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1편 2


 

제 1 편

2

 

윤화는 국화를 먼저 돌려보내고나서 밭머리에 남아있던 남새들을 다래끼에 담아들고 시내가로 향했다.

키낮은 가둑나무가 우거진 내가에 이르렀을 때 골어귀쪽에서 웅성웅성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윤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 길쪽을 바라보았다.

골어귀로 향한 오솔길에는 군복저고리앞섶을 다잡아 단추를 채우며 급히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였다. 그가 밀영책임자인 한길복군수관이라는것을 알아본 윤화의 마음속에는 기쁨의 파문이 일기 시작하였다.

윤화는 끌리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군복자락을 너펄거리며 저만치 달려가는 한길복의 흥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윤화는 마침내 기다리고기다리던 순간이 왔다는것을 예감했다. 그는 들었던 바구니를 가슴에 그러안으며

《오셨어요?》

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길복은 긴말 할새 없다는듯 바른 팔을 연신 흔들어보이며 서둘라고 신호를 했다. 나이 마흔살이 가까와 때때로 아바이라고 불리우는 군수관이 이 순간에는 한창나이의 젊은이처럼 팔팔했다.

윤화는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오셨구나! 우리 장군님께서!)

장군님께로 달려가려고 저도모르게 몇발자욱을 옮기던 그는 문득 멈춰서고말았다.

(아침식사차비를 못했는데 어쩐담?)

윤화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오늘아침까지만 해도 밀영에서는 장군님께서 저녁때쯤에 오실줄로 알고있었다. 밀영의 서쪽산뒤에는 어제 휘남현성전투에 참가했던 부대들이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렇게 련락을 보내온것이였다.

그 련락을 받은 김윤화는 장군님 맞을 준비를 미리미리 해두리라 생각하고 여느때없이 이른 조반을 치르고 터밭에 나왔던것인데 장군님께서 해가 뜨자마자 오시고보니 아침식사가 늦을것 같아 걱정스러웠던것이다.

윤화는 개울가에 다가앉아 서둘러 손을 씻었다.

단풍이 어우러진 봇나무줄기사이로 사령관동지를 모신 경위중대원들과 마중나갔던 군수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물묻은 손으로 군모도 다시 쓰고 옷매무시도 바로잡으며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길복판에 놓여있는 다래끼를 집어들고 한옆으로 비켜섰다.

장군님께서는 한길복의 안내를 받으시며 밀영을 향해 걸어오고계시였다. 그이의 뒤로 8련대정치위원인 박덕산의 들썩 큰 웃몸이 보이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위를 살피며 뒤따르는 다부진 오백룡의 모습도 보이였다. 이름난 기관총수인 오백룡은 얼마전에 리동학이 련대장으로 제발된 다음 그 후임으로 경위중대장의 중책을 맡아보게 되였다.

《우리 동무들이 모두 잘 있습니까?》

한길복에게 물으시는 장군님의 우렁우렁하고 따뜻한 음성을 듣는 순간 윤화는 뜨거운 감격에 휩싸여 험한 길을 헤치시고 이른 새벽에 오신 그이의 모습을 우러렀다.

장군님의 군복에는 멀고 험한 길을 헤쳐오신 자취가 력력히 어려있었다.

허리에 차신 목갑총은 가죽허리띠아래로 처져내리고 가슴앞을 엇가로 지나간 망원경과 야전가방의 멜빵은 여름내 해빛과 비에 씻겨 색이 바랜 군복어깨를 파고들었다.

자신의 로고에 대하여서는 아랑곳도 하지 않으시고 반갑게 웃으시며 기운차게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모습을 뵈옵는 윤화는 자기도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져서 어느새 가까이에 다가오신 그이께 입을 꼭 다물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윤화를 띠여보신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였다. 밀영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올라서신 순간부터 내내 대원들에게 근면하고 강직한 김윤화에 대해 말씀해주시던 장군님께서는 정작 윤화를 보시자 뜻밖이신듯 한참이나 묵묵히 그를 바라보시였다.

