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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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방안을 거닐며 카터를 두고 다시 생각에 잠기시였다. 며칠전에 보셨던 그의 개인경력자료를 상기하시였다. 오늘 회담탁에 마주앉게 될 카터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성공적인 회담을 위해서는 상대를 깊이 리해하는것이 필요했다.

제임스 엘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미국 죠지아주의 작은 땅콩농장경영주 제임스 엘 2세 (영국이민)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흑인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2년 죠지아주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를 하다가 아다폴리스의 미해군사관학교에 옮겨가서 320명중 33등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1948년부터 미해군장교로 중앙아시아수역에서 군무하였다.

이 시기 카터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원자잠수함 《케이-1호》건조에 참가하게 되였다. 1945년 일본에 원자탄을 떨군 사실을 두고 대부분의 미국청년들이 대아메리카제국 국민이라는 우월감에 들떴을 때 홍안의 카터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핵무기가 인류에게 얼마나 무서운 참화를 가져오는가를 리해했던것이다.

그로부터 5년후 원자무기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는 첫 핵잠수함의 건조에 직접 참가하게 된 카터는 5년전처럼 공포에 질려있지는 않았다 해도 그 연장이라고 할수 있는 두려움을 가지고 거부적인 심리에 있었다. 그는 급히 휴가를 받아가지고 교제중이던 녀대학생 로잘린과 함께 아시아의 어느 피서지의 바다가를 거닐면서 머리속에 파고드는 20세기 악마의 무기를 잊으려고 하였다.

원자무기에 대한 이때의 카터의 견해는 그 어떤 정견에 뿌리를 둔것이 아니였다. 정치적리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지성으로 더 정확하게는 박애를 지론으로 하는 카톨릭교적인 신앙으로부터 그것을 거부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50년이 흘렀고 대통령까지 지낸 후인 오늘에 와서도 핵무기에 대한 그의 견해가 변하지 않았을것인가?

지미 카터는 1959년 아버지가 암으로 죽자 중위로 퇴역하여 아버지의 유산인 땅콩농장을 경영하면서 농장을 확대하고 근대화하여 2. 5배의 자산을 늘이였다. 그후 동생 빌리에게 농장을 넘겨주고 1962년부터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로부터 그의 정치적경력이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그는 죠지아주 상원의원, 주지사를 거쳐 1977년 미합중국 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가 한창 선거유세에 나섰을 때 《AFP》는 카터가 핵물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있고 문학, 음악을 폭넓게 알고있다고 하면서 12살에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은 사실까지 상기시키였다. 다시말하여 카터는 앞으로 아름찬 일들을 해제낄수 있는 지성과 능력이 있는 미국의 거물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때 반드빌드대학 국가정치연구소장 어휘히글로는 《카터는 뛰여난 교성자도 아니고 이른바 정치가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에 대하여 두각이 없는 온건자유파라는 총적인 평을 내리였다.

이것이 불만이였던지 미국신문들은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에 영국의 족보학자들이 조사발굴한 카터의 족보를 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카터의 가문은 1861년 킹 렝리에 산 카터의 먼 조상을 조사해본 결과 카터(운반부라는 뜻)가 당대 미국에서 첫 백만장자였던 로버트(킹)카터의 후손이며 미국의 초대대통령 죠지 워싱톤의 후예라는것이였다. 그의 두각을 위해서 조상의 래력을 들춘셈이였다.

그렇다고 카터가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민주당출신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요란스레 인권을 들고나왔다.

이번에 조선을 찾아와 분리선을 넘어선것도 두각을 나타낸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수 있었다.

물론 카터는 련공분자나 공산주의의 동정자가 아니였다. 카터는 그의 족보가 말해주듯이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발생한 당시부터 대대로 이어오는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산주의를 적으로 치부하고있는 사람이였다.

그러나 《핵문제》를 걸고 2년여에 걸쳐 조선을 압살하기 위해 갖은 모지름을 다 썼으나 헛물만 켜게 된 미국에서 카터는 《반공》, 《반공화국》 강경보수세력과 립장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인 온건파의 대표자의 한사람인것만은 사실이다.

온건대화파들은 조선이라는 사회주의보루가 밉기는 하지만 미국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더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조선과의 대결에서 《힘》을 사용한다는것은 무모한 일이며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억제력으로만 되여야 한다는 정치적견해를 내놓고있었다.

