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2

책제목:운명
 
 

제 3 장

2

 

백두산이 지척이고 압록강을 끼고있는 북방의 도시 혜산은 아직도 새벽이면 오싹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군 했다. 간혹 씨비리의 찬바람이 때없이 밀려내려올 때도 있었다.

라정아는 바람에 날리듯 종종걸음을 옮기다가 자기들의 작업장인 천막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서 우편통신원처녀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것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통신원처녀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있었다. 류달리 바람질이 심한 날이였다.

라정아는 처녀가 괘궁정을 끼고있는 언덕을 올라 《인민영웅탑건설전투장》이라고 크게 쓴 표말뚝을 지날 때까지, 그리고 집채같은 화강석들이 가득 무져있는 건설장 한가운데로 달려올 때까지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그에게 날아올 새소식도 별로 없었건만 그래도 무엇인가 은근히 기다려지는 마음이였다.

건설장 여기저기에서 많은 남녀청년들이 처녀통신원을 보자 자석에 끌리듯이 우르르 몰려갔다. 이어 떠들썩한 인사말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통신원처녀가 그들모두에게 소리쳐 묻는 말이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현장이 이렇게 조용해요?》

처녀의 물음에 다들 시무룩해진것 같았다. 누군가 길게 탄식조로 내뿜었다.

《지도검열소조가 내려왔소.》

《지도검열? 아이참, 그게 공사와 무슨 상관이예요?》

《챠, 이런! 지도검열이 시작됐다는건 바로 기념비공사도 사람들도 다 얼어붙게 만든다는 소리란 말이요.》

《예?》

그 다음말은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세지면서 건설장 여기저기에서 먼지의 회오리가 일었다. 라정아는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여전히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통신원처녀를 기다렸다. 처녀가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며 신문을 비롯한 갖가지 출판물들을 나누어주고 곁을 지나쳐갈 때까지 까딱않고있었다.

통신원처녀는 반갑게 여기 인민영웅탑건설장의 유일한 녀성조각가인 라정아에게 정찬 눈인사를 보내며 자전거를 밀고 그의 앞을 그냥 지나갔다. 오늘도 라정아에게 오는 편지는 없는것이다. 편지를 쓸 사람도 없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이, 림근우선생도 인제는 이 세상에 없는것만 같다. 과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인가?!···

라정아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천막으로 들어갔으나 오래도록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조각한 항일유격대의 녀대원과 부녀회원, 소년들이 두손을 모두어잡고 천막안에 망연히 서있는 그를 묵묵히 지켜보고있었다.

얼마전까지 조각가들은 동평양체육관에서 200여상에 달하는 항일유격대원들과 유격근거지인민들의 각이한 군상을 조각했었다. 여러달동안 그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해당한 인물을 골라 모델을 세워놓고 스케치를 하고 흙으로 빚어 전반적인 기념비형성안에 조화되는가를 검토한 다음 매 조각품마다 부분들로 갈라서 동으로 주물을 하고 그것들을 렬차에 싣고 여기 현지에까지 날라왔었다. 이제 그 조각품들을 대기념비의 단우에 조립(용접)하고 연마하는 작업만이 남아있었는데 돌연 무슨 지도검열소조가 내려오면서 조립작업이 중단되고말았다. 아까 남녀청년들이 우편통신원처녀를 둘러싸고 떠들어댄것처럼 지도검열소조가 내려오면서 공사도 사람들도 얼어붙게 했던것이다.

갑자기 천막문이 활 열리더니 조각창작단에서 제일 젊은 로경호가 들어왔다. 미술대학을 갓 졸업하고 배치된 새파란 젊은이이지만 비상한 재능으로 하여 창작단에서는 전도가 가장 촉망되는 젊은 조각가로 인정되고있다. 하여 대기념비의 주인공도 그가 맡고있다.

《에익! 날씨도 더럽군.》 하고 로경호가 투덜거렸다. 《이거 무슨놈의 바람질이 이렇게 심해?》

라정아가 말했다.

《지도검열소조가 몰아온 바람이니까 셀수밖에.》

《예?···》

라정아는 쓰겁게 웃었다.

《조심하세요, 로경호동무. 이 라정아란 녀자도 저 바람질 못지 않게 치마바람을 쌩쌩 일군다구 시비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로경호는 비로소 라정아가 왜 비틀린 소리를 하는지 알겠다는듯 핫하!··· 하고 크게 웃어대였다. 지도검열소조로 내려온 사람들이 홀로 사는 녀성조각가 라정아가 내각설계실장이며 지금 대기념비의 총설계가인 리웅산과 어쩌구저쩌구 한다며 색다르게 볼뿐만 아니라 은근히 시비질을 하고있다는것을 그도 알고있었던것이다.

《아, 그러면》 로경호가 웃으며 말했다. 《바람질과 시비질중에서 어느쪽이 더 센가 그 사람들더러 한번 갈라보라고 합시다.》

《그럼 아마 시비질이 더 세다는게 증명될거야.》

라정아의 말에 로경호가 반대했다.

《아니, 바람질이 더 세요. 자연이 만든거니까!》

《아냐, 시비질이 더 세! 사람이 만든거니까.》

《아니예요, 바람질!》

《아냐, 시비질!》

《아니, 바람질!》

《아니, 시비질!》

라정아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

《아이참, 우리가 왜 이런담? 애들처럼···》

두사람은 그만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웃고보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천막이 웅웅거렸다. 밖에서 바람질이 더 세지고있었던것이다.

그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로경호가 흠칫했다.

《아, 참···》

그가 바빠하며 라정아에게 눈짓했다. 빨리 전화를 받으라는 신호였다. 라정아는 무심히 송수화기를 들었다.

《조각창작단입니다.》

《동무!》 저쪽에서 대뜸 석쉼하게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울려왔다. 지도검열책임자 방만길이였다. 《동무 라정아지? 헌데 총화모임엔 왜 참가하지 않는거요, 에?》

《총화모임이라뇨?···》

《지도검열중간총화 말이요. 뭐?··· 못 들었다구? 넨장, 온통 이 모양이라니까. 동무, 인민영웅탑건설에서야 조각가들이 기본이 아닌가?··· 잔말말구 당장 총화에 참가하오. 》

라정아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로경호쪽을 돌아보았다. 동문 알고있었는가? 하는 눈빛이였다. 로경호가 입을 비쭉거렸다.

《그래서 왔는걸요. 당장 가서 정아동질 데려오라구 했는데 그만 롱질을 하다보니···》

라정아는 쓰겁게 웃고말았다. 귀전에서는 방만길의 성난 목소리가 계속 웅웅거렸다. 방만길은 키가 훤칠하고 두눈이 부리부리한 미남형이나 성미는 장작개비처럼 메마른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자기를 올곧지 않게 바람쟁이녀자처럼 보고있었으므로 라정아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찬물을 들쓴듯 으시시 몸을 떨군 했다.

로경호가 뜨아해하며 물었다.

《정아동지, 왜 그럽니까, 빨리 가지 않고?》

《응?!···》

라정아는 이상하게 웃으며 로경호를 돌아보는데 그의 얼굴은 피기까지 가셔진듯 해쓱하니 질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