사실 김윤화를 보시는 장군님의 심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윤화를 보시니 중요한 임무를 띠고 먼곳에 나가있는 김주현이며 혁명의 불길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나고있는 종철의 모습도 함께 떠오르시였다. 윤화가 건강하고 무고하면 종철이도 무탈할것 같고 주현에게도 커다란 힘이 되는것 같아 류다른 위안과 기쁨을 느끼군하시는 장군님이시였다.

《아, 윤화동무!》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정하게 말씀하시며 악수하시였다.

《사령관동지, 안녕하셨습니까?》

윤화는 간신히 인사를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반갑게 웃음을 지어보이시고 밀영주위를 더듬어보시였다.

정갈한 애기봇나무숲과 맑은 물, 아름다운 단풍과 탐스러운 열매들도 다 윤화가 부지런히 가꾸어놓은것 같이 보이시였다. 윤화는 건강한 모습으로 반갑게 웃고있었으나 키낮은 한그루의 봇나무옆에 홀로 서있어서 그런지 외롭게 느껴지시였다.

《윤화동무, 이슬밭에 서있지 말고 어서 나오시오. 옷이 젖겠소.》

그이께서는 윤화를 길복판으로 이끄시였다. 해빛드는 길에 나선 윤화는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장군님, 이렇게 몇달만에 뵈옵게 되니 정말···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윤화는 벅찬 가슴을 누르며 간신히 말씀드렸다.

《수고는 동무들이 많았소. 방금 한길복동무한테서 동무들 이야기를 대충 들었소. 동무들이 다 건강하다니 반갑소.》

《사령관동지께서 이렇게 문득 오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소문에는 장군님께서 북만에 계신다고도 하고 또 남만에 가셨을게라고도 해서 쉬 만나뵙기 어려울줄 알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뒤에 따라선 대원들을 둘러보시고나서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런 말이 돌았소? 하지만 백두산이 우리 혁명군의 태줄을 묻은 고향땅인데 어디로 가겠소. 갔다가도 돌아올데는 백두산밖에 없소.》

그이께서 밝게 웃으시자 박덕산, 오백룡 등 뒤따라선 사람들도 모두 유쾌하게 웃었다.

밤이나 낮이나 호젓하기만 하던 밀영골안은 활기가 넘치였다.

윤화를 만나신 순간부터 장군님께서는 내내 김주현에 대해 생각하고계시였다.

며칠전에 온 통신에는 김주현이 압록강을 무사히 건넜다는것이 적혀있었다. 김주현이 가장 어려운 첫고비를 넘긴셈이다. 아마 지금쯤 그의 소부대는 성진방향으로 부지런히 달려가고있을것이다. 김주현소부대의 밝은 앞길을 내다보시며 윤화를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마음도 활짝 개여오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그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해주면 이 몸매 작고 살뜰한 녀인에게 더 큰 기쁨을 줄것인가 하고 궁리하시였다.

골안막바지의 들썩한 둔덕우에는 귀틀집지붕의 한 모서리가 간신히 드러나보인다. 그 귀틀집도 김주현이 지은것이라는것을 상기하시는 그이의 마음속에는 지금 사령부의 구상을 안고 화살과 같이 조국땅 깊숙이 박혀들어간 김주현의 모습우에 지난해여름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초병이 되여 백두산에로의 행군길을 헤쳐오던 김주현의 모습이 한데 겹치였다. 동강에서 백두산에로의 길은 간고하고도 험난했다. 그러나 김주현은 모든 애로와 난관을 박차고 사령부가 구상한 진군길을 열어제치였다. 그가 걸어간 무인지경의 밀림속에는 수많은 밀영들과 련락소들이 생겨났으며 그가 다녀간 마을들에는 우후죽순처럼 지하혁명조직이 일떠섰다. 물론 지금 정세는 그때와는 비할수없이 어렵고 복잡해졌으며 김주현소부대가 수행해야 할 과업 또한 그때에 비해서는 어방없이 중대하다.

