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2


 

제 6 장

2

 

장교들속에도 얼근하게 술기운이 퍼져 열을 올리는자들이 적지 않았다.

좌중의 기분에 같이 휩쓸리다가는 자신도 취해버릴것 같았다. 윤석찬은 술이 약한 두세명의 장교가 번열이 나서 머리를 식히겠다고 밖으로 나가는 틈을 타서 자기도 담배를 한대 피우겠다는 구실을 대고 슬그머니 자리를 일었다. 뜨락으로 나온 그는 서른보가량 떨어져있는 포대옆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나무그늘밑에 의자가 놓여있는것으로 보아 이따금 우미야마가 이곳에 앉아 피로를 푸는것 같았다. 밖에 나온 장교들은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담배대를 물고 객담을 늘어놓으며 바람을 쏘이고있었다.

윤석찬은 지친듯이 의자에 주저앉아 담배갑이 들어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활짝 열어놓은 미닫이문으로 넓은 방안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계속 방안에 버티고앉아 부어라 마셔라 하며 흥청망청 떠들어대는자들은 점점 더 취기가 올랐다. 팔을 내젓고 목소리를 높이고 하는 거동이 술상앞에 앉으니 저마다 호걸이고 영웅이여서 우미야마도 안중에 있는것 같지 않았다.

얼마 마시지 않은 술기운마저 날려보낸 윤석찬이 취한 자세를 취하며 방안에 다시 들어가려고 자리를 일었을 때였다. 상통이 오종종하게 생긴 장교가 그의 앞을 지나 급히 우미야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윤석찬은 의자에 도로 주저앉아 담배를 또 한가치 꺼내물고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급한 정황이 생겨 달려온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 장교가 보고하는 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불시에 나타난 장교는 정찰참모였다.

정찰참모는 우미야마옆에 앉아있는 참모장곁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수군거렸다.

《참모장각하, 전번에 후방밀영에서 종적을 감춘 아이들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서 말하라.》

《참모장각하, 종적을 감춘 아이들이 지금 모두 김일성빨찌산 주력부대에 가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뭣이? 너는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고있는가?》

참모장은 눈매가 사나와지며 거칠게 되물었다.

《우리 정찰대가 아이들을 백여명이나 끼고 행군하는 빨찌산부대를 보았습니다.》

《주력부대라는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사령관밑에 많은 부대가 있지만 사령관이 직접 친솔하는 주력부대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을 감히 할수가 없다는것입니다.》

참모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리가 적당치 않아 연회가 끝난 다음 보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옆에서 이미 귀신같이 엿들은 우미야마가 부대장들과 고바야시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연회탁을 치며 말하였다.

《나는 군들이 이렇게 먼길을 달려와 축배를 들어주는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군인이다. 훈시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부대장들은 허두가 어쩐지 심상치 않은것을 느끼고 풀었던 단추를 채우며 하나둘 자리를 고쳐앉았다.

《군들도 아는바와 같이 김일성빨찌산의 활무대로 되여있는 여기 이 조만국경일대의 치안확보는 대동아공영을 지향하는 제국의 운명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로서 이를 위해 우리 제국은 만전지계를 갖추고 그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관동군과 수비대, 경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빨찌산은 도처에서 군부를 경악실색케 하는 폭위를 그칠사이없이 휘둘러 국책수행과 후방치안에 엄중한 난관을 조성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또 어떤 기이한 정보가 들어왔는지 아는가? 김일성사령관이 직접 친솔하는 혁명군의 주력부대가 백여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을 끼고다닌다는 희한한 정보가 들어왔단 말이다. 군들은 이 정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미야마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부대장들을 둘러보았다. 부대장들은 웅성거렸다. 눈알이 매눈처럼 팽팽 돌아가는 작전참모가 먼저 일어서서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것은 몇개 사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횡재로 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각하, 우리 제국군이 이때까지 근 십년세월을 두고 김일성빨찌산을 소탕하지 못한것은 김일성사령관의 신출귀몰한 전법과 <축지법>으로 통하는 번개같은 기동때문이였다는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바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출귀몰한 전법도 번개같은 기동도 더는 맥을 쓰지 못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숱한 어린것들이 수족을 붙들어 그들이 가지고있는 장점을 마비시킬수 있기때문입니다. 저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김일성사령부를 포착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전참모는 자기의 의견을 상관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가늠해보듯이 우미야마의 안색을 살폈다. 우미야마는 철편같은 얼굴의 근육을 움직이지 않고 부대장들쪽을 바라보았다.

