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4

책제목:운명
 
 

제 1 장

14

 

날이 갈수록 날씨는 차졌다. 벌써 11월이다. 비행장활주로를 휩쓰는 돌개바람에 어디선가 굴러온 가랑잎들이 새떼처럼 우―우 흩날렸다. 비행기의 발동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와왔다. 정비원들이 손채양을 하고 검은구름이 뜬 하늘가를 눈이 빠지게 바라보고있었다.

《나타났다!―》 하고 정비원들중 누군가 뒤집히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한대, 두대, 석대, 넉대!··· 제3중대 추격기편대 오늘도 이상없음!―》

날씨가 나빴으나 추격기편대는 오늘도 임무를 마치고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나타난것이다. 비행장 저끝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아츠럽게 대기를 찢더니 착륙등들이 껌벅거렸다. 이어 비행장의 콩크리트바닥을 쓸치며 비행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바퀴들이 둔중하게 콩크리트바닥을 쓸치며 픽―픽 연기를 내뿜었다.

최봉호는 맨 마지막으로 내렸다. 담당정비원인 초기근무사관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상위동지, 수고했습니다!》

그는 어느새 거수경례를 붙이고 비행기의 천개를 열고나오는 최봉호를 거들었다. 봉호보다 7년이나 나이가 많은 맏형과도 같은 사람이다. 류달리 곰살궂고 좀 덩둘해보이는편이지만 그처럼 깐지고 정확하고 책임적인 정비원은 다시 찾지 못할것이다. 그가 또 소리없이 웃으며 무슨 비밀이라도 대주듯 봉호의 귀가에 손을 대고 낮게 말했다.

《상위동지, 정치부장동지가 찾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것 같습니다.》

《?···》

최봉호의 강파로운 이마우의 짧고 시꺼먼 눈섭이 미간으로 쪼프러졌다. 그는 비행모를 벗어 옆구리에 끼자 정비원은 돌아보지도 않고 스적스적 걸어갔다. 속이 언짢았다. 정치부장은 이제 수희의 문제를 꺼낼것이다. 한생을 언약하고서 갑자기 결별한다 하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따질것이다. 사실 봉호로서는 제일 말하기 딱한, 더이상 생각하는것조차 힘든 문제이다.

지휘부건물에 들어서니 오고가는 사람들모두가 그에 대하여 알고있는듯 했다. 여느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은체를 했다. 지나치고 다시 뒤돌아보는 사람, 무슨 말인가 하려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봉호는 잽싸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지나가는것으로써 귀찮은 물음을 피하군 했다.

정치부장은 대좌 전규환이다. 그가 반갑게 웃으며 마주나왔다.

《봉호동무, 자 어서···》

놀랍게도 전규환정치부장의 방에는 총정치국 부국장 장정환소장이 앉아있었다. 한달전에 만나본 일이 있는 사람, 바로 그때 그가 뜻밖에 봉호의 녀동생이 부대에 찾아오지 않았는가고 물었었다.

《소장동지!···》

봉호가 규정대로 보고를 시작하자 장정환소장은 그의 손목을 잡아내리고 자리에로 이끌었다.

《반갑소. 상위동무. 어서 여기 와앉소.》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미 대대장과 대대정치지도원도 와있었다.

마치도 상위 최봉호의 가정문제, 도덕륜리문제를 따지기 위해 무슨 특별군사재판이라도 열려는듯 했다.

장정환소장은 봉호가 자리에 앉자 그의 맞은편으로 갔다. 별스레 엄숙해진 표정이였다. 봉호는 무릎우에 올려놓은 두손을 불이 일게 비비며 바재이였다. 장정환소장이 탁우에 놓인 종이를 가까이 끄당길 때에는 숨을 죽이기까지 했다.

《동무들, 오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제203군부대 비행사인 상위 최봉호동무에 대해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구령이라도 받은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봉호도 벌떡 일어섰다.

장정환소장이 굵은 목청으로 계속했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얼마전 곡우중학교를 현지지도하시면서 10여년전에 찍은 사진을 보았다고, 그 사진을 찍을 때 어머니와 녀동생의 원쑤를 갚는 하늘의 복수자가 되기 위해 꼭 비행사가 되겠다고 맹세하던 소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최봉호라고, 자기가 맹세한대로 지금 공군제203군부대에서 추격기비행사를 한다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자신께서 최봉호동무가 군무생활과 전투정치훈련에서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는것을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고요가 깃들었다. 뜻밖이였다. 모두가 조각상들처럼 굳어져버렸다. 장정환소장이 탁우에 내려놓는 종이장의 미세한 쓸림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였다.

봉호는 숨을 쉬는것 같지 않았다. 불길같은 경련이 그의 광대뼈 어름까지 파문을 그리며 번져갔다. 눈시울은 떨리다못해 아프게 죄여들었다. 무슨 말인가 해야겠으나 입이 얼어붙어버렸다.

