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2

책제목:운명
 
 

제 4 장

12

 

1952년 2월, 황해북도 신계군 정봉리.

방독복을 입고 머리엔 방독면을 쓴 외국인들이 전화가 휩쓸고있는 이 나라의 눈덮인 산과 들을 헤매고있었다. 벌써 근 한달째 평안남도와 강원도, 황해북도의 여러 지방을 편답하는중이였다.

지금 여기서 그들을 안내하고있는것은 역시 방독복을 입고있는 인민군군의인 대위와 당시 간호장으로 싸우던 라정아였다.

외국인들은 방독장갑을 낀 손으로 열심히 시료를 채취하거나 그것을 촬영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선에서의 미제의 세균전 및 독가스전만행을 폭로하기 위하여 온 국제법률가조사단 성원들로서 뽈스까, 스웨리예 등 여러 나라의 법률가들과 의학자, 기자들로 무어진 국제평화운동의 저명한 활동가들이였다.

오후였다. 갑자기 적기 수십대가 하늘을 썰며 날아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철다리와 그에 이어진 도로를 집중폭격하기 위해서였다. 사방에서 새된 호각소리가 울리고 전선으로 달리던 차들이 대피하느라고 소동을 피웠다.

그런데 적기들은 한톤짜리 폭탄만 퍼부은것이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세균탄까지 투하하였다. 전쟁의 국면을 역전시켜보려는 단말마적인 발악이였다.

그때 대피호로 달려가던 한 외국인녀성이 잡관목에 발을 걸채였는지 앞으로 코밀이하듯 쓰러졌다. 스웨리예의 녀성법률가였다.

마침 그의 뒤를 따라 숨차게 달리던 라정아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 순간 라정아는 그 법률가녀성의 방독면이 찢겨져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라정아의 놀라는 눈길을 살피던 그 녀성도 비로소 그것을 알아보았다. 갑자기 그는 절망적으로 두손을 내뻗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찰나였다. 길게 생각할새가 없었다. 라정아는 주저없이 자기의것을 벗어 그에게 씌워주었다.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세계의 이름난 법률가들과 의학자들, 기자들이 격동되여 무어라고 웨쳐대였다. 아니, 미친듯 고함을 질렀다. 다음순간 그들모두가 구령이라도 받은것처럼 일시에 대피호에서 뛰쳐나왔다. 달려나와서는 라정아를 백포로 싸고 정신없이 대피호에로 날라갔다.

 

×

 

혜산시인민병원의 한 수술장에서는 눈부신 무영등아래에서 긴장한 수술조작에 여념이 없었다. 김정일동지께서 친히 직승기로 보내주신 조선적십자중앙병원의 명망높은 의료진이였다.

저녁 8시에 수술이 시작되였었다. 그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섬겨주는 수술도구들을 거의나 기계적으로 받아들며 긴장한 수술전투를 벌리는 집도자와 보조의사들의 이마엔 줄곧 무수한 땀방울들이 돋아나군 했다. 한 간호원이 전문 그것을 소독가제로 찍어주고있었다.

변함없이 채칵거리는 벽시계의 초침소리···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새벽 2시 42분을 가리키고있었다.

 

그 시각 김정일동지께서는 집무실에서 점도록 낡은 병력서를 들여다보고계시였다. 그이의 앞에는 김일과 신성우박사가 자리잡고있었다.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만이 계속되였다. 김일은 저도 모르게 《음···》 하고 마른기침소리를 내였다.

마침내 김정일동지께서 병력서를 탁우에 놓으시였다.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기시더니 신성우박사를 향해 조용히 물으시였다.

《박사선생은 이 녀성조각가의 병명을 어떻게 진단하였습니까?》

《예, 저와 우리 병원의 의료집단은》 하고 신성우박사가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전후에 이 녀성조각가를 치료한 삭주군병원의 병력서와 최근 여러 병원들에서 치료한 내용들을 자세히 연구해보았습니다. 결과 세균성 심내막염으로 확진할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균이 심내막 특히 판막에 침범하여 일으키는 병으로서 전신패혈증의 국소증상이 기본입니다. 자주 떨리고 숨이 차고 고열이 나는데··· 지금은 증후성정신장애까지 겹치여 시간마다 본격적으로 생명이 꺼져가고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괴로움을 이길수 없는듯 두손을 꽉 부르쥐시였다.