카터의 경력과 인간상을 머리속에 그려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미국의 종교지도자 빌리 그라함목사의 벗이라는 사실에 류의하시였다. 예로부터 한 인간을 리해하자면 그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것이 필요하다고 일러왔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 친구의 영향이 크기때문이고 생활의 지향이나 인간적인 성품에서 공통된 뉴대감이 존재할 때 서로 벗으로 사귈수 있기때문일것이다. 이번에 카터가 우리 나라를 방문할 결심을 가지게 된데는 그라함목사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이것은 카터에 대한 일종의 기대와 신뢰감을 가지게 하였다.

《빌리 그라함!》

김일성동지께서는 입속으로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보시였다. 이미전에 자신의 친근한 벗으로 사귀신 빌리 그라함이였던것이다. 어느덧 그이의 눈앞에는 그라함의 장대한 체구와 너부죽한 얼굴이 떠올랐다. 외양을 봐서는 성미가 무틀지고 과격할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선량한 마음씨와 부드러운 정서를 가진 사람이였다. 기독교적인 박애의 리념이 그의 사고와 행동의 기본으로 되고있었다.

빌리 그라함목사는 지난 조선전쟁때 미군 종군목사로 복무한바 있었다. 그때 그는 미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군병사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드리였다고 한다. 비난이 컸으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하면서 주저하지 않았다.

이무렵 미국에서는 《메카시즘》이라는 반공광증이 한창 벌어지고있었다.

미국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메카시가 1950년 2월 미국정부기관 특히 국무성을 비롯한 중추적기관에 205명의 공산당과 그 동조자가 잠복해있고 미국사회의 각 부문을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고있다고 주장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미국사회를 경련과 발작상태에 몰아넣었다. 1954년에는 정계와 사회계뿐아니라 군대내에도 다수의 《빨갱이》가 있기때문에 군대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그의 비난을 조사할 의회청문회가 열렸다. 2달에 걸친 조사와 증언청취가 진행되였으나 메카시의원은 단 1명의 《군대내빨갱이》도 립증하지 못했다. 그랬으나 메카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 대통령인 트루맨과 현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도 《빨갱이의혹》이 있다고 발설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국민모두가 5년동안 한사람의 악마선동에 피해를 보기도 했고 어리석게 휩쓸려들기도 하였다.

이때 그라함도 목사의 신분이 없었더라면 《빨갱이사냥》의 과녁이 되여 신고를 할번 했다. 다행히 직접적인 피해는 면했으나 광기어린 소동을 두고 그가 체험한 정신적번뇌는 심했다. 그리하여 《메카시즘》이라면 자다가도 놀랄 정도로 치를 떨었다. 그는 이 광란속에서 공산주의를 타매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한 피해자로 된 그들을 동정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후 남조선을 방문한 그라함은 재생된 《메카시즘》을 다시 보는듯 하였다. 남조선전역을 휩쓰는 《주사파소동》은 신통히도 미국에서 있었던 《메카시즘》광란을 방불케 하였다. 《주사파소동》은 주체사상신봉자들을 색출하고 련행하는 일대 검거선풍이였다. 그라함은 남조선의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 사무원들과 로동자들이 체포되여가는것을 보았을 때 50년대의 악몽이 되살아나 몸을 떨었다. 《한국판메카시즘》은 《적색공포증》으로부터 오는 남조선당국의 정치적경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 주체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였다. 과연 주체사상이 어떤 철학과 리념을 담고있기에 남조선당국자들이 그 파급을 그처럼 무서워하고있으며 청년학생들과 근로민중이 총칼의 란무속에서도 그 사상을 그토록 따르는가? 처음 그라함은 학구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주체사상을 대하였다. 그는 목사인 동시에 권위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세계의 여러 종교단체와 과학교육기관들로부터 25개 명예박사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널리 애독되는 그의 저작들이 있었던것이다.

그라함은 주체사상을 연구해볼수록 거기에 담겨진 인간중심의 철학과 인간사상의 리념에 점차 공감되여가는 자신을 의식하였다. 후날 평양을 방문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뵈웠을 때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드린바가 있었다.

《주석님, 실상 나를 주체사상에로 안내한것은 남조선당국자들이였습니다.》

전후사연을 따져보면 일리가 있는 고백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라함을 두고 이런 생각을 더듬으시던 김일성동지께서도 지난 1월말과 2월에 그를 두번째로 만났던 때를 회상하시였다. 첫번째보다도 특별히 인상이 깊었던 두번째 상봉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워싱톤에서 조미간의 3단계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였다. 때가 때인것만큼 당시 그라함의 평양방문은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그는 미국에서 대통령다음가는 인기와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금수산의사당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시였다. 친근한 웃음을 담고 들어서는 그를 보시는 순간 외교적인 상봉이 아니라 오래동안 헤여졌던 옛벗을 다시 만난듯한 반가움만이 가슴에 넘치시였다.

