》

김주현이 마동희 손을 잡아 자기앞으로 이끌며 하는 말이였다. 오랜만에 듣는 따뜻하고 정겨운 음성이여서 마동희는 부지중 련대장에 대한 살뜰한 정을 가슴뜨겁게 느끼였다.

마동희는 누이동생이 입대하였다는 사실이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 국화의 군복입은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썼으나 흰 토목적삼에 검정치마를 입고 밭에서 일하던 전날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일행은 시내물을 건넜다. 한패의 대원들이 팔을 거두고 빨래도 하고 머리도 깎고 하면서 아이들처럼 갈갬질을 하고있었다. 강변에는 빨래감들이 한벌 널려있고 그옆 숲속에서 가벼운 웃음소리와 흥겨운 노래소리가 간간히 울려왔다.

김주현은 문득 물속에 들어가 미역이라도 감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그리고 이 강변에서 안해 윤화와 아들 종철이를 만나게 될것 같아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레였다.

김주현은 타향에 갔다가 오랜만에 어머니가 있는 고향집에 들린 사람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쁨이 가슴한가득 차넘치는것을 느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김주현은 오중흡중대의 밀영쪽으로가 아니라 우선 사령부를 찾아 급히 걸어갔다.

해빛이 밝게 비친 자드락에 올라서니 무성한 이깔밭이 나타났다. 이깔나무숲속에서 박덕산이 마주 걸어나오고있었다. 군용지도를 들여다보며 걸어오던 박덕산은 김주현을 알아보자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는 펼쳐든 지도가 땅에 흐르는것도 모르고 김주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수고했소. 예견보다 훨씬 빨리 당도했구만.》

《사령관동지께서는 무고하시오?》

박덕산이 머리를 끄덕이자 김주현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귀틀집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부대가 모두 도착했소?》

박덕산은 맞잡은 손을 미처 풀기도전에 김주현을 사령부귀틀집쪽으로 이끌며 물었다.

《만일을 위해서 정일권동무와 한초남동무는 백두산밀영에 대기시켜놓았소. 나머지 동무들은 다 데리고 왔소. 들어갈 때도 베차지만 나올 때는 더 베차서··· 그놈들이 정말 극성이요.》

김주현은 그사이에 있은 일들을 대충대충 이야기하면서 박덕산의 입이 벌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사이 사령부에서 있은 일들이 한없이 궁금하였다. 그러나 박덕산의 입은 빗장을 해지른듯 좀체로 열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주현의 이야기가 진척되는데 따라 차츰 어두운 그늘이 비껴갔으나 김주현이자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워낙 과묵한데다가 늘 남이 모르는 근심거리와 복잡한 일거리를 안고있는 박덕산은 좀체로 속에 품고있는 감정을 드러내보이지 않았고 웃는 일도 드물었다.

김주현은 마침내 자기 말을 대충 마무리하고 직판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우리를 불렀소. 새 작전과 관련된것이요?》

박덕산은 다그쳐묻는 김주현의 불타는듯 한 눈길을 피하듯 얼굴을 돌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쉴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무리 과묵한 박덕산이지만 전에 볼수 없었던 일이였다.

《글쎄··· 우선 사령부에 들려야겠소.》

김주현은 비로소 박덕산의 밝지 못한 기색이며 대답을 피하려고 하는 태도가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이미 말을 더 나눌 겨를은 없었다. 사령부귀틀집이 눈앞에 솟아올랐다. 사령부귀틀집어구에 다달았을 때 김주현은 다시금 환희와 기쁨속에 잠기였으며 드디여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고이였다. 그는 여러해동안 사령부를 떠나있은것만 같았다.

사령부귀틀집에는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고있었다.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기미가 느껴졌다. 흥성거리는 사령부의 분위기를 느끼자 김주현은 전날에 크게 마음먹고 지어놓은 이 귀틀집이 오늘에 보니 별로 쫄아든듯이 작아보이였다. 이럴줄 알았더면 좀더 크게 지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김주현은 박덕산의 안내를 받아 사령부귀틀집마당에 들어섰다.

그때 사령관동지께서는 방금 담화를 끝낸 웬 낯모를 손님을 바래우러 밖으로 나오시는 참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 먼저 《주현동무.》하고 불러서야 김주현은 그이께 인사를 올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문간에서 보고하려드는 그를 방안으로 이끄시며 말씀하시였다.

