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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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한점 없이 맑게 개인 아침이였다. 한껏 푸르러진 정원수의 무성한 잎새들이 아침노을을 받아 번쩍거리며 훈풍에 설레이고있었다.

리대천은 지정된 시간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저택앞에 승용차를 대기시켜놓았다.

연회색 제낀양복에 흰점이 드문드문 박힌 진한 자주색넥타이를 매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저택에서 나와 곧 차에 오르시였다.

리대천은 감회로운 표정을 짓고 그이의 옷차림을 여겨보았다. 그 옷과 넥타이는 1984년 김정일동지께서 이전 쏘련과 동유럽나라들을 방문하고 돌아오시는 수령님을 국경역두에서 마중하시면서 경희동지에게 들려가지고나갔던 사연깊은 옷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 옷을 드리며 이제부터 내가 닫긴옷을 입고 모든 일을 하겠으니 수령님께서는 제낀옷을 입고 편히 쉬시라고 하시였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그것이 당과 인민의 마음임을 알고 쾌히 승낙하시였다.

그때부터 제낀옷을 입기 시작하시였지만 김정일동지께서 친히 마련해드린 그 제낀옷만은 별로 입지 않고 명절이라든가 간혹 휴식하게 되는 경우에 입으시군 하시였다.

차가 떠나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웬일인지 옥류교쪽으로 차를 몰라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출장을 떠나실 때면 평양거리를 돌아보군 하시는데 오늘도 그러시는가보았다.

운전수곁에 앉아있던 리대천은 머리를 기웃하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출장을 떠나시는 수령님을 바래드리기 위해 김정일동지께서 역두에 나와 기다리고계실것이였다.

그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옥류교가 먼발치로 바라보이자 차를 천천히 몰라고 하더니 언제인가 그와 함께 청류벽기슭을 산책하면서 《치적비》를 보시던 일을 회상하시였다. 그때 깎아지른 청류벽벼랑의 넓은 단면에는 빈자리가 없이 크고작은 글자들이 수없이 새겨져있었는데 그것은 지난날 벼슬한 사람들이 자기 공적을 자랑하기 위해 정대로 쪼아박은 일종의 《치적비》들이였다.

고구려가 도읍을 정한 이후로 왕조가 바뀌고 감사가 갈리며 천년세월이 흘러오는동안 수없이 석문이 새겨졌으나 세월의 비바람에 닳고 이끼에 덮여 흔적없이 지워진것도 적지 않았다. 지금 벼랑에 남아있는것은 거의 다 리조시기에 새긴 글들인데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글자들을 놓고 생각이 깊어지시는가싶었다.

물론 그이께서는 그 글자들을 한두번만 보아오시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보시고 리대천이와 산책을 하면서도 보시였다.

광복직후 어떤 간부들은 량반벼슬아치들이 제 이름을 내기 위해 새긴 착취계급의 《치적비》를 그대로 남겨둘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세멘으로 미장해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는것을 김일성동지께서 만류하시였다.

그게 있은들 무어라는가. 인민들은 그 석문들을 보고 당대 사회를 정확히 평가할것이라고 하시였다.

리대천이도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청류벽밑 강가를 산책할 때 큰 글자들짬에 쐐기처럼 끼여있는 《미곡일석기증··· 리일지참봉》(한자로 된 그 글은 리일지라는 참봉이 무슨 일엔가 쌀 한석을 기증했다는 뜻이였다.)이라고 쓴 글을 가리키며 《수령님, 저 참봉은 무던히도 제 이름을 내고싶었던 모양입니다.》하고 웃었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참봉이란 리조시기 종9품벼슬인데 당시 사회에서 그만큼이라도 선심을 쓴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후하게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도 바위에 새겨있는 이름들을 서글프게 바라보며 《이름이 남는게 아니라 해놓은 일이 남지.》하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사실 벼랑에는 무슨 감사요, 현감이요, 현령이요, 하는 따위의 높고낮은 숱한 벼슬아치들이 이름을 새겨놓았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치적비》에 관심을 돌리는 사람도 없었다.

