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2


 

제 4 장

2

 

숙영지에서 12도구까지는 걸음이 빠르면 한겻에 댈수 있는 60리길이지만 일행은 너나없이 이틀이나 낟알구경을 못하고 떠나온터여서 길을 빨리 축내지 못하였다.

강민이 책임진 이 선발대는 인원이 단출하였다. 《도감》인 로상권이까지 해서 모두 넷이였다. 한사람은 송순이고 다른 한사람은 군수처에서 로상권이와 같이 일하는 대원이였다.

행동하기 편하게 변복을 하고 배낭까지 떼두고 오는데도 허기진 몸에서는 식은땀이 그냥 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악스럽게 길을 질러 산발을 타고 걷다가 12도구어방에 이르러서야 신작로에 나왔다. 줄곧 산발을 타고오던 일행이 행길에 나선것은 얼마전에 개통한 신작로가 여간 분주하지 않기때문이였다. 행인들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큰길로는 황토색먼지를 뽀얗게 날리는 자동차들이 12도구쪽으로 미친듯이 질주하고있었다. 모두 군용트럭들이였다.

트럭마다 누런 복장에 철갑모를 눌러쓰고 총대를 무릎사이에 세운 《황군》이 시루의 콩나물처럼 적재함이 터지게 들어앉았다. 군복이고 얼굴이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써서 눈만 번뜩거리는 병사들은 거칠고 조야한 목소리로 군가를 불러대였다.

강민은 이번 걸음이 첫시작부터 어쩐지 느껴오는 조짐이 좋지 않아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이미 몇대가 지나갔는지 대중할수 없지만 눈으로 세여보는 사이에도 십여대의 트럭이 누기섞인 먼지를 그들한테 들씌우며 12도구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12도구에 이른 선발대는 서뿔리 거리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산에 붙어 거리를 내려다보며 동정을 살폈다.

엔징소리, 말울음소리, 욕지거리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와서 거리는 정신을 못차리게 소란하였다. 수비대건물쪽에서는 병영이 모자라 금방 실려온 병사들이 산기슭에 새까맣게 붙어 천막을 치고 한쪽에서는 끌려나온 수백명 부역군들이 칼을 찬 경관들의 감시속에 등짐으로 흙을 져나르고 방틀에 들어간 생흙을 나무메로 다지고 하며 토성을 쌓고있었다.

토성공사는 최근에 놈들이 부랴부랴 벌려놓은 품이 많이 드는 역사였다.

강민이네 일행이 혼잡스러운 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있을 때 공사장쪽에서 돌연 주의를 집중시키는 호각소리가 야멸차게 들려왔다. 뒤이어 검은 제복을 입은 경관들이 포승을 지운 한 청년을 격검채로 때리며 끌고오는것이 보였다. 그뒤로는 자위단복을 입은 코수염쟁이가 아마포로 싼 짐 한짝을 메고 따라왔다.

그자들은 칼집을 휘둘러 부역군들을 말떼 몰듯이 한옆으로 몰아놓고는 묶어온 청년을 반나마 쌓은 토성벽에 끌어다세웠다.

강민이가 보기에 금시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질것 같았다. 그는 로상권이와 같이 갈매나무숲을 헤치며 가까이 접근하여 웅성거리는 공사장을 풀잎사이로 내다보았다.

경관들이 분주히 뛰여다니며 주위를 정돈해놓자 공사장 한가운데로는 강민이가 얼마전에 이 거리에 왔을 때 본적이 있는 수비대장 아라끼소좌가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과는 형색이 완연 구별되는 거리의 유력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함께 온 유력자들속에는 검은 바지에 뻘건줄을 치고 칼을 찬 하시모도서장과 누런 복장에 완장을 두른 자위단장도 있었으며 신사풍의 흰 양복에 시계줄을 드리운 《협화회》 리사 윤석찬이도 있었다.

윤석찬의 옆에 서있는 두사람은 낯이 설었다. 살에 붙지 않는 모시천두루마기우에 빠나마모를 쓰고 개화장을 들고있는 중년의 사나이는 거리의 부호 민지주였고 검정례복저고리에 줄간 례복바지를 입고 전이 넓은 등황색중절모밑으로 칼칼한 얼굴을 드러내고있는 사람은 우미야마지구 《토벌》사령관의 손님으로 와있는 고바야시였다.

한옆으로 밀려나서 영문 모르고 빙 둘러선 부역군들은 기세등등한 거리의 유력자들과 포승을 지고 축축한 토성벽에 서있는 청년을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역군들속에도 알만 한 얼굴이 있었다. 강민이가 얼마전에 만나본 리인묵이였다. 그는 부역군들속에 있으면서도 행색과 거동이 부역군같지 않았다. 손에 연장도 들지 않고 어깨에 토목수건도 걸치지 않고 바래지 않은 옷차림에 선선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랭담한 표정으로 서있는품이 이때까지 토공과 채찍에 시달린 사람같지 않았다. 누구한테서 무슨 일이 있다는 연통을 받고 방금 구경나온 사람처럼 신색이 유표한데가 있었다.