얼근한 부대장들은 작전참모의 의견에 공감인듯 더욱 활기를 띠웠다.

《사령관각하, 이것은 김일성공산군이 숨쉬는 짐짝들을 지고 자기들을 소탕해달라고 스스로 통고장을 보내온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옳습니다. 각하, 그들은 지금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오고있습니다.》

참모장이 정색을 하고 우미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숱한 어린이들을 밀영에 두고 보호하는것 같다는 정보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런 일이 있을수 없다고 그 정보조차 완강히 부정하던 사람인만큼 오늘의 이 신기한 소식이 사실로 확증되자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흥분하였다.

《사령관각하, 김일성빨찌산토벌에 관동군사령부산하 많은 부대가 동원된 지금 이러한 정보가 들어온것은 빨찌산완전소탕의 거창한 사명을 우리 <토벌>사령부에 주고저 하늘이 돕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식이야말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각하에게 드리는 희한한 선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참모장이 위치에 어울리게 격을 갖추어 요란하게 말하자 부대장들은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쟁을 타고난 소장을 축하한다는듯이 그를 향해 잔들을 높이 들어보였다. 동시에 참모장이 우미야마앞에 술을 붓고 역시 축하의 뜻으로 자기 잔을 내밀며 어서 들자고 권하였다.

《고맙다.》

우미야마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거의 무표정한 태도로 참모장이 내민 잔을 찧었다. 그리고는 술을 입에 대는 시늉만 하고 잔을 도로 놓으며 차거운 눈길로 부대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밖으로 터져나가는 욕설을 겨우 참았다.

《바보들, 천하의 머저리같은놈들!》

연회탁을 뒤집어엎고 이 등신같은놈들을 전부 쫓아버리고싶었다.

(그러나 이 바보들속에 앉아있는 나는 무언가? 똑똑한 머저린가? 도대체 이것들이 이 정보의 위험성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인가?)

사실 오랜 전화에 단련되고 만만치 않은 담력과 랭철한 사고력을 가진 우미야마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아연실색하여 공포에 가까운 전률을 느꼈다. 일본제국이 대륙에 대한 정복전쟁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진격하고있는 전과에 극도로 흥분한 그는 김일성빨찌산이 완전소탕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이런 기상천외의 소식이 날아들줄은 꿈에도 상상 못하였다.

김일성빨찌산이 제 한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불길속으로 백여명이나 되는 어린이들까지 끼고다니는 그 거대한 여유와 무쇠같은 의지에서는 범속한 인간들과 속세의 무리들은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방약무인에 가까운 선전포고가 울리는것 같았다.

(만일 이런 소식이 내가 병사들을 내몰아 그처럼 무자비하게 칼로 찌르고 피바다속에 처넣은 조선사람들속에 퍼진다면 그 후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내 수하에 이 정보에 담겨있는 무서운 뜻을 옳게 리해할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은 조선인민앞에서 가장 횡포했던 우미야마, 그자신만이 느낄수 있는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결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일본군복을 입은 병사치고 조선민족앞에 량순했던 인간이 한명이라도 있었던가.

(뭐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여든다고?)

