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5


 

제 6 장

5

 

서장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머리를 싸맨채 누워있던 리인묵은 엉엉 울며 들어서는 자식을 보자 심사가 울컥 꾀여들었다. 일곱살난 이 막내녀석은 순해빠지기만 하여 늘 제또래아이들한테 몰리우며 섭쓸리지 못하였다. 오늘도 또 밖에 나가 놀다가 누구한테서 한대 맞은 모양이다. 막내동이라고 응석으로 키워 그런지 누가 쥐여박는 시늉만 해도 엄살을 부리고 울면서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듣기 싫다. 못난자식, 네놈은 언제까지 얻어맞기만 하겠니?》

역성을 들줄 알았던 아버지가 전에없이 화를 내는것을 보고 막내는 한손으로는 흘러내리는 괴춤을 잡고 한손으로는 눈을 이리씻고 저리씻고 하며 섧어했다.

《아이들이 모다붙어 놀려줘, 발길로 막 차.》

리인묵은 자식의 빈충맞은 소리에 방바닥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놈아, 넌 손이 없느냐?》

그는 화증이 나서 소리를 지르다가 제김에 가슴이 뜨끔하는것을 느껴 욕을 더 못하고 한숨을 쉬였다. 남이 때리면 반항을 하라고 자식을 훈계할 형편이 못되는 제 처지가 문득 돌이켜졌던것이다.

《그래 왜 모다붙어 때리더냐?》

《아버지가 광고에 났대.》

《광고?》

《응, 광고앞으루 내 귈 잡구가선 주구자식이라구 놀려주다가 때렸어.》

(뭣이?···)

리인묵은 머리에 동였던 토목수건을 풀어던지며 그길로 밖으로 나갔다. 찌그러진 대문을 열어붙이자 대여섯집 지나 있는 점포옆에 사람들이 꾀여 웅성거리는것이 보였다. 길가던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점포 한쪽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점포의 바람벽에 문짝만하게 내붙인 허연 종이장이 눈에 확 안겨왔다. 가슴이 활랑거렸다. 거리 아이들이 저앞에서 막내녀석을 주구자식이라고 몰아주며 때렸다면 자기에 대한 무슨 험한 광고가 난것이 확실하였다. 선뜻 다가갈수가 없었다. 철없는 아이들의 입에 오른 정도면 어른들한테서는 그보다 더한 비난이 터져나올것 같았다. 그러나 안가볼수도 없었다. 자기에 대한 광고가 났으면 도대체 무슨 광고인지 알아야 했고 실상은 그에게 못가볼만 한 죄가 있는것도 아니였다. 세상은 리인묵을 주구로 락인을 했지만 그는 아직 주구노릇은 해본적이 없었다. 물론 살아온 행로를 돌이켜보면 떳떳치 못한 구석이 있었지만 주구라니 웬 소린가 하는 반발의식이 광고가 나붙은 점포쪽으로 리인묵의 발길을 이끌어갔다. 그러면서도 막내자식같이 무슨 봉변을 당할것만 같아 걸음이 빨리 나가지 못하였다. 아니나다를가 벌써 점포근방에 가자 저주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내 개가 되고말았군!》

《글쎄말이요. 주구주구해서 무슨 소린가 했더니.》

《급살맞고 뒈질놈!》

사람들은 광고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상욕을 퍼붓기에 열이 나서 당자가 뒤에 와선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리인묵은 두눈에 불을 켜달고 점포벽에 붙은 광고를 쏘아보았다. 두터운 황노지전장을 세개나 맞붙인 광고였다.

 

주민들에게 알림

 

유격대에 간 동생의 자식들을 공산당씨라고 내쫓은 철저한 량민 리인묵씨.

곡절끝에 바른길을 찾은 인생담을 만민앞에 피력하고저 당국에 신청.

모레아침 소학교마당에서 연설 있음.

 

금시 리인묵은 온몸의 피가 꺼꾸로 솟는것 같았다. 눈앞이 새까매지며 악- 하고 소리를 지를번 하였다. 당장 사람들을 헤치고나가 점포벽에 붙은 광고를 잡아뜯고싶었다. 사람들앞에서 더러운 종이장을 발기발기 찢어던지며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보여주고싶었다. 오늘아침 경찰서장한테 불리워갔다올적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번질줄은 몰랐다.

《인묵씨, 그동안 생각할 여유를 주었으면 이제는 결심이 섰겠지요? 연설은 모레쯤으로 예견합시다. 연설문은 협화회 윤석찬리사가 만들어줄거요.》

리인묵은 그때만 해도 마음속에 얼마간 여유를 가지고 서장의 말을 들었다. 이처럼 본인의 의사에는 관계없이 광고를 내돌릴줄은 몰랐다. 아예 광고를 큼직이 내붙여 연설을 기정사실화해버림으로써 아직 확답을 안한 자기한테 이미 세상에 공포한 일이니만큼 살자면 요구에 응할수밖에 별수 없다는것을 강제로 인식시키려드는 마지막협박이였다. 이것이야말로 간악하기 그지없는, 생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 강도의 수법이였다. 격분한 마음같아서는 당장 이길로 서장과 《협화회》 리사한테로 달려가서 천하에 이런 고약한 법이 어디 있는가고 담판을 하고싶었다.

(이젠 광고까지 냈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는 억이 막혀 생이발을 갈며 저도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였다. 그 소리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광고앞에 나타난 리인묵을 보자 멸시감과 적의를 가지고 딴족속을 대하듯이 쏘아보았다. 양조업을 하며 태반이 낯을 익힌 사람들이지만 아무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무산집》할아버지는 하관을 덮은 허연 채수염을 후들후들 떨며 리인묵을 뜯어보다가 《퉤이―》 하고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제몸에 무슨 더럽고 흉한것이 와 묻기라도 한듯이 흰옷을 툭툭 털며 황급히 가버렸다. 그러자 광고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땅에 침을 뱉고 치욕을 느끼며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광고앞에는 비오는날 쓸쓸한 고개턱에 외로이 서있는 장승처럼 움직일줄 모르고 굳어진 리인묵이만 홀로 남았다. 보짱같은 방망이에 뒤골을 얻어맞은것 같이 뗑하였다. 무작정 광고를 뜯어내려고 휘청거리며 바람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갈구리처럼 벌린 손이 광고에 채 닿긴전에 머리를 벽에 찧으며 쓰러지고말았다.