《생명이 꺼져가고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뭐 시간마다? 본격적으로?!···》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지금까지 살아있은것만도 기적입니다.》

수술칼같이 차고 예리한, 실로 무정하기 짝이 없는 대답··· 허나 그들을 탓할순 없다. 생명을 다루는, 진정 참된 사랑을 지닌 의사들만이 그렇게 말할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이께서는 무엇인가 더 묻고싶으신듯 신성우를 바라보시다가 아무말씀없이 눈길을 돌리시였다. 신성우박사도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그옆에서 김일은 눈귀를 흠칫흠칫 떨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이윽고 낡은 병력서를 다시 드시였다. 아니, 그것이 아니였다. 그것을 도로 탁우에 밀어놓고 만년필을 드셨으나 그것도 제자리에 내려놓으시였다. 이어 서류철을 가까이 끌어가시였다. 아니, 그것도 아니였다. 마침내 그이께서는 탁우의 풀색전화기를 끄당기시였다.

《나 김정일입니다. 혹시 혜산에서 무슨 소식이··· 아니, 무슨 좋은 소식이 오지 않았나 해서 전활 걸었습니다.》

저쪽에서 뭐라고 나직이 보고드렸다. 힘들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것이 알렸다.

김일은 차츰 어두운 그늘이 덮이고있는 김정일동지의 안색을 불안에 찬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차츰 숨을 쉬는것조차 헐치 않았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것이, 무서운것이 예감되였다.

《뭐, 수술도중?!···》 그이께서는 급히 송수화기를 다른쪽에 옮겨쥐며 물으시였다. 《뭐요?!··· 그럼 인젠 아무 희망도 없단 말입니까. 예?··· 너무 늦었다?!···》

그이께서 마지막으로 《너무 늦었다?!···》고 하신 말씀은 거의나 불같이 뿜어져나온 웨침과도 같았다.

그이께서 들고계신 송수화기에서 다시 코맹맹이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느리고도 긴 설명이였다. 그이께서는 이윽토록 귀를 기울이시였다.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무것도 듣지 못하시였다.

잠시후였다. 그이께서는 그만 맥없이 송수화기를 떨구시였다. 덜컥하는 소리··· 순간 고막이 징― 울렸다. 세계가 이 좁은 방안속에 압축되여버렸다. 영원무궁한 우주의 시간을 끊임없이 재여가던 시계의 초침소리도 우주적인 중압에 짓눌려 숨을 죽여버렸다.

정적···

신성우박사가 먼저 자신을 다잡고 조용히 말씀드렸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현대의학으로써도 어쩔수 없는 그런 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쓰시지 말···》

그는 말끝을 이을수 없었다. 김정일동지께서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한동안 아무말씀없이 방안을 거니시였다. 이윽고 창가로 다가가신 그이께서는 멀리 밤하늘가에 눈길을 주시였다. 무수한 별들이 속삭이는 밤하늘··· 거기에서는 지금 우주적인 대원무가 한창이였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크고작은 별들이 금빛의 눈을 반짝이며 무엇인가 속삭이고 노래부르고있었다. 영원한 자기의 자리길을 따라 고요히 흐르는 우주의 별무리··· 허나 그이께서는 그 신비스러운 천궁의 원무만을 보고계신것이 아니였다.

《내가 제일 가슴아픈것은》 하고 그이께서는 애써 흥분을 누르며 말씀하시였다. 《〈너무 늦었다.〉고 하는 그 말입니다. 너무 늦었다? 그럼 왜 늦었는가?!···》

격하신 음성이였다. 호흡도 더 빨라지고 두눈에서는 섬광이 펀뜩이고있었다.