우미야마는 활기에 넘쳐있는 부대장들을 랭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원체 그는 부대장들을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명령을 집행하는 기계들이라고 보아왔기때문에 그들의 저속한 판단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부아를 돋군것은 자기의 오른팔이 되여주어야 할 참모장의 경망한 속단이였다. 우미야마는 영민하고 기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참모장으로 직접 등용한것이 자기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늘 보아오는 참모장의 불거진 광대뼈와 끝이 들린 들창코가 오늘따라 어찌 화를 돋구는지 몰랐다. 미욱하고 경솔한 사람됨이 상통에 내돋은 이자를 어째서 여태 자기 대리인으로 두고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 옆에서 나를 똑똑히 보좌해줄수 있는 사람이 이 방에는 없단 말인가?

우미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거닐며 친지의 아들인 고바야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아직도 대륙의 현황에 너무나 어둡다.

(그럼 저 윤석찬이는?)

우미야마는 술이 약한 장교들과 같이 밖으로 나가 멀리 나무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있는 윤석찬이를 바라보았다.

그를 리용하기 위해 《협화회》 리사로 등용하고 각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몇번 상면까지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식민지민족을 얕보는데 습관되여온 우미야마로서도 감히 하대할수 없는 기품과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그가 제국의 국책수행에 얼마나 발벗고 나서주겠는지는 아직도 알수 없다. 사실 그래서 중떠보려고 오늘 이자리에 청해온것인데 뜻밖에 들이닥친 정보때문에 기회를 놓쳐버리고말았다.

우미야마는 마음속으로 느끼는 전률과 부하들에 대한 실망, 자기의 모략적인 계획을 수하 장교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오직 공격정신으로 고무하는것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제군들이 우리가 오늘 입수한 정보를 두고 이처럼 활기에 넘쳐있는 심정을 알만하다. 군들이 한결같이 말한것처럼 김일성빨찌산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진것만은 확실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군들의 견해에 절대 찬성이다. 우리는 이 점을 최대한으로 리용해야 한다. 제군들은 이제 돌아가면 즉시 출동준비를 갖추고 다른 린접부대들과의 련계에 만전을 기하라. 그리하여 김일성사령부가 일단 포착되면 대거포위환을 형성하여 소탕전을 벌리는데서 우리 군부대가 앞장서야겠다.》

우미야마는 참모장과 다시 잔을 찧었다. 그리고는 방안에서 오가는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는듯이 상대를 잃어버리고 무료하게 앉아있는 고바야시를 쳐다보았다.

《군은 이자리에서 오가는 말을 리해 못하겠지?》

《천만에.》 하는 뜻으로 고바야시는 고개를 으쓱해보였다.

《고바야시군, 이제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두고보라구. 자넨 우리 사령부에 와있는 보람을 느끼게 될거야.》

《정말 그렇게 될가요?》

《암, 마시라구. 함께 온 윤석찬씨는 어딜 갔나? 이런 때 협화회가 잘만 하면 우릴 도와줄수 있는데.》

고바야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 나온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방안에서 내비치는 불빛에 형태가 어렴풋이 드러나는 느티나무밑으로 비칠거리며 걸어갔다. 저희들끼리 객담을 늘어놓던 장교들은 다시 방에 들어가고 나무밑의자에는 윤석찬이 혼자 앉아있었다.

윤석찬은 지금 바람을 쏘이는체하며 어떻게 하면 연회장에서 벌어진 내막을 알아낼것인가 하는 생각을 좇고있었다. 장교가 참모장의 귀에 대고 수군거리는 거동이며 흥분하여 훈시같은것을 하던 우미야마의 손짓과 몸짓으로 미루어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어떤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때 고바야시가 다가와 느티나무중허리에 손을 짚으며 윤석찬의 기색을 살폈다.