승용차는 어느사이 옥류교다리목에 이르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운전수에게 차를 세우라고 하시더니 옥류교의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시였다.

이른아침이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옥류교》라는 글자가 새겨진 현판주변에 몇명의 소년소녀들이 모여와서 현판에 새겨져있는 글자들을 닦고있었다.

이제 여라문살되였을가 하는 두명의 녀학생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담고 무슨 말인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현판 밑부분을 닦고 그 애들보다 나이가 더 어려보이는 남학생 둘은 발뒤축을 잔뜩 추켜들고 현판 웃부분을 닦고있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네댓살되는 어린애가 꼬마장령복에 군모까지 쓰고 허리에 두손을 난딱 얹은채 형님 누나들의 일손을 지켜보고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네 학생의 헝겊을 쥔 손끝에서 동합금으로 된 글자가 아침해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있었다. 웬 젊은 녀인 하나가 현판옆을 지나가다가 《꼬마장령》을 보자 대견하고 귀여운듯 볼에도 입을 쪽 맞추어주며 웃는다.

김일성동지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리였다.

《옥류교를 건설한지도 벌써 30년세월이 지났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추억에 잠겨 감회롭게 뇌이시였다.

옥류교를 건설할 때 그이께서는 3가지 조건을 제기하시였다. 그것은 첫째로 인민들이 편리하게 다닐수 있도록 인민의 립장에서 쓸모있게 건설해야 하며 둘째로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무너지지 않게 튼튼히 건설해야 하며 셋째로 바라보면 마음이 즐거워지도록 대동강풍치에 어울리게 아름답게 건설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건설자들은 옥류교를 로동당시대를 상징하는 만년대계의 기념물로 현대적으로 웅장하게 건설해놓았다. 지금 아이들이 정성스레 닦고있는 현판의 글자들은 김일성동지께서 쓰신 친필이였다.

원래 그이께서는 다리에 자신의 필적을 남기지 않고 이름난 서예가에게 글을 씌우려고 하시였다. 그런데 건설준공식을 며칠 앞둔 어느날 건설자들이 종이와 필묵을 들고와서 다리이름을 지어달라고 거듭 청을 드리여 붓을 들게 되시였다.

이미 다리건설이 시작될 때부터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나름으로 다리이름들을 지어놓고 론의에 붙이였다.

평양에서 으뜸가는 다리라는 뜻으로 평양교, 인민을 위한 다리라고 하여 인민교, 제2대동교 등 갖가지 이름들이 제기되였다.

그이께서는 제기된 이름들을 다 료해하여보시였으나 마음에 차지 않아하시였다. 수령님께서 깊은 생각끝에 구슬옥자에 흐를류라고 붙여 옥류교라고 지으시고 손수 붓을 들어 종이우에 정자체로 《옥류교》라고 쓰시였다. 지어놓고보니 참 좋은 이름이였다. 대동강물이 구슬처럼 맑고 아름답고 귀하다는 뜻으로도 되고 한점의 티도 없는 옥같은 인민의 마음, 인민의 기쁨이 흐른다는 뜻으로도 되였다.

그날 다리건설에 동원되였던 어느 대학생은 대동강에 대한 즉흥시를 읊었다.

그이께서 지금도 잊혀지시지 않는것은 《수수만년 흘러온 대동강, 너 이제부터 옥이 되여 흐르리라》라고 읊은 구절과 《후대들이여, 이 다리를 걸을 때 잊지 말아다오 옥류교의 이름이 탄생한 이날을···》라는 시의 구절이다.

그후 얼마 지나서는 옥류교에 대한 노래도 생겨났다. 그날에 대동강을 노래한 젊은 대학생이 지금은 유명한 시인이 되였을지도 모른다.