《나쁜 놈들이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의 핵을 거세하려고 했을뿐만아니라 한 녀성의 아름다운 꿈마저 짓뭉개버리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병과 아픔마저 숨기고 수령님과 당을 위해 몸바쳐온 그 녀성에게 모진 고통과 모욕까지 주면서··· 김일동지가 이번에 가서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 녀성조각가의 마음속에 간직되여있는 그 소중한 꿈도 알지 못할번 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법이나 한 일입니까?···》

그이께서는 주먹을 꽉 부르쥐시였다. 참을길 없는 분노로 하여 그이의 말씀은 마디마디가 그대로 불길같이 내뿜고있었다.

《그 녀성이 그처럼 최후의 숨을 몰아쉬고있을 때, 그러면서도 수령님을 따라 혁명에 나선 부녀회원과 소년들의 모습을 조각하고있을 때 나쁜 놈들은 그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은근히 모해하고 모욕을 주고 쫓아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녀성은 끝까지 자기의 존엄을 지키고 량심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순결하고 아름다운 녀성입니까. 그런데도 박사선생, 그렇듯 훌륭한 녀성의 생명이 꺼져가고있을 때 우린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신성우는 머리를 떨구었다. 할말이 없었다. 김정일동지께서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신것이 아니였다. 그를 책망하신것은 더더욱 아니였다.

한쪽에서는 김일이 후들후들 몸을 떨고있었다. 별안간 그는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더는 이길수 없어 김정일동지께 가까이 다가서며 거쉰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이 일은 전적으로 제가 잘못한 탓입니다.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받고서야 거기에 가보니 그땐 이미···》

그이께서 머리를 저으시였다.

《아닙니다. 1부수상동지, 우린 여기서 보다 심각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제국주의반동들만이 인민의 존엄과 자주권을 유린말살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더 아픕니다. 우리가 좀 더 일찌기 〈유일〉의 구호를 들고 전당과 온 사회를 수령님의 사상과 령도의 한길로만 이끌었더라면 이처럼 나쁜 놈들이 제멋대로 순결한 사람들의 량심을 짓밟고 고통을 주고 존엄까지 모욕하는 일은 없었을게 아닙니까.》

김일은 호흡이 절박한듯 헐썩이고있었다.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옮기시였다. 쓰라린 마음때문에 무수히 반짝이며 눈웃음치는 별빛도 미처 가려보시지 못하였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서야 다시 김일에게로 눈길을 옮기시였다.

《김일동지, 이럴 땐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습니까. 라정아라는 그 훌륭한 녀성조각가를 위해 이제 우리가 무엇을 더 해줄수 있겠는지?··· 생각되시는것이 있으면 좀 말씀해보십시오.》

김일은 아무말없이 짙은 눈섭만 찌프리고있었다. 마음속 괴로움이 물결처럼 그의 미간으로, 깊은 주름살로 퍼지고있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신성우박사에게로 질책하는듯 한 눈길을 던졌다.

《이럴 땐 박사선생이 좀 말씀드려주시구려.》 하는듯 한 눈빛이였다.···

신성우는 찌르는듯 한 그의 눈빛에 견딜수 없는지 그만 머리를 돌리고말았다.

《그 녀성은 의용군으로 입대한 전사였습니다.》 그이께서 계속하신 말씀이였다. 《수령님을 따라 한생을 꿋꿋이 걸어왔고 조각가로서 수령님을 따르는 인민의 형상에 온넋을 쏟아부은 수령님의 딸, 당의 딸··· 참으로 아름답고 순결한 녀성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떻게 하면 그를 더 위해주고 더 빛내여줄수 있을가 하는 그 한가지 생각뿐입니다.》

다시 오래 계속된 침묵··· 누가 그에 대한 답을 줄수 있으랴. 누가 그렇듯 모진 심중의 아픔을 가시여줄수 있으랴?!···

사람의 한생은 길지 않다. 너무 짧은것인지도 모른다. 허나 한생의 길고짧음은 대비속에서만 구별된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것을 대비할수 있을가?··· 그것은 사랑이다. 그 어떤 물질적, 정신적부를 가진 사람도 참사랑이 없으면 인생의 가난뱅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라정아는 끝까지 사랑을 안고산 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