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1

책제목:운명
 
 

제 1 장

11

 

박유진은 오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장정환이 몇번씩이나 방에 전화를 걸었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어디엔가 숨어버린것 같았다. 장정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있었지만 어쩌는수가 없었다. 자기가 그를 찾아갈 시간은 없었다. 그는 총정치국의 주간사업계획에 따라 어느 한 비행장으로 차를 달리고있었다.

라지오에서는 오늘 두번째인가 쏘련에서의 지도부교체와 중국의 핵시험소식을 알리고있었다. 충격적인 사변들이였으므로 장정환은 그 문구들을 전부 뜬금으로 외울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금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처남 박유진의 일은 어느새 벌써 멀리 뒤전으로 밀려나고말았다.

그때 운전사가 연방 경적을 울렸다.

《아니, 저런?···》

운전사가 조향륜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휙― 휙 잡아돌렸다.

그때마다 넓은 들 한가운데로 난 좁은 길에서 앞바퀴가 길섶의 도랑채기에 빠질듯 미끄러지다가 겨우 용을 쓰며 올라서군 했다.

앞을 보니 웬 녀자가 비틀거리며 걷고있었다. 꼭 술취한 사람의 걸음새였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어깨엔 커다란 배낭을 메고있는데 연신 손으로 눈언저리를 문지르고있었다. 울고있는것 같다. 운전사가 뒤늦게야 길섶에 비켜선 녀자옆을 스칠듯 차를 몰아가며 신경질적으로 빠―앙!―하고 길게 경적소리를 울리였다. 순간 겁에 질린듯 한 녀자의 얼굴이 이쪽으로 피끗 돌려졌다. 눈물에 젖은 약간 가무스레한 얼굴···

《차를 세우오.》

차가 멎자 장정환은 문짝을 열고 뒤에서 주춤거리는 처녀에게 소리쳐 물었다.

《동무, 어데까지 가오?》

대답이 없었다. 놀란듯 아릿다운 동작으로 한손을 가슴에 가져다 눌러대는것이 보였다. 왕별을 단 장령이 차에서 내다보며 물으니 그만 얼어붙고만것인지도 모른다.

《동무, 어데까지 가오?》

《저―기 룡산리까지··· 멀지 않습니다.》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분명 장정환이 가고있는쪽이였다. 석비레를 깐 좁은 길이 댕기오리같이 우불구불 뻗어올라간 저 고개를 넘으면 비행장이 나진다. 허나 눈짓으로 가리킬 때에는 지척인듯 보여도 실은 시오리도 넘는 먼길이다.

《혹시 공군부대를 찾아가는게 아니요?》

《예.》

그는 군인들처럼 매번 단마디 대답이였다.

《거기 누가 있소?》

《오빠가···》

그런즉 처녀인 모양이라고 장정환은 단정하였다.

《오빠가 뭘하는데?》

《비행사입니다.》

《이름은?》

《최―봉―호···》

처녀는 그 이름이 마치 중대한 군사비밀에라도 속하는듯 혀가 굳어진 소리로 마디마디 힘들게 발음했다.

《그럼 와서 타오.》

그 녀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슬비같이 여리고 애수에 젖어든 목소리였다. 그 어떤 눈물의 사연이 그런 목소리를 만들었을상싶었다.

《보매 그 배낭이 아주 무거운것 같은데?···》

《아닙니다.》

벌써 두번째로 그는 《아닙니다.》 라는 말을 이상한 어조로 반복했다. 젖어든 그 목소리에는 그 어떤 비통한 억양이 숨어있었다.

녀자가 또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문지르며 애원하듯 말했다.

《장령동지, 고맙습니다만··· 전 걸어가겠습니다. 바쁘실텐데 어서 가보십시오.》

여리고도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억양이였다.

《동문···》 하고 장정환은 약간 망설이며 물었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오? 》

이렇게 묻는것이 아니였다. 그 물음이 처녀를 저으기 당황하게 한듯 했다. 초점잃은 흐릿한 눈길을 아래로 떨구며 처녀는 신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였다.

《한―수희입니다.》

처녀는 아까처럼 또 힘들게 발음했다. 장정환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꼭 알아야 할 리유가 있어서 물은것은 아니다. 녀자가 비행사인 오빠에게 눈물을 안고가는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비행사들이란 항상 마음속에 한점의 그늘도 없이 늘 개여있어야 하는것이다. 한순간에 수백수천메터를 날아가는 그들에게는 사소한 마음의 불안도 치명적인 후과를 초래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럼 할수 없지.》

그가 문짝을 닫는것과 동시에 조바심치며 기다리고있던 운전사가 어느새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후 장정환은 저도 모르게 후사경에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한수희라는 그 이상한 녀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장정환은 공군부대에 가자 비행사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양사업, 특히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학습정형을 료해하고 진지한 토론을 벌렸다. 제일 문제로 된것은 부대에 회상기부수가 매우 적은것이였다. 회상기를 싣는 《조선인민군》신문도 기층단위에까지 차례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이 문제토의에 오랜 시간을 바쳤다.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얼마전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김정일동지께서 최근 인민군대에서 혁명전통교양을 강화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시였던것이다.

