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1편 3


 

제 1 편

3

 

중대하고 심중한 일이 갑자기 제기되지 않는이상 지하사업을 하는 일군들은 사령부에 찾아오지 않는다. 하물며 얼마전 《7.7사변》이 터진후 사령관동지께서 무릎을 마주하시고 여러시간 만나주신 권영벽이가 사전련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았다. 권영벽은 장백지구의 당조직을 책임지고있다. 어지간한 일을 가지고는 가볍게 움직일수 없고 움직여서는 안될 사람이였다.

장군님께서 휘남현성진공전투에 참가했던 부대를 만나시여 그들의 전투보고를 청취하시는 자리에서 전달장으로부터 권영벽이 밀영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박덕산은 이런 착잡하고 불안한 생각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한길복이네 밀영으로 돌아오는 지금도 권영벽이 뜻밖에 찾아온 일이 마음에 쓰이여 묵묵히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겼다.

높지 않은 산마루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가을바람이 상쾌하신듯 군복단추를 드티시고 하얀 구름이 떠있는 푸른 하늘을 미소를 지으시고 바라보시였다.

어느덧 그이의 눈길은 천리수해를 부드럽게 스치여 아득히 바라보이는 백두산쪽에 머무르시였다.

열망과 기대가 찬 그이의 안광에는 따뜻하면서도 다감한 빛이 어리여있었다.

권영벽의 도착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한걸음 가까이 장군님곁으로 다가섰던 박덕산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말았다. 언제나 바쁘신 그이께 드물게밖에 차례지지 않는 이런 순간을 아끼고싶었다.

백두산 저쪽 아득한 하늘가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옮기시던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박덕산을 돌아보시였다. 그러시고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만주에서 제일 유축진곳에 자리잡고있는 적의 군사요충지 휘남현성진공전투에서 우리 인민혁명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달성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장군님의 안광에는 근엄한 빛이 어리고 음성은 점차 격조높이 울리였다. 박덕산은 장군님의 말씀에 끌리듯 정신을 모으고있었다.

《이번 전투는 일제놈들에게 만주땅 그 어느 구석도 제놈들의 안전하고 공고한 후방이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소. 앞으로도 우리는 국경연안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강화함으로써 일제침략자들로 하여금 중일전쟁에 제놈들의 무력을 집중할수 없게 해야 하며 중일전쟁을 속전속결할수도 없고 제놈들이 지른 전쟁의 불길속에서 서뿔리 발을 뺄수도 없다는것을 통감하게 해야 하오. 놈들이 인민의 힘을 너무 얕잡아보았지.》

장군님께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숲을 바라보시며 활달한 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리시였다.

깊은 생각에 잠기신채 얼마쯤 걸으시던 장군님께서는 시종 기척이 없이 따라오는 박덕산을 돌아보시였다.

박덕산은 근심어린 얼굴모습을 감추려는듯 때아닌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장군님께서는 이상하게 느껴지시였다.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는가. 급히 달려왔던 전달장도 덤비던 일이 떠오르시였다. 분명 무슨 용무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심상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정치위원동무, 방금전에 전달장이 왔던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요?》

박덕산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채 잠시동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권영벽동무가 밀영에···》

《권영벽이가···》

뜻밖이신듯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박덕산을 바라보시였다.

《무슨 일로 왔소?》

《사령관동지께 직접 보고드려야 할 긴급한 문제들이 있다고 합니다. 군수관의 귀틀집에서 대기하고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어린 봇나무숲 저편 산기슭에 들어앉은 귀틀집을 잠시 여겨보시였다. 한참후에 장군님의 안색은 전과 같이 부드러워지시였다.

《만납시다. 아마 장백땅에서도 어려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거요. 한데 용케 찾아왔구만···》

그이의 걸음은 빨라지시였다. 그이께서 미처 숲언저리에 닿으시기전에 따뜻하고 밝은 해빛아래 단풍든 어린 가지들이 설렁거리는 애기봇나무숲속에서 이마가 훤한 권영벽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관목덤불을 헤치며 침착하나 잰 걸음으로 걸어오고있었다.

