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2

책제목:운명
 
 

제 1 장

12

 

땡, 땡, 땡··· 종소리가 울렸다. 오후수업을 끝내는 종소리··· 력사교원을 겸하는 곡우중학교의 교장 한초는 교무실로 들어가다가 마침 문을 열고 나서던 우편통신원과 마주쳤다. 우편통신원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교장선생님, 오늘 또 편지가 왔수다. 책상우에다 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교장선생님은 제자들이 많으니 편지도 그칠새 없습니다그려.》

한초는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군대에 나간 제자들중 누군가 또 편지를 보냈겠지요.》

《아무튼 기쁘겠습니다.》

한초는 탁우의 편지봉투를 집어들면서 물러가는 우편통신원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마침 그때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줄줄이 들어서던 교원들이 서로 눈짓했다. 그중 제일 나이가 많은 수학교원이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직방 물었다.

《교장선생님! 그 편진 누구한테서 왔습니까?》

한초는 돋보기안경을 끼며 봉투를 눈여겨보았다.

《이건 처음 보는 주소인데?···》 겉봉에 쓴 글을 읽던 그는 별안간 반가움에 목이 잠기는듯 했다. 《우리 봉호의 우편함대호요!》

교원들이 모두 반가와했다.

《야, 그렇습니까?》

《정말 반갑겠습니다, 교장선생님!》

여기 곡우중학교에서 최봉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군대에 나간 후에 온 신입처녀교원들도 최봉호의 지난 생활과 갖가지 일화들을 잘 알고있다. 어찌 그뿐이랴. 그가 한초교장선생님의 수양딸 한수희와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 은밀히 적어온 수집은 사랑가도 그 곡조와 가사까지 자자구구 뜬금으로 외우고있는것이다.

《어서 읽어보십시오.》

《옳아요, 최봉호비행사 편진 공개해야 합니다.》

《옳습니다. 교장선생님, 공개독보합시다!》

처녀교원들까지 합세하여 떠들어댔다.

《아, 조용, 조용!··· 물론 공개독보해야지.》

한초는 흥분으로 하여 입귀를 떨며 봉투를 뜯었다. 겉봉에 씌여있는 글씨가 눈에 설다는데 대해선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호기심어린 침묵속에 한순간이 흘렀다. 갑자기 한초는 안경을 벗어들고 두눈을 문질렀다. 그의 얼굴이 놀라움에 일그러져있었다.

《아니, 교장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예?》

교무실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한초는 후둘거리는 손으로 다시 안경을 끼였다. 편지의 글줄들이 눈앞에서 아물거렸다. 마침 그때 눈치빠른 소년단지도원선생이 한초의 표정에서 이상한것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참, 나 왜 이러니? 과외소조시간이 다됐는데 여기서 그냥 우물거리구있으니···》

그는 과외예술소조담당이였다. 그를 따라 수학과 물리소조를 맡은 교원들도 한초를 흘낏흘낏 훔쳐보며 밖으로 나갔다.

한초는 여전히 편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그것은 최봉호가 아니라 수양딸 수희가 보낸 편지였다. 그것도 겉봉의 주소는 최봉호의 상관인 2대대장의 안해가 쓴것이였다. 남의 주소로 편지를 써야 할만큼 급한 사정이라도 있단 말인가?···

수희는 먼저 자기가 오빠를 찾아가던 때의 암담하고 쓰라리던 마음에 대하여 썼다.

(놀랍게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오늘까지도 수희는 어릴 때처럼 봉호를 오빠라고 부르고있는것이다.) 군데군데 눈물로 얼룩진 편지였다. 모진 마음을 먹고 오빠를 찾아가던 그때 걸음걸음 혀를 깨물며 망설이지 않을수 없던 사연을 루루이 적고나서 수희는 이렇게 계속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저도 인젠 철부지가 아닙니다. 하기에 제가 이렇게 결심한것이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요. 전 모질게 마음을 먹고 오빠와 단호히 결별하기로 결심했어요. 세상에 태여나 처음 오랍누이로 지내며 친혈육의 정을 느꼈고 가장 진실한 사랑을 알게 해준 귀중한 오빠이지만··· 인젠 헤여져야 한다고, 다신 절 찾지 말아달라고 편지에 썼어요.··· 그럴수밖에 없는 이 몸이 아닙니까. 제스스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이 몸이여서 지금 제 마음 얼마나 아프고 쓰린지···

 

창밖의 느티나무우듬지에서 바람이 윙윙거리자 무수한 잎사귀들이 눈보라처럼 흩날렸다. 솨!―하는 설레임소리가 커졌다.

