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5


 

제 1 장

5

 

어찌 분격했던지 강민은 그날밤 윤석찬의 안내를 받으며 백바위골로 갈 때까지도 진정하지 못하였다.

윤석찬의 말대로 백바위골아지트에는 박덕산이 약속한 시간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미리 와있었다.

박덕산은 강민이와 마주앉자 정중히 장군님의 안부를 묻고나서 저고리자락을 량옆으로 제껴놓았다.

《강민동무와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구만. 그래 부대에서는 어떻게들 지내오? 그러지 않아도 사령부에서 누가 오지 않는가 해서 눈이 까매 기다리던 참이요.》

강민은 입이 무겁고 웬간한 일에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그가 성급히 재촉하는것을 보고 자기가 제때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잖아도 박덕산동무 얼굴이 좀 축간것 같습니다.》

《말 마오. 이번 〈7. 7사변〉이 터진 후로 사람들 단련에 살이 다 내렸소. 여기선 모두들 뒤숭숭하오. 그래 장군님께선 무슨 말씀이 없으시였소?》

박덕산은 기대가 어린 눈으로 초조히 강민을 쳐다보았다.

《계셨지요. 아마 이 편지가 그 문제와 관련된 편지인것 같습니다.》

강민은 장군님께서 박덕산이한테 보내시는 편지를 품속에서 꺼내며 대답했다.

박덕산은 편지를 펼쳐들자 단숨에 내리읽었다. 그리고는 평시의 진중한 성미에 어울리지 않게 무르팍을 탁 쳤다.

《그럼 그렇겠지. 내 장군님께서 이렇게 보실줄 알았소. 이젠 모든것이 명백해졌소.》

강민은 입술이 트고 수척해진 박덕산의 얼굴에 함뿍 넘치는 감격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그가 매우 흥분하고있음을 느꼈다. 편지에 담긴 사연이 그를 격동시킨것 같았다. 이어 박덕산은 편지를 정히 품속에 간수하며 긴장하여 지켜보는 윤석찬이쪽에 힘주어 말하였다.

《윤동무, 이제는 모든것이 명백해졌소. 빨리 조직책임자들을 불러야겠소, 비상련락을 띄우시오. 장군님의 방침을 전달해야겠소.》

사령부의 편지를 받기전까지만 하여도 안절부절 못하던 박덕산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였다. 강민이에게 그것은 소중한 기쁨이였다. 리성묵의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겁던 그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밤중에 박덕산이와 헤여진 그는 윤석찬의 도움을 받아 백로지를 한짐 지고 새벽녘에는 벌써 귀로에 올랐다. 짐속에는 수십매의 등사원지와 강필도 몇개 들어있었다. 숙영지를 떠날 때 사령부비서처의 권학식이가 특별히 부탁한 물건이였다.

권학식은 기뻐할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마음의 위안으로는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강민은 어깨를 파고드는 멜끈을 통하여 몸에 실리는 짐의 무게를 느낄수록 애당초 길을 떠날 때의 목적과는 달리 지금 비서처의 심부름만 하고있는것 같았다.

강민이 산발을 타고 종일 걸어 저녁녘에 부대에 도착했을 때 숙영지는 전에없이 활기가 넘치였다. 7련대는 어디론가 새 전투임무를 받은듯 지휘부앞 잣나무숲속에 늘어서서 무기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대원들의 손에서 총창이며 격발기며 하는것들이 해빛에 번쩍거리였다. 지휘관들과 전령병들이 분주히 오가는 저편 이깔나무가 늘어선 공지에서는 무슨 연예공연이라도 준비하는지 혁명가요를 합주하는 하모니카소리가 유난스럽게 울리였고 도간도간 녀대원들의 청높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며칠전만 해도 밀영에 떠돌던 긴장한 공기와 급변한 정세에 불안을 느끼던 대원들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모두가 신심과 랑만에 넘쳐있었는데 그것은 강민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강민은 수행하지 못한 임무에 대한 걱정과 등에 걸머진 짐의 무게도 잠시 잊고 밀영을 두루 살펴보았다. 분명 그사이에 기쁜 일이 있은것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강민은 밀영을 두루 살펴보며 걷다나니 새초에 걸채이고 나무가지에 이마를 긁히기도 하면서 비서처로 통한 길목에 접어들었다.