돌연 박수가 터졌다. 그의 상관들인 부대정치부장과 대대장, 대대정치지도원이 손바닥이 터질 지경으로 박수를 치고있는것이다.

《최봉호동무!》

장정환소장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순간 최봉호는 《헉!―》 하고 흐느끼며 그의 품에 안기였다. 말로써는 이루 다 표현할길 없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가슴을 찌르는 경건한 아픔이 눈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질무렵 최봉호는 전규환정치부장과 함께 비행장활주로의 변두리를 따라 걷고있었다. 정치부장에게 인제는 자기의 안해 수희에 대하여 털어놓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우리 처 한수희는 본래 윤씨성이였습니다. 윤수희···》 하고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 한초선생님의 성을 달고있지만···》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려는 수희와의 복잡한 문제의 밑뿌리라고 할수 있다.

전규환대좌는 시종 아무말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봉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지난날의 일들을 재빨리 돌이켜보고있었다. 그게 언제였던가?···

 

×

 

《사람들이 우리보구 진짜오누이가 아니래.》

수희가 잔뜩 볼이 부어 한 말이였다.

《어떤 시러베아들놈이 그따위 허튼소릴 해?》

봉호는 늙은이들이 대통을 탁탁 털며 내뱉군 하던 옛날말투를 본따며 씨근벌떡거렸다.

《오누이가 아니문 대관절 무어라는거야? 그럼 내가 네 오빠가 아니란 말야?》

생억지였다.

수희가 흐느껴울며 말했다.

《아니야, 오빠. 그 애들 욕하지 마. 걔들은 〈네 오빠 성은 최가이니까 최봉호구 넌 한가이니까 한수희··· 보라, 진짜오누이가 아니잖아?!〉 하는거야.》

《?···》

봉호는 그때 낚시에 물려 강기슭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리고있었다.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봉호도 자기를 키워준 한초부부의 사랑과 정성이 눈물겹도록 고마왔지만 성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수희와는 달리 친아버지,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진하게, 생생하게 새겨져있었으므로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또 언제였던가?!··· 대학을 다니던 수희가, 인제는 다 큰 처녀로 자란 수희가 자기 학급에서 제일가는 미남자이고 학과실력에서도 1등을 양보하지 않는 한 멋쟁이남학생에게 물벼락을 들씌워 소동을 일으킨적이 있었다.

그날 공군대학을 졸업하고 오래간만에 집에 들렸던 봉호는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한바탕 소리내여 웃었다. 전후사연이야 어쨌든 자기의 동생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마침 수희도 방학이 되여 집에 와있다 하니 한시바삐 보고싶었다.

수희도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바람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그만 봉싯한 입술의 귀재비를 바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오빠!―》

거의나 속삭임같은 소리였다. 다음순간 두손을 모두어쥐고 그새 눈에 띄게 봉긋해진 앞가슴을 꼭 누르더니 급기야 《오빠!―》하며 새처럼 날아들었다. 했으나··· 별안간 흠칫거리며 멎어서버렸다. 금시 자기를 안고 돌아갈것처럼 벌떡 뛰쳐일어서던 봉호의 입에서 뜻밖에도 이런 말이 튀여나왔던것이다.

《수희야! 너 무슨 처녀가 그래?》 봉호는 벌써 웃음을 거두고있었다. 《너 대학생이라는게 남학생과 쌈질을 해서 소동을 피웠다면서?··· 아니, 너 누굴 닮아서 그런 말괄량이가 됐니, 엉?!···》

실은 너무 기쁘고 반가와 막 얼싸안고 돌아가려던 봉호였었다. 그런데 알수 없는 그 어떤 충동이 먼저 군복입은 오빠로서 한번 을러메게 한것이였다.

《네―에?!》

수희의 낯색이 순간에 달라졌다. 급기야 새파란 빛이 돌만큼 해쓱해지고 치미는 분노로 하여 눈시울이 파들거리기 시작했다.

《말―괄―량이?》 하고 수희는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번득이는 두눈을 손등으로 벅 씻으며 부르짖었다. 《그래요, 난 말괄량이야. 그것두 오빠를 닮았지 누굴 닮았겠어요? 그래, 그런게 싫다문··· 좋아요, 다신 눈앞에 얼씬 안할게!》

수희는 말그대로 치마바람을 일구며 힝하니 문을 차고나갔다. 그새 몹시도 변했다. 어제날 귀엽고 재롱스럽기만 하던 수희가 아니였다.

부엌에서 닭을 튀기고있던 어머니가 기겁하여 《수희야!》 하고 소리쳐불렀으나 열려진 문짝만 덜커덕거릴뿐··· 수희가 사라지자 돌연 불꺼진 방안처럼 썰렁한 랭기가 엄습해왔다.