막내한테서 얻어듣고 무슨 일이 생긴것 같아 뒤따라나온 처가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다가 눕혔다. 리인묵은 얼마 안있어 눈을 떴지만 정신을 못차리고 물얼룩이 진 천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모든것이 천태만상을 이룬 물얼룩처럼 갈피를 잡을수 없게 뒤죽박죽이 되여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자기가 왜 이렇게 골을 싸매고 드러누웠는지 혼탁된 정신을 수습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서히 초점이 잡히는 눈앞으로 점포벽에 붙어있던 광고가 떠오르자 리인묵은 벌떡 일어나앉았다. 눈앞에 떠오른 그 광고는 자기가 지금 칼을 쓰고 목조임을 당하는 막다른 골목에, 백척간두에 섰음을 깨닫게 하였다.

(어떻게 되여 내가 이런 지경에 빠졌는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기에 왜놈들이 내 인생에 손붙임을 하며 우롱하고 짓밟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왜 내 얼굴에 침을 뱉는가?)

가슴이 터질 일이였다. 도대체 내 신상의 화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였는가?

리인묵은 인생이 쓰고 허무함을 느끼며 이때까지 살아온 한생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여태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악한 일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추한 리기심에 량심을 판적도 없었다. 비록 세상을 등지고 완고하게 장벽을 친 울타리속에서 살아오기는 했지만 량심이 가리키는대로 자기를 지키며 남을 등쳐먹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한 로력으로 생을 도모하려고 애써왔다. 물론 번민은 있었다. 우국지심에 피가 끓던 독립군시절의 화승대를 강물에 던지고 동생과도 다른 길을 걸으며 늘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좀해서 밖에서 뚫고 들어갈수 없는 완고성으로 사나운 세파를 물리치며 자기가 둘러친 울타리속에서 가까스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왔었다.

그런데 부모를 잃어버린 조카애들이 의지할데를 찾아 집에 왔다가 나간 후부터 바람자는 호수처럼 잔잔하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밭은 혈친으로 조카애들 하나 거두어주지 못해 집에서 나가버리게 했다는 죄의식이 언제나 집게처럼 머리를 꽉 집고 놓아주지 않았다.

몇달전에 강민이가 찾아와서 조카애들소식을 물었을 때에는 마른벼락을 들쓴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강민은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성묵의 자식들을 찾으신다고 하였다.

강민이 다녀간 후 리인묵은 며칠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심화병을 만나 자리에 누워버리였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찾자고 풍찬로숙을 하며 왜놈들과 싸우시는 장군님께서 준오형제를 찾으실수가 있단 말인가? 상상과 리해가 닿지 않아 몸만 추서면 조카애들이 어디에 가있는지 이제라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고싶었다. 하지만 한번 세상천지에 돌멩이처럼 버린 그들을 어디에 가서 찾아낸단 말인가? 일조에 가문의 명줄을 끊어버린것 같은 뉘우침과 인륜에 어긋나는 죄악을 저지른듯 한 암담한 생각에 눌려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던 그가 겨우 바깥출입을 하게 되였을 때 윤석찬이가 우연히 길가에서 만나 조카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인지 그애들이 밥을 빌어먹으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유격대원들을 따라 산으로 갔다는것이였다.

리인묵은 준오네가 목숨이 붙어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큰아버지구실을 못한 가책에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으나 한편으로는 어쩐지 그 일이 사실로 믿어지질 않았다. 일제주구단체인 《협화회》의 리사가 소식을 전한다는것 자체가 이상하였다. 산에서 조카애들때문에 사람이 왔다간것을 알고 무엇인가 뒤를 캐자고 떠보는 수작같기도 하였다.

경찰의 마수가 그에게로 뻗쳐온것은 이무렵이였다. 서장이 무슨 줄을 통해 들었는지 전에 리인묵이네 집에 와있던 아이들이 동생네 자식들이였다는것을 알고 경찰서로 호출하여 문초를 하였다.

《집에 왔던 공산당씨들을 어디다 빼여돌렸소? 좋은 말로 물을 때 순순히 부는게 나쁘지 않소.》

리인묵은 며칠전에 《협화회》 리사가 하던 말이 대뜸 가슴에 짚였다. 윤석찬이가 난데없이 조카애들 소식을 들고다니면서 별로 수상쩍은 소리를 한다 했더니 그놈이 밀정노릇을 한게 틀림없었다. 연설문도 윤석찬이가 써준다는걸 봐서는 경찰서장의 졸개로 주민들의 뒤를 캐며 어지러운 세상을 호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이 틀림없었다.

《내가 뭘 숨겼다고 야단이시오?》

리인묵은 경찰에서도 눈을 밝히고 숱한 식구를 먹여살릴 힘도 없어 조카애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자기는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라고 덧붙이였다.

《그래, 쫓았단 말인가?》

《그렇다고도 할수 있지요.》

문답은 이런 식으로 오고갔는데 서장은 마감에 《좋다. 쫓아버린것으로 하자. 나도 그렇게 믿겠다.》라고 도장을 누르듯이 말하였다. 그러더니 얼마 안있어 경찰서로 다시 호출하여 혁명군에 간 동생의 자식들을 집에서 쫓아버리게 된 사연을 만사람들앞에 이야기하라고, 그것이 국책수행을 크게 돕는것이라고 설복하며 이것은 지구《토벌》사령관 우미야마소장각하가 직접 관심하는 일이라고 했다.

놈들의 속심을 알아차린 리인묵은 아뜩하여 그거야 당신이 그때에 너무 다그어대기에 좋도록 생각하라고 한 소리인데 아무러면 조카애들을 쫓아버리기야 했겠는가고 변명을 하였다. 그러자 서장은 긴 칼집으로 책상을 땅 치며 왜 제입으로 한 말을 이제 와서 뒤집는가, 누구를 희롱하는것인가고 을러메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무사치 못할것이라고 공공연히 위협하였다.