《윤선생, 왜 이렇게 밖에만 나와있소?》

《난 그만 가야 할가보오.》

《가다니? 우리가 손님을 청해놓고 푸대접을 한게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고바야시선생의 성의여서 오기는 왔습니다만 군인들속에 사민이 자리를 같이하는것은 아무래도 격에 어울리지 않지요.》

《그래서 자리를 일었소? 하긴 저 사람들이야 앉으면 전쟁이야기지. 무슨 비밀두 많지, 옆에서 듣기에두 싫증이 날 지경이니까.》

《허, 당신이야 뭘 아는게 있겠다구.》

《여보, 당신도 날 그렇게밖에 보질 않소? 하긴 방금 나타난 정찰참모란자도 내가 들을가봐 그러는지 참모장의 귀에 대고 소근거리더군. 하지만 우미야마소장은 이 고바야시를 남으로 생각질 않는단 말이요, 윤선생, 당신이 반도인이지만 난 당신을 믿소. 정찰참모 그 작자는 방금···》

고바야시는 정찰참모의 보고며 우미야마의 훈시며 하는 방안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들은대로 옮겼다. 고바야시는 자신이 청해온 손님이 생일잔치에 흥미를 못느끼고 돌아가고싶어하는것을 보고 미안해하면서 이 대륙에 생소한 자기에게 많은 지식을 주었고 앞으로도 크게 도움을 줄수 있는 윤석찬이한테 각별한 호의를 베풀고싶어했는데 그런 호의를 보여주는 방법의 하나가 비밀을 대주는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그는 자기가 취중에, 화김에 또 리해관계로부터 옮긴 비밀이 윤석찬이한테 어떤 충격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사실 태연한 표정으로 고바야시의 이야기를 듣고있었으나 윤석찬은 그 순간부터 가슴이 옥죄여드는것을 느꼈다. 적들은 우리 혁명군주력부대가 무거운 짐이 아닐수 없는 숱한 아이들을 싸움판으로 끼고다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령부를 포착《소탕》하기 위한 대공세를 준비하고있는것이다.

한시바삐 이 사실을 사령부에 보고하여야 한다.

윤석찬은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하려고 주연이 끝나가는 우미야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창문쪽에 놓여있는 풍금뚜껑에 손을 짚고서서 부대장들을 상대로 전쟁에서 기동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력설하고있는 우미야마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무슨 말끝에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우미야마는 와테를로격전에서 나뽈레옹이 패한것은 대포를 끄는 군용마차들의 무거운 수레바퀴와 장마때문이였다고 주장하였다.

《나뽈레옹군이 영국군의 공격을 받던날 비가 왔는데 만일 그때 나뽈레옹군의 군화와 수레바퀴가 진창에 빠지지만 않았던들 그의 운명은 달리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뽈레옹의 머리우에 비를 퍼부었던것이다. 헌데 지금 무거운 수레바퀴와 무거운 장화를 신은 적이 우리앞에 나타났단 말이다.》

우미야마는 고개를 돌리다가 윤석찬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윤선생, 내가 귀한 손님을 청해놓고 너무 다른 문제로 열을 올리는게 아니요? 오늘이야 그럴 날이 아니지요. 리사선생, 이 즐거운 날 우리 군인들을 위해 한곡 들려주지 않겠소.》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던 윤석찬이한테는 천만뜻밖의 청이였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듯 하다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잘 타지는 못하지만 각하의 청이니 한곡 타보겠습니다.》

그는 례절있는 몸가짐으로 풍금앞에 앉으며 까만 뚜껑을 열어놓았다. 일시에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며 건반우로 올리는 손을 쳐다보았다. 윤석찬은 건반우에 손을 올린채 밑을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건반을 누르기에 앞서 음악의 세계에 잠기며 곡상을 더듬는것 같았다. 그러나 윤석찬은 이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

(문제가 아닌가. 적들이 이런 때 사령부의 행처를 찾아내고 대병력을 집중하면 어떻게 하는가?)

불안과 뒤숭숭한 생각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머리를 숙이고있던 그는 조용히 건반을 짚었다. 고요한 선률이 방안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슈벨트의 《보리수》였다. 방금전까지 전쟁열에 미쳐날뛰던 그들의 거칠어진 마음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우면서도 향수를 자아내는 선률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윤석찬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어느덧 선률이 추억속에 묻어두고온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에 이르자 윤석찬은 고개를 들며 우미야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우미야마는 폭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매우 심취해서 듣는 표정이였다.