봉호가 게면쩍어하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배고프문 돌아오겠지요.》

《아냐. 그 애 성미두 자네만 못지 않네.》

어머니가 허둥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사방 돌아가며 소리쳐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희는 날이 어둡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새 중학교 교장이 된 한초가 늦게 들어와 사연을 듣더니 봉호를 나무랐다.

《수희가 그 남학생과 왜 다퉜는지 먼저 알아봤어야지, 응? 그 앤 모욕받는 자기 녀동무를 지켜주느라구 그랬다는거야. 남학생이 제일 마음 약한 처녀한테 무례한 행동을 했거던. 청소를 하면서 자기 신발에 어지러운 물을 좀 흘렸다구 해서 도수가 넘게 모욕을 가했다지 않나. 늘 야질거리길 잘하는 학생이라더군. 그 꼴을 보다못해 수희가 나서서 당장 사과하라고 들이댔다는걸세. 그러니 우쭐대기 잘하던 그 학생이 가만있자구 했겠나? 뭐라고 또 이죽거리기 시작했지. 그러자 수흰 정 참지 못하구 물을 들부었다는걸세. 그때문에 학생총회에 나서서 호되게 비판도 받았지.》

봉호는 놀랍고 한편 기쁘기도 했다.

《아, 그랬군요. 헌데 선생님은 그 일을 두고 수희한테 뭐라구 했습니까?》

《뭐라긴!··· 자존심이 강한 사람만이 자기도 지키고 남도 지켜줄수 있어.》

《···》

봉호는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봉호도 잊지 않겠지만》 하고 한초는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난 우리 학교에 찾아오신 아버지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나깨나 가슴에 새기군 하지. 바로 우리 학생들에게 학문을 하나 배워줘도 민족적존엄과 자존심을 먼저 심어주라구 하시던 그 간곡한 가르치심을 말일세. 존엄이 기본이야. 그걸 잃으면 소나 말이나 다를바가 뭔가. 봉호도 우리 민족의 피눈물나는 력사를 잘 알지 않나? 그래서 난··· 우리 수희가 좀 지나쳤다 생각하긴 하면서두 아무 말 안했어. 자기를 지킬줄 아는거야 좋은 일이지. 그래서 다행스러웠네. 마음을 놓았다구 할가.···》

《···》

봉호는 무엇인가 껄낏한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수희가 장했다. 모욕받는 자기 동무를 지켜준 그 애가 더없이 미덥고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흥분으로 하여 검붉어진 두볼을 실룩거리며 두손을 힘껏 맞부비였다. 그러는 그를 눈여겨보던 한초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봉호, 어서 가서 그 앨 찾아오라구.》

수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봉호는 밤이 깊어갈수록 조바심치지 않을수 없었다. 마을의 뒤산기슭에까지 정신없이 돌아쳤다. 이전처럼 《수희야!―》 하고 소리쳐부르지도 못했다. 목이 메이고 혀가 굳어졌다. 그 어떤 알수 없는 불안과 거북함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사방을 쏘다니였다. 얼마나 시간이 갔는지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골안의 싸늘한 개울가에서 무엇인가 희뜩거리는것이 눈에 띄였다. 봉호가 돌부리를 걷어차며 달려가니 어둠속으로 날래게 피해갔다. 틀림없는 수희였다. 기를 쓰고 봉호에게서 달아나려 하고있다. 봉호는 자기의 이마에서 피줄들이 부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숨이 차고 속이 끓어 참을수 없었다. 암상스럽게 구는 그애가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수희야, 잠간!··· 너 정 그러겠어?》

봉호는 고양이처럼 잽싸게 빠지려는 수희의 팔소매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너 왜 자꾸 못나게 굴어, 응?》

수희는 울고있었다. 그 눈물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싫어요, 싫어!》

《수희야, 나 좀 봐.》

봉호가 그의 어깨를 힘껏 잡아돌렸다. 그러나 더이상 말을 이을수 없었다.

《싫어, 정말이야. 보기 싫어!》 하고 수희는 발버둥치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내가 오빠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요? 그런데두 뭐 만나자바람··· 뭐라구 했어요? 뭐 말괄량이라구?! 정말 내가··· 그렇게두 미워요?》

수희는 종주먹으로 봉호의 가슴팍을 내지르며 흐느꼈다. 그러는것을 봉호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자기 가슴앞으로 끌어당겼다. 수희는 더 항거하지 못하고 힘이 진한듯 그의 가슴에 무너져왔다.