조카애들이 집에서 나간 일로 벌써 오래전부터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렸던 리인묵의 번뇌는 이때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인간의 허울을 벗지 않고서는 살아갈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 이른것이였다. 원쑤들은 세상이 사악해져 피줄마저 돌보지 못하게 된 리인묵의 식어버린 가슴을 흉악한 발톱으로 움켜잡고 끝내 오늘같은 함정에 몰아넣었다. 이제 래일모레 광고대로 사람들앞에 나서지 않으면 놈들은 당장 보복으로 나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태는 절망적이였다. 삶과 죽음을 놓고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운명적인 시각이, 넘어설수도 물러설수도 없는 마지막계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여기서 한걸음 나가면 사람이기를 그만두는것이다. 물러서면 죽어야 한다. 하기는 차라리 살아서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기보다는 죽는편이 훨씬 나을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로는 마음대로 죽을수도 없다. 자기가 죽는다면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고 한구들되는 자식들은 한지에 나앉게 될것이였다. 그러므로 죽고사는것이 결코 자기 하나에 관한 문제가 아니였다. 제 한몸보다 더 귀한 가족을 살리자면 자기도 살아야 하였다.

그러나 지금 리인묵이한테 사는 길이란 놈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만약 살기 위해 굴복을 하면 이 리인묵이라는 인간은 무엇이 되겠는가? 사람의 도리와 량심의 편린마저 시궁창에 던진 반역자가 될것이다. 살아서는 한번도 동생의 넋을 불러볼수 없는, 조카애들의 얼굴을 마주볼수 없는 원쑤가 될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걷는 마지막길이다. 사람이 자기를 버리는 추악한 길이다.

죽을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자기 운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고통스러워 맑은 정신으로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여보, 뭘 좀 주오!》

그는 부엌으로 통하는 사이문을 열어붙였다.

남편의 신상에 불행이 닥쳐왔음을 깨닫고 아궁앞에 쭈그리고앉아 근심에 잠겨있는 마누라가 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찍어내며 만류했다.

《밤낮 술만 마시면 어떻게 해요? 정신을 차리구 무슨 살수를 찾아야지.》

《살수가 어디 있소?》

《그럼 가만 앉아서 죽겠단 말이시우? 자식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아니, 누군 자식들을 생각 안한대?》

《글쎄 안돼요. 생사가 오가는판에 술이 뭐예요?》

《무슨 잔소리!》

리인묵은 종일 베고누웠던 목침으로 구들장을 두드렸다.

온순한 처는 한숨을 쉬며 커다란 양은주전자와 산나물무침을 각상에 받쳐들여왔다. 술잔은 눈에 차지 않게 도토리잔을 가져왔다.

리인묵은 도토리잔을 각상밑에 내려놓고 황새주둥이같이 긴 주전자부리를 입에 대고 랭수켜듯이 꿀꺽꿀꺽 강술을 마시였다.

술기운이 지쳐버린 피줄을 타고 몸으로 퍼지자 싸늘하게 고드름이 맺힌 가슴이 훈훈히 더워오르며 마음이 다소 편해지는것 같았다. 일부러 안주 한꼬치 안들고 마신 강술로 그는 세상만사를 잊고 자신까지 내던지며 무아경속에 빠졌다. 이 상태가 계속되였으면, 사람이 죽는날까지 그 어떤 번민도 고통도 모르는 이런 무의식상태가 지속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그는 마취제같이 고통을 잠재워주는 이 망각의 상태에서 깨여나지 않으려고 강술을 그냥 마셨다.

《인묵씨 계시오?》

밖에서 누군가 와서 찾는 소리가 났으나 리인묵은 듣지 못하였다. 찾아온 사람은 윤석찬이였다. 아침에 하시모도서장은 《협화회》명의로 리인묵이에 대한 광고를 내다붙이라고 부서장에게 지시한 다음 윤석찬이한테 래일까지 연설문을 만들어주라고 통지해왔다. 그러나 지금 윤석찬이가 찾아온것은 그일때문이 아니였다. 12도구조직에서는 리인묵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론의가 있었다. 이미 리인묵의 동향에 대하여 사령부에 통지했으나 결론이 오기전에 광고가 나붙었으니만큼 이제는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래일까지 사령부에서 소식이 오지 않으면 자체로 결심하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조직에서는 리인묵이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동생과 조카들을 팔며 기만선전에 응해나설 기미이면 부득불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윤석찬은 어느 화살에 맞든 어차피 죽음을 면할수 없게 된 리인묵의 동태를 알아보려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길이였다.

《인묵씨 계시오?》

밖에서 두번째로 주인을 찾았다.

리인묵은 그제야 창호지가 퇴색한 범살문을 열어제쳤다. 개화장을 들고 시계줄을 드리운 《협화회》 리사가 마당에 서있었다. 리인묵은 대뜸 눈섭이 푸들거렸다. 그의 눈에는 신사차림으로 마당에 서있는 이 윤석찬이나 하시모도서장이 다 한동아리로 보였다. 이것들이 작당을 하여 악하기 그지없는 흉모를 꾸미며 자기를 오늘과 같은 막다른 골목에 밀어넣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 뭐가 모자라 개화장을 짚고 내 집에까지 발길을 하는가? 남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판인데 금력과 지체를 등대고 거들먹스럽게 들어오는 리사를 보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올라와 충혈된 눈에 불이 일었다.

리인묵은 여태껏 윤석찬을 그닥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접촉은 별로 없었지만 사람이 씨먹은 소리도 하고 의젓하여 속에 뭔가 든것이 있다고 보았다. 간봄에 《협화회》 리사가 되였을 때에 인물이 뛰여나서 하는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제보니 이놈이야말로 왜놈들의 주구였다. 자기가 경찰에 불리워다니기 시작한것이 바로 이자가 유격대에 간 조카애들 소식을 전해준뒤가 아닌가? 그러고도 나한테 연설문을 만들어주겠다니 낯짝이 보통 두꺼운자가 아니였다.