《수고했소. 그런데 안희창동무가 부상을 입었다면서?》

김주현은 자기의 왼쪽옆구리를 짚으며 자세히 보고드렸다.

《여기로 적탄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곧 지혈을 시켜놓아서 지금은 상처가 아물고 더께가 앉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만해도 다행이라는듯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그러시고는 김주현을 걸상에 앉히신 다음 찬찬히 살펴보시였다.

그이의 변함없는 미소와 건강한 모습과 자애에 넘치는 음성을 듣는 순간 김주현은 은근히 가슴한구석에 저도모르게 서리고있던 불안이 서서히 녹아내리는것을 느끼는것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고뿌에 물을 따라 김주현이 앞으로 옮겨놓으시였다.

《김주현동무는 또다시 조국땅을 밟아보았구만.》

《그렇습니다. 석달만에 다시 밟아보았습니다.》

《그렇지. 보천보전투가 있은지 석달만이지. 그런데 동무네 소부대는 벌써 조국땅에 다시 들어가보았구만.》

장군님께서는 감회깊이 말씀하시더니 잠시 동안을 두셨다가 조용히 물으시였다.

《그래 국내형편은 어떻소?》

김주현은 기다렸다는듯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종합한 내용을 말씀드리였다.

중일전쟁이 발발된후 조선에 대한 일제의 착취와 략탈이 전례없이 강화되였는데 그것은 대륙침략에 필요한 물자들을 충당하기 위한것이였다. 조선총독이라는 놈은 중일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다 대겠다고 쥐여쳤다. 놈들의 이런 조치에 따라 실로 류혈적인 강도적략탈이 감행되고있다. 특히 지하자원에 대한 일제의 략탈행위를 이야기할 때 김주현의 눈에서는 분노가 이글거리였다.

일제는 전쟁물자조달을 위하여 조선사람들을 마소와 같이 굴속으로 내몰아 철광과 금광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있다. 지난 한해동안에만도 수십t이나 되는 금을 략탈해갔는데 그 금덩이들도 엄청난 량이지만 그것을 캐내기 위하여 흘린 조선사람들의 피땀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것이다···

격분에 치를 떨며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과 략탈만행자료들을 보고드리던 김주현은 한참 숨을 톺다가 어딘가 울먹이는듯 한 어조로 보고를 이었다.

《사령관동지, 저는 중국인민들의 반일기세가 비할바없이 높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중일전쟁을 급속히 확대하기 위해 대구를 비롯한 종심깊이에 있던 부대들까지 끌어내고있는 확실한 자료를 손에 넣었습니다. 놈들의 수송렬차를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지금 놈들이 발광은 하고있지만 실상 조선에 군사력량은 그리 많지 못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차츰 호소조로 변해가는 김주현의 보고를 심중히 듣고계시다가 이윽하여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다 근거가 있는 자료요. 물론 우리는 객관적세계혁명정세를 중시하고있소. 그러나 기본은 어디까지나 우리자체의 준비에 달려있소. 김주현동무의 국내형편에 대한 보고가 아주 흥미있는 문제거리를 제기하고있는것은 사실인데···》

사령관동지께서는 책상을 손끝으로 다독이시며 눈길을 뙤창밖으로 돌리시였다. 귀틀집의 크지 않은 뙤창은 군청색 하늘을 시원하게 채색하고 그밑에 피여오르는듯 한 숲의 정수리를 강렬하게 대조시킨 어딘가 의도적으로 구도를 잡은 한폭의 풍경화같았다.

사령관동지의 눈길을 따라 그 시원스런 천연의 풍경화를 바라보고있노라니 김주현의 달아올랐던 머리속이 차츰 식어들었다.

처음 사령관동지께서 말을 흐리신것부터가 커다란 의문부호를 김주현이앞에 제시하는것 같았다. 분명 장군님께서는 자기에게 국내형편에 대해 물으셨고 또 자기가 응당 보고를 잘 올려야 할 문제가 그 문제인데 어떻게 되여 말머리가 국제정세문제로 빗달아나기 시작했는지 저로서도 잘 알수 없었다. 어쨌거나 사령관동지의 몇마디 안되는 말씀에도 벌써 자기의 보고가 탈선되였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보고를 조리있게 못한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김주현이 스스로 자기의 허점을 발견하고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데 장군님께서는 더 계속하라는 뜻으로 김주현의 입모습을 지켜보시였다.