《난 싫어. 정말 보기 싫어. 그런줄도 모르구 내가 얼마나 오빠를 기다렸다구, 얼마나!···》

목메이는 흐느낌소리··· 어느덧 수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지고있었다. 퍼릿한 달빛아래 부르르 떨고있는 그 애의 어깨를 다그어안으며 봉호는 단숨을 활 내뿜었다. 이상한 일이다. 아직 이처럼 사랑하는 동생 수희가 오빠인 그의 가슴을 아프게 허빈 일은 없었다. 아직 이렇듯 수희가 그의 마음을 뒤죽박죽 산란케 한 일도 없었고 이렇듯 예리한 기쁨과 무서운 불안에 몸을 떨게 한적도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사랑하는 동생 수희를 힘껏 끌어안았다.

《수희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그만···》

《오빠!―》

웬일인지 숨이 막혔다. 불시로 호흡이 멎어버린듯 했다. 다음순간 힘껏 껴안고있던 두사람은 마치 전류에라도 감전된듯 화닥닥 놀랐으니··· 별안간 그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힘껏 떠박질렀다. 무엇인가 뭉클하고 화끈했었다. 불길같이 뜨겁게 달구고 무섭게 그리고 사무치게 지져대는것이 있었다. 그 격렬한 뜨거움과 아찔한 충격이 그들 두사람을 헐떡거리게 했다.

한발자국 떨어져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봉호는 비로소 자기앞에 이전의 그 애,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동생 수희가 아니라 한 처녀가, 몸도 마음도 무르익고 성숙한 한 처녀가 서있다는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날부터 그들은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시꺼먼 고민에 휩싸여 서로의 눈길이 마주치기만 해도 마치 전기에 감전된듯 펄쩍 뛰군 했다.···

 

물론 봉호는 정치부장에게 이러한 사연까지 다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다만 수희와 처음 만나던 일, 한초부부의 극진한 사랑과 헌신··· 마침내는 정이 깊어져 수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배치된 다음 결혼식을 했다는것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였다. 여전히 전규환대좌는 묵묵히 다음이야기를 기다리고있었지만 봉호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오래 계속되니 몸도 마음도 썰렁했다. 주위의 모든것이 닥쳐오는 추위에 으시시 떨고있는듯 했다. 한산한 풍경이였다. 새들이 날아들지 않도록 남새만 심던 밭들과 공지, 마지막락조가 가까스로 불그레한 빛을 던지는 긴 활주로가 전부였다.

그러나 최봉호의 한생과 곧추 이어져있는 활주로였다. 지금껏 걸어온 그의 전반생도 외줄기 저 활주로와 잇대여져있고 이제 가야할 먼 인생길도 저 넓고 탄탄한 활주로를 따라 아득히 뻗어있다. 한생 저 활주로를 박차며 창공에 날아오르고 저 활주로에 인생의 바퀴자국을 진하게 새기며 미끄러져내릴것이다. 줄기찬 삶의 활주로― 유독 수희만이 지금 거기에 한줄기 그림자를 던지고있을뿐··· 끝내 참지 못하고 전규환대좌가 물었다.

《그럼 말해보오. 왜 그가 갑자기 동무와 갈라지려고 하는지?···》

봉호는 잠시 입술만 깨물고있었다. 이윽고 무엇인가를 결심한듯 웃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였다.

《대좌동지, 이 편지에 다 씌여있습니다.》

《?!···》

그것은 수희가 봉호의 대대장댁에 써놓고간 편지였다.

《이건 뭐요. 주소도 없는 편지?》

전규환대좌가 눈꼬리를 치떴다.

《그래도 필요한 얘긴 다 있습니다.》

《그―래?!···》

전규환대좌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여 조심스럽게 펴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주의깊게 희미하게 보이는 편지의 글줄들을 읽기 시작했다.

숨막힐듯 괴로운 순간들이 흘렀다. 봉호는 성급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으나 곧 두손을 바지무릎에 가져다붙였다.

《대좌동지, 담배를 피워도 되겠습니까?》

《말시키지 마오.》

전규환이 한손을 홱 내저었다.

벌써 어둡기 시작하여 편지를 읽기가 헐치 않았다. 그는 종이장을 눈앞에 더 바싹 가져다대고 그닥 길지 않은 수희의 편지를 눈으로 빨듯이 읽고있었다.

《그러니 안해의 친아버지가···》 마침내 편지를 다 읽은 전규환이 힘들게 속삭이였다. 《치―치안대였다구?···》

봉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가 나올 지경으로 아프게 입술을 깨물고있을뿐이였다.

《이게 사실인가 말이요?》 대좌가 다시금 숨가쁜 소리를 내질렀다. 《이 모든게 왜 오늘날에 와서야 밝혀졌다는건가, 엉?!···》

여전히 봉호는 입을 열지 못했다. 목에 경련이 이는듯 얼굴을 외로 틀며 어깨만 떨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