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0

책제목:운명
 
 

제 2 장

10

 

저녁노을이 피빛으로 진하게 불타고있었다.

내각 제1부수상 김일은 창문유리를 통해 내다보이는 그 먼 하늘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의 뒤쪽 길다란 량수책상에는 급히 불리워온 농업상 김만금을 비롯하여 현무광, 정일룡 등 금속, 화학, 전기, 석탄공업부문의 여러 상들과 부상들이 둘러앉아 청산리 녀성관리위원장의 울음섞인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마침내 관리위원장의 말이 끝났다.

오래 계속된 침묵··· 녀성관리위원장의 흐느낌소리만이 간간이 방안의 정적을 깨치고있었다. 점도록 창밖을 내다보며 모두숨을 톺고있던 김일이 마침내 일군들을 향해 돌아섰다. 로환으로 검버섯들이 드문드문 돋아있는 그의 얼굴은 벌거우리하게 물들여지고있었다.

《우리 인민들이 이 일을 알면···》 하고 그는 숨찬 소리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용서치 않을거요, 이 김일이나 동무들모두를 말이요. 그래 세계 어느 나라 수령이 농사일때문에 저수지물맛까지 맛본적이 있소, 저수지물을!··· 인민들은 수령님의 안녕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데 이 김일이나 이 자리에 앉아있는 동무들이 제구실을 못하다보니 우리 수령님의 고생이 얼마나 큰가 말이요! 수령님께서 오죽하면 저수지물을···》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억눌린 숨소리뿐··· 모든 일군들이 자책에 싸여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리종옥부수상은 왜 아직 안 보이오?》

김일의 물음에 구석쪽에 앉아있던 키가 꺽두룩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제가 대신 왔습니다.》

일순 김일의 더부룩한 눈섭이 우로 치켜들리였다.

《대신이 뭐요, 대신이? 당장 저수지물을 풀 대형양수기생산문제를 토의해야겠는데···》

리종옥은 내각부수상 겸 금속화학공업상이므로 토의할 대형양수기문제의 주인공이기도 한것이다.

김일의 불같은 목소리에 키 큰 부상이 어깨를 옴츠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상동진 좀전에··· 2월5일기계공장에 나갔습니다.》

《거긴 왜?》

《그 공장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나가셨다면서···》

《뭐, 김정일동지께서?···》

《예, 그이께서 태성호저수지의 물을 퍼올리는 문제때문에 2월5일기계공장으로 떠나셨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

김일은 불현듯 낯색이 질렸다. 금시 심장이 멎는듯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협의회를 준비하는새··· 김정일동진 벌써 기계공장으로?!···》

그는 곧장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탁우에 놓인 여러개의 전화기중에서 송수화기 하나를 성급히 들었으나 도로 내려놓고말았다. 이어 손에 잡히는대로 탁우의 서류철을 하나 집어들었으나 아무 의미없이 들여다보다가 별안간 그것으로 탁자를 탁 쳤다.

《그 말을 왜 인제야 하는거요, 엉?!》

협의회는 필요없게 되였다.

얼마후 김일은 2월5일기계공장으로 차를 달렸다. 땅거미가 지고있었다. 운전사가 전조등을 켰다. 그러나 대동강너머 재빛으로 보이는 푸른 숲너머에서는 아직도 락조의 빛이 희미했다.

김일은 무겁게 입을 꾹 다물고 재빨리 마주오는 가로수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오래전 전쟁이 끝난 후의 어느해 12월의 일을 더듬고있었다.

그때가 아마 1956년이였던가?··· 그래, 그해 12월의 어느날이였었다. 그날 수도의 거리들에는 눈이 내렸었다. 그때 김일은 강선에서 돌아오고있었다. 도처에 전쟁의 흔적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었으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활기에 넘쳐있었다. 멀리 보통강에서는 아이들이 스케트와 썰매를 타며 떠들고있었다.

한순간 김일은 길 저앞에서 한 소녀가 손달구지를 끌고가는것을 보았다. 흔히 보는 일이여서 무심히 지나치려고 했었다. 허나 다음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어 뒤를 돌아보고는 급히 소리쳤다.

