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겨울-제1편 10


 

제 1 편

10

 

사령부귀틀집 창문밖에서는 늦가을의 찬비가 내리고있었다. 바람이 이따금 비발을 휘뿌렸다. 얇은 동기와우에 후두둑 비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똑똑히 들리였다. 늦은 아침이였으나 날이 흐리고 게다가 안개까지 끼여 밀림속은 침침하고 어둑시근한 그림자가 드리운듯 사방이 컴컴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귀틀집창문밖에서 비에 젖은 가둑나무가 설레이는 소리를 조용히 들으시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래 언제 떠나겠소?》

맞은편 통나무의자에 앉아있던 권영벽은 머리를 들었으나 선뜻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있었다. 그의 얼굴은 사령부에 도착할 때보다 퍽 수척해보였고 눈빛도 역시 어두웠다.

《···》

이제 더 있어야 할 리유가 없고 어서 떠나도록 하라는 사령관동지의 말씀도 있었지만 권영벽은 아직까지 떠나지 못하다가 그이의 부르심을 받은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전에없이 심중한 낯빛으로 앉아있는 권영벽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시였다. 물론 사령관동지께서는 모처럼 사령부를 찾아온 그가 쉬 떠나기를 어려워하고 또 부대를 떠난다는것이 얼마나 서운한것인가를 잘 알고계시였다. 그러나 지금 사령관동지를 간절히 바라보는 권영벽의 무거운 표정에는 전에없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사령관동지···》

그 어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입을 연 권영벽은 지그시 입술을 다물고 한동안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의아스러운 눈길로 권영벽을 바라보시였다.

《한가지 말씀드릴 문제가 있습니다.》

권영벽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인데 그렇게 심중해졌소? 어서 말하시오.》

사령관동지께서는 권영벽의 대답을 기다리시며 창밖을 내다보시였다. 비방울은 여전히 동기와우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람소리도 한결 높아졌다. 이제 저 비속을 헤치고 권영벽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저릿해지시였다. 얼마나 다감하고 의리있는 동무들인가, 문득 밤중에 잠을 깼다가도 사령부에서 사령부선전과장으로 일손을 돕던 그를 생각하며 잠을 들지 못하던 나날들이 떠오르군 하시였다. 복잡한 사업과 겹치는 일들을 혼자힘으로 처리하실 때 권영벽이가 그립던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가 와있는 기간 그이께서는 어덴지 마음이 한결 놓이는것을 느끼였고 그가 또 이제 부대를 떠날것을 생각하시면 마음이 허전하시였다.

《권동무, 어서 말하오. 그러나 김주현동무가 철직되였다고 해서 지내 걱정하지는 마오.

박덕산동무랑 다른 련대장들도 있고 또 김주현동무도 멀리 가는것은 아니요. 그 동무가 비록 책벌을 받고 가마를 지고 다니게 되였지만 늘 우리 생각을 할게요.》

사령관동지께서는 평소처럼 다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권영벽은 그이의 음성이 변함없이 따뜻하고 김주현에 대하여 믿음에 찬 말씀을 하시는것을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끼였다.

그이께서는 차츰 비소리가 높아지자 바람에 삐걱거리는 창문을 바로잡아놓으시였다. 김주현이 동기와를 어떻게나 알뜰하게 얹었던지 비 한방울 새지 않았고 동기와처마끝에서는 제법 락수가 흘렀다. 그이께서는 김주현이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책상모서리를 잠시 쓸어만지시였다. 권영벽이도 김주현의 책벌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것이였다. 그들의 우정을 그이께서도 기특하게 여기고계시였다. 혁명의 시련은 이렇게 동지들의 운명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참다운 동지애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낳는다고 그이께서는 생각하시였다.

권영벽은 결연히 머리를 들고 말했다.

《사령관동지, 김주현동무의 소부대공작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국내인민들을 항일성전에 준비시키는 사업은 중단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백현사업을 보면서 김주현동무가 하려던 사업을 벌리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끌리시듯 권영벽에게로 다가서시다가 걸음을 멈추시였다.

《옳소. 그 사업은 누가 하든간에 꼭 해야 할 일이요.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곳으로 사람들을 보낼수 없소. 김주현동무가 일제침략군놈들을 벌둥지 쑤셔놓듯 해놓았으니 그놈들이 가만있자고 하겠소. 김주현동무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이처럼 실천적으로도 큰 난관을 조성시켜놓았소. 장백에서도 적들의 수색소동이 좀 즘즉해진 다음에 다시 사업을 펴는것이 좋겠소.》

권영벽은 침착하고도 사리있게 말했다.