그런 느낌이 더 들게 한것은 주위사람들이 리인묵이를 보는 순하지 않은 눈길이였다. 사람들은 마치 제무리에 날아든 한마리의 갈가마귀를 경계하는 까치들처럼 눈총을 쏘면서 그를 비웃는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는것 같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어째서 리인묵이한테 저렇게 눈총을 쏘는가?)

강민은 의혹을 품으며 잡혀온 청년을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조심히 토성쪽으로 접근하였다. 청년은 목탄재가 꺼멓게 묻은 로동복을 입었는데 어찌 매를 맞았는지 옷이 갈가리 찢기고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저 사람은 누굴가? 혹시 이곳 지하조직원이 아닐가? 도대체 어떻게 하자고 공사장으로 끌어왔는가?)

강민이 숨을 죽이고 놈들의 거동을 지켜보고있을 때 수비대장이 하시모도서장쪽에 눈짓을 하였다.

서장은 무슨 신호처럼 시퍼런 칼을 좍소리가 나게 뽑아들었다. 그러자 일시에 한옆에 서있던 부하들이 당장 발사할 기세로 토성벽에 서있는 청년을 향하여 총대를 뻗쳐들었다.

서장은 사격준비가 끝난것을 보고 금시 누구의 목인가를 찍을것 같은 기세로 칼날에 손을 대여보고는 위협적인 눈길을 들어 군중을 일별하며 공포하였다.

《모두 듣거라, 저놈은 <공비>와 내통하는 불온분자이다. 저놈은 나오라는 토성공사에는 안나오고 통제품을 숯구이막에 감추어놓고 혁명군에 넘겨주려다가 잡혀왔다.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기앞에 가져다놓은 짐짝을 가리키며 단칼에 뭉텅 동강을 내고 시퍼런 칼끝에 지하족 한짝을 꿰여들었다. 부역군들은 눈이 퀭하여 서장이 칼끝에 꿰여 머리우로 쳐들어올린 커다란 지하족을 일시에 바라보았다.

《다들 보라! 이 지하족이다. 우리는 당국이 시행하는 조치에 불복하거나 혁명군에 통제품을 공급하는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하라는 우미야마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자를 즉결 총살한다.》

서장이 번쩍 하고 섬광이 일게 칼날을 아래로 내리긋자 총을 겨누고있던자들은 한쪽눈을 감으며 발사했다.

숯구이청년은 피를 뿜는 가슴을 두손으로 움켜잡고 《이놈들아-》 이 한마디를 지르고는 성벽밑에 쓰러졌다.

군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듯이 주먹을 부르쥐고 서장쪽을 쏘아보았다.

서장은 입을 꽉 다물고 표정없이 자기앞에 서있는 리인묵이쪽을 힐끔 보고나서 소요를 일으킬것처럼 웅성거리는 군중들을 향해 피대를 다시 세우며 경고했다.

《보았는가? 당국의 요구에 불응하는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렇게 된다. 이 토성공사로 말하면 조만국경일대에서 김일성공산군을 견제소탕하기 위한 중요한 시책의 하나이다. 너희들은 응당 제국에 운명을 맡긴 국민의 열의를 다하여 토성공사를 하루빨리 끝냄으로써 적색사상이 들어오는것을 막고 한톨의 쌀, 한근의 소금, 한통의 성냥, 한컬레의 신발도 혁명군편에 절대 넘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신작로를 질주하던 군용트럭들, 거리에 우글거리는 적들을 볼 때부터 이번 걸음이 어떻게 될지 불안을 느끼던 강민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몸서리를 치며 생각하였다.

(식량해결은 말도 안되겠구나.)

그가 뒤에 있는 동무들한테로 가서 방금 있은 총살에 대해서와 느낌을 말하였을 때 로상권이도 이번 걸음은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도무지 자신이 없어하였다. 박덕산의 사람됨은 모르는바 아니였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참경을 보니 이제 그를 만나 엄청난 임무를 전할 일이 난감하였다. 강민이네 일행은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중간련락소인 윤석찬이네 집부터 찾아갔다.

본시 례절바른 윤석찬이네 내외는 초면이 아닌 일행을 여간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 걸음에 혁명군이 된 송순이가 같이 와준것이 이들내외를 더욱 기쁘게 하였다.

윤석찬의 안해는 그전의 주눅에 빠졌던 겉기를 벗고 생기가 어린 송순의 얼굴을 보면서 참 몰라보게 되였다고 혀를 차며 소곤거렸다.

윤석찬이도 자기가 한해전에 추천하여 혁명군에 보낸 송순이가 어엿하게 공작까지 나온것을 보고 감개무량해하였다.

《혁명군물이 좋긴 좋군.》

《그러게말이예요. 참 모두 저녁식사전이겠어요. 잠간만 앉아들계셔요. 제가 얼른 한술 지어드리겠어요.》

격식없는 수인사가 오간 뒤에 계숙은 서둘러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그만두십시오. 수고스럽게 언제 군불을 때겠습니까. 찬밥이면 찬밥, 아무것이나 있는대로 한술 주십시오.》

강민이가 아래방에 대고 시간도 없는데 새 밥은 짓지 말라고 만류했다. 로상권은 밖에서 먹고왔다고 찬밥소리도 하지 않았다. 유지들의 세간에서나 볼수 있는 자개박이로 십장생을 그려넣은 문갑과 벼루를 올려놓은 연상을 보니 아무리 혁명동지네 집이라도 체면을 생각하게 되는 모양이였다.