권영벽의 모습을 보신 장군님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사령관동지!》

권영벽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이렇게 목메여 부르며 허둥지둥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깨에 걸멘 자그마한 보따리가 건둥거린다.

《영벽동무!》

장군님께서도 걸음을 크게 옮기시였다.

권영벽은 그이앞에 다가오자 다시 자신을 진정하고 멈추어서서 캡을 벗어들고 인사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반갑게 웃으시며 권영벽의 손목을 잡으시였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불쑥 나타났소? 우리가 여기 온줄 어떻게 알고···》

웃으시며 물으시는 말씀에 권영벽이도 마주 웃으며 뒤덜미를 긁적거렸다.

《밀영에 와서 사령부의 행방을 알아볼 작정이였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뵙게 되였습니다.》

《그렇소? 그럼 꿈을 잘 꾼게로구만. 아무튼 잘 왔소···》

그이께서는 권영벽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으시였다.

권영벽의 등뒤에 선 박덕산과 오백룡도 권영벽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의 잘 어울리는 옷매무시를 보자 그의 곁에서 말없이 일을 잘 도와주고있을 라명희가 떠오르시였다. 그이께서는 권영벽과 부부로 가장하고 적구에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자 얼굴이 발개서 눈길을 떨구던 라명희의 모습을 회상하시였다.

《우리 명희동무는 잘 있소? 명희동무가 고생이 많겠구만.》

권영벽은 장군님의 다심하신 관심을 느끼며 대답올렸다.

《잘 있습니다. 부녀회사업을 잘해나가고있습니다.》

《반갑소. 명희동무는 성격이 유순하고 눈썰미가 있으니까 마을녀성들속에 인차 어울렸을거요. 부녀회사업이랑 하느라고 수고많을거요. 부대를 떠나는걸 섭섭해하더니··· 그래 정두철동무는 별일 없소?》

《잘 있습니다.》

《아마 형편이 좀 어려워졌겠지. 놈들이 무슨 소동을 일으켰을것 같은데?···》

《사령관동지의 예견대로 심상치 않게 굽니다. 갑자기 <집단부락>포고령을 장백땅 전지역에 뿌려놓고···》

《<집단부락>포고령?···》

그이께서는 잠시 권영벽의 얼굴을 유심히 건너다보시다가 말씀을 이으셨다.

《가기요. 가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저기 봇나무숲이 좋겠군.》

앞장서신 그이께서는 어린 봇나무숲자드락의 아늑한 잔디밭으로 가시여 자리를 잡고 앉으시였다. 설핏설핏한 숲속의 잔디우로는 나무그림자가 선명히 드리워있었다. 권영벽이 어깨에 걸쳤던 보따리를 내려놓고 그이앞에 마주 앉고 박덕산은 한옆으로 비켜앉았다. 오백룡은 잠시 지켜보다가 병실쪽으로 멀찌감치 물러서서 서성거리였다.

《좀 자세히 이야기하오. <집단부락>포고령이 어떻게 되였다구?》

그이께서 이렇게 물으시자 권영벽은 침착한 어조로 말씀드렸다.

《조직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놈들은 장백땅 전역에서 산재부락들에 모두 <집단부락>에 들어가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기한을 정해놓고 응하지 않으면 강제집행한다고 위협합니다. 벌써 지역별로 한두개부락씩 불을 지른데도 있습니다.》

《불을 질렀단말이요? 그래 사람들은 상하지 않았소?》

《조직들에서 피난조직을 했기때문에 인명피해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놈들의 발광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것 같습니다. 결코 빈 위협이 아니라는것을 암암리에 보여준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면서도 잘못 선불질을 했다가 전장백땅 인민들이 폭동에로 들고일어날가봐 두려워합니다. 지금 놈들은 <토벌대>와 경찰, 자위단을 대대적으로 장백땅에 그러모으고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더 큰 탄압소동을 일으킬 준비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백두산근거지를 어떻게 들어내보자는것이 그놈들의 속심인것 같습니다.》

그이께서는 권영벽의 보고를 유심히 들으시였다.