그러나 로흉스러운 이 책략가 역시 지금 전혀 딴 생각을 하고있었다.

(어째서 저 사람은 군인들을 위해 풍금을 타면서 일본을 찬양하는 곡이나 군가를 타지 않고 애상적인 곡을 타는가? 쩍하면 일본사람들을 발라맞추기 위해 일본노래를 부르는 저속한 사람들과는 어덴가 좀 다르다. 저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우리를 도와나서게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윤석찬은 우묵한 눈으로 자기 얼굴을 뜯어보는 우미야마의 차거운 시선을 륙감으로 느끼며 침착히 건반을 짚었다.

(저자는 오늘의 정보를 두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어째서 풍금은 나더러 타라고 하는가?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고 나를 중떠보고있는것은 아닐가?)

이 악귀같은자들이 혹시 내 정체를 알고있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럴수록 윤석찬은 음악세계에 깊이 잠긴듯이 눈을 조프리고 침착하게 건반을 눌렀다. 그러는 윤석찬의 눈앞으로는 언뜻 그리운 모습들이 떠올랐다.

장군님께서 계시는 사령부가 우렷이 보이고 부대에 와있다는 숱한 소년들의 얼굴들도 상상속에 다정한 모습으로 안겨왔다.

이때까지 살아온 한생도 순간의 흐름을 타고 언뜻언뜻 지나갔다.

국치를 당하여 통곡하는 우국지사들을 눈물이 글썽하여 바라보던 유년시절, 피로 물들인 3. l의 광장에 치를 떨며 서있던 소년시절.

학문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현해탄을 건넜던 일본류학, 신병과 비탄만을 안고 돌아오던 쓸쓸한 배길.

그후 지식청년 윤석찬은 어디 가나 망국노의 설음을 뼈저리도록 맛보며 가슴속의 슬픔과 번뇌, 암흑을 가시여줄 홰불을 찾아 수년세월 등대없이 포류하였다.

마침내 김일성장군님을 알게 되고 그이의 해발을 받아 혁명의 길에 들어섰을 때 감격에 젖은 윤석찬의 환희는 얼마나 컸던가. 정녕 절세의 영걸만이 지닐수 있는 뜻과 슬기로 캄캄한 조국의 하늘에 광복의 서광을 비쳐준 장군님의 해발은 윤석찬이에게 있어서 가슴속의 어둠을 가시여준 구원의 해빛이였으며 인생항로에 삶의 목적을 세워준 신념의 기둥이였다. 이 해빛, 이 신념이 있어 망국노의 비탄을 안은채 황량한 초야에 한 품고 묻힐번한 그도 장군님을 우러르며 적구의 어려운 나날에 자신을 단련하여 삶의 긍지와 존엄을 지닌 혁명가로 자랐다.

성장한것은 자기만이 아니였다. 감상적인 녀고보졸업생이며 소시민적인 기분이 농후하던 안해 계숙이도 이제는 남편의 도움이 없이도 혁명의 한길을 걸어나갈수 있는 녀성으로 자라났다.

진정 혁명이란 얼마나 보람있는 삶의 창조인가!

조야한 일본군가나 부를줄 알았지 대부분 음악을 모르는데다가 다만 우미야마가 심각해서 듣는다는 리유로 자기들도 열중해 듣는체하던 부대장들은 점점 더 심취되는 윤석찬의 그 정열적인 자세에 얼떠름해졌다. 그들은 마치도 음악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낡은 풍금앞에 앉아서도 인간이 저렇게 오묘한 선률을 끌어낼수 있는지 그것을 놀랍게 여기는것 같았다. 드디여 마지막선률이 긴 여운속에서 오래 잦아들었다.

