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3


 

제 5 장

3

 

김정숙동지께서는 밝은 미소와 함께 무거운 침묵에 짓눌리던 방안에 서늘한 숲의 신선함과 향취까지 안고오신듯 했다.

의사들과 간호원, 간병원들이 따라왔다. 밝고 정답고 매혹적인 녀사의 미소에 이끌려 웃고 떠들며 저마끔 더 가까이 서려고 다투며 쓸어들었다. 류덕호원장이 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팔을 내젓고 눈을 흘기며 그들을 밀어냈으나 멀리 가지 않고 문밖에 몰켜서있는것이 알렸다.

김정숙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병문안을 왔어요, 안길동지.》

안길은 손을 내저었다.

《병문안이라니, 내가 뭐 환자이기라도 합니까.》

《그런데 갑자기 소식을 듣고 오다나니···》 하고 녀사께서는 웃으시였다. 《이렇게 빈손으로 왔군요.》

《차라리 잘됐소, 정숙동무. 제발 날 좀 도와주시오. 장군님께 잘 말씀드려 내가 아무런 탈도 없다는것을 믿으실수 있게 좀···》

녀사께서는 머리를 저으시였다.

《안길동지, 그걸 어떻게 믿으실수 있겠어요. 안길동지 얼굴색만 봐도 다 알리는데.》

류덕호원장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두손을 마주잡고 비비적거리더니 안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참모장동지, 그러기에 내 뭐라고 했습니까. 절대로 숨기지 못한다고 하질 않았습니까!》

《?!···》

안길은 화가 나서 기침을 했다.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그만큼 절절하게 호소했는데 이렇게 뒤집어놓다니!··· 노여움때문인지 목이 칵 막혔다.

그러건말건 원장은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녀사께 안길참모장이 절대로 입원은 할수 없다, 나는 나가서 일을 해야 살수 있다라고 하면서 권총을 꺼내들기까지 했다고 말씀드렸다.

안길은 기가 막혔다. 권총을 꺼내놓은건 사실이나 그 의미가 생뚱같이 전도된것이였다. 원장의 말을 들어보면 안길이 그 권총으로 류덕호원장을 무섭게 위협한것으로 되는것이다.

《원장선생!》 안길이 소리쳤다. 《난··· 난···》

원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뉘 메스를 들고 숱한 사람들을 째고 자르고 깁고 꿰매였을 이 무정한 원장은 끄떡없이 계속했다.

《그러니 별수 있습니까. 손을 들고 말았습지요. 정말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녀사께야 뭘 숨기겠습니까. 사실 난··· 장군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더 속이 타구··· 또 안길동지 말을 들어보면 그저 눈물만 나는게··· 견딜수 없었습니다. 마침 녀사께서 오셨으니··· 됐습니다. 그럼 전···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두분께서 말씀하십시오.》

원장은 손수건을 꺼내여 눈굽을 찍으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 몰켜섰던 사람들을 그가 쫓아버리는듯 했다.

조용해졌다. 창밖의 비소리도 숙어든듯 했다.

자리잡고 앉았다.

침묵··· 의미깊은 침묵, 파아란 번개불이 창유리를 짓태웠다. 그러나 기다리는 천둥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내심의 격렬한 충동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한것인지··· 녀사께서 주의깊은 시선으로 여겨보신다는것을 느낀 안길은 머리를 곧추 들었다.

《정숙동무, 인젠 다 알겠지요? 그래서 부탁하는건데··· 도와주시오. 이 안길이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끝까지 일할수 있게!···》

《제가 온건》 하고 녀사께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안길동지 진찰결과나 알아보러온게 아닙니다. 힘을 주고싶어서··· 급히 달려왔어요. 선물을, 아니 기쁨을 갖구 왔다고 할지··· 안길동지한테 힘과 용기가 될 귀중한것을 가지고··· 막 달려왔답니다.》

《그게 뭔지 어서 보여주시오. 정숙동무, 빨리··· 봅시다.》

녀사께서는 손에 들고온 작은 보자기를 푸시였다. 수수한 공책 하나··· 이번엔 책장을 번지더니 그속에 끼워둔 하얀 모조지 한장을 뽑으시였다.