《그래 대책을 세웠소?》

권영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씀드렸다.

《론의들은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은 아직 세우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론의되였소?》

《제일 우수한 주장은 묻어놓은 무기를 파가지고 전장백땅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적들의 <집단부락>기도를 정면으로 맞서 파탄시킨 다음 로출된 핵심조직원들은 유격대에 입대시키자는 의견이였습니다.》

《폭동을 일으킨단말이요?》

그이의 안색은 긴장되시였다.

《예, 다른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더 깊은 산속으로 이주하자는 주장도 나왔고 조직을 그대로 가지고 <집단부락>안에 들어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집단부락>에 들어가잔말이지?》

그이께서는 고개를 번쩍 드시고 반문하시였다. 권영벽은 장군님의 뜻을 가늠해보려는듯 잠시 그이의 안색을 살피다가 대답하였다.

《예, 그러나 그 안은 결국 적들이 총칼과 토담으로 둘러친 성안에다 조직을 갇아넣는, 적이 판 함정에 제발로 뛰여들어가는격이라고 반박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나 저 경우나 결국은 백두산근거지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오기때문에 저는 결심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이 사령부를 찾아온 중요한 용건이 바로 이 문제라는것을 짐작하시였다.

《<집단부락>에 들어가자는것은 혹시 동무가 내놓은 안이 아니요?》

권영벽은 긴장한 표정이였으나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무슨 타산이 있겠지?》

《똑똑한 론거는 없습니다. 다만 다른 안들은 백두산근거지를 스스로 포기하는것이기때문에 합당한 대책이 못되는 반면에 <집단부락>안에 들어간다면 일단 혁명조직들과 군중을 살릴수 있으며 살리기만 한다면 총칼에 갇히운 제약된 조건이기는 하지만 차츰 활동할 길도 열리지 않겠는가 하는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안입니다.》

그이께서는 고개를 가로저으시였다.

《아니요. 동무의 생각이 옳소. 들어가야 하오!》

《예?》

권영벽이도 박덕산이도 몹시 놀란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았다.

《들어가되 궁여지책으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들어가야 하오. 하기는 들어간다기보다 <집단부락>을 타고앉는다고 해야 옳지. 우리 혁명조직들이말이요.》

《타고앉는단 말씀입니까?》

권영벽은 명민하게 생긴 눈에 빛을 띠우며 물었다.

《그렇소. 믿음직한 조직원들을 적기관에 박아넣어야 하오. 경찰, 자위단, 촌공서··· 적기관이면 어디든지 우리 사람들을 박아넣어 <집단부락>을 틀어쥐여야 하오. 이렇게 하면 화를 복으로 만들수 있고 우리는 더욱 잘 위장된 혁명조직을 꾸리고 활동할수 있지 않겠소?》

《사령관동지, 제 미처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권영벽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양한 해빛이 숲속을 뚫고 들어왔다. 저쯤 해빛에 번쩍거리는 물소리는 유난히 맑고 청청하게 울렸다.

《권영벽동무···》

그이께서는 목소리를 낮추시고 조용히 말씀을 이으셨다.