그게 어떤 연설인가? 왜놈을 찬양하고 조선사람을 중상반대하라는 연설이 아닌가? 술기운이 올라 벌겋게 퍼진 눈으로 리인묵은 《협화회》 리사를 쏘아보았다.

윤석찬은 주인의 험악해진 낯빛을 보고 잠시 주춤거리다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이거 인묵씨의 안색이 좋지 못한걸보니 양주업이 시세가 떨어진게 아니요? 갓난아이 열병처럼 올랐다내렸다하는게 요즘 기업이라고는 합디다만 인묵씨가 이렇게 손맥을 놓아서야 되겠소.》

리인묵은 대척이 없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문턱을 짚고 얼굴을 돌려버리였다. 윤석찬은 그가 눈꼴사납게 외면하는 심정을 얼마간 짐작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연설을 회피할 사람이라고 쉽게 담보할수 없는 일이여서 무턱대고 토방우로 올라섰다. 남이야 고와하건 미워하건 상관없이 리인묵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그의 본심을 정확히 타진하고 가능성이 보이면 마음을 돌려보는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상대가 놈들의 올가미에 걸려든 사람이고 윤석찬이자신도 《협화회》 리사밑에 깔린 신분을 드러내보여서는 안될 처지이다보니 사실은 여간 어려운 걸음을 하지 않았다. 리인묵은 당초에 곁을 줄 형세가 아니였다. 윤석찬이가 헛기침을 하며 금시 한발을 문턱안으로 들여놓자 리인묵은 꼼짝않고 지릅떠보더니 벌떡 일어나 대번에 윤석찬의 귀뺨을 후려갈겼다. 아귀센 손에 어찌나 힘을 주어 쳤는지 깜짝 놀란 윤석찬은 비칠거리며 토방밑으로 내리굴번 하였다.

《인묵씨, 이게 무슨짓이요?》

《인묵씨라구? 이놈의 자식!》

리인묵은 또 한번 쳤다,

《<협화회> 리사라는 놈이 경찰과 작당하여 사람잡이를 해? 네놈이 내 집에서 무사히 돌아갈줄 아느냐?》

무슨 살인이라도 칠것 같은 웨침이였다. 무방비상태에서 연거퍼 뺨을 맞은 윤석찬은 리인묵을 부둥켜안을것처럼 팔을 벌렸다. 얼결에 취한 자세였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그의 마음이 가리킨 행동이였다. 인제보니 리인묵은 주위에서 멸시해온 그런 너절한 인간이 아닌것 같았다. 윤석찬은 무엇보다도 그의 넋속에 살아있는 량심의 웨침을 듣는것이 기뻤다. 고통과 번민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난 그의 표정과 울분에서는 억울하게 주구의 루명을 쓰고 손가락질 받고있는 자기자신에 대한 저주와 함께 자기를 그런 고통속에 몰아넣는자들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나왔다.

윤석찬은 반가와도 반갑다는 말 한마디 할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자 서러움이 북받쳐오르며 눈굽이 축축히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그는 비록 뺨을 맞았지만 무엇인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될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금 문턱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리인묵은 그를 토방밑으로 활 밀어버리며 소리쳤다.

《이 체면없는 놈같으니, 리인묵이가 그래 다 죽은줄 아느냐? 연설을 하면 내 입으로 하지 네놈이 만들어준걸 들고나가지는 않을테니 썩 사라져라.》

리인묵은 가슴속의 울분을 뿜으면서도 후환이 두려워서인지 당국의 요구만은 내놓고 거절하지 못하였다.

윤석찬이한테는 리인묵의 말이 매우 어정쩡하게 들렸다. 당국이 요구하는대로 응해나서겠다는 말인지 연설은 하되 량심은 지키겠다는 소린지 명백히 가늠할수가 없었다.

윤석찬은 호두속같이 단단히 껍질을 쓰고 들이박힌 리인묵의 마음을 똑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발길을 돌릴수 없었으나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한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생각되여 토방아래로 내려서며 알아들으라는듯이 말했다.

《여보, 당신이 나같은 리사앞에서 량심인처럼 허장성세할것 있소?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은 이 리사가 아니라 민중이라는걸 알아두시오.》

리인묵은 윤리사의 말을 귀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보짱이 울리도록 문을 탕 닫아버렸다.

문밖이 잠잠하더니 얼마 안있어 대문쪽으로 걸어나가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리인묵은 범살문에 붙인 유리쪼각으로 얼핏 문밖을 내다보고는 돌아앉아 또다시 화술을 마시였다. 정신이 조금 들만 하면 마시였다. 자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취기에서 순간이라도 깨여날가봐 두려웠다. 모든것을 기억하고 상기하기 싫고 제정신이 돌아올가봐 겁이 났다. 맑은 정신으로는 삶과 죽음의 어간에서 몸부림치는 마음속고통을 견디여낼수가 없었다.

숨막히던 날이 저물고 땅거미질무렵에 주인을 찾는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토방에는 검은 제복바지에 칼집을 드리운 하시모도서장이 서있었다.

리인묵은 위엄을 차리는 하시모도의 서슬푸른 기상과 번쩍거리는 칼집을 보자 (끝장이구나.) 하는 섬찍한 생각이 들었다. 서장이 윤석찬의 고발을 받고 체포하자고 온게 틀림없었다. 리사한테 주먹맛을 보이며 한 소리가 상기되였다. 끌려가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나 죽음으로 마음의 고통을 면할수 있다면 선뜻 맞받아나갈 배심으로 하시모도를 마주쳐다보는데 웬일인지 서장은 커다란 술주전자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술상에 잔도 없는걸 보니 역시 양주업자의 포재가 틀림없군. 인묵씨, 술이야 계집이 부어야 술맛이 더 나지 이렇게 쓸쓸히 혼자 마시겠소? 오늘은 이 서장과 한잔 합시다. 민영달씨가 초청을 하는데 마다하겠소.》

리인묵은 어리둥절하여 네모진 서장의 상통을 면바로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수 없었다. 평소에 별로 대상을 하지 않은 민영달이가 자기를 청했다는것도 모를 소리고 오만한 서장이 자기네 집에 직접 찾아온것도 수상하였다. 《협화회》 리사놈에게 손찌검을 한 사실을 보고받고 연설이 파탄될가봐 회유하자는 수작인가?