날이 어두워서야 일이 끝났다. 부대지휘관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르려던 때 불쑥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눈물속에 비행부대를 찾아오던 한수희라는 녀자···그 녀자는 오빠를 만나 무슨 가슴아픈 소식을 전했을가?···

《참, 이 부대에 최봉호라는 비행사가 있소?》

《예,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것은 정치부장이였다. 그가 웃으며 계속했다. 《아까 부국장동지가 그를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지금 뒤에 서있습니다.》

《뭐?》

장정환이 자기를 둘러싼 부대의 지휘성원들인 상좌, 대좌들을 둘러보는데 맨뒤쪽에 서있던 제일 젊고 몸이 갱핏한 상위가 앞으로 쑥 나섰다.

《옛, 상위 최봉호!》

그러고보니 아까 만나본 기억이 났다. 구분대의 회상기학습정형을 료해하기 위하여 정치부장이 도중에 불러온 2대대 3중대의 새파랗게 젊은 비행사였다.

《음··· 동무요?》 하고 장정환은 실눈을 지으며 직방 이렇게 물었다. 《오늘 녀동생이 찾아왔겠는데··· 만나봤소?》

상위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남달리 눈을 디룩거리며 자기의 상관들을 둘러보았다.

《소장동지, 저한텐··· 녀동생이 없습니다.》

《뭐?》 이번엔 장정환이 뜨아해하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내가 여기루 올 때 부대를 찾아온다는 녀동생을 길가에서 만나봤는데두?···》

부대의 지휘관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부국장동지.》 정치부장이 나섰다. 《우리 봉호동무한텐 부모형제가 없습니다. 전쟁때 모두 희생되였습니다. 고아입니다.》

《고아?!···》

장정환의 두눈이 희미한 빛을 내였다.

《그러니 오늘 동무한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겠소?》

《그렇습니다.》

장정환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가 로상에서 이상한 녀자를 만나던 그때부터 벌써 여러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아직 부대에 오지 않았다면 그 녀자가 거짓말로 그를 속였단 말인가? 그가 놀라와하는것을 보고 참모장이 부대직일관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부대직일관은 오늘 누구도 최봉호상위를 찾아온 일이 없다고 했다. 그때 불현듯 최봉호가 두눈을 번뜩이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부국장동지, 혹시 그 녀자 이름을 물어보셨습니까?》

《음··· 한수희라구 했던것 같애.》

《그러니 제 안해가?··· 부국장동지, 미안합니다.》

《안해?》 장정환이 언짢아하며 따져물었다. 《안해가 왜 아직두 오빠라구 해?》

《예,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문득 장정환은 아까 만났던 그 녀자의 이슬비같이 여리고 눈물에 젖어있던 목소리며 고개를 외로 틀고 그 무엇엔가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이상한 거동을 상기했다.

《남편을 찾아오던 안해가 왜 부대엔 나타나지 않았는지 이상하군. 무슨 일이 있는것 같은데 좀 알아보오.》 그것은 최봉호와 지휘관들모두에게 한 권고이기도 했다. 《그럼 난··· 가겠소.》

승용차에 오르는데 부대지휘성원들이 구령이라도 내린듯 일시에 거수경례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소장동지.》

가을날의 밤은 빨리도 시작되였다. 승용차가 부대정문을 나섰을 때였다. 장정환은 가랑잎이 어수선하게 날리는 길가에 서있는 한 녀자의 모습을 얼핏 스쳐보았다. 한수희가 분명했다. 그 녀자는 아름드리가로수밑둥에 착 붙어서서 부대정문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갑자기 승용차의 전조등빛이 눈을 때리자 얼결에 손을 들어 앞을 가리웠다. 순간의 일이였다. 차는 어느새 그를 멀리 뒤에 남기고 달렸지만 장정환은 줄곧 뒤를 돌아보고있었다.

운전사가 말했다.

《아까 만났던 그 녀자가 옳습니다.》

《음···》

이상한 일이다. 녀자가 시오리길을 반나절이나 걸어왔을수는 없다. 오랜 시간을 저 부대정문앞에서 망설이고있었을것이다. 분명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것이 틀림없다.

운전사가 라지오를 틀었다. 라지오에서는 근래에 새로 나온 노래 《종다리》가 한창이였다.
 


뜨락또르 우릉우릉 넓은 들에 달리구요
소리고운 종달새는 하늘높이 지저귀네
종다리야 노래부르자
우리의 봄노래 풍년의 노래

 

흥취나는 노래였다. 시대에 따라 노래의 상도 달라진다. 지금은 모든것이 흥하는 때여서인지 새로 나오는 노래들모두가 벅차고 랑만적이고 건드러지는 악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아헤― 에헤여―
수령님 다녀가신 농장벌에 새봄 왔네
씨뿌리는 이 가슴에도
삘리리리 삘리리리 새봄이 왔네

 

노래 한곡이 끝나자 갑자기 방송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취자여러분! 방금 들어온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장정환은 두눈을 흡뜨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이와같이 남조선괴뢰들은 미제의 총알받이로 〈이동외과병원〉이라는 선발대를 먼저 윁남에 파병하고 이어 괴뢰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을 얻으려고 획책하고있습니다. 어제 남조선의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미 괴뢰국방부는 동의안을 얻는 즉시 윁남에 파병할 〈비둘기부대〉 2천명을 만단의 출동태세에 두고있다고 합니다.···》

장정환은 흥분을 참을수 없어 두손의 관절마디를 딱딱 소리나게 꺾고있었다. 실로 격동적인 60년대이다. 오늘 하루새 벌써 세번째로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