강물처럼 세월은 멀리 흘러왔다. 이제는 옥류교의 유래와 그 건설의 나날에 떨친 위훈들에 대하여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 타신 승용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그이께서는 렬차가 떠나게 되여있는 서쪽으로 가는 빠른 길을 피하고 버드나무거리쪽으로 돌아가자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차가 버드나무거리를 지나 천리마거리에 이르도록 줄곧 밖을 내다보시였다. 마치 이 거리를 처음보는것처럼 거리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

차가 인민문화궁전앞을 지나게 되자 그이께서는 다시 차를 세우도록 하고 그 현판을 자세히 바라보시였다.

인민문화궁전은 대중이 모여서 문화생활도 하고 각종 회의를 비롯한 교양사업도 하는 말그대로 인민의 전당이다.

광복전이나 광복직후에는 평양시에 대중이 모여앉을수 있는 공회당 하나 변변한것이 없었다. 리조통치배들과 일제통치자들은 인민대중이 공동으로 문화정서생활을 할수 있는 공회당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광복전에 자선가 백과부가 《내 비록 무식하고 소견이 좁은 녀자이지만 조선사람들이 모여앉을수 있는 공회당 하나 없는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기부금을 바치니 모두 힘을 합쳐 그 분한 마음을 풀어주기 바라노라.》라고 의분을 터뜨렸겠는가. 사실 광복전 평양거리에 조선사람들을 위해 만든 공회당이라고는 백과부의 기부금으로 건설한 대동강기슭의 화강석3층집 하나뿐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에 개선하신 첫날부터 군중회관을 꾸리는데 큰 관심을 돌리였고 전후복구건설시기에도 도시와 농촌, 그 어디서나 대중문화회관을 우선적으로 짓게 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리대천에게 말씀하시였다.

《인민문화궁전을 지을 때 김일동무가 나에게 우리 조상들의 건축술이 괜찮았는데 인민을 위해 지은 집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원망했소. 그래서 내가 조상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도 채심을 해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후대들이 고생을 하고 그들로부터 원망을 살수 있다고 하였소. 그렇소. 세월은 가고 사람은 떠나가기마련이요. 그러나 그들이 해놓은 일은 남아있소. 집도 거리도···》

김일성동지께서는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지만 남은건 이름이 아니라 일이라고 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타신 승용차는 록음이 우거진 보통강반의 유보도를 끼고 달리였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에 수양버들과 강기슭의 고층건물들이 비치였다. 그것들은 김일성동지께서 감탕물이 범람하던 그 옛날의 어지러운 토성랑을 추억하게 하시였다.

광복직후 그이께서는 토성랑사람들의 눈물이 스민 이 땅에서 건국의 첫삽을 뜨시였다.

보통강기슭에서 첫삽을 뜨시여 인민들과 토성랑의 슬픈 력사를 이야기하던 50년전의 과거가 어제일처럼 눈앞에 떠오르시였다.

토성랑에 살던 사람들은 해마다 장마철이면 뚝이 무너지고 움막집들이 떠내려가 처참한 재난을 당하군 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광복후 보통강개수공사를 자연개조사업의 첫 대상으로 삼으시고 이해 장마철전으로 공사를 끝내자고 호소하시였다.

이 말씀을 듣고 개수공사를 담당한 건설일군들이 처음에는 모두가 다 눈이 둥그래지도록 놀라와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공사기간을 앞당겨도 3년은 실히 걸려야 하였던것이다. 사실 공사량은 방대하였으나 굴착기같은 기계수단은 물론 필요한 기술인재도 전문건설력량도 없었고 모든것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로동자, 농민, 사무원 그리고 학생들과 지식인들 그 모든 평양시 군중이 동원된다면 산도 옮기고 바다도 메울수 있다고 하시며 친히 이 강기슭에 나와 첫삽을 뜨셨던것이다. 그때 김책, 안길, 최현, 류경수를 비롯한 항일의 용장들이 그이를 따라 혹은 삽자루를 쥐고 혹은 가래줄을 잡고 눈물과 설음이 배인 토성랑의 흙을 뒤번져놓았다. 그날 김정숙동지께서는 질통을 지고 뛰여다니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보통강개수공사는 3년이 아니라 두달도 안되는 단 55일동안에 완공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공사의 완공을 경축하던 그날의 광경도 눈에 선하시였다. 그날 《토성랑사람들》은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춤판을 벌리였다.