(계집이 부어야 술맛이 난다? 이놈들, 어림없다.)

리인묵은 금방 마신 술기운이 말짱 깨는것을 느끼며 주저없이 응해나섰다.

《갑시다요. 서장님 말씀을 누가 감히 거역하겠소.》

서장한테는 귀맛좋게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실상 그것은 반허탈상태에 빠져 운명에 순종하는 자신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서장은 술에 곤죽이 되여 비칠거리는 리인묵을 부축해가지고 민지주네 집으로 갔다. 솟을대문앞에 나와 기다리던 주인 민영달이와 첩 화월이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반갑게 맞아들였다.

안방에는 이미 진수성찬을 차려놓은터여서 초청을 받은 두 손님은 들어가자바람 화문석우에 마주앉았다. 서장곁에는 민지주의 첩 화월이가 노란 반회장저고리를 입고앉아 깃부채로 부채질을 살살 해주며 간사를 떨었다. 몇년전만 해도 본마누라와 두발부이를 하며 시앗싸움이 일면 릉지가 되도록 얻어맞고 기를 못펴던것이 민지주가 다 파먹은 김치독처럼 늙어빠지고 볼품없이 된 본댁을 합수촌에 남겨두고 이 거리로 이사나오게 되자 치마자락을 휘두르며 안주인노릇을 제법 하자고들었다.

서장은 화월이를 옆에 차고앉아 리인묵이앞으로 연방 잔을 권하였다.

리인묵은 사양하지 않고 마시였다. 원체 만취했던 눈에 더욱 취기가 올랐다. 그는 정신이 휘휘 도는것을 느끼자 한숨 돌리려고 구들장을 짚고 몸을 뒤로 젖히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은장식에 자개까지 박은 가구들이며 진채화로 나비와 꽃을 그린 8첩짜리 병풍도 그렇고 방바닥에 깐 두잎의 화문석과 꽃방석만 눈을 끄는것이 아니였다. 아래목에 깔아놓은 남색보료우에는 팔꿈치를 고이고 사방침과 팔꿈치로부터 손목까지 받치는데 쓰는 장침도 있었다. 벽에는 고동색바탕에 복복자를 수놓고 박쥐무늬를 새긴 안석도 세웠는데 그것은 벽에 기댈 때 쓰는것이였다.

민영달의 딸벌이나 되는 화월이와 진수성찬과 은잔에 찰랑거리는 향기로운 술을 포함하여 호화스러운 방안의 모든것은 이 집의 부러울것 없는 재력을 말없이 시위하는것 같았다.

하시모도서장은 홀린듯 한 리인묵의 눈길을 보고 속으로 이자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우미야마의 모략대로 리인묵을 《량민》의 본보기로 내세우는데서 맡은 책임이 있었다. 우미야마는 완고한 리인묵을 총칼로 굴복시키는 일을 서장한테 맡기고 그 다음 일은 윤석찬이한테 맡겼다. 이리하여 그동안 확답이 없는 리인묵을 줄곧 설복위협해오던 서장은 드디여 오늘아침에 본인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그길로 거리에 광고를 내다붙이게 함으로써 아예 모든것을 기정사실로 공포해놓았다. 그러나 하시모도는 그렇게 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본인한테서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한 이상 당일에 가서 리인묵이가 나눕지나 않겠는지 또 강요에 못이겨 나선다고 하더라도 당국이 바라는 말을 순순히 해주겠는지 그것을 마음놓고 믿을수가 없었다. 그가 요구에 끝내 불응하면 없애버리라는 지시가 이미 내려와있었지만 없애치우기는 간단한 일이였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굴복시켜 리용해야 하며 또 그래야 우미야마사령관앞에서 서장의 면목도 서는것이다.

이리하여 서장은 리인묵의 약한 구석을 들추다 못해 이번에는 그를 물욕으로 자극할 궁리까지 하게 되였다. 하시모도는 리인묵이가 동생과 다른길을 걸으며 기업을 편것으로 보아 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이렇건저렇건 지금의 리인묵의 생활관은 무엇으로 합리화하든간에 격페된 울타리를 치고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며 개인의 안일을 추구하는것으로서 이런 사람들한테는 어렵지 않게 물욕이 동하게 할수 있다고 하시모도는 타산하였다. 그래서 서장이 요구하는 일이면 발벗고 합력하는 민영달이와 짜고 오늘저녁에는 리인묵이를 경찰서가 아니라 이 집으로 끌고온것이였다.

하시모도는 말없이 술만 마시는 리인묵의 잔에 또 술을 부어놓고 제복단추를 풀며 말을 붙였다.

《인묵씨, 술판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있소? 혹시 아직도 연설이 주저돼서 그러는게 아니요? 가만보니 인묵씨가 기업을 한다지만 술막집주인 같은 촌스러운데가 없지 않단 말이요. 내 오늘밤 술김에 인묵씨와 흉금을 터놓고 말하는데 기업이란것도 시국을 따라야 하는거요. 세상에 백만장자로 소문난 일류급기업가들도 알고보면 모두가 권력을 끼고있는 야심가들이요. 난 인묵씨도 이번에 우리 일에 협력해나서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이 민영달씨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것임을 의심치 않소. 내 말을 명심해듣소. 소위 량심이요, 도리요 하는것은 다 인간의 본심을 가리우기 위해 선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울에 불과한거요. 그 허울만 잡아벗기면 인간은 곧 실체를 드러내게 되지, 내 당대에 잘먹고 잘살아보자는 본능말이요.》

리인묵은 몸에 잠겨있는 술이 퍼지지 않고 자꾸만 목구멍으로 올라와 충혈된 눈을 굴리며 자기한테 은잔을 권하는 민지주의 유들유들한 볼편과 비단으로 몸을 휘감고 추파를 보내는 화월의 요염한 자태만 지켜보았다. 서장이 민영달씨의 부귀영화요 뭐요 하고 침발린 소리를 했지만 거기에서는 근로하는 사람들의 성실한 피땀을 제물로 쌓아놓고 환락을 누리는자들의 추악하고 랭혈적인 그 무엇이 역하게 풍겨왔다.

