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5

책제목:운명
 
 

제 3 장

5

 

새벽··· 줄기찬 비줄기와 더불어 캄캄한 어둠속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어온 새날의 정적과 려명··· 그러나 라정아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오직 마음속에서 울리는 노래소리만 듣고있었다. 그것은 라정아가 쓴 가사에 림근우가 곡을 붙인 노래였다. 해방직후 서울에서 김일성장군님 계시는 평양의 하늘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오직 그들만이 알고 둘이서만 가만히 불러온 꿈의 노래, 애모쁜 련정의 노래였다.

···

마음속으로 그 노래를 다시 불러본다. 하지만 웬일인지 오늘따라 한없이 마음은 어둡고 쓸쓸하기만 하다. 하여 그는 리웅산이 나간 후에도 오래도록 까딱하지 않고 푸릿한 창너머 멀리로 망연히 눈길을 주고있었다.

《저를 욕해주세요. 선생님, 잊지 못할 나의 사랑, 나의 림근우동지.》 하고 라정아는 언제나 군복차림으로만 안겨오는 그의 모습을 그리며 마음속으로 절절히 부르짖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나를··· 콱 욕해주세요. 그리구 제가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좀··· 부축해주세요.》

그이는 지금 어데서 무엇을 하고있을가. 그이 역시 어데선가 나를 생각하고있지 않을가? 이 라정아를 그리워하고있지 않을가?···

《선생님! 오늘도 난··· 의사선생님들께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어요. 〈내게 이제 몇달만 더 주세요. 몇달만 더 살게 해주세요!〉 하고 말이예요.》

여전히 군복차림을 하고있는 림근우가 거칠게 내쏜다.

《도대체 지금 무슨 허튼소릴 하는거요, 응?! 정아, 제발 정신차리오!》

정아는 머리를 젓는다. 마음속으로 그에게 매달리며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아니예요, 선생님! 내가 이제 얼마를 더 못산다는걸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나요. 그래서 하는 말이예요. 난 한시도 죽음과 헤여질수가 없는 몸이예요.》

《정아! 죽음이란 각오하는것이지 맹목적으로 기다리는게 아니요. 이걸 알아야 해.》

《하지만 선생님, 난··· 선생님도 잘 아시는 전쟁때의 일때문에··· 몇날 못산다는걸 잘 알아요. 그 일때문에!··· 그래서 매일같이 의사선생님들께 빌지 않을수 없어요. 정말이지 좀 더 살고싶어요. 선생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살고싶어요.》

《난 믿소, 그날을!··· 그러니 기다려주오. 내 이제 꼭 정아한테로 가겠소.》

《그래서··· 의사선생님들께 빌고있는거예요. 〈선생님들, 몇달만 더 살게 해주세요. 나의 사랑, 나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의 한생의 전부이기도 한 저 조각품들이 완성되고 선생님도 보게 될 그때까지, 그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세요!···〉 하고 빌고 또 빌군 하는거예요.》

불현듯 림근우의 얼굴에서 피기가 사라져간다. 노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적구에서 단도를 내밀며 상처를 째라고 명령하던 그때처럼 우악스러운, 찢어지는듯 한 목소리로 무섭게 질책한다.

《듣기 싫소, 정아! 내가 벌써 몇번이나 말했소, 엉?··· 자기를 이겨내야 한다구,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믿어야 한다구 말이요. 그런데 오늘 또 정아답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요? 정말이지 난 정아가 그렇게 우는소릴 하는걸 차마 듣고만 있을수 없소. 참을수 없단 말이요.》

《그럼 그때처럼 주먹으로 귀통을 때려주세요. 내가 정신을 차릴수 있게···》

그러나 그는, 상상속의 림근우는 아무말없이 사납게 씨근덕거리기만 한다. 두주먹을 부르쥐고 무섭게 쏘아보더니 갑자기 몸을 홱 돌려 가버린다.

《왜요? 뭣때문에요?···》 라정아는 자기의 등골로 줄달음쳐가는 차디찬 전률에 부르르 몸을 떤다. 《가지 마세요, 선생님! 제발 날 좀 도와주세요! 난, 난 정말이지···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요. 정말이예요, 도와주세요.》

그가 멈춰선다. 불이 황황 이는 눈빛으로 라정아를 돌아보며 준절하게 타이른다.

《제발 용기를 잃지 마오, 정아!··· 동무야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운 인민군녀전사가 아니요!》

《아니, 그보다 먼저 난 녀자예요.》

《그런 녀잘 난 알지 못하오. 알고싶지도 않구···》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결연히, 발걸음소리도 없이 저 멀리 아득히 사라져버린다.

《선생님, 가지 마세요. 부탁이예요!―》

라정아는 한손을 내뻗치며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인제는 자기 귀에도 들리지 않는 그 부르짖음··· 라정아는 헉―헉 토막숨을 내불기 시작한다. 목구멍이 칵 메였지만 힘겹게 그리고 거의나 애처롭게 거품이 끓는 소리로 그를 부르고 또 부른다.

《선생님! 이 라정아가 이렇게 제일 힘들구 아플 때, 이렇게 홀로 외롭구 괴로울 때 당신은 어데서 무얼 하고계시나요, 예?!》 푸릿해진 저 하늘가에로 끝없이 메아리쳐가는 가느다란 흐느낌소리··· 그러나 그의 애절한 부름에 화답해주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울려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