7월 7일 일제의 강도적침공으로 중일전쟁이 터지고 이 《7.7사변》에 격분한 전체 중국인민이 항일구국투쟁에 떨쳐나선 새로운 혁명정세하에서 김주현은 일제가 저희네 공고한 후방으로 만들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고있는 국내에 깊숙이 들어가 분산적으로 활동하고있는 국내공산주의자들을 튼튼히 묶어세워야 하며 유격투쟁을 국내에 확대하여 랑림산맥줄기를 타고앉을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 일제의 중국관내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과 인민들의 앙양된 반일기세를 옳바르게 분석평가하지 못함으로써 마치 혁명의 승패가 오늘저녁이나 래일아침쯤이면 결판날것처럼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향이 《열하원정》로선과 군사만능주의 등으로 표현되여 대오의 안팎에서 무시할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있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각 부대가 초수탄군정간부회의와 지휘원 및 병사대회결정을 관철하는것이 결코 쉬운 일일수 없다. 하물며 김주현소부대가 국내에 들어가서 그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겠는가. 그러나 우리 혁명앞에 제기된 과업이 장차 도래할 대사변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높이에 이른 그만큼 김주현이 역시 혁명의 그런 발전속에서 성장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유격대의 활동구역에서 밀영을 짓고 지방조직을 내오던 그가 오늘은 비록 소수이지만 부대를 이끌고 놈들이 《동장철벽》이라고 뽐내는 삼엄한 국경경비진을 뚫고 화살과 같이 국내깊이 박혀들었다. 오늘 래일 새로운 통신이 날아올것이다.

《윤화동무.》

장군님께서는 귀속말을 하시듯 윤화에게만 들리게 말씀하시였다.

《주현동무의 소식이 왔소.》

《그렇습니까?》

윤화는 눈을 흡뜨고 웃음이 함빡 피여난 그이의 얼굴을 눈물이 글썽해서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사연을 듣지 않고도 그이의 기쁨에 넘치신 그 얼굴과 자애에 넘치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모든것을 다 말해주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여전히 은근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무사히 강을 건넜소. 아직은 그것뿐이지만 사실은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요. 벌써 일은 절반이상 제껴놓은거나 같단말이요. 하루이틀만 기다리면 또 좋은 소식이 올거요. 통신이 오면 내 윤화동무에게만은 알려주지.》

《장군님. 정말 고맙습니다.》

윤화는 저도모르게 머리를 숙이고는 아무도 못보게 눈굽을 재빨리 훔치였다.

장군님의 사랑을 자기와 남편이 독차지하고있는듯 하여 둘러선 동무들 보기가 면구스럽기도 하였다. 입가에는 자꾸만 웃음이 피여나는데 눈굽으로는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 슴새여나오는것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윤화는 괜히 허둥거리며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장군님께서 식전에 오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장군님, 시장하시겠는데 인차 아침식사를 짓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며 길섶의 풀밭에서 다래끼를 집어들자 장군님께서는 서둘러 눈길을 돌리시며 말씀하시였다.

《조반은 길에서 먹었으니 안지어도 되오. 나하고 이야기나 좀 합시다.》

그러시고는 천천히 걸음을 떼시며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종철이가 왜 보이지 않소?》

윤화는 반사적으로 골안막바지쪽을 바라보다가 황망히 말했다.

《지금 동무들이 달라붙어 그애 머리를 깎아주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님께서는 기쁨에 잠겨 머리를 들며 웃으시였다.

《몸단장을 시켜서 내세우겠다는거겠소! 그럼 기다려야지.》

윤화는 송구하여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경신이와 국화의 목소리가 간간이 아슴푸레 들려오는 막바지쪽을 돌아보았다.

장군님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잠시 걸음을 옮기시다가 혼자말씀처럼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기다려야지. 이제 오늘래일 좋은 소식이 올거요.》

그것은 벌써 종철이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국내로 들어간 김주현과 그의 소부대에 대한 말씀이였다.