하시모도는 리인묵의 창백해져가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젠 때가 되였다는듯이 해죽거리는 화월의 손목을 잡고 뇌까렸다.

《여보 인묵씨, 당신도 나긋한 화월씨 손을 한번 잡아보지 않겠소? 세월은 류수고 인생은 환락이요!》

(흥, 네놈이 못하는짓이 없구나. 날 저년의 무릎에 쓰러뜨리고 값을 받아내자는거야?)

리인묵은 당장 일어나서 벽에 걸려있는 서장의 칼로 하시모도와 년놈을 모조리 찌르고 자기 가슴도 찌르고싶었다.

서장은 리인묵을 꼬이려다가 제편에서 아주 취해버려 아양을 떨고있는 화월이쪽에 헛손질을 하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화월이, 인묵씨한테 한잔 더 부으라구. 화월이같은 아녀자가 인묵씨를 리해할가, 우리 제국은 이제 인묵씨한테 금실로 짠 옷을 해입힐거요. 인묵씨로 말하면 조카애들까지 공산당씨라고 집에서 내쫓고 우리와 손을 잡은 철저한 제국신민이란말야.》

리인묵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쫓아버렸다고? 내가 그애들을 쫓아버렸겠는가?)

지금도 자기로서는 량심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리인묵은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리는 목소리에 얼굴을 찌프렸다.

서장놈도 이 리인묵이가 조카애들을 쫓아버렸다고는 생각지 않을것이다. 조카애들을 쫓아버린 사람이라고 말하고있지만 진짜속심은 다른데 있을것이다. 리인묵은 인간을 저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리용물로, 꼭두각시처럼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는 주구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흑백을 전도하여 사실아닌 사실을 인정케 하며 죄없는 사람을 죽을고비에 빠뜨리고 고통을 주며 추물로 만들어버리는 일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놈들의 야비성에 몸서리를 쳤다.

(그래 내가 추물이 되지 않았단 말인가?) 리인묵은 지금도 자기를 저주하며 침을 뱉던 광고판앞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기는것 같았다.

내가 어찌하여 동족의 손가락질과 눈총을 받으며 이 짐승같은 놈들한테 끌려다니고있는가? 이 고통과 번민을 알아줄 사람은 없단 말인가? 나를 리해해주고 이 고통에서 건져줄 구세주는 어디 있는가?

하시모도는 객기를 부리며 사발보다 더 큰 대접에 술을 가득 부어 목을 젖히고 단숨에 들이키더니 얼마 안있어 곤죽이 되여 화월의 무릎을 베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민지주도 술상에서 물러나 안석에 기대였다.

화월이는 서장한테 옆에 있는 사방침을 베워주고나서 단단히 분담이 되여있는지 은저가락에 안주를 꿰여들고 분내를 풍기며 리인묵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이 대장부다와요. 어쩌면 아직도 끄떡 안하실가, 참 술을 잘도 하시네. 듣자니 연설을 하신다지요? 네? 그땐 제가 인묵씨만 청해놓고 한상 차리겠어요.》

리인묵은 속이 메슥메슥하여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갈증과 번열이 나 빨리 집으로 가서 드러눕고싶었다.

《인묵씨, 왜 일어나세요?》

《가겠소.》

《가시다니? 주무시고 가요.》

화월이는 턱밑으로 다가들어 더운 입김을 뿜으며 리인묵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비켜라, 이년!》

리인묵은 챙챙 감기며 옷자락을 붙드는 화월이를 떼여버리고 사람의 넋을 휘저어뽑는 그 어떤 악마의 소굴에서 뛰쳐나듯이 마루로 뛰여나왔다. 그리고는 신발을 겨우 찾아신고 풍을 만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대문있는데까지 갔다.

대문은 성문처럼 닫겨있었다. 대문에 빗장이 질려있다는것도 잊고 문을 앞으로 밀며 왈가닥왈가닥 흔들었다. 아무리 흔들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 신발을 철뜨럭거리며 달려나와서 빗장을 뽑아주었다. 부엌어멈같았다.

리인묵은 비칠거리는 넋처럼 정신이 휭휭 돌아 발길이 어떻게 놓이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팔을 내저으며 집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무엇엔가 얼굴이 부딪치며 도랑창옆에 넘어졌다. 얼굴에 상채기가 나고 피가 줄줄 나왔으나 그것 역시 의식하지 못하였다. 일어나려고 했으나 일어날수도 없었다. 무엇이든 붙잡고 일어나려고 손더듬을 하는데 선뜩하게 손끝에 와닿는것이 있었다. 물이였다. 갈증이 불일듯 하였다.

그는 어푸러진채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을 마시려고 안깐힘을 썼다. 웬일인지 몸을 내밀수가 없었다. 누군가 뒤다리를 잡아당겼다. 잡힌 다리를 뽑자고 버둥거렸다. 그런데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떤 작자야?》 하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때야 리인묵은 자기가 근래에 드물게 많이 마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몸을 가까스로 내밀어 도랑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리고는 입을 떼지 않고 서너모금 들이키다가 흐리멍텅해진 눈길을 들었다. 역하고 구역질이 났다. 썩은 물이였다.

리인묵은 자기가 구정물을 마시였다는것을 깨닫고 실성한 상태에서 입안의것을 내뱉으며 중얼대였다.