비서처만은 웅성거리는 밀영의 분위기하고는 달리 조용하였다. 그래서 비서처 《대통령감》 권학식을 찾는 강민의 목소리는 아주 크게 울렸다.

《이게 강민동무 목소리가 아닌가?》

《대통령감》 권학식은 비서처문을 열고 뛰여나왔다. 군모를 벗어 그대로 드러난 땀이 밴 그의 이마우에는 반나마 흰머리칼이 드리워졌는데 눈에는 온통 웃음이 활짝 폈다. 그는 서둘러 강민이가 땀흘리며 지고온 짐을 벗기였다. 어느새 짐안을 엿본 권학식은 등사잉크가 묻은 손으로 강민의 팔목을 잡고 흔들었다.

《강민동무. 고맙구만, 고마와. 이 신셀 어떻게 갚는다?》

홀가분해진 어깨를 펴고 강민은 어줍게 웃어보이였다. 권학식의 진정에 넘친 기쁨도 그의 살뜰한 어조도 모두가 뜻밖이였다.

《그렇게 고마우면 사위라도 삼으시구려.》

그 말에 권학식은 눈을 흡뜨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헝, 딸도 없지만 그건 안돼. 임자한테야 점찍은 처녀가 있질 않나.》

두사람은 껄껄 웃으며 짐을 맞들고 비서처안으로 들어갔다. 등사기름내가 확 풍기는 천막안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밝은데 있다가 갑자기 들어서서 강민은 사람들의 얼굴을 인차 가려보지 못했다. 단지 귀에 선 목소리와 한결같은 흰옷차림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손님들이라는것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손님들쪽에서 한사람이 한걸음 나서며 《강민동무》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눈여겨보니 그는 조국광복회 지회장으로 신흥촌에서 공작하고있는 리제순이였다. 강민은 그를 지난해 선발대로 장백지구에 나왔을 때 알게 되였다. 윤석찬의 권고로 송순이를 지주집에서 빼내여 부대로 데리고올 때 바로 리제순의 도움을 받았던것이다.

반갑던나머지 강민은 그의 팔소매를 와락 부여잡고 기쁨이 실린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새 안녕하셨습니까!》

《잘 있었소. 사령부에 오니 이렇게 만나누만. 난 강민동무가 사령부 기관총소대장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민복차림으로 어딜 이렇게 나다니시오?》

《예, 좀 다녀올 일이 있어서 갔다오는길입니다.》

《그래, 송순동문 잘 있는가요?》

《그 동문 후방밀영에 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 장군님을 뵈오러 왔지요.》

모든 일이 만족인듯 리제순은 순박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그렇지 않느냐는듯 권학식을 쳐다보았다. 비서처안에 있는 사람들은 부러운듯이 강민이와 리제순을 바라보고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려볼수 있게 되여 강민은 모두에게 허리를 굽석하고 인사를 하였다.

이때 권학식은 중키에 어깨가 다부진 흰 광목저고리를 입은 손님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강민동무가 알겠는지 모르겠는데 이분은 멀리 국내에서 온 박달동무요.》

두툼한 입술과 진중한 눈모습하고는 다르게 박달은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받았다. 강민은 장군님께서 지난해 12월에 장백현 19도구 삼개골에서 박달을 부르시여 국내에서의 혁명운동과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자세한 가르치심을 주신것과 그후 박달이 조국광복회 국내하부조직의 하나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고있다는것도 이미 알고있었다.

이어 강민은 권학식의 소개를 받으면서 박달을 안내해온 키가 호리호리한 애젊은 련락원청년과 상강구일대의 지하조직책임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흥성거리는 밀영의 모습과 여기 비서처에서 만난 손님들로 미루어보아 사령부에서 중대한 사업이 전개되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특히는 리제순과 박달의 도착은 충격적이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들이 여기로 올수 없다는것을 강민은 잘 알고있었다.