머지 않아 장마가 시작되려는듯 하늘에는 이따금 천둥이 울고 매지구름이 떠돌고있었으나 그들은 그처럼 무서워하던 장마철이 다가온것도 아랑곳없이 만시름을 놓고 누구라없이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짓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전군중적운동으로 벌어진 이 거창한 자연개조사업을 통하여 인민을 믿고 인민의 힘에 의거하면 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다는 신념을 다시한번 굳게 간직하게 되시였다.

승용차는 달리고있었다. 차창으로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아름다운 북새거리(안상택거리)가 내다보이였다. 그 거리는 그이의 사색을 가장 어려웠던 전쟁의 나날로 이끌어갔다.

참으로 어려운 시련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김일성동지께서는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서 힘을 얻으시였다. 락원의 녀성당원의 말은 그이께 얼마나 큰 힘이 되고 고무로 되였던가. 전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광복후에도 왜놈들이 다 마스고 간것을 복구하여 그만큼 살았는데 걱정할것이 없다고, 싸움을 끝낸 다음 다시 복구하면 얼마든지 잘살수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아직도 그이의 귀가에서 쟁쟁히 울리고있었다.

어려웠던 후퇴시기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간다고 하며 신심에 넘친 얼굴로 억척같이 달구지를 몰아가던 법동로인의 모습이 또한 그이의 뇌리에 깊이 찍혀져 잊혀지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인민들이 있었기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화의 날에 벌써 승리한 래일을 내다보시고 최고사령부 작전실에서 전후복구건설의 위대한 설계도를 그려나가시였다.

락원의 녀성당원의 말은 옳았다. 전쟁이 끝나자 인민들은 복구건설에 힘있게 떨쳐나섰으며 폭격에 불타버린 페허우에서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이 련이어 솟아났다. 평양은 100년이 아니라 10년도 못되는 사이에 전쟁의 상처를 가시고 웅장화려한 도시로 변모되였다. 하여 전후복구건설시기 《평양속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였다.

현대적인 고층건물이 조화롭게 솟아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북새거리는 세월을 주름잡아 달린 《80년대속도》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타신 차는 개선문을 지나고있었다. 《1925-1945》라는 글자가 그이의 사색을 더 깊은곳으로 몰아갔다. 짚신 두컬레를 전대에 매달고 만경대고향집을 떠나시던 1925년에는 조부모님 두분이 눈물지으며 사립문밖에서 그이를 바래워주시였다. 허나 20성상 불바다, 피바다를 헤치고 조국으로 개선하던 1945년에는 온 민족이 기쁨에 울고 웃으며 그이를 맞아주었다.

그이께서는 공설운동장(지금의 김일성경기장)에서 개선연설을 하실 때 수십만 군중이 모였는데 당시의 신문들은 평양이 생긴 이래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보기는 처음이라고 하였다.

조국에 개선하신 1945년은 민족력사에 영광을 아로 새긴 감격의 해, 기쁨의 해였으나 한편 새 조선 건국의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간고한 투쟁의 해였고 걸음마다 괴로움과 걱정을 받아안으며 진펄길을 헤쳐나가는 시련의 해였다.

그때는 모든것이 부족하였다. 자금도 인재도 기술도 로력도 모든것이···

그해 식량난은 참으로 엄혹하였다. 이 틈을 타서 반동들이 일부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을 부추겨 파업을 선동하였다. 서평양철도공장 로동자들의 파업이 그 하나의 실례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 쌀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철도공장로동자들이 파업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의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그 공장을 찾아가시였다. 실지 가서 보니 철도공장의 남녀로동자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여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초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왜정때 입던 헌 철도제복과 구멍이 뚫린 왜놈군복을 입고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폭정이 가져다준 후과였고 식민지 노예생활의 후유증이였다. 그때 그이께서는 로동자들에게 호소하시였다.