안길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의혹이 실린 눈빛으로 녀사를 쳐다보고 이어 종이장에 눈길을 박았다.한순간 그의 두눈에서 광채가 번득이였다. 머리에 꽉 들어차는 크나큰 기쁨에 허덕이였다. 두볼을 후둘후둘 떨기까지 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신음소리처럼 웅얼거리기도 했다. 뜨거운 경련이 그의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종이장을 받들어쥔 손이 마구 떨려났다. 벅찬 기쁨에 숨도 제대로 못쉬며 눈길을 들고 부르짖었다.

《갑시다. 정숙동무, 빨리, 빨리!···》

《아니 어데로요?》

《우선 가서··· 가서 봅시다. 그리구 정숙동무, 다들 빨리 불러옵시다. 김책동지, 김일, 최현, 류경수, 아니 류경수랑은 여기에 없지. 그럼 평양학원, 보안간부학교동무들을 다 불러와야지.》

《평양학원에서 방금 조정철동지가 왔어요. 안길동지 병소식을 듣고··· 아마 지금···》

《원, 정신나갔지.》 안길이 또 소리쳤다. 《내가 어쨌다구··· 하여튼 잘됐어, 조정철이! 마침 잘 왔어!》

터질것 같은 기쁨에 가슴이 뻐근해났다. 어느새 밖으로 달려나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얼굴에 뿌려치는 비방울마저 불찌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는 김정숙동지와 함께 차에 오르자 운전사가 정신을 차릴새없이 다그어댔다.

 

장군님께서는 댁에 계시지 않았으나 김책, 김일, 최현, 김경석, 조정철, 오진우 등은 다 모였다.최현은 평천리에서, 김경석과 오진우는 대안리에서 전화를 받자 차를 달려왔다.

안길은 피아노앞에 마주 앉아있었다. 김정숙동지를 중심으로 모두 그를 둘러싸고 피아노앞에 놓인 악보에 눈길을 모으고있었다. 하얀 모조지에 먹으로 정히 그린 악보였다.

드디여 첫 화음이 흉벽을 쳤다. 천정의 전등불이 수천수만의 령롱한 빛으로 부서져내렸다. 이어 장중한 선률이, 격류처럼 줄기차고 불길처럼 열정적인 송가의 선률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안길은 흐느끼듯 숨결을 톺으며 피아노를 쳤다. 그렇다, 피어린 자욱!··· 설레이는 밀림이, 타래치는 화염과 세찬 눈보라가 선률에 실려 파도쳐왔다. 돌격전의 나팔소리가 귀전에 쟁쟁했고 대오앞에 날리던 붉은기의 퍼덕임소리가 가슴속깊이 파고들었다. 장백산 줄기줄기에, 압록강 굽이굽이에 찍혀진 발자국들, 조국해방을 위해 헤쳐온 멀고도 험한 혈전의 길들이 눈앞에 삼삼했다.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사무치는 격정에 목이 메여 안길은 노래를 더 이을수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 그를 대신해주시였다. 다감한 조정철이, 기타와 하모니카의 명수인 빨찌산의 음악가 조정철이 눈물젖은 목소리를 합쳤다. 김일, 오진우, 최현도 눈시울을 떨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노래 1절을 다시 쳤다. 안길은 등뒤에서 누군가 아귀센 손으로 자기의 어깨를 꽉 짓누르는것도 처음엔 알지 못했다. 최현이 목소리보다 손아귀에 더 힘을 주며 불같이 숨을 내뿜고있었다. 김경석은 울음소리가 더 컸다. 참지 못하고 김책과 김일도 손바닥으로 눈언저리를 문질렀다.