통나무책상우에는 방금 등사한 종이가 무둑히 쌓여있고 한쪽에는 이미 가녁을 꿰맨 책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박달도 리제순도 그 책들을 손에 들고있었는데 그들의 관심은 지금 권학식이 풀어헤치는 등짐에 쏠리였다. 서둘러 헤쳐놓은 짐에서 백로지와 등사원지를 집어든 권학식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인젠 됐소. 이 종이면 넉넉히 찍어낼수 있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인젠 동무들의 성화를 면하게 됐소.》

그리고는 강민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때마침 와주었으니망정이지 난 큰일날번 했소.》

권학식은 등사잉크냄새가 물씬 풍기는 종이를 강민이앞에 내밀었다.

《이걸 보면 내가 왜 동무를 그처럼 고맙게 여기는지 알거요.》

《그게 뭡니까?》

《동무가 떠난 뒤에 장군님께서는 주력부대 지휘관들을 사령부에 부르시고 이번에 일제가 〈7. 7사변〉을 조작하게 된 배경과 그에 따르는 우리 혁명군의 활동방향에 대한 중요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소. 그후에는 장백지구와 국내에 있는 혁명조직책임자들에게 금후 투쟁방향과 방법상 문제들에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소. 그 말씀요지를 내가 속필로 다 적어두었는데 이 동무들이 그걸 등사기로 찍어달라질 않겠소. 몇십부씩 품고 가겠다는거요. 그래 등사하기 시작했는데 종이가 있어야지, 그래서 걱정을 하던 참인데··· 동무가 불쑥 나타났으니 내가 귀잡고 절을 하지 않게 됐소.》

권학식은 낯익은 고불통에 써레기를 꾹꾹 눌러담으며 등사지로 찍은 장군님의 말씀요지를 개략적으로 아래와 같이 들려주었다.

《일제는 아무러한 준비와 타산도 없이 대륙침략의 야망에 환장이 되여 전쟁의 불을 질렀소. 놈들은 조중인민의 항일혁명투쟁이 더욱더 고조되기 전에 국민당 반동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일정책을 리용하여 전중국을 일거에 점령할것을 타산했소. 〈속전속결〉의 전략으로 말이요. 이러한 정세하에서 우리는 즉시 강력한 군사활동으로 넘어가 일제의 전략적기도를 결정적으로 좌절파탄시켜야 하오. 바로 이렇게 하는것이 우리 혁명을 앞당기고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우며 세계혁명을 전진시키는것이요. 강민동무, 이것이 장군님께서 이번에 주신 말씀의 진수요.》

강민은 설레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급변하는 정세를 단번에 갈라볼수 있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여직껏 갈망하고있던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된 기쁨을 느꼈다.

장군님의 편지를 받고 그처럼 신심에 넘쳐있던 박덕산의 심정을 이제와서 더 깊이 리해하게 된 그는 흥분하여 말했다.

《아바이, 새힘이 솟는군요. 그래서 숙영지가 떠들썩한걸··· 7련대도 당장 출동하는것 같더군요.》

《그렇소. 싸움은 벌써 시작되였소. 어제만 해도 세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소. 소덕수일판의 주민지대에서는 정치사업도 크게 했는데 적들의 악선전에 기가 꺾였던 인민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르오··· 이제 국내인민들도 들구 일어날거요···》

권학식은 대통을 쥔 손을 내흔들면서 신명이 나서 설명하였다.

강민은 자기가 메고온 백지가 등사되여나오는것을 보고서야 비서처 천막을 나섰다.

사령부로 통한 이깔나무사이로 걸어가면서 강민은 이제 자기가 받게 될 새로운 전투임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다나니 리인묵이네 집 문제는 자연 뒤로 밀려나고말았다. 급변하는 정세와 사령부의 방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것만 같았다. 장군님께서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계실 마음의 여유가 없으실것이였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강민은 헛걸음을 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사령부로 갔을 때 장군님께서는 커다란 군용지도와 세계정치지도를 탁상우에 펼쳐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강민은 리인묵이를 만나본 이야기만은 아예 입밖에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것 같았다.