윤화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생각하는것과는 견줄수도 없이 지극한 사랑으로 김주현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놓지 못하시는 장군님의 크나큰 품을 느끼는것이였다.

그만큼 장군님께서는 김주현을 믿고 사랑하시였으며 또 이번걸음에 그처럼 큰 의의를 부여하고계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저도모르게 고개를 숙이는 윤화를 고무하시듯 낮으나 정열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이제 두고보시오. 주현동무가 낸 길로 수백수천의 대원들이 따라서게 될거요. 국내인민들속에 들어가 일판을 크게 벌릴 동무들을 보내주어야 하오. 그러니 김주현동무의 뒤를 대주자면 오히려 우리가 일을 서둘러야 할것 같소. 자 어서 걸읍시다.》

윤화는 행복에 겨워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다래끼를 집어들었다. 장군님께서도 유난스러운 싸리다래끼에 주의가 미치시여 윤화에게 물으시였다.

《윤화동무, 그게 뭐요?》

윤화는 귀밑을 붉히며 다래끼를 움츠리는데 한길복이 옆에서 말씀드렸다.

《윤화동무가 봄, 여름내 가꾼 푸성귑니다.》

《푸성귀라니?···》

그이께서는 한걸음 다가서시여 다래끼안을 기웃이 넘겨다보시였다. 윤화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재빨리 다래끼를 두손으로 받들었다.

장군님께서는 손을 다래끼안에 넣으시고 그속에 담긴 남새들을 헤쳐보시였다.

《원, 이런, 고추, 무우, 근대, 풋강냉이··· 별의별게 다 있구만! 산속에서 이런걸 구경하기란 쉽지 않소!》

그이께서는 강냉이 한자루를 꺼내드시고 호탕하게 말씀하시더니 그것을 이윽토록 바라보시였다.

윤화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 몰라하다가 속삭였다.

《제 손이 작아서 그런지 모두 그렇게 작습니다.》

과묵한 성미여서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박덕산이도 고개를 제치고 웃었다.

《윤화동무의 손이 작아서 그런게 아니라 원래 령북땅 이북에서는 남새가 잘되지 않소. 해발고가 높고 해빛이 잘 안드는 이런 숲속에서 웬만한 공력을 가지고야 푸성귀들을 이만큼 키워내겠소?》

그이께서는 따라선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였다.

《그러지 않아도 다음해봄부터는 모든 후방밀영들에서 농사를 짓게 하려고 생각하던 참인데 동무들이 윤화동무의 밭에 한번 가보는것이 좋겠소. 윤화동무, 오래간만에 풋고추며 감자장에 풋강냉이까지 곁들여 먹어봅시다. 속이 놀라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허허허.》

《고맙습니다, 장군님.》

윤화는 행복에 넘쳐 탄력있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재봉대병실을 향했다.

장군님께서는 한길복을 옆에 부르시여 함께 걸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이제 이 밀영으로 많은 부대들이 모여오오. 여기서 이삼일 쉬면서 배후교란작전을 총화하고 새 과업들을 주려고 하오. 이제 사처에서 통신원들도 올것이요. 동무들이 모여들면 편히 쉬고 군복과 장구도 보충할수 있도록 준비를 잘하시오.》

《알았습니다.》

한길복은 소리없이 발걸음을 옮겨디디며 장군님의 지시를 조목조목 새겨갔다.

장군님께서는 가장 중요한것을 놓칠가봐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바짝 차리느라고 발등만 내려다보고있는 한길복에게 말씀하시였다.

《종이를 건사하고있는것이 있으면 좀 보내주오. 아무것이든 글을 적을수 있는 필기지면 되오.》

《예,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조용하고 아늑한 골안이 마음에 끌리시는듯 끊임없이 봇나무가 깔린 골바닥이며 소나무숲이 촘촘한 산허리를 바라보시였다.

밀영은 흥성거렸다.