마침내 안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기 목소리 같지 않은, 이상하게 높아지고 젖어든 목소리로 그는 웨치듯 했다.

《동지들, 김정숙동지와 김책동지가 이 노래 창작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나도 방금전에야 알게 되였소. 그런데 장군님께선 절대 노래를 보급하지 말라고 엄하게 금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항일투사들이 제일 먼저 장군님의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자는걸 제의합니다.》

모두 일시에 호응하여 박수를 쳤다. 피아노가 벅찬 환희와 격정의 선률을 울렸다.

이윽고 합창이 시작되였다. 장군님을 모시고 장장 20여성상 피흘리며 싸워온 투사들의 불과 초연에 타고 돌격의 함성에 찢겨진 목소리들이 합창을 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피아노건반우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음 순간 세찬 울림에 떨고 흐느끼며 산산이 뿌려졌다. 드디여 만고령장의 노래가 나왔다. 위대한 군령수의 노래가 울려퍼지게 되였다!··· 안길은 힘껏 건반을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우리 항일투사들이 맨 처음 이 노래를 부른다. 이제 우리의 군대가 우렁찬 대합창으로 따라부를것이다. 우리 장군님의 노래를 우리 장군님의 군대가 제일 선참으로 세상이 들썩하게 부를것이다!···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림의 긴긴 밤아 이야기하라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얼마후 안길은 퍼붓는 비속으로 달려나갔다. 조정철이 뒤따랐다. 그들은 즉시 평양학원으로 달려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대합창을 조직해야 했다. 우뢰가 울었다. 대줄기같은 비발속을 파고 헤치며 시퍼런 번개가 번뜩이였다. 솨- 세찬 바람소리처럼 비소리가 커지더니 땅!- 하고 천둥이 터졌다. 시꺼먼 어둠이, 장마비에 부풀어오른 대지가 몸부림쳤다.

안길은 비줄기속을 뚫고 내닫는 차안에서 뜨겁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정숙동무. 고맙소, 꺼져가던 나의 생명에 정숙동무가 불을 달아주었소. 나는 인젠 끄떡 없소. 활활 타오르는 이 심장의 불을 소낙비인들 꺼버릴수 있겠소. 정숙동무, 정숙동무가 달아준 이 심장의 불을 안고 평양학원으로 나는 가고있소. 평양학원, 중앙보안간부학교 또 보안간부훈련소들··· 장군님의 군대에 이 불을 달아주겠소. 고맙소. 정숙동무, 우리 빨찌산의 녀장군 김정숙동지!··· 정숙동문 우리의 군건설에 기치를 주었소. 새 조선의 군대에 넋을 주었소!···

비줄기는 더욱더 세차졌다. 승용차의 시창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거침없이 쏟아져내리는 비줄기들이 뽀야니 부서지고 흩어지며 끊임없이 사물거렸다. 그 세찬 비줄기속을 헤치며 행군해가는 대오를 안길은 보고있었다. 척척척척··· 힘찬 발구름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심장을 달구고 온몸을 격동시키는 《김일성장군의 노래》 대합창이 점점 더 커져오고있었다.

안길은 바로 그것을, 력사의 지평선으로 발걸음 높이 행군해가는 총멘 대오를 보고있었다.

사뭇 세차게 가슴을 치는 벅찬 환희에 구붓한 눈섭을 흠칫거렸다. 가늘게 좁혀 뜬 두눈에서는 눈물이 끓고 심장은 아프리만큼 뛰놀았다.

50년세월이 흐른뒤 건군의 첫 대오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대합창을 제일 선참으로 터친것처럼 《김정일장군의 노래》 첫 대합창 역시 우리 군대가 부르게 되리라는것을 그가 알수 있었을가, 아니면 그것을 간절히 희망하였을가, 믿고있었을가?··· 어쨌든 그는 총멘 대오가 헤쳐가는 먼먼 래일에서 이윽토록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