한초는 이윽토록 창가에 붙어서서 웃옷앞섶에 매달린 까만 단추를 정신없이 잡아비틀고있었다. 지금 그의 귀전에는 창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수희가 써보낸 편지의 글줄들이 바람소리처럼 계속 윙윙거리는것이였다.

 

아버지, 어머니! 인젠 마음이 개운합니다. 오빠와 인연을 끊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그리도 괴롭고 아프던 마음도 인젠 죄다 눈물에 씻기여버린듯 합니다. 인제는 그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견디여낼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따라 제가 어릴 때 배운 동요가 자꾸 기억에 떠오릅니다. 《네 오려무나 네 오려무나 아빠엄마 그립거던 네 오려무나》 하는 그 노래를 말입니다.

가고싶습니다. 언제든 저를 따뜻이 품에 안아주던 아버지, 어머니에게 당장 달려가고싶습니다. 달려가서 맘껏 울고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처럼 마음이 약해진 저를 부디 용서하세요. 저를 키워주신 그 사랑에 머리채를 잘라 보답은 못할망정 가슴에 아픈 못을 박고있는 이 못난것을 부디 용서해주세요.···

 

한초는 다시 창밖으로 눈물어린 시선을 옮기였다. 그 순간 바람에 날리던 잎사귀 하나가 용케도 창유리에 달라붙는것이 보였다. 휘익! 찬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떨어지지 않고 파들거리는것이 마치도 창가에 서있는 한초에게 눈물로 떨며 애원하는듯 했다.

별안간 오래전의 일이, 어언 13년전에 있었던 일이 뜻밖에도 기억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1950년 가을이였다. 모든것이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던 동구밖의 길, 달구지가 굴러가고 보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걸어갔다. 북으로 향한 그 행렬속에 최봉호의 일가족도 있었다.

최봉호의 아버지 최승렬은 군인민위원회 교육부의 시학이였다.

당시 곡우중학교 교원이였던 한초와 자별한 사이였지만 그는 군소재지에 살았으므로 한초의 가족들과는 별로 련계가 없었다. 그 최승렬이 전선에서 희생되였다는 통지가 왔으므로 13살난 봉호가 앓고계신 어머니와 어린 녀동생을 태운 소달구지를 끌고갔다. 개천군의 어느 리에선가 산다는 어머니의 먼 친척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그때 먼 하늘가에서 우르릉거리는 발동기소리가 파도치듯 밀려왔다. 몸서리치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조밭으로, 산등성이에로 허우적거리며 밀려갔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의 머리우로 적기들이 내뿜는 불의 소나기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폭탄이 떨어지며 대기를 써는 아츠러운 소리에 이어 마침내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딛고선 땅이 부르르 떨리더니 눈부신 섬광이 번쩍이고 시뻘건 화염이 도로우를 휩쓸었다. 그뒤를 따라 앙칼진 기관총의 급사격이 죽음의 휘파람소리를 내질렀다.

괴멸적인 공습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지··· 드디여 적기들이 사라져갔을 때 도로엔 수많은 시체들이 마구 널려있었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달려와 서로 찾고부르며 아우성쳤다.

봉호가 끌고가던 달구지는 어데론가 바퀴를 날려버리고 길섶에 구겨박혀 끄물끄물 연기를 피워올리고있었다. 파편에 앞다리가 뭉청 잘려나가고 창자가 쏟아져나온 누렁소가 매캐한 폭약내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도랑채기에서 혀를 가로물고 마지막숨을 톺고있었다. 그때 폭풍에 날려 도로의 반대쪽 산기슭에 구겨박혔던 봉호가 달려왔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정경에 그만 억이 막혀 몸부림쳤다. 피자욱이 널린 그 주위를 미친듯 돌아치며 그는 울부짖었다.

달구지에 타고있던 어머니와 어린 녀동생은 직탄을 맞고 형체도 찾아볼수 없었다. 마침내 봉호는 녀동생이 신고있던 작은 고무신 한짝만을 겨우 찾아들었다. 아직도 시꺼먼 피가 고여있는 신짝···

《봉숙아!―》

그가 울부짖었다. 무서운 고함소리였다. 거칠고 호흡이 막혀 허덕이는 거쉰 통곡이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뛰여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부르는 길 한쪽에서 《오빠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던것이다. 봉호는 소리나는 그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봉숙아!―》

《오빠야!―》

서로 숨차게 달려가 붙안으려고 했다. 어푸러질듯 마주가 팔을 벌리고··· 그만에야 봉호는 비칠했다. 마주오던 소녀도 입을 딱 벌린채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봉호는 그냥 떨리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다. 아까 손에 들고있던 봉숙이의 고무신때문에 얼굴이 온통 피칠갑이 되는것도 알지 못했다.