오래간만에 장군님을 맞은데다가 오늘래일사이에 많은 련대와 중대들이 모여올것이라고 한다. 밀영일군들은 저마끔 일감을 맡아안고 부대들을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병실에 돌아온 윤화는 간밤에 손질한 군복과 옷가지들을 개켜서 가슴에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 개울을 건너 느슨한 둔덕길을 올라갔다. 촘촘한 소나무숲을 따내고 자드락머리에 지은 귀틀집은 숲에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으나 남향이여서 해빛이 잘 들었다.

귀틀집방안은 아늑하고도 밝았다. 윤화는 뙤창앞에 놓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어 먼지가 오르지 않았나 살펴본 다음 그우에 안고온 군복과 내의를 올려놓았다. 방안에서는 황경피나무냄새와 재봉기름내가 연하게 풍겼다.

그는 방안을 꼼꼼히 살펴보고나서 문을 닫고 밖에 나섰다. 사령관동지를 모실 방이였다.

윤화는 다시 한달음에 자드락길을 내려와 재봉대실로 돌아왔다.

그는 방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서 소랭이에 담아놓은 강냉이와 감자를 세여보았다. 사령관동지와 겸상할 사람들의 몫까지 충분할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맞추자면 너무 이르지 않을가 해서 망설이던 윤화는 차라리 사이참을 내놓는것도 좋을듯 하여 솥에 물을 두고 대접을 엎어놓은 다음 풋강냉이자루를 차곡차곡 안치였다. 감자를 풋강냉이우에 얹으려다가 그만두고 소랭이를 부뚜막끝에 밀어놓았다. 지나치게 여문 강냉이라 먼저 김을 좀 올리다가 감자를 안치는편이 좋을것 같았다.

그는 아궁에 불을 지피려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미타하게 생각되여 다시 망설이며 부엌밖을 내다보았다. 장군님께서 언제쯤 시간을 내실수 있겠는지 가늠할수 없었다. 누가 있으면 물어보고싶었으나 주변에는 군수관도 오백룡도 보이지 않았고 방금까지 근방에서 오락가락하던 전령병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때를 놓칠것만 같아 아궁으로 돌아섰다. 그러다가 문득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 혼자 웃었다. 전에없이 덤비며 허둥거리는 자신을 발견한것이였다. 그 까닭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남편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고보니 그처럼 침착하고 아련하다는 성미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웬 들뜬 아낙네가 나타난듯 하였다.

윤화는 가까스로 웃음을 가무리고 아궁에 불을 지피였다. 봇나무껍질은 성냥불이 닿자마자 아궁이 넘쳐나게 불길이 일었다.

장작에 불이 달린 다음 부엌바닥에 고추잎보자기를 옳겨놓았다.

국화가 알뜰히 가려놓은 고추잎을 하나하나 헤쳐보니 여물지 못한 작은 고추꼬투리도 간간이 섞여있었다. 잎이고 꼬투리고 모두 한데 뭉그려 살짝 데친 다음 샘물에 우렸다가 한접시 무치여 상에 받쳐드리면 장군님께서 달게 드실것 같았다.

솥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부엌안은 뽀얘졌다. 윤화는 고추잎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고르면서 솥에서 흘러나오는 물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어느새 생각은 남편이 건너섰다는 그곳 조국땅에로 하염없이 달리였다.

《안녕하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려서야 윤화는 흠칫 놀라 머리를 번쩍 들었다.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탓도 있지만 너무나 들어본지 오래인 귀익은 목소리였기때문이다. 윤화는 일어서며 문앞을 내다보았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나 찾아오던 문앞에는 뜻밖에도 조선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친 사람이 우선우선한 얼굴로 서있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기름한 얼굴, 널직한 이마와 명민하고 침착해보이는 눈모습···

《아니 권동무!》

윤화는 놀라며 못박힌듯 우뚝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편에서도 놀란듯 눈이 커졌다. 그도 윤화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였다.

