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6

책제목:운명
 
 

제 2 장

6

 

깊은 밤이였다. 혜영은 렬차칸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억지로 졸음을 청하고있었다. 가끔 증기기관차의 거센 기적소리가 여름밤의 대기를 찢으며 사납게 울리군 했다. 혜영이에게는 그 기적소리조차 누군가의 성난 웨침소리처럼 들려왔다.

렬차방송에서는 아까부터 경쾌한 음악이 계속되고있었다.

《이번엔 백인준 작사, 김린욱 작곡의 영화주제가 〈해빛밝은 내 나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어 물결치는듯 한 반주음악이 울리더니 맑고 랑랑한 녀성고음독창이 시작되였다.

 

찬란한 해빛이 이 강산에 넘치니
사람들 한없이 행복하여라
창조로 꽃피는 사회주의 내 조국
땅우에는 백과 무르익었네

 

예술영화 《끝없어라 나의 희망》의 주제가이다. 끝없이 밝고 랑만과 희열에 넘친 노래··· 허나 그것도 혜영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남편일때문에 온통 마음이 구깃구깃 구겨져있었던것이다.

렬차원이 들어서더니 챙챙한 목소리로 노래부르듯 했다.

《차안에 계신 손님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다음 도착할 역은 고원역입니다. 고원역에서는 20분간 섭니다. 내리실 손님들은 미리 준비해주십시오.》

 

우리 나라는 살기 좋아라
우리 태양은 밝고밝아라
우리 앞길은 넓고넓어라
언제나 한마음 수령님 모시고
충성을 다하여 천년만년 살리라

 

렬차방송의 녀성고음독창이 고조되는 속에 많은 사람들이 당반우의 크고작은 보짐들을 끌어내리고 커다란 배낭을 찾아메면서 법석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함경도사람들의 악센트가 센 사투리의 회오리가 렬차칸을 휩쓸어가고 또 휩쓸어왔다.

혜영은 얼핏 눈을 떴으나 곧 도로 감고말았다. 혜영이의 맞은편에는 하얀 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있는 교육자나 예술가풍의 한 녀인과 공군령장을 단 한 군관(상위)이 앉아있었다. 처음엔 딸의 잔치에 간다는 로인내외가 앉아있었는데 그들이 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그 녀인과 공군상위가 자리를 메웠던것이다.

처음엔 그들이 부부간인가 했었다. 그런데 녀인보다도 젊어보이는 공군상위가 전투가방에서 무슨 편지인가를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눈치가 이상했다. 손에 펴든 편지는 보는둥마는둥 반쯤 눈을 감고있었다. 그가 편지를 한두번만 읽어본것이 아니라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그와는 달리 예술가풍의 녀인은 처음부터 혜영이에게만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있었다. 그가 먼저 상긋 웃으며 알은체를 했었다. 혜영은 당황하여 건성 눈인사를 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낯모를 녀인이였다. 그 녀인이 무슨 말인가 꺼내려는 눈치여서 혜영은 눈을 감고말았다. 졸음에 못 견디겠다는듯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지금껏 자는척 했다. 그러나 그 녀인의 주의깊은 시선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속이 언짢았다. 혜영은 눈을 뜨고 도전적으로 녀인을 마주보았다. 순간 가늘게 쪼프린 녀인의 눈에서 밝은 미소가 불을 켰다.

《몹시 고단한가보지요?》

《예, 그저 좀···》

얼떠름한 대답이였다. 사실은 귀찮게 구는 녀인에게 한마디 퉁이라도 놓고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녀인의 두눈에서 흘러나오는 정찬 미소에 부쩍 마음이 끌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혹시》 하고 녀인이 또 물었다. 《리혜영이라고 하지 않는지? 사진보도사에서 일하는···》

《아니, 그걸 어떻게?···》

혜영의 놀라는 표정을 보며 녀인은 상긋 웃었다.

《그러니 내가 바로 봤군요. 아버진 건축가 리웅산선생··· 내각건축설계실 실장으로 일하시지요?》

혜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쩌문?!···》

《난 라정아라구 해요.》 녀인은 여전히 웃는 눈이였다. 약간 흐릿한 색갈의 목소리였지만 남달리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미술가동맹에 있는 조각가이구요. 얼마전부터 인민영웅탑조각군상제작에 동원되였어요. 그래서 인민영웅탑 총설계가인 리웅산선생을 아니, 혜영이 아버질 알게 됐어요.》

《우리 아버지를요?》

《예, 그래서 혜영이네 가족사진도 여러번 볼수 있었어요.》

《예―》

그래서 우연히 나를 보자마자 우정 가까이 옮겨온것인가?!··· 혜영은 얼결에 녀인이 권하는 사과를 받아들었다. 렬차판매원이 밀차를 밀고 수시로 오고갔지만 여적 한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던 혜영이였다.

라정아라는 녀인은 곁에 앉은 공군상위에게도 친절히 사과를 권하였다. 그러자 보풀이 인 편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던 공군상위가 그것을 팔소매로 쓱쓱 문지르며 분명치 않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사야 하는걸···》

《아이, 무슨 그런 말씀···》

공군상위는 사과를 받아쥐고 당장 입에 가져가기가 무엇한 모양이였다. 그는 게면쩍어하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별안간 놀랜 소리를 질렀다.

《가만, 지금 기차가 어디에 와있습니까?》

《고원역이예요.》

라정아가 대답하였다.

《아니, 이런 변이라구야? 난 여기서 내려야 합니다.》 공군상위는 손에 쥐고있던 사과를 녀인의 손에 꾹 박아넣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가 덤볐다치며 인사를 하고 승강구로 달려나가는것을 지켜보던 라정아가 혜영이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정말 재미나는 군관동무이지요?》

《?···》

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말도 없었다. 자기에게는 그 공군상위가 재미나는 사람은커녕 무엇때문인지 몹시 괴로와하는 사람으로밖엔 달리 보이지 않았다.

《참, 혜영인 어데까지 가세요. 혹시 아버지한테?···》

《아니예요.》

혜영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더이상 설명도 달지 않았다.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였다. 정찬 목소리를 가진 이 녀인, 창백한 얼굴에 류달리 깊고 따스한 눈동자를 가진 이 녀인이 나에게 이처럼 바투 다가온것은 무슨 까닭일가?··· 그리고 이 녀인이 아버지가 품고다니는 가족사진까지 자주 들여다보는 정도라면, 하여 사진에서 본 나의 얼굴모습까지 생생히 기억해둘 정도라면 두사람은 과연 어떤 사이란 말인가?···

어머니는 벌써 몇해전에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었다. 그후 혜영이까지 출가하여 집에는 지금 늙으신 할머니 한분밖에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밤낮 일이 바쁘다는 리유로 현장에 나가서 살고있고··· 몇해사이에 눈에 띄게 퍼그나 늙어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곁에 이렇듯 예쁘장한 녀인이 나타난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좋은 일일가, 나쁜 일일가?······

혜영은 라정아라는 녀인이 또 무엇인가 물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한순간 전류처럼 가슴속을 스쳐간 짜릿한 아픔때문에 가쁜숨만 내긋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