소녀가 겁먹은듯 뒤걸음쳐갔다. 그리고는 얼른 손으로 눈을 씻더니 엉엉 울면서 돌따섰다.

《오빠야!―》

울음섞인 그 가냘픈 목소리에 봉호는 또 한번 비칠했다. 그는 입을 벌리고 길가에 뽀얗게 떠도는 먼지며 화약내며 피비린내까지 정신없이 들이켰다. 별안간 명치끝이 쑤시고 눈이 바로서지 않았다.

《봉숙아!》

그는 소녀를 따라가 붙잡았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뿌리쳤다.

《아냐, 아니야!》

그렇다. 봉호도 그가 아니라는것을 잘 안다. 그러나 봉숙이나이와 비슷한 어린 소녀가 홀로 길바닥에서 울고있는것을 그냥 내버려둘수 없었다. 그는 소녀를 다시 쫓아가 붙잡았다.

《가자. 나랑··· 같이 가자.》

어찌된 일인지 이번엔 소녀도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며 미심쩍게 살펴보긴 했어도 그냥 잡아끄는대로 따라왔다. 그러나 갈곳이 없는 그들이였다. 찬바람이 길가를 휩쓸고있었다. 희뿌연 먼지가 회오리치며 끄물거리던 불길과 알싸한 내내를 휩쓸어갔다. 얼마후엔 땅거미가 지더니 추위가 옥죄이기 시작했다.

어린 수희가 목놓아울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미국놈들의 폭격에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몸서리치는 일을 상기해서인지 목이 쉬도록 울어대였다. 도무지 그 애를 달랠수가 없었다. 봉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망연히 서있었다. 그의 두볼에서도 말라버린 피자욱을 적시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바로 그 애들을 한초가 찾아내였다. 아침에 땔나무를 찾아 헛간에 들렸다가 북데기를 잔뜩 뒤집어쓰고 잠들어있는것을 발견했던것이다. 그러나 그 애들은 잠들어있는것이 아니였다. 열에 들뜨고있었는데 특히 봉호가 더했다. 한초는 안해와 함께 앓고있는 애들을 집으로 안아들였다. 마침 한초부부는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고있었다. 자식 하나를 성홍열로 잃었던것이다.

지금도 한초는 그때 봉호가 여러날 앓고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의 일을 잊을수 없다. 눈을 떴으나 입을 벌린채 말을 못했다.

《아이, 이제야 눈을 떴구나, 응?··· 》 한초의 안해가 진심으로 반가와했다. 《우리 수희는 이틀만에 깨끗이 털고 일어났는데···》

어린 수희가 봉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봉호는 놀란 눈빛으로 그 애를 지켜보았다.

《봉숙아···》

《아냐, 난 수희야.》

《···》

봉호는 말을 못했다. 꿈이 아닌가싶어 두눈을 몇번이고 슴벅이였다. 이윽고 움푹 꺼져들어간 그의 눈확에서 한줄기 가느다란 눈물이 샘솟더니 귀언저리로 쭈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얼마전에 겪은 끔찍한 일들이 상기된 모양이였다. 어머니와 어린 녀동생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것도 비로소 깨달은듯싶었다.

그러나 그 애들의 마음속에 더 큰 상처를 입힌 일이 또 벌어졌으니··· 그것은 미국놈들이 군을 점령하고 살륙만행을 일삼기 시작하던 어느날에 있은 일이였다.

동네애들중에서 오가성을 가진 제일 나이가 많고 힘꼴이나 쓰는 불망종녀석이 어린 수희의 코피를 터쳐놓았다. 한초선생이 없는 틈에(그 녀석도 물론 한초가 배워주었다.) 집에 들어와 동네에서 보지 못하던 애들이 언제 무엇때문에 여기 와있는가고 트집을 걸며 머리끄뎅이를 잡아끌다가 담벽에 짓쪼았던것이다.

《오빠야!―》

수희가 울부짖었다. 그러자 오가성을 가진 녀석은 더 기승을 부리였다.