《마셔라. 내가 무슨 인간이냐? 짐승이지, 에익, 더러운놈의 세상, 다 부서져라! 뒈져라!》

리인묵은 넉두리하듯 땅을 치며 절규하고는 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

 

바로 이럴즈음에 리인묵이를 체포하기 위해 산에서 온 강민이네 일행이 거리로 들어왔다. 일행은 많지 않았다. 강민을 돕기 위해 경위대원 한개 분대가 이 거리를 잘 아는 덕만이와 함께 따라왔다. 워낙 초저녁에 도착했으나 밤이 이슥하기를 거리밖에서 기다리다가 곧장 리인묵이네 집으로 갔다. 리인묵은 집에 없었다. 처가 하는 말이 하시모도서장이 민지주네 집에 가서 한잔 하자고 데려갔다고 했다.

(벌써 그렇게까지 한통이 되였단 말인가?)

강민은 분기가 치밀어올랐다. 일행은 거리유축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있는 민영달이네 집으로 급히 갔다.

그러나 정작 와보니 민영달이네 집 방비가 간단치 않았다. 집주위로 길반이 넘는 통나무울타리를 둘렀을뿐아니라 울타리우로는 삐죽한 쇠못이 빗살처럼 촘촘히 박혔고 지붕이 우뚝한 솟을대문은 성문처럼 닫겨있었다. 덕만의 말을 들어보면 대문은 조금만 밀어도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퉁방울이 달려있고 대문안에는 사납기가 승냥이에 못지 않은 사냥개가 있으며 집안에는 비상전화통까지 있어 여차직하면 몇분안팎에 수비대와 경찰을 불러올수 있다고 하였다. 방비가 이러하므로 밖에서부터 문 열라고 소리치며 들어가는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였다. 안에서 선손을 쓸수 있는 여유를 주어 복잡한 정황이 생길수 있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얼른 수가 떠오르지 않아 이 집에서 머슴을 산 덕만이를 불렀다.

《덕만동무, 소리 안내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놈들앞에 총부리를 들이대야겠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

《중대장동지, 그건 제가 할수 있습니다!》

덕만은 강민이와 같이 온 경위대원들을 안내하여 집뒤로 돌아가서 울타리밑에 있는 수채로 다가갔다. 그것은 울타리안 사람들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 집의 비밀출입구였다. 울타리로 세운 통나무밑둥을 감쪽같이 잘라내여 문을 만들어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손으로 밀면 여닫기는 문이 있었다. 민지주네 집에서는 이 수채로 오물을 버리여서 덕만이는 내막을 잘 알고있었다. 그가 이 집에서 그런 구저분한 허드레일을 오죽 많이 하였던가.

강민은 미심쩍은데가 없지 않으면서도 장담해나서는 덕만이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그가 안내하는대로 소리안나게 수채문을 열고 잠시 동정을 살피다가 바람같이 울안으로 새여들었다. 강민의 지시로 대원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지하족 신은 발끝으로 자국을 저겨디디며 가랑잎이 굴러다니는 뒤뜰을 지나 안뜨락으로 갔다. 집지키던 세빠드가 무슨 기미를 차렸는지 대문옆에서 두귀를 쫑긋 세웠다.

덕만이가 입에 한손을 붙이고 그쪽에 대고 조심스럽게 휘파람소리를 내였다. 그러자 세빠드는 대뜸 순하고 착하던 어제날의 이 집 머슴을 알아봤는지 어느새 긴 꼬리를 사리며 앉아버렸다.

《괜찮아.》 하고 강민은 어둑한 추녀밑에 들어서서 집안팎을 살펴보았다. 방방이 다 불을 껐는데 한방만 아직 불을 끄지 않았다. 강민은 귀속말로 물어보았다.

《덕만동무, 저 방은 뉘 방이요?》

《민지주하고 첩년이···》

《첩년?》

강민은 토방앞으로 다가갔다. 한자리에 누워 년놈이 수작질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여나왔다.

《화월이두 이젠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구나. 철 지난 꽃이야.》

《그런 소린 왜? 하나 더 끌어들이고싶은가부지?》

《화월이가 가만있을가?》

《맘대로 하시구려. 돈많은 부자들이 세상에 못하는짓이 어디 있담.》

《그거야 사실이지. 세상이야 우리 세상이고말고. 그렇지만 난 우리 화월이가 제일인걸.》

《가짓뿌리.》

재깔거리는 화월의 목소리와 함께 참새주둥이처럼 뾰조름해진 그 입술마저 보이는듯 하였다.

같이 왔다는 리인묵이와 경찰서장은 어디 있는지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벌써 취해서 어느 방에 쓰러진것 같았다.

강민은 대원들더러 불을 끈 방들을 전부 감시케 하고는 아직 자지 않는 민지주부터 끌어내려고 토방우로 올라섰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고 덕만이더러 일렀다.

《동무가 저놈을 끌어내라구.》

덕만이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널뛰듯 하였다. 지난날의 악한 상전과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민영달이한테 매맞고 까무러치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게 악착하고 무섭던 어제날의 주인을 덕만이가 오늘은 총을 메고 찾아왔다.

(저놈이 이제 나를 어떻게 맞아줄가?)

덕만이는 방안에서 오가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불빛이 벌건 미닫이문을 스르시 열었다.

민지주가 기척을 느끼고 흘낏 문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문앞에 풀색옷을 입은 웬 사나이가 우뚝 막아선것을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울타리는 넘을수 없고 대문에서 방울소리도 안나고 개도 짖지 않았는데 무슨 사람인가? 멀리서부터 들어오는 기척을 내지 않고는 도저히 접근할수 없는 방이였다. 하도 괴이쩍어 민지주는 화월이를 품에서 놓으며 누운채로 소리쳤다.

《귀신이냐? 도깨비냐?》

《귀신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요.》

《그럼 너는 뭐길래 소리도 없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느냐?》

《난 사람이요!》

《응?》

민영달은 어느새 팔을 내밀어 머리맡에 세워둔 단장으로 침입자를 단매에 때려눕히려고 했다. 그만큼 그도 눈확이 우묵한것이 결패가 있고 사나왔다. 그러나 잘 때마다 버릇처럼 머리맡에 세워두는 망치달린 이 쇠지팽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을 돕지 못했다. 덕만이가 번개같이 쇠지팽이를 잡아뿌리고 그앞으로 총구를 들이댄것이였다.