김주현은 더욱 당황해지는것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사령관동지앞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기본적으로 다 말씀드렸습니다.》

《기본적으로 다 말했다? 그러니 국내조직들이나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동무들의 형편은 알아본것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국내에 들어가자마자 소환되였기때문에 미처 손을 써보지 못했습니다.》

김주현은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렇지. 들어가자마자 전투를 했으니 언제 사람들을 만나볼 사이나 있었겠소?》

김주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실은 중평광산을 칠 때까지 소부대가 국내인민들과 접촉한 사실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투와 련결된 과정이였지 국내조직이나 개별적혁명가들과 련계를 짓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사업은 아니였다.

김주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자기네 소부대의 활동전반이 사령관동지의 의도와 빗나가지 않았는가 하는 불안이 어렴풋한 인상으로부터 차츰 명료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군님께서는 한참후에야 박덕산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김주현동무가 국내깊이 들어가 좀더 오래동안 있었더라면 우리는 국내형편에 대한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보고를 들을수 있었겠는데 너무나 일찍 돌아오게 된것이 아쉽소.》

김주현은 장군님의 어두운 안색과 박덕산의 침울한 얼굴을 돌아보며 자기의 귀환이 사령부의 사업에 꼭 필요한것이 아니며 자기는 국내에 그냥 있는것이 사령관동지의 뜻이였다는것을 느끼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어쨌든 모두가 큰사고 없이 돌아온것이 다행이요. 적은 인원으로 전투까지 치렀으니 뜻하지 않은 손실을 볼번 했소. 우리는 주현동무가 있다는 생각으로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건 사실이지만··· 그래 그 전투는 불의의 조우전이였소?》

김주현은 인차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자기의 대답이 사령관동지께서 바라시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똑똑히 깨달은 지금 차마 그이의 흐리신 안색을 바라볼수 없었다. 그러나 사령관동지앞에서 사실을 외곡할수는 더욱 없었다.

《피치 못할 조우전은 아니였습니다. 저희들이 주동적으로 쳤습니다.》

김주현은 보고만은 명확히 드렸으나 차마 사령관동지의 흐려지는 안색앞에 고개를 들고 배길힘은 없었다.

《주동적으로 쳤단말이지?》

장군님께서는 조용히 받아외우시며 창밖으로 여기저기 널려있는 밀영의 귀틀집들을 바라보시였다. 김주현이 지은 귀틀집들을 랑림산맥의 밀영에서 보시게 될것을 간절히 기대하시였는데 그 기대가 이제 더는 실현될수 없다고 생각하시니 기가 막히시였다.

한동안 묵묵히 흐리신 안색으로 생각에 잠기셨던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말씀을 이으시였다.

《알겠소. 나는 동무네 소부대가 전투를 했다기에 필경 적들의 포위속에 들것 같애서 급히 불렀소. 이제 동무의 보고를 듣고보니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르기를 잘한것 같소. 이제 돌아가서 식사도 하고 좀 쉬시오. 이제 곧 사령부당위원회가 열리겠는데 동무도 참가해야겠소. 초수탄군정간부회의와 지휘원 및 병사대회이후 각 부대의 활동을 총화하고 대책을 세우자는거요. 지금 사령부에서는 급변하는 국제국내정세하에서 우리 혁명앞에 제기된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 매개 전투원들이 그 어느때보다도 우리 혁명의 근본원리로 더욱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있소.

동무도 이런 각도에서 자기 사업을 분석도 해보고 토론에도 참가하는것이 좋겠소.》

김주현은 흠칫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령관동지의 표정과 어조는 얼핏 보매 범상한것 같았지만 김주현은 그이께서 몹시 흥분하셨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초창기이래 그이를 모시고 곡절에 찬 싸움의 길을 헤쳐오면서 그이로부터 칭찬도, 비판도 남보다 많이 받아온 김주현이로서도 이처럼 자신을 다잡기 힘들어하시는 그이를 뵈옵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더는 마주앉아계시기가 괴로우신듯 일어서시여 밖으로 나가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일어서시자 김주현은 더 앉아있을수가 없어서 일단 일어났으나 그이께서 문밖으로 나서시자 허물어지듯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