윤석찬은 건반을 짚은채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변변히 타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량해를 구하며 풍금앞에서 일어섰다.

흥분한 우미야마가 술잔을 들고 그앞으로 다가왔다.

《고맙소. 잘 들었소. 그렇게 잘 탈줄은 몰랐소. 이런 날에는 격렬한 곡을 탈줄 알았는데 슈벨트를 들려준것도 역시 뜻밖이요.》

윤석찬은 방금 자기가 탄 선률로 하여 보다 대담해진 눈길을 들고 우미야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각하, 큰 싸움을 앞둔 군인들에게는 격렬한 곡도 필요하지만, 지난날을 추억케 하는 음악이 군인들의 용감한 정신에 불을 붙이는 부시돌이 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윤리사다운 대답이요!》

우미야마는 감사를 표시하는 뜻으로 그에게 잔을 권하였다. 그리고는 얼굴에 스치는 음영을 살피듯이 윤석찬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정색하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정력과 의욕에 넘쳐있는 리사를 보니 반갑소. 그것을 고스란히 제국을 위해 바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에게 한가지 중한 일을 맡기겠소. 거절하지야 않겠지?》

윤석찬은 이런 좌석에 왜 자기를 불렀는지 여태 궁금해하던 차여서 더욱 긴장을 느끼며 대답했다.

《누구의 말씀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우미야마는 족할만큼 먹었지만 무엇인가 방금 삼켜버릴듯이 탐욕스럽게 눈을 번뜩이며 풍금앞을 왔다갔다하였다.

윤석찬은 만만치 않은 이 책략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는가를 신경을 세우고 기다렸다.

《윤선생, 우리 제국은 지금 방대한 군력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김일성빨찌산에 대한 전면공세를 개시하였소. 이러한 때에 협화회도 국책수행에 적극 협력해야 할것이요. 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이 거리에는 리인묵이라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좋은 선전대상이 한사람 살고있소. 그는 독립군을 하다가 화승대를 스스로 강물에 던진 사람으로서 빨찌산에 간 동생과도 리념상으로 결별하고 집에 찾아온 동생 자식들까지 쫓아버렸다고 하오. 그렇게 한것은 체험을 통해 제국의 힘앞에서는 반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량민이 되여 편안하게 사는 길이 상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기때문이요. 이것은 더 바랄수 없이 좋은 선전감이요. 리인묵이 그 사람을 모르는 백성이 없도록 내세워야겠소.

리사, 나는 당신이 그 일을 맡아주기 바라오. 당신이 그런 내용으로 연설문도 만들어주고 거리와 마을로 데리고다니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선전을 하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 작전구역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그 사람처럼 만들어야겠소. 혁명군이 의거하고있는 군중지반을 무너뜨려야 하오. 어떻소? 취지를 알겠소?》

우미야마는 걸음을 멈추고 윤석찬의 눈길을 들여다보았다.

예상 못한 우미야마의 요구는 윤석찬을 아연케 하였다.

《사령관각하, 알겠습니다.》

《리사, 나는 그 일에 큰 기대를 걸고있소. 리인묵이가 큰것이 아니라 그가 주는 영향을 크게 생각하기때문이요. 당신이 리사가 된 후에 처음 맡기는 일인데 믿음에 보답해주기 바라오.》

우미야마는 례절을 끝까지 지키며 이번에는 성공을 바라는 뜻으로 술을 부어 권하였다.

윤석찬은 《토벌》사령부를 나설 때까지도 자기가 지금 무슨 지령을 받고 오는가를, 어떤 난사에 부닥치고있는가를 곰곰히 분석해보지 못하였다. 그런만큼 얼마나 그것이 무서운 일이며 자기를 얼마나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랭혹한 시험인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수가 었었다. 다만 사고를 침착히 정리해볼수 없는 좌중의 엄엄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공작원으로서의 내 신상에 무엇인가 아주 좋지 않은, 매우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만을 어렴풋이 의식하였을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