《목사님, 당신을 평양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여 정말 반갑습니다.》

《저 역시 주석님을 다시 뵈옵게 되여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뜨겁게 포옹하였던 팔을 푸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담고 다시 말씀하시였다.

《나는 요새 큰 회의 하나를 준비하느라고 몹시 바쁘지만 목사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회의인가요? 각하의 부하들은 그런 말이 없던데요.》

《나는 그들에게 아직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국농업대회를 크게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목사님에게는 말하는가 그 말입니까? 그건, 목사님은 나의 친구이니까요. 하하···》

그라함은 김일성동지를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였다. 그리고 김일성동지의 풍모를 깊이 리해한 첫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였다.

빌리 그라함이 처음으로 평양에 온것은 1992년 3월말이였다. 그 당시 세계의 모든 출판물들은 사회주의종말에 대하여 떠들면서 동유럽과 쏘련의 붕괴에 이어 조선도 오래 못갈것이라고 예언했다. 미국정계의 견해도 같은것이였다. 이런 형편인만큼 그의 평양방문은 시민자격이라는 형식을 갖추긴 했어도 조선의 현실을 자기 눈으로 똑바로 가려보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수 있었다.

(어디 내가 직접 확인해보자. 100여년간 온갖 신앙을 거부해온 공산주의리념의 산아인 공산국가의 마지막보루가 어느때에 허물어지겠는가?)

그라함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당시 대통령이였던 부쉬에게 주어야 했다. 떠나올 때 부쉬를 만났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탐군》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김일성동지와 친분관계를 맺어놓고 돌아갔다.

미국을 떠날 때만 하여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그러나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웠을 때 그이의 인간적인 풍모와 솔직성앞에 깊이 머리가 숙어졌고 그이의 넓은 도량과 친화력에 끌려드는 자신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라함은 그이께서 자기 나라의 어려움을 숨기고 현실을 분석하며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의 붕괴가 가져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시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라함에게 나라의 어려운 형편을 솔직히 말씀해주시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좌절이 가져온 사태의 엄중성에 대해 그라함 자신이 리해하고있는것보다 더 심각히 분석해주시였다.

참으로 뜻밖이였다. 그라함은 커다란 놀라움속에서 그 누구앞에서도 진실과 진정만을 터놓으시는 그이의 고결한 성품을 보았으며 동시에 그이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의 사회주의는 결코 허물어질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였다. 승리를 확신하는 강자만이 조성된 역경과 엄중한 사태를 떳떳이 드러내보일수 있는 법이다. 그렇기때문에 김일성주석님께서 《조선은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사회주의를 지켜 싸울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을 때 그라함은 크게 공감하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저는 주석님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라함은 평양에 머무르는 기간 시내의 여러곳을 돌아보았다. 미국의 출판물들은 평양을 《절망과 공포의 도시》로 묘사하고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거리들에는 신심과 확신에 넘치는 자유롭고 활기찬 생활이 흐르고있었다. 고층건물의 지붕과 벽들에는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 《우리 식 사회주의 만세!》라는 힘찬 구호들이 나붙어있었다. 그라함에게는 최근 수십년간에 일떠선 새 건물들과 그 구호들의 내용이 하나로 조화되여 시야에 안겨왔다. 평양은 다른 나라의 수도들과는 달리 고풍의 낡은 건물들을 찾아볼수 없었다. 지난 전쟁때 모조리 파괴되여서 그야말로 빈터우에 다시 일떠세웠다. 기껏 오래된 건물이라고 해야 30여년전에 건설된것이였다. 수백년의 건물수명에 비하면 아직 새 건물들이라고 할수 있었다.

(낡은 건물이 없는데 무너지기는 무엇이 무너진단 말인가!)

그라함은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 초고층 건물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중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과거보다 미래에 몇십, 몇백배의 수명을 남겨놓고있는 튼튼한 건물들이 조선의 사회주의를 상징하는듯한 느낌을 받았기때문이였다. 얼핏 보면 론리적련관이 너무도 비약된 느낌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라함은 분명 그렇게 느끼였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의 안해 루스 벨 그라함은 1920년 중국 강소성 회음에서 태여났다. 당시 루스의 아버지 넬슨 벨은 미국의 장로교회가 회음에 설립한 병원의 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유명한 외과의사였다. 13살까지 중국에서 자라난 루스는 그후 조선에 와서 평양에 있던 외국인학교를 3년간 다니였다. 1879년 외국인자녀들을 위하여 설립된 이 학교는 보통문가까이 신양리에 있었다. 처음은 조선에 와있는 외국인(주로 미국선교사)자녀들을 공부시켰지만 점차 이름이 나자 중국을 포함하여 동양 각 나라에 와있는 외국인 가정들에서도 자녀들을 보내왔던것이다.