《거기서도 폭동문제가 제기되였다면 혹시 우리 동무들이 격분한 나머지 조급성에 사로잡힌게 아니요? 중일전쟁은 장차 다가올 세계적동란의 서막에 불과하오. 결정적국면은 아직 앞에 있소. 우리는 그날에 가서 전인민적폭동, 전인민적항쟁으로 일거에 일제를 타승하고 혁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꾸준히 참을성있게, 정력적으로 인민을 묶어세우고 또 묶어세우며 온 나라를 묶어세워야 하오. 바로 그런 까닭에 대담하게 우리는 유능한 일군들을 떼여 정치공작에 파견한것이 아니요.》

그이께서는 한마디한마디 마음속에 새겨넣어주시듯 말씀하셨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령관동지.》

이렇게 대답하는 권영벽의 표정은 매우 엄숙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걱정스럽던 장백지구의 사업도 편향없이 진척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시였다.

《장백현의 혁명조직들을 <집단부락>에 박아넣을 안을 생각해보시오. 너무 조급해말고 우선 윤화동무가 한턱 낸다고 했으니 점심이나 먹고 오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의논해봅시다.》

장군님께서는 먼길을 헤쳐온 권영벽이 시장할것 같아 이렇게 말씀하시였으나 권영벽의 얼굴에는 아직 무엇인가 간절히 말씀드릴것이 남아있는듯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기 서운해하는 빛이 어려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의 심중을 헤아리시고 그의 이야기를 더 듣기로 하시였다.

그이께서 다시 자리를 잡고 마주바라보시자 권영벽은 전보다 낮고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7.7사변>후 일제침략군은 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을 전례없이 강화하는 한편 특무기관과 특수부대들을 만들어가지고 우리 사령부에 대한 <특수작전>을 벌리고있습니다. 간과할수 없는것은 이 모략기관의 우두머리 오끼라는놈이 박차석을 끌고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놀라시며 권영벽과 박덕산의 얼굴을 번갈아보시였다.

《박차석이라니?···》

그이께서는 이렇게 나직이 반문하시며 믿어지지 않는듯 머리를 저으시였다.

박차석은 전날 독립군에서 젊은 하사로 있다가 혁명군에 입대하여 투쟁한 사람이였다. 그후 그는 국내에 파견된 조선혁명군무장소조에 속하여 활동하던중 일제에게 체포되여 8년형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계시였다.

《특무기관에서 박차석을 끌고 통화, 무송 등지를 싸다니고있다는 사실은 적들이 최근 발광적으로 벌리고있는 <특수작전>의 목적과 모략수법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언제나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간명하게 전달하군하는 권영벽이 장군님의 심중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기의 생각을 조용히 말씀드렸다.

박덕산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였다.

일제는 100만대군으로도 대적할수 없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비렬하고 간악한 모략의 수법으로 해쳐보려고 날뛰고있는것이다.

박덕산은 분노를 묵새기려고 거칠어진 숨을 조심히 몰아쉬고있었다. 권영벽은 어쩔수없이 이 사실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의 딱한 처지가 괴로와 고개를 숙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먼 추억속에 잠기신듯 하늘가를 바라보시였다.

그이의 머리에는 살갗이 컴컴하고 광대뼈가 삐여진 박차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나 울분에 넘쳐있는 거센 숨결소리도 들려오는것 같으시였다.

그전날 할머님은 무송에 오셨을 때 박차석의 손목을 잡고 동정에 어려 말씀하시였다.

《너무나 굶주리고 고생이 막중하다나니 임자 얼굴색까지 환하게 피여보지 못하는구만. 어서 왜놈들을 내쫓고 우리 만경대에 오라구.》

장군님께서는 할머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이 귀전에 쟁쟁하였다. 박차석은 할머님을 몹시 따랐다. 그한테는 독립군에서 인배인 낡은 관습이 좀 남아있어 때때로 기분주의에 빠지군하였으나 어려운 대목에서는 대담성과 헌신성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적들에게 체포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어째서 8년형을 받은 사람이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출옥하여 적들과 밀려다니는가?

장군님께서는 믿고 사랑하는 권영벽의 보고였지만 쉬 믿을수 없으시였다. 그 사실을 믿는다는것은 곧 박차석이가 적들에게 투항, 변절하였다는것을 믿는것과 같은것이였다.