《오빠를 찾아? 어디 나오기만 해봐라. 뼈다귀두 추리지 못하게 해놀테다. 》

《오빠야!―》

이번에는 거의나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앓아누워있던 봉호가 벌떡 자리에서 뛰쳐일어났다. 다음순간 어느새 문을 열어젖히고 토방을 뛰여내리더니 자기보다 곱절이나 체통이 큰 그녀석을 머리로 지끈 들이받았다. 아츠러운 비명이 터졌다. 허나 봉호는 조금도 사정보지 않고 땅바닥에 나딩구는 그녀석의 머리를 련속 발로 짓뭉개였다.

《야, 이새끼··· 내 동생은 왜 때려? 고 쬐꼬만거··· 불쌍한 그 앨 왜 때리는가 말야? 응?!··· 야, 이 개같은 새끼, 어디 죽어봐라, 죽어봐!―》

얼마후 얼굴이 팅팅 부은 그녀석이 《치안대》완장을 낀 제 아버지 오기택을 끌고왔다. 그다음 벌어진 무서운 매질··· 뒤늦게야 집에 들어선 한초의 안해가 기겁하여 막아나섰지만 어쩔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성이 독같이 난 오기택이 이따금 제 아들한테도 매질을 하더라는것이였다.

《야, 이 멍텅구리같은 놈아, 너보다 죄꼬만 놈한테 매를 맞구 울구불구 해?··· 이 쓸개빠진 놈아, 미물같은거야?!》

그러나 봉호는 모진 매질에도, 피가 랑자해지면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나중엔 오기택이란 놈이 봉호에게 사정사정을 했다고 한다.

《야 이놈, 너 잘못했다구 빌어, 응?! 한마디라두 빌기만 하면 놔주겠다. 한마디라두··· 알겠니?》

그러나 봉호는 증오에 사무친 눈으로 그를 쏘아볼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야 이놈아, 빌어라, 빌어!···》오기택이 입에 거품을 물고 사정을 했다. 《한번만이라두 잘못했다구 빌어라. 딱 한번만··· 응?!―》

진짜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아픔에 울부짖고있는것은 봉호가 아니라 《치안대》인 오기택인듯 했다.

날이 어두웠다. 그만에야 맥이 진해버린 오기택은 쓰러진 봉호를 죽어라 하고 발길로 걷어차며 침을 뱉았다.

《야 이놈아, 이 독한 빨갱이새끼야!―》

그날 한밤중에야 집에 들어선 한초는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것은 봉호 역시 한마디도 말이 없는것이였다. 말라터진 입술을 혀로 추기며 멀거니 바라보는가 하면 가끔 의혹이 실린 눈빛으로 그들부부를 매몰스럽게 살펴보기도 했다. 마치도 뭇매를 맞게 한것이 한초량주의 탓이기라도 한듯···

이렇게 봉호는 한초량주와 어린 수희의 천진한 마음까지 의혹과 불신의 압박감으로 잔뜩 괴롭히더니 어느날 홀연 사라져버렸다.

수희의 말에 의하면 한초부부가 없는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희를 부르더라고 했다.

《수희야.》

그 순간 어린 수희는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있던 봉호가 자기를 부르는 바람에 너무 기뻐서 《오빠!》 하고 휘파람소리같이 부르짖으며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봉호는 어린 수희가 반갑게 매달리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나직이 이렇게 말했을뿐···

《수희야, 난··· 오늘 가겠다.》

《아이 오빠, 어델 가니?···》

《우리 어머니켠 친척이 개천이라는데서 산다구 했다. 거기 가보겠다. 가보구··· 널 데리러 올게.》

《아니, 싫어. 오빠야, 가지 마.》

봉호는 머리를 세게 저었다.

《수희야, 이 집 아버지, 어머니한텐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구 말해다구. 절대 은혜를 잊지 않겠다구··· 응?!》

이것은 그가 한초의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그것도 제일 길게 한 말이였다. 그길로 그는 어데론가 사라져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것은 전쟁이 끝난 후의 어느날이였다. 그것도 자그마한 간이역 기다림칸에서 병들어 쓰러져있는것을 한초와 한마을에 사는 학부형 한사람이 발견하고 알려주었던것이다.

어머니켠 친척은 봉호가 찾아간 그곳에 없었다. 알고보니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때 마을에 조직된 《치안대》놈들이 리농맹위원장을 하던 그 집을 도륙내였던것이다.

봉호는 온 겨우내 혹독한 추위와 전쟁의 란리속을 누비며 방랑생활을 했다. 때로는 피난민들속에 끼워 밤길을 가고 때로는 후퇴하는 인민군대렬을 따라 산속길도 걸었다. 언젠가는 미군용렬차에 숨어들었다가 덜미를 잡혀 얼어붙기 시작한 강바닥에 내던져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류랑아들에게서 구원을 받고 그들과 같이 밀려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다시 봄이 시작될무렵 어쩔수없이 한초량주의 따뜻한 인정이 그리워 한발, 두발 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14살 어린 나이에 이 땅을 북으로, 남으로 회오리같이 휩쓸어간 가혹한 전쟁의 화약내 짙은 싸움길, 피의 진창길을 정처없이 헤매이던 끝에 여기에 다시금 나타난것이다.

