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3


 

제 4 장

3

 

곽일무와의 이야기는 며칠후에야 있게 되였다. 안길은 겨우 짬을 내여 그를 불렀다.

《오늘은 아저씨가 아니라 그저 사내들로서 말해보자.》

안길이 이렇게 허두를 떼자 곽일무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듯했다. 손가락으로 코밑을 긁더니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먼저 한가지 물어보자, 일문 그 처녀를 사랑했댔나?》

《···》

일무는 화가 난듯 기침을 했다.

《사내들끼리 말해보자구 하질 않았나. 일무답지 않게··· 그래 사랑했나 안했나?》

《···》

그래도 입을 열지 못한다.

물론 사랑이란 말은 호주머니속의 담배쌈지처럼 아무때나 꺼내는것이 아니다. 그 말을 수월히 대수롭지 않게 꺼낸다면 그는 진정한 사랑을 모른다고 할수 있다. 진실한 사랑은 그것을 자랑할줄 모르며 자신있게 단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이 크고 뜨거울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섭게 싸우기도 하는것이다. 그런데 곽일무는?··· 그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차버렸다.

《그럼 내가 말해주지.》 안길이 말했다. 《일문 그 처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어. 그저 사랑하는척 했을뿐이지.》

《예?!》

곽일무가 눈꼬리를 치떴다.

《그건 사실이야. 일무가 뭐라고 하든 난 믿지 않아. 동문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 동무가 진실로 그 처녀를 사랑했다면 그렇게 무정하게 굴진 않았을거야.》

《그러니 내가···》

얼굴이 해쓱하니 질린 곽일무를 면바로 노려보며 안길은 매몰스럽게 계속했다.

《동문 그를 모욕했어.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럴수밖에···》

《그러니 절··· 망나니처럼 보시는겁니까? 녀자들이나 희롱하는 그런 망종같은 자식으로 보신다는거예요?!》

《그럼 뭔가. 처녀를 모욕하는건 너절싸한 일이야!》

《전 경위대원이란 말입니다. 안길동지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의 경위대원인 제가 그럼··· 그럼···》

말이 잘 안되는지 그는 군복저고리의 소매깃을 계속 쥐여당기며 울대뼈를 움씰거렸다. 금시 화약통같이 터질듯 했으나 겨우 참고 계속했다.

《난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나올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저씨가 아니라 동지로서, 같은 사내로서 말하는거야. 그래 장군님의 경위대원이 어쨌다구? 너무 요란스럽게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구. 장군님의 전사들은 사랑을 해도 진실하고 뜨겁게 했어.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 없인 혁명도 못해!》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아저씨라면··· 아니, 안길동지라면 그 처녀가 예수쟁이라는걸 알면서두 그냥 좋게만 대하겠어요?》

《예수쟁이가 뭐 곽일무의 눈알이라도 뽑아간다던가?··· 나도 한땐 신자였어.》

《예?!》

《놀라긴!》 안길은 계속했다. 《열네살때 례배당에 다니기 시작했어. 기도를 드리구 찬송가도 부르고··· 그러던 내가 장군님의 품에 안겨 눈을 떴지. 혁명을 배우고··· 장군님께선 나를 방면군의 참모장으로까지 키워주셨어. 어디 그뿐인줄 아나? 지금 장군님의 기술서기로 일하는 처녀 역시 신자라는걸 몰라?··· 일무 말대로 하면 예수쟁이지.》

《?!》

불끈 그러쥐고있던 곽일무의 두주먹이 맥없이 풀리고있었다.

눈의 흰자위가 꺼지고 악물었던 이새로는 바람새는듯한 소리가 쌕쌕했다.

안길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한모금 깊숙이 들여마시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파르스름한 회색의 연기가 천정을 향해 뽀야니 흐트러지며 기여올랐다.

《일문 그 처녀를 다 몰라. 본래 이름은 석금옥이라는것두 모르겠지?··· 친아버진 독립군에서 싸우다가 왜놈들한테 잡혀 옥중에서 잘못됐어. 홍목사가 양딸로 삼아키웠지. 그 목사도 왜놈들을 반대했다구 해서 옥고를 치른분이야. 그런데 일문··· 너무도 모르고있어. 그저 예수쟁이, 예수쟁이하면서 먹다버린 개살구만큼도 여기지 않는데··· 그러면 안돼. 처녀가 왜 종교를 믿게 됐는지 알아봤어야지. 사랑이란 무한히 아끼구 지켜야 해. 그리구두 뭐 경위대원?··· 우리와 끝까지 한길을 가야 할 처녀를 모욕하고 차버리면서도 뭐 장군님의 경위대원이라구?··· 그런 쇠고집 곧은목이 돼가지군 아무 일도 제대루 못해. 자기의 사랑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구 혁명을 지키겠어. 잘 생각해보라구. 이제 그 처녀가 일무를 용서해주겠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제 장군님께서 석금옥을 평양학원 녀성중대에 보내셨소. 일무는 그것도 모르고있었겠지?··· 그것보라구. 일무한텐 알리지도 않고 가버렸거든.》

곽일무는 한자리에 못박혀버린듯했다. 해쓱해진, 그리하여 더욱더 거무스레해지고 퍼릿해진 그의 얼굴은 어수선하고 음울했다.

밖에서 자동차경적소리가 요란했다. 여러대의 자동차에 탄 평양학원학생들이 정문으로 들어서고있었다. 력사적인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된 이후 각 지방의 토지개혁실시를 돕기 위해 평양학원학생들을 동원하였던것이다. 이제 장군님께서 그들이 해야 할 사업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게 된다.

그리고 안길은 오늘중으로 안주에 갔다와야 한다.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되자 반동놈들의 준동이 더 우심해졌는데 안주지구에서 폭동음모를 꾸민 반동분자들이 감춰두었던 수많은 무기탄약들을 꺼내들고 안주녀자중학교를 점거하고있다는 비상통보가 왔던것이다.

안길은 시계를 꺼내보았다.

《그럼 후에 또 얘기해보자구.》

규정대로 경례를 붙이고 돌아가는 곽일무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안길은 머리를 짓숙이고가는 그의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았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것만큼 번마다 추궁하고 매질하지 않으면 안되는 안길이였다.

자동차에서 뛰여내린 학생들가운데서 누군가 곽일무를 소리쳐부르고있었다. 평양학원을 놀래우고 들썩하게 했던 한종삼이 입이 째지게 웃으며 그를 붙안고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는 들을수 없었지만 무척 반가운 상봉인것만은 틀림없었다. 많은 학생들이 곽일무와 한종삼 두 사람에게 눈길을 모으고있었다. 한종삼은 연신 팔을 내두르며 무엇인가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곽일무는 시무룩해서 웃으며 그저 듣기만 했다.

안길은 창가에서 물러나 서류를 정리했다. 빨리 안주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서류는 왜?··· 손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였다. 곽일무와 석금옥, 곽일무와 한종삼··· 옛 사람들은 사람의 한생을 부단한 상봉과 리별극이라고 했다. 서로 만나 사귀고 사랑하다가는 헤여지고 영영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기도 하고···

밖에서는 여전히 한종삼이 곽일무를 붙잡고 무엇인가 열심히 말하고있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많은 한종삼이였고 곽일무였다.