그이께서는 괴로우시였다.

(어떻게 되여 치욕과 파멸의 길에 나떨어졌는가? 혁명의 지조와 절개를 버리고 적들에게 허리를 굽힌 까닭이 무엇인가?)

박차석은 무산자의 고통도 알고 나라잃은 백성의 슬픔도 맛본 사람이다.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민족적멸시가 얼마나 참기 어려운가 하는것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아무리 감옥살이가 힘들다한들 망국노의 설음과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것이겠는가?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였다.

감옥에 갇힌후 박차석이가 적들에게 허리를 굽힌것은 주림과 학대, 어려운 고역이 아니라 혁명가들에게서 순시도 뗄수 없는 혁명적신념이 흔들린탓이 아니겠는가?

(박차석이, 그는 한때 우리를 따랐고 우리의 혁명위업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또 우리가 절대로 투쟁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라는것쯤은 지금도 알고있을것이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느 지경에까지 굴러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사람의 체모를 다 잃어버리기야 했겠는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박차석에 대한 생각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권영벽이가 아까 한 말을 상기해보시고나서 말씀하시였다.

《적들이 모든 힘과 갖은 수단을 총동원해서 우리와 대결하려고 하고있소. 이것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우리들에 대한 태도요. 나도 적들이 특무기관과 특수부대를 만들어놓고 무슨 <특수작전>을 벌린다는 소식은 들었소. 그러나 크게 놀랄것은 없소. 이제 국내에서 제놈들의 발밑에 불이 깔린것을 알면 모둠발로 미친듯이 뛸거요.》

이 순간에 장군님께서는 국내에서 그 불을 지펴올리게 될 김주현이 생각나시였다. 사령부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시였다.

《혹시 김주현동무가 강을 건너가서 동무네 조직과 련계를 취하지 않았소?》

장군님께서 이렇게 물으시자 권영벽은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여 그이께 드리였다.

《주현동무가 저에게 보내온 통신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의 가늠할수 없는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하여 고개를 기웃하시였다. 이런 통신까지 가지고 와서 여태 말도 비치지 않은것이 이상하시였다. 그러나 봉투를 받아드시고 날려쓴 낯익은 김주현의 특징적인 글씨를 알아보시는 순간 그이께서는 다른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곧 통신내용에 이끌리시였다.

권영벽에게 직접 보냈다는 김주현의 통신내용을 요약하면 소부대는 사령부를 떠난 이후 급변한 정세를 타산하여 사령부에서 받은 임무를 다그칠 필요성을 느끼였다는것, 중평광산을 친후 소부대가 로출되여 난관에 부닥치긴 하였으나 군사행동을 배합하면서 계속 랑림산맥방면으로 진출할 결심인데 권영벽동무가 어떻게 하나 사령부비상련락선을 찾아 소부대의 실정을 보고드리고 새로운 지시가 있으면 지체없이 전해달라는것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장군님께서는 너무나 기가 막혀 좁다란 통신쪽지를 움켜쥐시고 격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럴수록 권영벽은 한마디 대답도 못드리고 고개만 깊숙이 떨구었다.

《정세의 급변이라는건 뭐요? 그래서 중평광산을 친게 아니요? 그 동무들이 군자금이라도 필요했던 모양이요?》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좀해서 동하지 않으시는 그이의 격정이 걷잡을수 없이 차넘쳐 통신쪽지는 그이의 줌안에서 후들후들 떨리고 그에 따라 설레이던 숲도 번쩍거리던 강물도 다 빛을 읽고 숨소리를 죽여버린듯 했다.

권영벽은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것처럼 소심한 어조로 숨가쁘게 말씀드렸다.