《웬걸 했겠소.》

윤석찬이가 안해더러 어서 나가 한술 안치라고 재촉했다.

계숙은 채롱우에 놓여있던 행주치마를 집어들고 시우쇠로 장식한 반닫이앞에 부끄럼을 타며 서있는 송순이더러 앉아서 기다리라고 이르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송순은 소매를 걷어접으며 부엌으로 따라나갔다.

어느덧 벽시계가 열점을 치고있었다.

윤석찬은 장지문을 닫고 마루로 통하는 완자문도 꼭 닫았다.

그리고는 남포등의 심지를 돋구고 강민이와 마주앉았다.

강민은 그가 찾아온 용무를 묻고있다는것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선뜻 말이 안나와 다른 이야기부터 하였다.

《윤선생, 오늘 공사장에서 총살당한 숯구이청년이 어떤 사람입니까? 서장이 하는 소리가 사실입니까?》

《말 마시오. 그 악귀같은 놈들이 백성들을 위협하자구 생사람을 죽였습지요.》

《생사람이라구요? 숯구이막에서 나왔다는 그 신발은 어떻게 된겁니까?》

《청년은 집안살림이 쪼들려서 없는 수완에 돈을 좀 얻어볼 생각이 들었던가봅니다. 9도구치기에 새로 생긴 목재판에서 지하족이 두배값으로 팔린다는 소문을 듣고 한행보 해본다구 그동안 점포들에서 한두컬레씩 빼내여 숯구이막에 감춰두었던 모양인데 그걸 저놈들이 혁명군에 보낼거라고 뒤집어씌웠지요.》

윤석찬은 생떼같은 젊은이가 무고하게 눈앞에서 죽는것을 눈뜨고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수 없었던 자신의 괴로움을 터놓으며 절통해하였다.

몸서리를 치게 하던 총살장면을 상기하자 강민이도 분개하여 몸을 떨며 그때 이상하게 생각되던 다른 문제를 물어보았다.

《윤선생, 아까 보니까 부역군들속에 리인묵씨도 있던데 사람들이 그한테 왜 그렇게 눈총을 쏩니까? 저마다 뒤에서 손가락질하는것 같은데 어찌된 일입니까?》

윤석찬은 낯색을 흐리며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그럴만 한 사정이 있지요. 그 사람이 요사이 경찰서출입이 잦으니까요. 불러서 가는지 제발로 가는지 아직 내막은 모르겠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가봅니다. 원체 평판이 나쁘던 사람이다보니 그가 인제는 왜놈들의 개로 되는게 아닌가 해서 그렇게 경계하는것 같습니다.》

《말세로군··· 하여간 그 사람한테 소식이라두 전해주십시오. 그래도 리성묵의 형이 아닙니까. 일전에 말하던 성묵동무의 자식들을 찾았습니다.》

강민은 놀랍게 생각하는 윤석찬이한테 리성묵의 자식들이 부대에 업혀들어온 경위도 들려주고 부대소식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는사이 부엌에서는 두 녀자가 오손도손 밥을 지었다. 윤석찬은 사이문으로 올라오는 밥그릇을 받아 제 손으로 두리반에 차려주며 권하였다.

《찬은 없지만 어서들 나앉으시오.》

《무슨 큰 손님이나 온것처럼 더운밥까지 지으면서 이러십니까.》 하며 상앞으로 먼저 나앉은 사람은 강민이였다. 그는 사양할 때 같아서는 뜨는 시늉이나 할것 같더니 일단 숟갈을 들자 꼿꼿하여 잘 넘어가지 않는 조밥 한그릇을 게눈감추듯 하였다.

로상권이도 지긋한 나이를 생각하는지 체면을 차리며 좀 늦게 술을 놓았지만 달게 먹기는 한가지였다.

가마치가 섞인 구수한 숭늉도 꿀물처럼 마시였다. 그 모양을 보고 윤석찬이 로상권의 무릎을 짚으며 웃었다.

《동무네 굶었구만.》

로상권은 그때야 세사람 다 풀솔로 닦아낸듯이 반반히 낸 밥그릇을 보고 게면쩍어하면서 역시 웃는 소리로 실토했다.

《굶었습니다. 사실은 지금 부대가 굶고있지요.》

《그럼 동무네 식량때문에 온게 아니요?》

윤석찬이 벌써 건너짚고 자기쪽에서 먼저 물어주는바람에 로상권은 말을 꺼내기가 한결 쉬웠다.

《그렇습니다. 식량공작을 나왔습니다.》

《그럼 진작 말해야지.》

《우리가 해결받자는 량이 적지 않다보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아서···》

《원, 어서 말하오. 네분이 지고가야 얼마나 지고가겠소.》

《우선 당장 대여섯바리는 있어야 합니다.》

《대여섯바리?》

《그것도 한 이틀동안에 해결하자는거지요.》

윤석찬은 아뜩해하였다.