병든 봉호를 구완하려고 안해와 어린 수희가 보름이 넘게 그의 머리맡에 붙어있었다. 열이 내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자 수희가 손벽을 치며 부르짖었다.

《아이 엄마, 오빠가 눈 떴어!》 그새 어린 수희는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부르는데 습관되여있었다. 《이거 내 손 보이지, 응?!》

어린 수희가 가늘고 작은 손가락들을 쫙 펴고 그것을 봉호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것을 보던 봉호의 두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눈앞에서 나비춤을 추는 수희의 작고도 예쁜 손가락들을 꼭 잡아주었다.

《봉숙아!―》

이것은 그의 마음속 부르짖음이였다. 그때 어린 수희는 자기의 손을 꼭 잡아쥔 봉호의 두눈에 그득 고이는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알수도 없는 나이였다.

봉호가 또 집을 나갔다.

이태가 지나서야 한초는 개천에 있는 초등학원(전쟁고아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에서 봉호를 찾아냈다.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숱한 품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에게 붙잡혀왔으나 웬일인지 봉호는 한초부부에게만은 끝까지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인정많은 한초량주라 해도 그의 마음속 족보에만은 친아버지, 친어머니로 올릴수 없는 모양이였다. 대신 어린 수희만은 친오빠로서 대해주었다. 결패있고 감때사나운 소년답게 미국놈폭격에 잃은 어린 녀동생을 대신하여 그 나이또래의 수희를 살틀하고 깊이 그리고 속절없이 사랑하는것으로써 마음속 아픈 상처를 달래고있는듯싶었다.

그는 이렇게 3년동안만 집에 붙어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군대에 나갔던것이다. 그리고 공군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한번도 집에 들리지 않았다.

남달리 뚝심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봉호였다. 한초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수희와는 달리 단 한번도 그들부부를 두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마운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칠수 있는 그였건만 자기에게 생을 주고 피를 준 친부모에 대한 기억만은 끝까지 버릴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는 공군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수희에게만 편지를 썼지만 한초량주의 사심없는 사랑과 보살핌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수희에게 그들을 친부모처럼 여기고 절대로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어른스럽게 강조하군 했었다.

그 과정에 그들 오누이의 가슴속에서는 새로운 피의 흐름이 시작되고있었다. 그것을 그들 두사람은 느끼지 못했지만 한초만은 아버지다운 감각으로 그 류다른 피의 흐름을, 그 뜨거움을, 그 격렬함을 느끼고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금 수희가 써보낸 편지의 구절들이 귀전을 허비였다.

 

그래요. 전 모질게 마음을 먹고 단호히 결심했어요. 제스스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는 이 마음 지금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한초는 봉호와 영영 결별하려는 수희의 마음을 그 누구도 돌려세우지 못하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인생길은 먼길이다. 꿈을 꾸면서는 갈수 있어도 믿음을 잃고서는 가지 못한다. 믿음이란 곧 인생길의 지팽이이다. 마음속 안내자이다.···

어느새 창밖의 하늘에서는 찢겨진 구름장들이 서로 뭉치며 서켠으로, 밤을 향하여 가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데선가 승용차의 경적소리가 울려오는듯 했다. 한초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한적한 이 산골마을에 승용차라니?··· 과외예술소조원들이 하루일과를 끝낸듯 떠들썩하며 밀려나오는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수습하였다. 무엇인가 하는척 해야만 했다. 먼저 딸의 편지를 책상서랍에 쓸어넣었다. 바로 그때 교무실문이 벌컥 열리며 소년단지도원선생이 뛰여들어왔다.

《교장선생님, 교장선생님!》

《아니, 왜?》

《교장선생님, 지금 아버지원수님께서!···》

《뭐?···》

그는 얼결에 책상을 짚고 일어섰으나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 빨리요. 아버지원수님께서 오셨단 말이예요!》

한순간 숨이 꺽 막히는것을 느낀다. 가슴이 후두둑··· 모든 기쁨과 행복은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따라 딸의 편지로 마음이 괴로왔는데 이렇듯 아름이 벌게 기쁨이 찾아오다니!··· 그는 정신없이 복도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