루스가 평양에 와있은 시기는 1930년대말 40년대초였다. 그의 눈에는 아마도 그때의 평양건물들이 초라하게 보였던 모양인지 이번에 남편이 평양을 방문하게 되자 떠나기에 앞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런 까닭에 그라함은 평양에 도착하자 도시의 건축물에 주목을 돌렸고 그것으로 조선의 실정을 짐작해보았던것이다.

그라함은 봉수교회당에도 들리였다.

그는 거기서 기도를 드리고 와서는 김일성동지께 이런 질문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어떻게 보장되고있습니까?》

《당신이 가본대로입니다. 우리는 건설이 긴장하지만 교회당도 지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간단히 대답하시였다.

그라함은 기쁨에 넘쳐 다시 물었다.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교리에 공통성이 있다고 볼수 있겠습니까?》

《공통성말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반문하며 잠시 생각하시다가 겸손하게 말씀하시였다.

《주체사상을 높이 비교해주어서 감사합니다.》

《···》

그라함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리념에 같은 점도 있다고 믿었다. 그 공통의 리념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라함이 돌아간 다음 미국은 급기야 조선에 대한 압살정책으로 나왔다. 저절로 허물어지지 않는 조선에 강권이 필요하다고 여겼던것이다. 그라함은 그러한 정책변화가 무모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조선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협상의 방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조선에 대한 리해를 정확히 가지도록 하기 위해 방문기간에 보고느낀바를 널리 선전하였다. 그렇기때문에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두번째로 평양에 왔을 때에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구면친구로 허물없이 친절하게 맞이하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그라함으로부터 새해를 맞이하여 보내온 클린톤의 구두메쎄지를 전달받고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다음 인차 오찬회장으로 이끄시였다.

《어서 기도를 드리십시오.》

음식상을 마주하신 그이께서 그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였다.

《예?》

그라함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을 들기에 앞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것이 기독교의 률법이 아닙니까.》

《···》

그라함은 무슨 말인가를 할듯 하더니 응대없이 가볍게 머리를 숙이였다. 16살에 기독교신앙에 충실할것을 서약하고 세계 84개 나라 1억 1천만을 대상하여 전도를 하여온 종교계의 원로가 률법을 잊을리 없었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수저를 들지 않고 기다리시였다.

이윽고 두손을 무릎우에 포개놓고 앉았던 그라함이 정중히 일어서더니 술잔을 집어들었다.

《제가 오늘은 그 률법을 좀 어기려고 합니다. 이 나라 민중의 하늘이신 주석님의 만년장수를 기원하여 이 잔부터 듭시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일어서며 손을 내저으시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민중의 하늘이 아니라 그들의 노복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머리가 숙여집니다.》

오찬회장에는 잔을 찧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손님이 앉자 김일성동지께서는 방금전에 받은 클린톤의 메쎄지를 상기하며 말씀하시였다. 그 메쎄지에는 핵문제를 포함하여 조미 두 나라의 관계가 좋게 발전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목사님자신도 그렇게 말한바가 있지만 나도 당신이 미국사람중에서 우리 나라를 옳게 리해한 첫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현실을 직접 보았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중에 당신의 친구인 클린톤대통령도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목사님은 클린톤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이니 서로 마주 앉을수 있도록 노력해주기를 바랍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주석님의 말씀을 복음서처럼 무겁게 지니겠습니다.》

잔 찧는 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그라함과 상봉했던 나날들을 돌이켜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입속으로 조용히 뇌이시였다.

(카터가 평양으로 오기전에 그라함을 만났다고 하였지···)

그이께서는 마음속의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이제 카터를 만나서 진심을 이야기해보자. 그와도 친분관계를 맺을수 없을가?)

적들속에 친구를 만들줄 아는 장기를 지니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의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질것이라고 확신하시였다.

···날이 환히 밝았다.

집무실 둘레에는 안개가 늠실늠실 뒤설레이며 조수처럼 흐르고있었다. 무더울것이 예견되는 아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