《가만, 달구지 한바리면 열둬가마니 되는데 다섯바리면 예순가마니, 아니? 그 많은 량을 이틀에요?》

로상권은 억이 막혀하는 윤석찬의 얼굴을 보고 거리에서부터 가뜩이나 흔들리던 기대가 반나마 무너져내렸다.

《부대식구가 오죽 많습니까? 그렇게 가져가두 며칠밖에 대질 못하지요.》 하고 그는 대답하였는데 여기에는 벌써 실정을 바로 리해시키려는 의도외에는 아무런 요구도 담겨있지 않았다.

윤석찬은 먼길을 믿고 찾아온 동지들한테 섭섭하게 들릴 말을 하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담보 없는 빈말로 실현이 불가능한 헛약속을 할수도 없고 하여 난처해하다가 솔직히 이야기했다.

《아··· 그건 좀 힘들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어려울것 같소. 동무네두 살벌한 거리를 보았겠지?》

로상권은 난감해하는 그의 심정에 충분한 리해를 표시하며 이왕지사 터놓은김에 알고있기나 하라고 두번째 용건을 말했다.

《윤선생, 한가지 더 있습니다. 신발을 좀 구해야겠는데 그건 어떨가요?》

윤석찬은 딱한 사정을 거듭 말하기가 거북한듯 잠시 말이 없었다.

《신발, 그건 어떻게든 힘을 써봅시다. 요사이는 신 한컬레 사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렇지만 잘하면 신발은 몇컬레 구할수 있을것 같소.》

《그런데 이번에 필요한 신발은 아이들 신발입니다.》

《아이들?》

윤석찬은 말귀를 미처 알아듣지 못하였다.

《윤선생은 참 모르시겠는데 얼마전에 밀영에 있던 아이들을 전부 사령부로 데려왔습니다. 백명이 넘지요.》

이 말을 듣자 윤석찬은 좀전의 놀라움과는 또 다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다.

《그자의 말이 빈말이 아니였군.》

윤석찬은 얼마전에 일본인어용기자 고바야시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기가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바야시는 그때 우미야마소장의 권고대로 《협화회》 리사이며 《만선일보》 지국장이기도 한 윤석찬을 만나보고 그의 해박하고 건전한 지식과 《내지인》 못지 않은 능한 일본어에 감동되였다. 그는 제국신민으로 완전히 동화된 이 리사와 가까이 사귀면 자기가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대륙으로 건너온 목적을 실현하는데 약차한 도움을 받을것 같았다. 소란한 대륙을 디디고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자신만만 한 야심에 비해볼 때 그한테는 광대하고 신비로운 이 대륙이 너무도 생소하였다. 그리하여 한번 상종해본 뒤로 윤석찬이와 자주 만나게 된 그는 식민지민족이라고 멸시해온 이 《반도인》한테서 조선과 만주, 중국관내의 풍토와 력사, 문물, 민속과 습관에 대한 깊은 지식과 더불어 지어는 래일의 자기 저서에 짙은 향토미를 부여해줄수 있는 전설과 민요, 각종 명절놀이 유래까지도 통역없이 들을수 있었다.

고바야시는 들을수록 끝이 없는 윤석찬의 이야기에 더욱 반하여 그와 마주앉으면 시국에 대해서도 자주 론하게 되였는데 하루는 료정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우미야마방에서 들은 비밀을 루설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토벌》사령부로는 김일성빨찌산이숱한 어린이들까지 밀영에 두고 보호해준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그것을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밀영소재지들을 정확히 탐지 감시하라는 명령이 내렸다는것이였다.

윤석찬은 그때부터 어쩐지 근심이 되였다. 적들이 왜 그 밀영들을 탐지 감시하려고 하는지 진의도를 알수는 없지만 혹시 이 밀영때문에 사령부에 무슨 후환이라도 미치지 않겠는가 해서 불안하였다. 빨리 사령부에 보고하여 밀영을 더 멀리로, 더 깊은 곳으로 옮기게 하던가, 밀영에 발길을 끊게 하던가, 속히 무슨 대책을 취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박덕산이한테 보고하고 부대에서 사람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참이였다. 그런데 밀영아이들을 멀리로 보내기는커녕 사령부로 전부 데려왔다니 도대체 이 무슨 일인가?

그는 선발대를 책임지고 온 강민을 정색해서 바라보았다.

《강민동무, 지금 적들이 그애들의 행처를 찾고있다는걸 모르시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글쎄 우리야 최선의 노력을 하겠지만 아이들의 신발을 갑자기 많이 뽑는것은 적들의 눈을 끌수 있는 표나는 일인데 일없겠소? 지금 상점들에 대한 놈들의 감시가 어느 정도인지 아오? 지하족같은것은 한사람한테 한컬레이상은 절대 못팔게 되여있소. 그걸 어기면 경찰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하는판이요.》

《그건 우리도 알고있습니다.》

《아니요, 전과 같은가 생각지 마오. 오늘 숯구이청년이 총살당하는것을 보았겠지만 근간에 놈들의 발악과 감시가 여간 더 심해지지 않았소.》

강민은 난색을 짓고 잠자코 앉아있다가 로상권이쪽을 쳐다보았다.

《상권동무, 와보니 사정이 생각보다 더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로상권은 암만해도 이번 공작이 순조롭게 될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어 상심한 기색을 하고 말이 없었다.