《통신을 가져온 동무의 말을 들어보니 그 동무들이 압록강으로 나가다가 <장춘포위작전>에 나가는 부대들을 적지 않게 만난것 같습니다. 또 국내에 들어가자마자 일제가 대구어방에 있던 부대들까지 끌어내다 <북지전선>에 동원해가는것을 봤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산형편이라는것이··· 저도 중평광산을 좀 압니다만 그 참상을 보면 혁명군대원들치고 그냥 참고 지나치는 사람이 별로···》

《그래서 우리 유격투쟁무대를 랑림산맥줄기로, 국내깊이에로 확대하자는 구상을 줴버렸단말이요!》

장군님께서는 전에없이 권영벽의 가뜩이나 소심한 변명조의 말을 중둥무이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시였다.

권영벽은 더는 말을 못하고 아까보다 더 깊이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장군님께서는 움켜쥐고계시던 통신쪽지를 다시한번 물끄러미 들여다보시더니 권영벽에게 넘겨주시였다. 그리고 혼자말씀처럼 낮게 뇌이시였다.

《김주현동무가 중평광산을 쳤다? 참으로 모를 소리군. 대체 통신은 누가 가져왔소?》

《안희창동무가 가지고왔습니다. 저도 좀 생각되는바가 있어서 련락소에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광산을 친후 형편은 어떻소?》

《놈들이 벅적 소동을 일으킨것 같습니다. 혜산진을 비롯한 국경연선의 경찰대와 수비대들이 부랴부랴 추격전을 벌리고있고 함흥에서도 인차 응원대가 오리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국경연안은 삼엄해졌습니다.》

그이께서는 흐리신 안색으로 애기봇나무숲 건너편의 먼 하늘을 바라보시다가 뒤짐을 지시고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시였다. 빨갛게 단풍든 쇠스레나무잎이 가끔 그이의 어깨우로 날아떨어졌다.

(주현동무가 어떻게 된 일인가? 장기적인 지하정치사업을 하기로 하였는데 처음부터 대판 전투를 벌리다니?···)

발길밑에서는 맑은 개울물이 조잘대며 흘렀다. 이따금 색조가 선명해진 단풍잎들이 물우에 떠서 맴돌이치며 흘러갔다.

침착하고도 완강한 김주현이가 다부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시내물 맞은편에 서있는것 같으시였다. 얼핏 장군님의 눈빛을 보고도 그이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고 요긴한 모퉁이를 막아주던 눈치빠른 주현이였다.

김주현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새로운 력사적정세하에서 우리 나라 북부산악지대에 새로운 근거지창설을 준비하며 국내에 산재하여 분산적으로 활동하고있는 공산주의자, 혁명가들을 단합시키고 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단일적인 지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성진, 길주, 단천, 함흥 지방을 다니며 조직정치사업을 하기로 되여있었다. 그가 책임진 소부대에는 정일권, 한초남 같은 로숙한 정치군사일군들과 그 지방을 환히 꿰들고있는 마동희같은 젊고 날파람있는 대원들이 망라되여있었다.

김주현은 련대장으로서 자기가 받은 이 임무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고도 남을 사람이다. 두말할것없이 이 구상이 실현되면 무장투쟁이 국내깊이에로 확대될것이며 전체 조선인민을 구국항전에 일떠세우기 위한 골간들을 수없이 길러낼수 있게 될것이였다.

그런데 김주현이가 어째서 지하사업에서는 자살적인 행위와도 같은 군사행동을 벌리였는가?

그가 말하는 정세의 급속한 변화란 무엇을 념두에 둔것인가?

현하정세는 복잡하게 급변되고있는것이 사실이다. 국제정세, 국내정세가 모두 예상밖으로 급속히 복잡해진다. 정세를 잘 안다고 장담하는 사람일수록 과오를 범하기 쉬운 시기이므로 서둘러 행동하기전에 침착히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여러가지 가정을 해보시였다. 그러나 쪽지에 씌여진 몇줄의 글을 가지고 김주현의 의도를 확정하실수는 없었다.