《가만, 차를 세우오.》

차가 멎기 바쁘게 김일은 문짝을 열어젖히며 내렸다. 저 뒤쪽에 힘겹게 손달구지를 끌고가는 단발머리 어린 소녀가 있었다. 김일이 그를 소리쳐불렀다.

《얘, 너 경희 아니냐?··· 경희야!》

눈이 녹아 질척해진 길에서 자꾸 미끄러지며 안깐힘을 쓰던 소녀의 발이 멎었다. 머리를 쳐들고 돌아보는 소녀··· 김일을 알아보자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일은 그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그 애어린 얼굴에 흐르는 눈녹은 물을 닦아주었다.

《이건 뭐냐, 누가 이러라던? 누가 어린 너희들까지 파철을 줏게 하더냐, 응?···》

《···》

대답이 없었다. 할딱거리는 숨소리뿐··· 김일이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 차를 타구 가자.》

《아니, 안돼요. 저기 강가에서 오빠가 기다리고있어요.》

《오빠가?···》

《예, 오빤 저―기 보통강에서 파철을 줏는데 수매소에서 만나자구 했어요. 우린 매일 아버님께 수매증을 바치구 그담에야 숙제를 해요.》

《아니, 누가 그렇게 하라구 하던? 엉?!》

《이건 우리 오빠가 정해준 집안의 법이예요, 법!》

《뭐, 법?···》

그만에야 김일은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꿀꺽 삼키지 않을수 없었다. 느닷없이 빨갛게 얼어든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차디찬 그 손에 입김을 불어 녹여주며 속으로는 김정숙동지를 뜨겁게 불러보았다.

《김정숙동무, 이 일을 어쩌문 좋소? 이 머리 크다란 김일이 일을 쓰게 못하다보니 어린 경희까지 이런 고생을 시키고있구려.···》

그때 추위에 언 자그마한 손이 살그머니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는것이였다. 그러자 불현듯 마음이 허전해졌다. 자기의 진정을 몰라주는가 했었는데··· 어인 일인가. 작고 따스한 그 손이 김일의 젖어든 눈굽을 닦아주는것이 아닌가!···

《아저씨도 우시나요? 내각 제1부수상인데?···》

김일은 웬일인지 목구멍이 콱 메여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머리만 세게 흔들었을뿐···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아버님께서 강선제강소에 가시여 강재 1만톤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편다구 하셨대요. 그래서 오빤 우리도 매일 파철을 모아 나라가 허리를 펴는데 조금이라두 보탬을 주자구 했던거예요.》

《그래? 오빠가 그랬단 말이지?!···》 김일은 다시금 그 자그마한 손을 잡아 자기의 얼굴에 대고 비벼주었다. 《손이 다 얼었구나, 꽁꽁··· 내 녹여줄게.》

《아니예요. 됐어요, 아저씨.》

저 멀리 보통강에서 스케트며 썰매를 타고있는 아이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그 모습··· 김일은 그 여린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저씨, 난 가야 해요, 저기서 오빠가 기다려서···》

《응?!···》

이번에도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하는수없이 김일은 그 손을 놓아주었다.

운전사가 차를 후진하여 가까이 다가와 문짝을 열어주는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눈발이 굵어졌다. 눈앞이 흐릿했다. 그는 이윽토록 한자리에 굳어진채 힘들게 손달구지를 밀고가는 나어린 소녀의 뒤모습을 뜨거워진 그리고 뿌옇게 흐려진 눈길로 이윽토록 바래주고있었다.···

그때 일을 상기하자 김일은 다시금 가슴이 후더워지는것을 느꼈다. 전후의 제일 어렵던 그때는 물론 지금도 오직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몸과 마음 다 바쳐가시는 우리 당의 젊으신 지도자 김정일동지!··· 그이께서 지난해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이 한해동안 우리 당안에서는 벌써 얼마나 많은 벅찬 일들이 벌어졌던가!···

김일은 김정일동지께서 가셨다는 2월5일기계공장에 이를 때까지 승용차 뒤좌석에 바위처럼 꾹 박힌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