··· 동무들, 광복된 조국땅에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 먹을것, 입을것이 없어 고생을 하는 인민들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20년동안 백두산에서 총을 잡고 왜놈들과 싸우다 온 나에게는 빈 배낭밖에 없다. 지금 국고는 텅 비였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두다 건국운동에 떨쳐나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부흥시키는 길밖에 없다. 이제는 동무들이 고용로동자가 아니라 주인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슴을 터치고 하시는 그이의 열렬한 호소에 철도공장로동자들은 《옳소, 장군님의 말씀대로 모두다 힘을 내여 떨쳐나서자.》하고 주먹을 들고 일어났다.

그후 그 철도공장은 건국운동의 전초선을 지켜나가는 모범공장으로 되였고 그곳 로동자들은 새 조선건설의 앞장에서 대중을 이끌어나가는 혁명의 전위부대로 자라났다.

(우리 인민은 참으로 좋은 인민이다.)

그이께서는 인민들과 더불어 걸어온 혁명의 길을 새삼스럽게 돌이켜보시였다. 20년만에 나라를 광복하고 그후 15년이 지나 사회주의공업화를 실현하였으며 또 20년후에는 오늘과 같은 천지개벽을 이룩하였다.

그이께서는 이 승리, 이 변혁이 어떤 비싼 대가로 이루어졌는가를 언제나 잊지 않고 생각하시였다. 그 과정에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도전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되시였다. 그 나날에 그이의 머리는 한오리, 두오리 희여졌지만 그때에도 인민이 그이를 지지하고 고무하고 열렬히 따라나섰다.

종파놈들때문에 수령님의 얼굴이 몹시 축갔다고 하며 수령님, 걱정마십시오, 우리는 수령님을 절대 지지한다고 힘있게 고무해주던 태성할머니, 그이께서 어찌 이런 인민들을 잊으실수 있겠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의 모든 승리를 인민들의 이름과 결부시키시였다.

그이께서는 개선문을 세울 때에도 자신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인민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자고 하시였다.

어느덧 그이께서 타신 승용차는 개선문을 에돌아 룡흥네거리에 들어섰다. 벌써 길 좌우에는 일터로 가는 사람들의 흐름으로 꽉 찼다.

그이께서는 밝은 얼굴을 하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수도시민들의 활기찬 흐름을 정겹게 내다보시였다.···

이윽고 김일성동지께서 타신 차가 역에 들어섰다. 홈에는 한대의 려객렬차가 머물러있었다.

렬차가까이에 서있던 사람들은 말없는 속에서 옷매무시를 바로 잡았다. 렬차 앞뒤에 서있던 호위병들은 그 누구도 구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일제히 몸을 곧게 펴며 차렷자세를 하였다.

김일성동지의 승용차가 렬차 한복판의 객차 승강대에 차체를 가까이 대고 멈춰섰다. 승용차의 앞문이 열렸다.

김일성동지께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천천히 차에서 나오시였다.

홈에는 김정일동지께서 나와계시였다. 그이의 뒤에 리을설과 동행하게 된 몇명의 수원들이 오래 기다린듯 반색을 짓고 서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주변을 둘러보시고는 김정일동지께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 얼른 마주 걸어오시였다. 수령님께서 그이와 악수를 나누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시내를 한번 돌아보느라 좀 늦었소.》

수령님께서는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였다. 그러느라 김정일동지와는 얼마 이야기하실사이가 없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신 다음 김정일동지께로 다시 돌아오시였다.

《수령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김정일동지께서 정중히 작별인사를 올리시였다. 거리에서 시간을 지체하신때문인지 더 말씀을 나누시지 못하고 수령님께서는 답례를 하고 인차 승강대에 오르시였다.

몇분후 김일성동지께서 타신 렬차는 사랑하는 수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