(글은 그렇게 썼지만 심정은 다를수도 있다. 공작중에 갑자기 적들과 조우하여 예상하지 않은 전투를 벌렸을수도 있지 않는가?)

어쩐지 소부대가 불가피하게 조우전을 벌렸을것 같은 생각이 갈마드시였다. 그러자 김주현의 신변이 더욱 걱정되시였다.

그 사연과 과정은 어떻든간에 김주현의 소부대는 지금 커다란 위험속에 빠져있다. 김주현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모르지만 소부대가 총소리를 울리였으니 적들은 혈안이 되여 날뛸것이 아닌가? 몇명 안되는 소부대가 포위상태에서 기를 쓰고 달려드는 적들과 싸우면서 임무를 수행할수 있다고 믿을수는 없으시였다. 결국 사령부가 준 임무는 수행하지도 못하고 헤여나올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된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초조해지시였다. 시간을 끌다가는 아끼고 사랑하는 전사들을 잃어버릴수 있다. 그쪽 일은 다른 사람이 나가서 다시 시작할수 있지만 사람은 한번 잃으면 그만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단호하게 결심을 내리신후 무거운 걸음으로 권영벽과 박덕산이 기다리고있는 풀밭으로 돌아오시였다.

《정치위원동무, 김주현소부대를 급히 불러들여야겠소. 련락소에 곧 사람을 띄우시오. 그리고···》

그이께서는 권영벽을 돌아보며 계속하시였다.

《권영벽동무는 여기서 며칠 묵는것이 좋겠소.》

두사람은 명령대로 집행하겠다고 대답을 드렸다.

《저쪽일은 일없을가?》

그이께서는 권영벽에게 다시 물으시였다.

《당장 필요한 조치는 취했고 또 정두철동무가 있으니 일없습니다.》

《그럼 며칠 묵소. 이제 사령부당회의를 열고 초수탄군정간부회의와 지휘원 및 병사대회에서 제시된 과업집행정형을 토론하고 새로운 대책을 세우려고 하오. 회의에도 참가하고 김주현동무도 만나보고 가는것이 좋겠소.》

그이께서는 돌아서시여 건너편 귀틀집쪽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시였다.

박덕산이 거멓게 질린 얼굴로 그이를 바래고 섰다가 안타까운듯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망탕 총질한건 아닐가?》

《글쎄말이요.》

권영벽은 한숨을 지었다.

뒤에서 자박자박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봇나무숲속에서 윤화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양재기에 하얀 보를 씌워 가슴에 안았다. 흰보가생이로 김이 물물 피여오른다. 윤화는 장군님께 더운것을 대접하려고 총총히 달려오고있었다. 그 모습을 본 두사람의 얼굴에는 졸지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윤화는 뜬김을 쐬여 빨갛게 익은 얼굴에 밝은 빛을 띠우며 명랑하게 말했다.

《아니, 장군님께서는 어디 가셨어요? 방금 여기서 말씀을 하고계시기에 더운 강냉이를 가지고왔는데···》

윤화는 땀발이 송골송골 돋힌 이마를 쳐들고 두사람에게 묻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저편 귀틀막으로 들어가시는 장군님을 띄여보자 반색하며 두사람에게 말하였다.

《병실로 들어가시는군요. 두분도 함께 가시자요. 장군님께선 음식을 혼자 드시는걸 좋아하시지 않는데···》

윤화는 양재기를 바로잡으며 귀틀집쪽으로 돌아섰다. 박덕산이 당황히 손을 쳐들며 만류하였다.

《윤화동무, 그걸 건사했다가 점심을 차릴 때 함께 드리도록 하오.》

두사람을 돌아본 윤화는 그제야 그들의 표정이 어두운것을 눈치챘으나 사연을 묻지는 않았다.

윤화는 의혹과 불안에 싸인 표정으로 서서 장군님의 귀틀집과 두사람이 멀어져가는쪽을 번갈아 바라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