방안에는 무겁고 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하여간 박덕산동무한테 전달은 합시다. 이밤중으로 찾아가겠소.》

윤석찬은 찾아온 동지들을 실망케 한것이 적들이 살판치는 엄혹한 현실이 아니라 형편을 이실직고한 자기자신이기라도 한듯이 미안해하면서 바깥동정을 살폈다.

살벌하던 거리는 악몽속에 불안을 안은채 고요해지고 이따금 들려오는것은 《추야정》의 밤늦은 장고소리와 뚜벅거리는 기마순찰대의 말발굽소리뿐이였다.

윤석찬은 잠자는 주민들을 위협하면서 멀어져가는 말발굽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강민이앞으로 한무릎 나앉았다.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즉흥적인 속단을 내리지 않고 사고가 정리된 다음에야 견해를 내놓는데 습관된 그는 지금 절박하게 말하고싶은것이 있었다.

《강민동무, 사령부로 데려온 아이들이 몇명이라고 했지요?》

《백명이 훨씬 넘습니다.》

《대단하군, 그 많은 아이들을 싸움판에 끼고다니면서 보살펴주자니 동무네가 참 수고가 많겠구만.》

《수고랄게 있습니까.》

《장군님께서도 그애들때문에 마음을 쓰시겠지?》

《그거야 저희들보다 몇배 더하시지요.》

《그러실테지, 정말 죄스럽소. 우리가 어떻게 도울수가 없을가?》

윤석찬은 다시 무거운 생각에 잠겼다가 강민의 무릎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 강민동무, 내 박덕산동무와 토론해보겠는데 그애들을 지방조직들에 내려보내는게 어떨가?》

강민은 진심으로 도와주고싶어하는 윤석찬의 심정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수 없습니다. 우선 장군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겁니다.》

《그럼 동무네가 허락하시도록 잘 말씀올려야지.》

《그건 모르시는 말입니다.》

《모르다니? 난 암만해도 그애들 문제가 걱정이 되여서 그러오. 안할 말로 우리장군님께서 숲속에 무슨 집을 짓고 살길 하십니까, 숲속에서 농사를 짓습니까, 정규군같은 후방을 가지고있는것도 아닌데, 더구나 정세가 날을 따라 더 험해지는데 무슨 수로 그 숱한 아이들을 건사해주겠습니까. 내가 주제넘은 소견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리해가 되질 않습니다. 전쟁판에 아이들을 백여명이나 끼고다니다니? 글쎄 그게 어디 세상에 있을 법한 일입니까. 나로서는 기상천외라고 할밖에 없는 그 일이 초래할수 있는 후과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군요. 도대체 어떻게 되여 아이들을 전부 사령부로 데려오게 되였는지 내막을 깊이 모르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암만해도 무슨 딴 대책이 서야 할것 같습니다.》

강민은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걱정으로부터 나온 윤석찬의 진정이 담긴 말에 무슨 딴 의견이 있어서가 아니였다. 그와는 반대로 강민은 지금 윤석찬이가 말하는것이 부인할수 없는 진실이며 또 사리를 따지면 따질수록 공감이 가는것을 느꼈다. 사실 강민은 언행이 신중한 윤석찬의 말을 들으면서 그애들에 대한 문제가 순수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는 깨우침을 재삼 받은것 같은 심정이였다.

옆에서 잠자코있는것을 보고 그애들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강민이 못지 않게 생각이 많은 로상권이가 서로 리해를 바라는 타협조로 윤석찬의 말을 받았다.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참 딱한데가 있습니다. 그애들을 데려오게 하신분은바로 장군님자신이십니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걸 우린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그애들은 태반이 우리와 같이 혁명을 하다가 희생된 전우의 자식들 아니면 부모없는 불쌍한 고아들이지요.》

《알만합니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내가 지금 죄가 될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난들 왜 그애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딱해하는 동무들의 심정에도 충분히 리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런 말을 하게 되는것은 우리 장군님의 안녕과 그이의 어깨에 실린 중하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기때문입니다. 조선의 운명이 장군님어깨에실렸는데 동무들이 어떻게 하자고 그럽니까. 장군님께서 어지신 마음에 그애들이 자꾸 매여달리니까 떼여놓지 못하는것 같은데 동무들이야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게 아닙니까.》

마디마디에 진정과 우려가 담긴 윤석찬의 절절한 호소를 듣고 강민이네 일행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때 밖에서 송순이와 같이 망을 보던 계숙이가 완자문을 방싯 열고 박덕산동무가 왔다고 조용히 안에 알렸다.

심각해 앉아있던 방안사람들이 활기를 띠며 일어섰다. 박덕산은 대문쪽을 한번 살피고나서 부엌으로 들어와 매생이같은 신발을 벗어놓고 방으로 올라왔다.