장군님께서는 박덕산동무가 몸성히 잘 있던가, 무슨 애로는 없던가 다심히 하나하나 물어보고 그가 혁명의 길로 이끌어준 윤석찬의 공작정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료해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무슨 이야기가 더 있기를 기다리시는듯 하였으나 강민은 일어설 차비를 하였다.

《여보, 그 일은 어떻게 됐소? 왜 리인묵이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소?》

장군님께서 자리를 일며 찍어서 물으시였다. 그래도 강민은 어물거리며 선뜻 입을 벌리지 못했다.

《강민동무, 왜 그러우? 리인묵이를 만나봤소?》

《예, 만나보기는 했는데··· 차라리 그 사람은 찾아가지 않을걸 그랬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요? 도대체 그 사람이 어떻다는거요?》

강민은 하는수없이 거리에서 나도는 소문이며 본인을 만나본 전말을 자초지종 말씀드렸다. 동생이 전사한 소식을 알리고 그 집을 떠나올 때 문을 활 열어놓고 멍청히 내다보던 허탈상태에 빠진 리인묵이와 부엌에서 훌쩍훌쩍 울던 녀인의 처량한 울음소리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음··· 그렇단 말이지···》

안색이 흐리여진 장군님께서 시름겨운 생각에 잠겨 사령부안을 묵묵히 거니시였다.

강민은 그이께서 괴로와하시는것을 보고 공연한 말씀을 올렸다고 후회하며 송구스러워했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전달장을 부르시더니 김주현련대장을 데려오라고 이르시였다.

얼마후에 목갑총을 찬 김주현이가 문밖에서 군복깃을 바로잡고 사령부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장군님 안색이 흐려있는것을 보고 강민이쪽을 쳐다보았다.

강민은 련대장의 눈길을 피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있을뿐 말이 없었다.

장군님께서 영문을 모르고 긴장해 서있는 련대장을 통나무걸상에 앉히시며 침중히 물으시였다.

《주현동무, 리성묵이 죽을 때 일이 생각나오?》

《예? 성묵동무말입니까?···》

《그 사람이 죽을 때 자기 형에 대한 말을 한것 같은데. 완고는 하지만 나쁜짓은 안할 사람이라고 형을 부탁하는 말을 한것 같은데.》

련대장은 장군님께서 그걸 왜 물으시는지 까닭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기억을 살리며 말씀올렸다.

《예, 생각이 납니다. 그런 말을 했던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탁상모서리를 지그시 누르시며 다시금 생각에 잠기시였다.

《그런데 주현동무, 모를 일이요. 그 사람이 이제는 제 피줄도 다 잊어버리고 집에 찾아온 동생의 자식들까지 내쫓았다고 하질 않소.》

김주현은 뜻밖의 소식에 놀라며 눈길을 들었다. 함께 싸우던 리성묵의 생각을 하니 그 소식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련대장은 장군님께서 바로 그 일때문에 괴로와하신다는것을 깨닫자 자신의 아픈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말씀드렸다.

《사령관동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변할수 있는게 사람이 아닙니까.》

《변할수 있다?》

《제가 집을 떠나오기 전에 우리 마을에 우국지사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늘 마을사람들앞에서 자기가 이제 독립운동선상에 나서면 무슨 일을 칠것 같이 큰소리를 곧잘 쳤습니다. 그런데 3년후에 가보니 황모장사가 되질 않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련대장이 위로겸 하는 뜻있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그렇지, 인간이란 변할수 있지.》

하지만 그이께서는 가슴속의 허전한 심정만은 가실수가 없었다. 눈앞으로는 전사한 리성묵이와 그의 자식들, 수년전에 한번 보신적 있는 준오와 순애 얼굴이 그때의 그 모습대로 떠올랐다.

그애들이 지금 어디 가서 어떻게 사는지, 죽지 않고 살아나있는지 더욱 걱정이 되시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무시로 떠오르군 하는 후방밀영아이들 문제도 걱정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