《저는 그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풍산, 리원, 홍원, 함흥 지방은 이미 1930년 여름에 김형권동지가 인솔한 무장소조가 사업을 벌렸던곳입니다. 그 지방인민들의 혁명적진출이 류달리 강한데는 김형권동지의 영향이 크기때문입니다. 이 선을 타고 들어가면 얼마든지 북부조선의 동해안지방을 장악할 가능성이 보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흥미를 느끼시고 눈에 영채를 띠시며 권영벽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으시였다.

《정말 그 통로에 대해 연구해보는것이 좋겠소. 가능성이 조금만 보여도 우리는 줄기차게 사업을 벌려야 하오!》

권영벽은 지도를 펼쳐놓고 꼭꼭 짚으면서 며칠새 밤을 지새우며 무르익힌 계획을 설명해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권영벽의 구체적인 설명을 신중히 들으신 다음 지도를 살펴보며 오래동안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확신을 품으신듯 권영벽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가능성이 보이오. 커다란 돌파구를 찾아낸것 같소. 그런데 이 사업을 꼭 동무가 해야 옳겠는가, 다른 소조를 파견하고 권동무는 국경과 장백현사업에 전념하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것을 토론해봅시다.》

권영벽은 자기가 이 사업을 맡는것이 왜 합리적이며 유리한가에 대하여 오래동안 설명했다. 그리하여 장백현일대에서 사업을 원만하게 이끌고나가는 조건에서 권영벽자신이라든가 그에게 속해있는 일군을 통해 리원, 신흥, 홍원 일대에 대한 사업을 벌리기로 락착지었다.

자기의 희망이 성취되자 권영벽은 모자를 찾아쥐고 곧 길떠날 차비를 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앉히고 석별의 정을 못이기며 말씀하시였다.

《지금 내 생각은···》

그이께서는 한번 웃으시고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만약 사령관의 몸이 둘이라면 하나는 전선을 지휘하고 하나는 백두산에서 지하사업을 장악하고싶소.》

권영벽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수만 있다면 제가 제일 기쁘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무릎우에 놓으시고 엄숙하게 말씀하시였다.

《권영벽동무, 회의에서 토론한것처럼 우리는 이해 겨울 인민혁명군대원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시키는 사업을 크게 벌리자고 하오. 그러나 이 사업도 지하조직이 튼튼히 꾸려지고 활발하게 움직여야 성과적으로 실현할수 있소. 나는 권영벽동무가 이 사업을 잘 보장해주리라고 믿소.》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겨울동안 인민혁명군을 정치군사적으로 강화해서 봄이 오면 국경일대의 일제침략자들을 더욱 호되게 족치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령부에서는 장백일대의 지하사업을 돕기 위하여 유능한 정치일군들과 강력한 소부대들을 계속 파견해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군정훈련을 진행하는 기간 적당한 기회에 박덕산이까지도 국내가까운 백두산기슭에 내보내리라는 확고한 결심을 이미 품고계시였다. 이렇게 강력한 소부대들이 백두산주변을 드나들면서 군사, 정치활동을 벌린다면 권영벽에게는 비할바없이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것이였다. 지금 백두산밀영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있을뿐인데 소부대가 들락날락하면서 적들을 공격한다면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한편 적들은 계속 백두산에 매달려있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권영벽에게 박덕산이까지 내보낸다고 하면 그가 더욱 놀랄것 같아 더 말씀을 안하시였다.

《사령관동지, 적들의 탄압이 아무리 가혹해도 지하조직을 끝까지 지켜내겠습니다. 백두산근거지일대의 인민들이 마지막 한사람이 남는 한이 있어도 인민혁명군을 도와 싸우도록 저의 모든것을 다바쳐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당면한 시련을 잘 이겨내고 새봄에는 인민혁명군부대의 진격을 도와 일떠서게 하겠습니다.》

권영벽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를 우러렀다. 그날 권영벽은 비를 맞으며 밀영을 떠나갔다. 장군님께서는 먼 초소에까지 그를 바래워주시였다. 여전히 궂은 가을비가 내리고있었다. 그이의 군복어깨가 축축히 젖었다.

《이쪽 일은 걱정 마오. 다 잘 될거요. 마음 놓소···》

권영벽은 사령관동지께서 손을 잡아주시며 하시는 이 말씀이 김주현의 운명도 포함한 매우 의미깊은 말씀이라는것을 충분히 알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