《박덕산동무!》

반갑게 모두 그를 부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가 왔는가 했더니 동무들이 왔구만. 내 짐작이 맞았구만.》

박덕산은 강민이며 로상권의 손을 하나씩 붙잡고 흔들었다. 사실 그는 조직원들로부터 12도구 뒤산에서 저녁녘에 낯선 사람들을 보았다는 보고를 받고 혹시 부대에서 동지들이 오지 않았는가 해서 달려오는 길이였던것이다. 원체 과묵하여 말수더구가 적은 그는 장군님의 안부를 묻고는 곧 용무로 넘어가서 윤석찬이로부터 강민이네 일행이 찾아오게 된 사연을 들었다.

《윤동무,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글쎄 저로서는··· 거리의 공기가 너무 살벌해서 우선 박덕산동무한테 알리려던 참입니다.》

그렇다면 제때에 왔다고 하면서 박덕산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강민이와 로상권이를 쳐다보았다.

《상권동무, 식량에 대한 계산이야 강민동무보다 <도감>이 더 밝겠지, 지금 당장 식량이 얼마나 있으면 되겠습니까?》

로상권은 가서 형편을 알아보고 무리하게 요구하지는 말라고 하시던 장군님 말씀이 상기되여 듣는 사람에 따라 다섯바리로 들을수도 있고 여섯바리로 들을수도 있는 적지 않은 수량을 박덕산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지 신경을 쓰면서 대답했다.

《필요한 량으로 말하면 지금 당장 대여섯바리는 있어야 하지요.》

《음, 여섯바리···》

침묵이 흘렀다.

박덕산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모두 긴장되였다.

한참 뒤에 박덕산이 침묵을 깨뜨렸다.

《그다음은 또 뭐요? 신발이라고 했지?》

연거퍼 힘든 요구를 내놓기 미안하여 로상권이 머뭇거리는것을 보고 강민이가 말하였다.

《신발은 신발인데 아이들 신발입니다. 저 알고계시는지? 후방밀영에 있던 아이들을 전부 사령부로 데려왔답니다.》

《나도 일전에 들었소. 그것은 참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요. 우리 장군님께서만이 하실수 있는 일이지.》

박덕산은 깊은 감동에 젖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조용히 이야기하며 강민의 무릎을 잡았다.

《동무가 그애들을 돌봐줄 책임을 맡았다지? 잘 됐소. 듬직한 동무가 그 일을 한다니 우리도 마음이 놓이는구만. 여보, 부탁하오. 장군님께서 그처럼 귀중히 여기시는 아이들인데 우리 힘을 합쳐 잘 돌봐줍시다. 신발은 얼마나 있으면 되겠소?》

강민은 자기에게 표시해주는 동지의 믿음에 어쩐지 떳떳치 못한 자신을 느끼며 그가 실무적으로 랭담하게 물었으면 오히려 제대로 내댈수도 있었던 수자를 절반이상 줄여서 대답하였다.

《백명이 넘는 아이들한테 어떻게 한꺼번에 다 신발을 갈아신기겠습니까. 우선 정 험한 아이들부터 갈아신기게 한 이삼십컬레만 있으면 되겠습니다.》

《30컬레?···》

박덕산은 찾아온 동지들앞에 난색을 보이지 않고 잠시 생각해보는듯 하더니 강민이쪽에 이야기하였다.

《알겠소. 모두들 오늘은 떠날것 같지 못하니 아지트에 가서 기다리오. 기다렸다가 식량과 신발을 가지고 가시오.》

강민은 걱정이 되였다. 이번 일이 제대로 되겠는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박덕산은 찾아온 동지들앞에 난감해하는 빛을 애써 보이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있던 그의 얼굴표정에서 강민은 이번 일이 헐치 않으리라는 예감을 느꼈던것이다. 사실 오늘 거리에서 본것처럼 이 하강구일대가 여느때없이 살벌해진 지금 그 많은 식량과 신발을 하루이틀사이에 뽑는것은 간단치 않은 일일뿐아니라 적들에게 발견되여 피를 흘릴수도 있는 일이였다.

박덕산은 이번 공작과 관련된 공식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강민이더러 식사는 했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사이문을 열고 부엌에 들어와 바깥동정을 살피고있는 계숙이를 찾았다.

《아주머니, 이제부터 뛰자면 원기를 좀 돋궈야겠는데 뭐 좀 없소? 부대에서 동지들이 온것 같다기에 저녁을 못먹구 급히 왔더니 출출하구만.》

《네, 있습니다.》

계숙은 좀전에 밥을 지을 때 한그릇 더 담아놓은것이 있어 부뚜막에 벗어놓았던 행주치마를 두르며 얼른 각상을 차렸다. 그는 박덕산이 집에 들릴적마다 자기를 손우의 누이처럼 대해주며 이처럼 소탈하게 구는것이 늘 고마왔다. 언제보나 박덕산은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틀을 차리거나 교만하게 행동하는 법을 모르고 부드러운 포옹력으로 동지들과 주위사람들을 존중해주고 걱정해주고 배려해주면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 그는 분식이라는것을 몰랐으며 허식을 가장 혐오스러운것으로 간주하였다.