《윤화동무!》

실로 뜻밖이였다. 권영벽이 이렇게 불쑥 나타날줄은 몰랐다.

그는 마주나가 권영벽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잘 있었습니까? 한길복동무가 이 집에 알만한 동무가 있으니 들어가서 잠시 쉬라고 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권영벽은 이렇게 말하며 반가와하였다. 그는 8련대정치위원인 박덕산과 더불어 남편의 오랜 친구여서 윤화와도 퍽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수고하셨군요. 적구에 들어가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계신다더니···》

윤화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권영벽을 집안으로 안내하였다.

권영벽은 눈웃음을 짓고 잠시 서서 윤화의 손에 알뜰하게 꾸려진 귀틀집을 둘러보았다. 부엌으로 들어서던 윤화는 뒤를 돌아다보며 생각난듯 말했다.

《명희동무는 어떻게 지내요? 잘 있어요?》

그러나 권영벽은 윤화를 언뜻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을뿐이였다.

라명희는 권영벽과 부부로 가장하고 마을에 내려가있는 지하공작원이였다.

《우정 못들은척하는구만요.》

《예, 잘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밀영초막이 그리워서 가슴을 앓고있지요.》

《그럴거예요. 정말 보고싶군요.》

윤화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없이 웃었다. 권영벽이 별로 점잔을 빼는 모습이 우스웠던것이다.

《이제는 농촌생활에 퍽 익숙되였겠군요. 산에 있을 때보다 불편한 점이 많을거예요. 물동이도 이고 발방아도 찧고···》

《예. 벌써 익숙되여 토배기농촌녀성 같답니다.》

《그래요? 한번 보았으면 좋겠군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윤화는 지하사업을 하는 명희의 어려움과 수고를 생각하였다.

윤화의 눈길에서 권영벽은 명희에 대한 윤화의 따뜻한 우정과 사랑을 가슴뜨겁게 느끼였다. 윤화는 사이문을 열고 권영벽을 방안에 들여보낸 다음 사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권영벽이 불쑥 여기에 나타난것이 처음에는 뜻밖이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럼직한 일인것 같기도 하였다.

사령부가 후방밀영에 들리는것과 때를 같이 하여 휘남현성전투를 치른 일부 부대가 나타났다. 뒤이어 또 며칠어간에 각지에서 분산활동을 하던 련대와 중대들이 모두 모여올것이라고 한다. 사령부가 여기에 있으니 누군들 찾아오지 않겠는가.

여기에 권영벽이 온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자 윤화의 머리에 문득 그가 남편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님께서도 오늘이나 래일쯤은 남편에게서 소식이 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권영벽이 남편의 통신을 가지고 왔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남편의 소식쯤은 알고있을것 같았다.

윤화는 설레는 가슴을 눅잦히며 사발에 차거운 샘물을 떠들고 부엌으로 들어가 구수한 미시가루를 풀어가지고 방안에 들어섰다.

올방자를 틀고앉아 두리번두리번 방안을 살피며 담배를 태우던 권영벽은 사발을 받아들자 꿀꺽꿀꺽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윤화는 만나자바람에 남편소식부터 물어볼수도 없어 권영벽의 일거일동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에이 시원하다.》

권영벽은 사발을 돌려주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는 말수는 적은 사람이지만 그대신 가식이 없고 속이 크며 인정도 깊은 사람이였다.

《윤화동무 손이 가면 별치 않은 음식도 달아진다니까.》

권영벽은 입가에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치고 시장하셨으니까 랭수라도 달지요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윤화동무 차려준 음식을 한두번 먹어본다구?》

《그때두 매번 적구나 산속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들리시군하지 않았어요?》

윤화는 문득 권영벽이 남편과 함께 압록강을 넘나들며 투쟁하던 일이 떠올라 이런 말을 했다.

《하기는 속이 출출해지면 윤화동무생각을 하군했지. 허허허.》

하고 권영벽이 서글서글하게 웃는바람에 윤화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솥에서는 흰 김을 뿜어올리며 물이 기운차게 끓고있었다.