민지주는 자기 이마빡을 겨누고있는 총구를 보자 휙― 눈알이 뒤집혔다.

《나으리, 누가 왔는지 똑똑히 보시오!》

덕만이가 발을 쿵 구르자 민지주는 남포불에 드러나는 침입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덴 소처럼 화닥닥 일어나 앉으며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자기네 집에서 머슴살던 덕만이가 틀림없었다. 어디 가서 죽은줄로만 알았는네 그 원귀가 찾아온것은 아닌가?

첩년 화월이도 정신이 번쩍 들어 덕만이를 알아보았으나 그전만큼 알고 속치마바람으로 달려나오며 총구를 치우라고 야단이였다.

《너 이놈, 나리님앞에 무슨짓이냐?》

덕만이는 총구로 달려나오는 화월의 가슴을 쥐여질렀다. 화월이는 저만큼 물러나며 비단요우에 풀썩 주저앉고 그러는사이 민지주가 정신을 수습하여 앉은채로 짐짓 위엄을 차렸다.

《음, 너 어디 갔다가 인제야 나타났느냐?》

《여보시오, 똑똑히 보시오. 나는 우리 혁명군의 이름으로 악질 지주를 처단하러 왔소.》

《응?》

민지주는 경풍이 일도록 놀라며 덕만의 차림을 살펴보았다. 푸른옷은 이제보니 군복이고 눌러쓴 모자에는 붉은별까지 달았다. 틀림없이 소문에 들은 혁명군 모습 그대로였다. 귀신이 곡할노릇이였다. 몇달전까지 이 집에서 머슴을 살던 덕만이가 총멘 군대가 되여 나타났다. 민지주는 와들와들 떨며 구멍이 확 열린 총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그만큼 짓밟고 등때기를 벗겼으면 이제는 당신이 벌을 받아야지.》

덕만이는 절컥하고 부러 더 큰소리가 나게 총탄을 재웠다. 그바람에 화월이는 기절을 하고 민지주는 덕만의 다리를 부둥켜안았다.

《덕만군!》

《군은 무슨 군인가?》

《그럼 아저씨!》

퇴지밑에서 강민의 기침소리가 났다. 16살난 덕만이가, 이 집에서 소똥처럼 막 굴리던 머슴이 그전날의 상전으로부터 아저씨대접을 받고있었다.

덕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민영달이 들으라. 내 몸에는 너의 채찍자리가 아직두 남아있다. 네놈은 마소처럼 때리며 사람으로 여기지 않던 내가 이렇게 나타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나를 어느분이이렇게 사람으로 내세워주고 키워주시는지 아느냐? 이놈.》

덕만은 민영달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소리쳤다.

강민이가 들어와서 민지주를 마루로 끌어내였다.

《민영달씨, 손님들은 어디 있소? 이 집에 리인묵이란자가 서장과 같이 왔지?》

《예, 예, 왔소이다.》

《그자들이 어디 있소?》

《예, 바로 저 방에···》

강민은 전지를 켜들고 민영달이가 가리키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의 대답과는 달리 술판을 벌리던 그 방에는 하시모도서장 혼자 있었다. 하시모도는 주인보다 곱절이나 더 마시였던것만큼 취중에 아직 세상모르고 잤다. 벽에는 금줄을 시누렇게 두른 경관제복과 긴 칼이 걸렸고 머리맡에는 듣던바대로 비상전화통이 놓여있었다. 강민은 남포등을 켠 다음 일어나라고 서장의 이마빡을 단장으로 한대 딱 때렸다.

《뭐야?》

하시모도는 깨여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권총을 넣은 베개밑으로 한손이 갔으나 어느새 벌써 강민이 그 손을 발로 누르며 총구를 내밀었다. 하시모도는 자기 가슴통에 총구를 겨누고있는 강민의 엄한 기상과 토방에 서있는 총쥔 사람들을 보더니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강민은 서장을 마루에 꿇어앉힌 민지주옆으로 끌어내고 벽에 걸려있던 그자의 칼끝을 목에 가져다대였다,

《서장, 리인묵이란자는 어디 갔는가?》

《예, 오기는 같이 왔는데···》

강민은 대원들에게 열개가 넘는 빈방을 다 찾아보게 하였다. 대원들은 방방이 문을 열어보고 리인묵이가 이 집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 주구놈을 쫓아가서 잡으라!》

강민은 명령하였다.

얼마후 집안팎을 수색하던 대원들이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을 마당으로 끌어왔다.

《강민동지, 대문밖 도랑창옆에서 끌어왔는데 취한걸 보니 이자가 혹시 리인묵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취한자를 끌고온 대원이 보고했다.

만신창이 되도록 얼굴에 상채기가 나서 강민은 그가 누군지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였다. 불빛이 환한 마루로 끌고나와서야 그가 바로 리인묵임을 알아보았다.

흔들어깨웠다. 리인묵이 역시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몽롱한 눈으로 군복입은 사람과 그뒤에 서있는 총멘 대원들을 물끄러미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싸창을 쥐고있는 강민을 마침내 알아보고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군··· 나도 이런 날이 올줄 알았소··· 어서 쏘시오!》

《이놈, 왜놈들의 주구질한 값을 앉은 자리에서 쉽게 치를줄 아느냐?》

강민은 서장과 리인묵을 체포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앉아 떨고있는 민지주쪽으로 돌아섰다.

《민영달씨, 당신이 하는짓을 봐서는 당신도 용서해줄수 없다. 그러나 조선사람이라는걸 생각해서 한번 용서해준다. 왜놈이 다 된 주구 리인묵이와 이 악질서장은 부대로 끌고가서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할것이다. 만일 당신도 계속 악한짓을 하면 이자들과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한다는것을 명심하라.》

《명심하겠소이다. 황공하오이다.》

민영달은 얼혼이 빠져 두손을 비비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였다.

강민은 철수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