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22

책제목:운명
 
 

제 3 장

22

 

오호쯔크해를 떠난지 닷새째 되는 날 유진은 배에서 내리는 길로 사업소당위원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당위원장은 도에 회의를 가고 나어린 처녀직관원이 원양어로선대의 지도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진은 호기심 가득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맨 꼭대기에 《수산물 80만톤고지 점령에 어느 배가 제일 앞장섰는가?》 라는 제목을 쓰고 그밑으로 쏘련 깜챠뜨까반도와 오호쯔크해, 싸할린섬과 일본북부 및 우리 나라 북부지방까지 섬세하게 그려놓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청진으로부터 매 해구와 여러 섬들까지의 거리를 마일로 표시하고 매 뜨랄선들이 지금 작업하는 해구와 배들의 위치, 어획고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알아볼수 있게 써넣었는데 공로있는 선장, 어로공들의 사진까지 오려붙인 굉장한 지도였다.

박유진이 감탄했다.

《동무 미술대학을 나왔소?》

《아니요.》

《그래두 그림솜씨를 보면···》

《이것두 뭐 그림인가?》

처녀는 오목눈이였다. 속통도 그 눈처럼 잔뜩 오무라들었는지 모른다. 유진은 혀를 찼다.

《아니, 그림이 아니문 뭐라는거요? 난 그래도 정말 멋있다구 봤는데···》

《이런것쯤 뭐···》 처녀는 조금 너누룩해졌다. 《중학교땐 미술소조에 들었댔어요, 미술대학시험엔 미끄러지구···》

《저런!···》

더 할말이 없었다. 나어린 처녀이지만 동정하는 말이라도 하는 날에는 새파래질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처녀가 그린 오호쯔크해의 여러 배들 그림우에 공로있는 여러 선장, 어로공들과 나란히 박유진이 사진(아주 작은것이긴 하지만)도 붙어있는것이였다.

《아니, 이건?!···》

《왜요?》

처녀가 실눈을 하며 그를 마뜩지 않게 흘겨보았다. 다음순간 저도 모르게 사진과 박유진을 번갈아보더니 어망결에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아이, 뜨랄56호! 그렇지요? 이름은 박유진.》

《동무가 날 어떻게?···》

《왜 모르겠어요. 온 사업소가 다 아는데··· 보시겠어요?》

처녀는 그를 복도로 잡아끌었다. 문을 열어놓은채로 복도벽에 붙인 영예게시판을 가리키는데 김태규선장과 여러 사람가운데 박유진이 이름도 있었다.

《보세요, 여기 이름이 나있는걸··· 사실은 배우에서 고무옷을 입고 찍은 사진까지 크게 붙어있었는데 얼마전에 내각부수상동지가··· 뜯어갔어요.》

《뭐?》 박유진은 입이 째지게 웃어대였다. 《여 동무, 웃기지 말라구. 아니, 나같은게 다 뭐라구 내각부수상동지가 사진까지 뜯어간다구 그래?··· 동무 얌전데기인줄 알았더니만···》

처녀의 오목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웃지 마세요. 이건 정말이예요. 바로 남일부수상동지가 와서 박유진이··· 참, 그랬어요. 〈박유진이 그 사람 일을 쓰게 합데? 그럭저럭 잘한다구? 그럼 그 사람 배에서 일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없소? 한장 있으문 내놓소. 당장 필요해서 그러오.〉라고 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우리 당위원장동진 신이 나서 〈우리 박유진동문 배사람이 다됐습니다.〉 하면서 여기 영예게시판에 나붙은 사진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가져가라구 했단 말이예요.》

유진은 그만 입을 다물고말았다. 별안간 뒤통수를 한대 호되게 얻어맞은것 같은 기분이였다.

직관원처녀가 또 무엇인가 생각난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참, 열흘전엔 외국에서 무슨 이상한 소포를 보내왔어요. 무슨 책같기두 하구 원고같기두 하구···》

《외국에서? 나한테?···》

《예, 뚜껑엔 로어로 〈조선 평양. 그리운 학창시절의 벗 박유진에게〉 이렇게 쓰구 그밑엔··· 참, 뭐라구 했더라? 아, 그렇지. 무슨 아다 미헬―쏜?··· 그래요, 그런 이름이였···》 처녀는 두눈을 흡떴다. 《아이,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아무렴 그런 거짓말까지 다할가?··· 정말이예요.》

《···》

여전히 박유진은 입을 열지 못하고있었다. 태규선장이 말한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그 녀자가 왜 한사코 지구의 이 한끝까지 따라오는지 알수 없었다.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마르고 등골이 서늘해지는것을 느꼈다. 사진을 떼여간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아다 미헬쏜이 보냈다는 소포가 더 께름하였다.

···다음날 도에 회의갔던 당위원장이 돌아와서야 모든것이 석연해졌다. 남일부수상이 사진을 떼여간것도 사실이고 아다 미헬쏜이 소포를 보내온것도 사실이였다. 그런데 아다가 보낸것은 사진묶음이였다. 자기의 결혼과 외국려행, 딸의 불의적인 죽음과 남편과의 리혼 등 행복과 불행이 하나의 쌍곡선을 이루며 흘러온 자신의 인생극에 대한 일종의 사진기록··· 편지는 따로 없었다. 유진은 아다가 보낸 그 사진묶음을 보면서 으시시 몸을 떨었다. 마치 자기의 인생길에 매설된 정신적지뢰같은것을 발견한듯··· 하여 유진은 또 한동안 심리적알레르기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