윤화는 진중하고 과묵한 권영벽이가 오늘따라 전에없이 수다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이 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때문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서로 웃음의 소리를 나누는 기회에 슬쩍 남편이야기를 꺼내볼가 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권영벽은 윤화가 남편소식을 궁금하게 기다리고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는 사람처럼 별안간 웃음을 거두고 덤덤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의 넓은 이마와 명민하게 생긴 눈에 언뜻 그늘이 비꼈다. 윤화는 어쩐지 권영벽이 무엇인가 매우 심각하고 긴급한 용무를 가지고 왔을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이나 망설이고 바재던 윤화는 마침내 남편이야기를 꺼냈다.

《저··· 종철이 아버지 그후 소식을 모르세요?》

권영벽은 곧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되물었다.

《주현동무 소식말이요?》

윤화는 간절한 념원이 담긴, 그러면서도 소박하고 정깊은 눈길로 권영벽을 바라보았다.

활기에 넘쳐있던 권영벽은 무엇인가 망설이는듯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힘들게 대답하였다.

《무사히 강을 건너 국내에 들어갔답니다.》

《그 소식은 방금전에···》

윤화는 눈빛이 밝아지며 권영벽의 다음말을 재촉했다.

권영벽은 잠시 입을 다물고 윤화의 시선을 피하였다. 그는 지금 김주현에 대한 통신을 가지고 사령부에 도착하는길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김주현의 안해인 윤화한테 이야기할수 없었다. 권영벽은 크게 걱정할것은 없다고 윤화를 안심시켰다.

《그래요···》

방금전까지 그렇게 기대에 떨리던 윤화의 목소리는 어데 가고 한꺼번에 김이 다 빠져버린것 같은 목소리였다. 권영벽은 분명 무엇인가 알고있다.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터놓기를 꺼려하는것이다.

이제 와서보니 평소에는 진중하고 과묵하던 그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수선을 피운것이라든가 자기가 요긴한 말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곧 그것을 알아차리고 눈길을 피하던 행동도 윤화에게는 다 까닭이 있는것 같았다. 남편이 무사히 강을 건너가서 몸성히 맹활동을 벌린다면 자기가 묻기전에 말해줄 권영벽이 아닌가!

강냉이를 안친 가마에서는 솥뚜껑이 요란하게 덜렁거리면서 세차게 김을 뿜어올렸다.

윤화는 남편에게 아직 사령관동지께서도 모르시는 그 어떤 불미한 일이 생겼다는것을 짐작했으나 더 캐여묻지 못하고 권영벽에게 말하였다.

《고마와요. 맡고나간 임무가 중하다 보니 공연히 마음이 쓰이는군요. 그럼 좀 푹 쉬세요.》

윤화가 부엌에 내려가자 권영벽은 저도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의 마음속에도 불안한 예감이 가마속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

이번에 권영벽이 사령부에 보고하게 되는 내용에는 김주현에 대한 소식도 들어있었다. 그가 사령부에 전하려고 하는 소식은 김주현의 활동전모가 아니지만 그것은 김주현일행의 행군로에 어두운 그늘을 던져주고있었다.

권영벽은 김윤화에게 남편의 소식을 속시원히 이야기해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으며 그럴수록 그와 가까이 앉아있는것이 옹색하였다.

마침 전달장이 찾아왔다. 그는 사령관동지께서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신다고 알리였다. 권영벽은 무거운 마음을 다잡고 문밖을 나섰다.

윤화는 부엌문앞에 나와 깍듯이 그를 바래주었다.

《일을 다 보시면 또 들리세요.》

권영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언뜻 뒤를 돌아보며 생각나는듯 조용히 물었다.

《종철이는 잘 자라겠지요?》

그 물음이 반가와서 윤화는 밝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였다.

권영벽은 복잡한 심정을 용케도 내비치지 않고 변함없이 미소를 담고있는 김윤화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나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