윤석찬이가 박덕산의 영향과 지도하에 혁명의 길에 들어선것도 처음에는 이러한 그의 소박하고 미더운 품성과 말없는 속에 정이 흐르는 인간적인 미에 이끌린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 윤석찬은 자기는 박덕산동무의 사람됨에 반하여 혁명을 하게 된것 같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박덕산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한테 사람됨됨이 있다면 그것은 장군님을 받들어오는 과정에 생겨난것이요. 내가 우리 장군님을 한생 모시기로 맹세한것은 그이의 위대한 사상뿐아니라 그 위대한 인간미에반했기때문이요. 나는 확신하고있소. 진정으로 인간다운 인간만이 위대한 인간이 될수 있고 위대한 인간만이 인간을 위한 위대한 사랑을 낳을수 있다는것을 장군님을 보면서 나는 깊이 확신하고있소.》

그것은 감정의 잔물결에 좀처럼 용해되지 않는 과묵하고 웅심깊은 그의 가슴에서 용암처럼 터져오른 열정의 분출이였다.

윤석찬은 지금 그때 일을 상기하며 각상을 사이문턱옆에 놓고 조밥을 물에 말아 요기를 하고있는 박덕산을 축축히 젖어드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세월이 시대의 이 풍운아들을 너무도 몰라보고 푸대접하는것 같아 그것이 가슴에 맺히게 분하였다.

그밤으로 윤석찬의 안내를 받아 백바위골아지트로 간 강민이네 일행은 일이 어떻게 되겠는지 초조해서 마음을 못놓고 기다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식이 없었다.

밤이 되여도 아무 소식이 오지 않았다. 강민은 궁금하고 불안하여 가슴에서 숯덩이가 타는것 같았다. 신발은 후차로 치고 부대가 굶고있는데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밤 한시가 되여도 소식이 없는것을 보고 일행은 모두 얼굴이 가맣게 되여 전전긍긍하며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고 줄곧 서성거렸다.

새벽 3시에 깊은 생각에 잠긴 윤석찬이가 다급한 걸음으로 아지트에 나타났다.

《어떻게 됐습니까?》

강민의 입에서는 총알같은 물음이 튀여나왔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시다.》

이 한마디뿐이였다. 그래서 강민은 더욱 불안하였다. 일행은 말없는 윤석찬이를 따라 컴컴한 숲속길을 묵묵히 헤쳐나갔다.

가는길에 로상권이 어둠속에서 윤석찬의 팔소매를 잡으며 도대체 어떻게 되였는가고 다시 물었으나 대답은 역시 한마디였다.

《가면 알게 됩니다.》

일행은 기대절반 락심절반인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였다. 하늘에 달은 없지만 뭇별이 총총하여 주변의 지형과 산세를 어둠속에서도 얼추 가늠해볼수 있었다. 일행이 이른 곳은 부대에서 온 식량운반대가 대기하기로 한 진봉산기슭이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응당 있어야 할 운반대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중충 솟은 이깔나무밑에서 박덕산이 한사람의 지하조직원과 같이 걸어나왔다.

박덕산은 어둠속에서 강민의 팔을 잡고 서두르며 말하였다.

《미안하오. 기다렸지? 어서 떠나시오. 신발은 여기 있소.》

강민은 기쁨 대신 심장이 멎는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식량은요?》

《식량은 운반대가 벌써 지고 떠났소.》

강민은 털썩 주저앉았다.

《여보, 왜 그러우?》

《박덕산동무, 그게 정말입니까?》

《원 사람두, 이 하강구조직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요?》

박덕산은 일행을 자기가 서있던 이깔나무밑으로 데리고갔다.

거기에는 그의 말대로 네사람이 갈라지게 꾸린 신발짐이 놓여있었다. 어둠속에 만져보는데 신발은 부탁한 수량보다 훨씬 더 많아보였다. 손더듬으로 가늠해보니 칠팔십컬레는 되는것 같았다.

《박덕산동무, 무슨 신발이 이렇게 많습니까?》

《많다니? 아이들이 백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한컬레씩 다 차례지게 구해보자고 했는데 뜻대로 안되는구만. 다문 몇컬레라도 더 있으면 좋겠는데.》

강민은 가슴이 후더워지는것을 느끼며 전지불을 켜들고 신발짐을 하나 터쳐보았다.

지하족도 있고 운동화, 고무신도 있었다.

지하족은 발등에 끈을 매게 된것도 있고 발목뒤에 채우게 만든것도 있고 엄지발가락을 터친것도 있었다. 검은색, 흰색, 색갈도 여러가지였다.

꿰진데는 없지만 바닥이 조금 닳거나 색이 바랜것을 깨끗이 빨아말리운 신던 신발도 한두컬레 섞여있었다.

강민이 가슴이 저릿하여 신발짐을 쓸어보는데 박덕산이 앞으로 와서 마주앉으며 손을 잡았다. 그때야 강민은 전지불에 드러나는 박덕산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어제 본 박덕산의 얼굴이 아니였다. 하루밤사이에 열에 떠서 앓고난 사람같이 얼굴이 반쪽이 되고 눈에 피가 지고 입술이 조개가 일도록 말라서 갈라터졌다. 어찌 애를 말리며 속이 타서 뛰여다녔는지 목소리마저 석쉼해진것 같았다.

끈으로 발등허리를 잡아매고 조여서 신은 신발은 흙탕에 본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곤죽이 되고 소금발이 돋은 저고리와 물에 푹 젖고 가막사리가 다닥다닥 붙은 바지가랭이 역시 험상하기 이를데 없었다. 꼭 백날 앓을 열병을 하루밤사이에 치른듯 한 얼굴이였고 물인지 불인지 가릴새없이 사지를 장밤 뛰여다닌 행색이였다.

그는 짐을 제대로 해놓고 서둘러 떠나겠다는 강민의 손을 잡은채 말했다.

《가만 조금만 기다려주오. 6도구에서 아직 못왔는데.》

《예? 그 먼데서까지 옵니까?》

《지회장이 올거요. 네시까지는 꼭 도착한다고 했소. 그 사람은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소.》

강민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6도구가 어디기에 하루사이에 거기까지 갔다왔단 말인가? 그럼 박덕산동무는 온 하강구일판을 다 돈셈이 아닌가?

일행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가 네시 20분전이였다.

박덕산은 회중시계를 초조히 들여다보았다.

숲속에는 어디에나 서늘한 새벽기운이 돌았다.

15분이 지나서 아래쪽 골짜기에서 와삭와삭 가둑나무 헤치는 소리가 났다.

박덕산은 급히 마주나갔다. 6도구 지회장이 왔다. 박덕산은 땀에 젖은 지회장을 데리고와서 강민이네 일행과 인사를 시켰다.

6도구 지회장은 이깔나무밑에 놓여있는 여러개의 신발짐을 보더니 자기가 끼고온 보퉁이를 점직하게 내려다보며 박덕산을 한옆으로 데리고갔다. 무엇인가 말하기 거북한 사연이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여 몇걸음 못가서 마주섰으므로 두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강민의 귀에도 들렸다.

《부끄럽습니다. 박덕산동무가 밤길에 그 먼길을 찾아까지 와서 당부했는데 저희네 지회에서는 여섯컬레밖에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여보, 무슨 말을 하오. 동무네가 큰몫을 해결했소. 여섯컬레가 어디요. 수고했소.》

《아닙니다. 그나마 한컬레는 태운자리까지 낸 신던 신발입니다. 제가 너무 안타까와하니까 저의 집사람이 자식이 며칠 신던 신발을 빨아서 부랴부랴 불앞에서 말리우다가 그만··· 할수없이 가져오기는 했는데 그런 신발까지 보내겠습니까.》

《보냅시다. 그걸 도로 가지고가면 아주머니가 얼마나 섭섭해하겠소.》

박덕산은 6도구 지회장이 송구해서 내놓은 신발 여섯컬레를 가지고와서 함께 꾸리라고 강민이한테 주었다.

강민은 그것을 받아 짐속에 함께 꾸리다가 탄 자리가 있는 신발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하루밤사이에 몰라보게 된 박덕산의 얼굴과 불앞에서 급히 말리우다가 태운자리를 낸 한컬레의 신던 신발, 그것은 부대에 보낸 식량과 지금 눈앞에 있는 신발짐이 얼마나 간고하게 마련된것인가를 무언으로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강민이 탄 자리가 있는 그 한컬레의 신발을 놓지 못하고 더욱 소중히 어루만지는데 박덕산이 괴로와하며 이야기하였다.

《한가지 량해를 구할게 있소. 동무들도 보았겠지만 짐속에 그 신발처럼 신던 신발도 서너컬레 들어있소. 회원들이 한컬레라도 더 보태겠다고 자식들이 며칠씩 신던 신발까지 보내왔소. 성의를 생각해서 함께 꾸렸으니 량해해주시오. 내 다음에는 신던 신발은 보내지 않겠소. 장군님 심정이야 그애들한테 다 새 신을 꼭같이 갈아신기고싶겠는데 내가 일을 쓰게 못해서 오늘은 신던 신발을 보내오.》

강민은 전지불을 꺼버렸다. 갑자기 더운 눈물이 전지를 쥔 손등에 뚤렁뚤렁 떨어졌다. 등뒤에서는 송순의 흐느낌소리가 들렸다.

강민은 어둠속에서 박덕산의 손을 꽉 잡고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한마디 수고했다는 말로 인사를 차리기에는 하루밤사이에 온 하강구일대의 조직들을 전부 발동시키며 뛰여다닌 그의 노력이 너무도 크고 눈물겨웠던것이다. 윤석찬이가 자기들을 여기로 안내해올 때 그저 가자고만 하면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온 까닭이 리해가 되였다. 아무리 조건이 어려워도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임무라면 만난을 이겨내면서라도 기어이 해내고야마는 그의 충성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로상권이가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너무 큰 수고를 시킨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서 형편을 보고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라고 하시였는데 돌아가서 꾸중을 듣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원, 무슨 소리를 하오. 응당 할 일을 했는데 수고는 무슨 수고요? 동무들, 돌아가서 장군님께 보고올릴 때 그런 말은, 이번 공작이 힘들은것 같은 말은 절대 비치지 마시오.》

강민이와 로상권의 손을 잡고 이렇게 부탁하는 석쉼해진 박덕산의 목소리에는 적구의 형편이 아무리 살벌하고 한몸이 받아안는 신역이 아무리 고되여도 그런 티를 누구에게도 내색 안하고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여 장군님을 받들려는 그의 의지와 신념이 후더운 숨결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